노점상이 사회안전망 역할을 하는 곳

[최인기의 사진세상](15) 피맛길에서 만난 노점상들


노동자대회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종로로 나왔습니다. 간간이 내리던 빗물과 낙엽이 뒤섞여 바닥에 얼룩져있습니다. 종로는 조선왕조 때 왕이 행차하면 백성은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지나가길 기다렸다지요. 양반네들의 거드름에 말 한 필 겨우 지나는 피맛길을 택했다는 거, 이렇게 써놓고 보니 참 불평등한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임금님 ‘가오’ 잡는 길 따로 있고 상놈 다니는 길 따로 있다니요. 하지만 김란기 문화유산연대 공동대표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피맛길은 종로대로 쪽 시전이라 불리 우는 옛 상가들이 형성되었고, 그리고 뒤로 주거지가 분리된 길이 바로 피맛길이라는 겁니다. 지금도 피맛길로에서 청진동과 종로 3가에 가면 골목입구에 문이 있고, 그 안에 골목이 형성된 주거지역이 있었습니다. 이곳 피맛길은 초기에는 굉장히 넓었어요. 차량 두 대가 다닐 수 있는 5m~6m길이었던 것이 이후 좁아지다가 2m까지 폭이 줄어 정겨운 골목이 된 것입니다. 당연히 종로는 왕이 거처하던 경복궁에서 창덕궁 비원으로 행차를 할 때 세종로 네거리를 지나 돈화문으로 들어갔던 길이니 대단히 중요한 길이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높은 양반들이 지나갈 때 피하거나 말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라고만 알려졌지만 실질적으로는 속설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뒷길인 피맛길로 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처음부터 말을 피하려고 조성된 길은 아니라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난전을 펼치던 곳도 종로였고,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전찻길이 놓인 곳도 종로였습니다.


1968년으로 전찻길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종로는 서울 근대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종로가 가장 번성했던 것은 1970년대와 1980년대였다고 봅니다. 그 후 강북에서 강남으로 상권이 이동해 쇠락하기 시작한 종로는 지금까지 계속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는 종로통을 가득 메우던 즐비한 포장마차와 그 사이사이 떡볶이와 어묵을 먹던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신 그 자리엔 군데군데 화단과 가드레일이 설치되었습니다. 불과 몇 년 사이 풍경이 바뀐 것입니다.


과거 종로의 풍경을 그려 볼까요. 80년대와 90년대의 모습입니다. 종각 근처 초조하게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서성이던 사람들은 슬며시 눈으로만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종로 거리에 알 수 없는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함성과 함께 깃발이 오르고 시위대가 거리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상가 셔터는 내려지고 달리던 차들도 멈춰서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갑니다. 전경과 시위대 그리고 시민이 뒤섞입니다. 건물 위에서 유인물이 뿌려지고 화염병을 담은 상자들이 속속 등장합니다. 종각 앞 도로는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그만큼 종로는 광화문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요한 지점이었습니다.


피맛길은 파헤쳐지기 시작했고, 철거를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한 것도 오래전 일입니다. 청진동은 1996년부터 현대자동차 측에서 1,926억 원을 명의 신탁하여 2001년 재개발 허가를 냈고, 2003년 1차 철거를 시작으로 세입자들을 내쫓기 시작한 곳입니다. 비바람에 씻겨 흔적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벽보에는 당시의 사정을 희미하게나마 전해줍니다. 2004년 11월 4일 청진동의 철거대책위 사무실이었던 만나회관 식당은 용역깡패들에게 모두 철거됐고, 이때 고용한 용역 경비 대금 7억 5천만 원을 청진동 철거민 6명에게 행정대집행비용으로 청구합니다. 철거비용을 철거민들에게 덮어씌운 것인데 이후에 이 문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봐도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서다가 최근 들어 개발 열기가 식자 군데군데 공사가 중단되어 을씨년스러운 모습입니다.


생선 굽는 냄새가 입구부터 진동하는 청진동 피맛길을 떠올리며 잰걸음으로 들어서는데, 왠지 낯설다는 느낌이 듭니다. 잠시 길을 잃었습니다. YMCA 앞을 지나 막걸리 주점 ‘와사등’ 까지 왔습니다. 찌그러진 주전자에 담겨 나오는 막걸리에 커다란 파전, 고등어를 안주 삼아 타는 목마름으로 시대의 울분을 토했던 곳입니다. 이 주점에서 겨울을 재촉하는 바람이라도 불면 옷깃을 여미고 자리를 꿰차고 앉아 악을 쓰며 하루하루의 쓰디쓴 일상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면 온몸에 최루탄 가스를 뒤집어쓴 채 삼삼오오 모여들었던 곳, 흔들릴 때마다 한 잔씩 그렇게 마셔댔던 곳, 그리고 오늘을 기억하고 미래를 준비했던 곳입니다.


지난 10월 서울시는 종로와 돈화문로 사이 3.1km 피맛길 가운데 교보빌딩에서 종로2가 사이를 뺀 나머지 2.2km 구간을 ‘원형 보존 재개발 구간’으로 지정해 관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구간은 기존의 모습과 분위기를 최대한 유지할 수 있도록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는 전면 재개발 방식이 아닌, 일부 구간만 다듬고 손보는 리모델링 방식으로 재개발된다고 합니다. 또 이미 구역 지정이 끝나 철거 재개발이 진행 중인 청진·공평구역도 골목길만큼은 원래 모습에 가깝게 유지할 수 있도록 원설계자와 협의해 지구별 건축계획에 반영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뒤늦은 서울시의 결정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피맛골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속절없이 피맛길을 지나 건너편 ‘젊음의 거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종로서적이 있던 자리는 공산품을 파는 ‘다이소’로 바뀌었습니다. 버스정류장을 지나 종로 관철동으로 들어갔습니다. 노점상들이 보입니다. 오후 늦은 시간 하루의 마지막 손님을 맞느라 손길이 빨라지고 바빠진 모습입니다. 1984년부터 장사를 한 사진 속 이사범 씨(남 82세)를 찾았습니다. 노점상들이 종로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젊음의 거리’에서 장사를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입니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노점상관리대책’ 기자회견을 열어 약 1,117개의 노점상을 상대로 시범가로를 만들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곧바로 종로대로는 금지구역으로 정하고 뒷길에 노점상을 이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의 대표적인 정책이 ‘도시디자인 사업’이었고 이러한 열풍에 발맞춰 서울의 도시미관에 맞게 포장마차를 디자인하거나 규격화하여 허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노점상관리대책인지 뭔지 아무튼 종로의 노점상들은 싹 이면도로로 밀려났어. 대신 단속은 없었지. 하지만 단속을 안 하면 뭐해? 상권이 서야지요. 상권이... 모두 고사할 위기에 처해 있는 거야. 다들 거리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럼 뭐해 사람이 다녀야지...”

자그마한 손난로 위에 손을 얹어 놓고 언 손을 녹이는 이사범 씨의 말은 이어졌습니다. 실태조사를 통해 신상정보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노점관리대책’은 시행 뒤 몇 년이 지나자 노점상에게 재산기준을 초과하면 장사를 불허하고, 해당지역에 거주하지 않는 노점상은 규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점상들은 구청의 관리대상이 되어 이래라저래라 하면 따라야 하고 거부하면 불이익을 당하거나, 쫓겨날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노점상을 위한다는 정책이 생계를 위협하는 정책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당시 서울시의 노점관리대책에 동의했던 종로의 노점상 수백 명은 얼마 전 민주노점상전국연합으로 재가입을 하기에 이릅니다.


2002년 청계천 복원공사를 앞두고 분신자살한 박봉규 씨 집회 문제로 수배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머니에 돈이 모두 떨어진 채 무작정 종로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착잡한 심정이어서 그랬는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이 마치 마네킹처럼 무표정한 얼굴들이었습니다. 도시의 삭막함이란 게 이런 거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때 누군가 저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제가 수배 중인 사실을 알고 근처 설렁탕집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한 그릇의 설렁탕을 다 비웠습니다. 뽀얀 국물 위로 김이 피어오르던 설렁탕 국물맛보다 그분의 따뜻한 눈길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인파 속으로 사리질 때까지 오랫동안 저를 지켜보셨을 겁니다.


이제 서울거리의 디자인 사업과 맞물려 과거 2만 개에 달하던 노점상은 절반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서울시의 공식자료에도 8천 개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서울시의 노점상관리대책의 본질은 새로운 노점 발생을 억제하고, 기존 노점상을 줄이려는 대책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인사동의 사례에서 봤듯이 노점관리대책이라는 이름의 당근을 던져주는 척하다가 한쪽에서는 용역반을 동원해 단속이라는 채찍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과거 뒷길로 밀려나 피맛길이 형성된 거처럼 노점상은 관리대책으로 이면도로로 밀려났습니다. 종로를 걷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걷기에 불편하지 않지만 활력이 없는 거리는 참 재미없습니다. 서민이 즐겨 찾는 거리의 건전한 문화가 될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강제단속으로 이제 서울 노점상들은 대폭 줄었습니다. 노점상 하면 눈살부터 찌푸리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도 쉽게 교감하지 않는 거리는 왠지 차갑고 창백하게 느껴집니다. 노점상이 가난한 사람의 사회안전망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바람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사범 씨께 연세를 여쭤보니 1931년생 양띠라고 하십니다. 할머니는 최복례 씨로 1934년생이십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몸짓과 언어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스쳐 지나가는 관철동 한 귀퉁이에서 종로의 늦은 밤길 위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불을 밝힙니다. 두 노인 내외가 조용히 장사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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