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한다는 것은 내어 준다는 것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어머니와 병원에서

잠결에 무슨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다. 눈을 비비고 손전화를 보니 새벽 네 시 반이었다. 거실에서 주무시던 어머니가 힘없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계셨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낮에 볼일을 보러 나갔다가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지신 어머니는 이마와 한쪽 눈두덩이 벌겋게 부푼 얼굴로 집에 돌아오셨고 나는 득달같이 약국으로 뛰어 나가 연고와 진통제를 사왔다. 토요일 오후라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걱정이 되었지만 구역질이나 마비처럼 뇌가 다쳤을 때 생기는 증상은 없어서 어머니도 나도 그만 마음을 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허둥지둥 거실로 나와 보니 한 손을 이마에 얹은 어머니가 이부자리에서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계셨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온 세상이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러워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고 하셨다. 불을 켜 보니 어머니의 눈가는 보랏빛으로 둥글게 물들어 있었고 이마는 퉁퉁 부은 그대로였다. 한쪽 팔은 경련이 일어나는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나는 서둘러 동생을 깨우고는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에는 보호자가 한 명만 탈 수 있다고 해서 일단 동생을 어머니와 함께 태워 보냈다. 집에서 버스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종합병원까지 걸어가면서 나는 잠깐 사이에 마구 휘저어진 머릿속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어젯밤 좀처럼 잠들지 못하면서까지 끙끙거리며 고민했던 무언가가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병원에 다다르니 어머니는 CT 촬영실에 계셨다. 찍을 거 다 찍고 검사할 거 다 검사하고 나서 어머니와 우리 남매는 응급실 한 귀퉁이 침상으로 돌아왔다. 돌아누우려 고개를 돌리실 때마다 어머니는 머리를 부여잡고 에그그그 큰 소리를 지르셨고, 그럴 때마다 나는 멀쩡한 내 머리통을 떼어다 어머니를 드리고 싶어졌다. 저렇게 괴로워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무엇 하나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빈 침상을 하나 골라 걸터앉아 있자니 동생은 어머니 침상 옆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밭은 숨을 내쉬면서 가만히 누워 눈을 감고 계셨다. 새벽의 응급실은 너무 시끄럽지도 않았지만 고요하지도 않았다. 내가 어머니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듯 이 시간 다른 이들도 저마다 자기의 환자를 위한 간절한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 갈피 없는 생각은 어느새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가장자리’라는 이름의 협동조합에서 일한다. 홍세화 선생님이 만든 이른바 ‘좌파들의 교양을 위한 학습 공동체’이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것저것 할 일도 많고 챙겨야 할 것들도 많다. 가장자리 인터넷 카페에는 지금 500여 명이 가입해 있는데 그중에는 오래 전에 알고 지내던 이들도 몇 있었다. 오래 전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내가 이런저런 현장들을 쏘다니며 글을 쓰던 삼사 년 전에 인연을 맺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삼 년 동안 나는 글쓰기고 뭐고 아예 세상일에 등을 돌린 채로 살았다. 나와 가족들의 목숨을 어떻게든 이어 가야 한다는 핑계를 품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돈을 벌었다. 내가 ‘비정규직 철폐가’의 가사를 조금씩 잊어버리는 사이 강정이 쑥밭이 되었고 희망버스가 많은 이들을 태우고 달렸으며 웬 글쟁이 하나가 첫 번째 르포르타주라면서 희한한 책을 냈다.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 때가 있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의 삶 속에 파고들어 새로운 글을 쓰기에 나란 인간은 이미 시커멓게 썩어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집안의 빚을 거의 꺼 나갈 때쯤 되니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사람 마음이란 정말 간사한 것이었다. 무슨 글을 어떻게 쓸지 하나도 생각해 둔 것이 없으면서 일터를 때려치웠고 무작정 다른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편의점 알바라도 좋고 보습학원 강사라도 좋으니 글을 쓰면서도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다가 걸려든 곳이 바로 가장자리라는 협동조합이었다. 나로서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자리 인터넷 카페에다 틈틈이 올린 글에 누군가가 댓글을 달았다. 오래 전 서울 서부 비정규직 센터에 몸담았을 때 자주 만나던 분이었다. 귀농한 지 오래돼서 지금은 지방에 있지만 며칠 뒤에 서울에 올라가 가장자리 사무실에 들러 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과 술집에 마주앉은 것이 며칠 전 금요일이었다.

거기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까. 거푸 들이킨 술에 빠르게 취해 간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노동조합의 이름을 주워섬겼고, 사오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이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새된 목소리로 이야기했으며, 오랜만에 ‘이 바닥’에서 다시 활동하니 꼭 군대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지껄였다. 전부터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갈등이 이제 와서 보니 사업장들마다 돌림병처럼 퍼져 있다고 열을 냈고, 둘로 쪼개진 조합원들이 서로 다른 곳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어느 노조의 이름을 대며 왜 이 상황을 파고들어 글을 쓴 사람이 지금껏 한 명도 없었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술기운이 아니었다면 낯 뜨거워서 도저히 할 수 없었을 말들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더 끼어든 술자리는 자리를 옮겨 가며 이어졌다. 밤 열두 시가 넘어 분위기가 고즈넉해지자 지금껏 자신의 귀농살이 이야기만 조곤조곤 들려주던 그분이 나를 향해 물었다. 도대체 왜 노동자들을 위한다고 썼어요?

네? 나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얼마 전에 가장자리 카페에 올린 글에 있잖아요. 우리는 노동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부분 말예요. 노동자들은 우리가 무언가를 해 줘야 하는 대상인가요? 그렇게 생각해요?

그분은 내가 가장자리 카페에 올린 글 한 편을 두고 말하고 있었다. 그 글에서 나는 먹고살 만한 자들이 말하는 ‘연대’는 자신의 죄책감을 빨아먹기 위해 내세우는 가짜라 잘라 말하고는, 어차피 입을 옷 있고 먹을 것 있고 잠잘 곳 있는 우리가 현장에서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고,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연대’라는 말을 쓰고 있을 뿐이라고 썼다. 연대라는 말이 얼마나 편리한 면죄부인지, 우리는 농성장이나 집회에 나가서 눈물 한 방울 흘리거나 구호 몇 번 외치고 나서는 자신의 양심을 편안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나는 그 글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야기했다. 너는 그 정도 연대라도 하면서 떠드는 거냐? 누가 이렇게 들이댄다면 물론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뭔가 되게 안타깝고 막막했다. 누구나 연대라는 것을 이야기할 줄 안다면, 현장 노동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이들이 그토록 많다면 왜 5년 6년씩이나 노동자들은 한뎃잠을 자고 철탑에 올라갈까? 왜 여전히 노동자들만 함부로 짓밟히고 두들겨 맞을까? 연대라는 말이 자기 누릴 것 다 누린 채 멀리서 지켜보며 발만 동동 구르는 것만을 가리킨다면 그 연대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삼 년 전까지 내가 이런저런 현장들을 다니며 했던 건 뭐였을까? 결국 나는 못 견디도록 괴로워진 내 양심을 달래기 위한 진통제가 필요했던 것일까? 한 사람이 아쉬운 노동자들이 덥석 내미는 손을 잡고 흔들며 나는 이것으로 됐다고 생각했을까? 노동자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부숴 버리고 싶었다. 모든 걸 부수고 잿더미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노동자들과는 결코 동일한 입장에 설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노동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우리에겐 그들이 처한 삶의 조건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조금도 없다. 인생의 선택지가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선택지가 몇 없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가짜라고, 그 가짜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도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분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그 부분이 참 불편했어요. 왜 노동자들이 우리가 불쌍히 여겨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죠? 왜 노동자들은 항상 피해자 역할을 해야 하죠? 그들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순간 그들은 우리의 동정이나 받고 살아가는 대상이 되어 버리잖아요. 난 그게 너무 싫어요. 노동자들은 자존감도 없는 사람들인가요? 그들이 정말 오갈 데가 없어서 할 수 없이 투쟁을 하는 사람들인가요? 그들에겐 정말 다른 길이 없나요? 정말?

나도 말했다. 저 역시 노동자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표현을 무척 싫어해요. 제가 예전에 현장 다니며 글을 쓸 때도 이걸 노동자들을 위해서 쓴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저는 일차적으로 저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는 걸 꽤 오래 전에 깨달았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노동자들을 뭔가 도와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삼는 걸 언제나 경계하고 있기도 하구요. 제가 그 글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가 노동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노동자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즉 연대를 너무나 쉽게 말하는 것은 가짜다, 이거였어요.

그분이 바로 대거리했다. 그게 진짜 의도였다면 표현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되죠. ‘위해서’라는 표현을 쓰면 안 되죠.

나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져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위해서’라는 표현을 썼을까? 노동자들을 동정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들을 불쌍하게 보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었을까? 생각은 다른 쪽으로도 뻗어 갔다. ‘노동자들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건 정말 잘못된 일일까? 나는 그들을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걸까? 노동자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말 자체가 이미 그들을 나와는 동떨어진 어떤 존재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있는 건 아닐까?

술자리가 늘 그렇듯 다른 이야기가 끼어들면서 그분과 나의 대화는 흐지부지 끝났다. 워낙 오랜만에 만나는 분이어서 얼굴만 보고 있어도 정겨웠다. 그렇게 동이 틀 무렵까지 온갖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조합 상근자이고 그분은 조합원이니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씻고 잠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토요일 오후였다. 내가 잘 때 밖에 나가신 어머니는 누구에게 되게 얻어맞은 듯한 부은 얼굴로 들어오셨다. 밤이 될 때까지만 해도 부은 것 말고는 다른 증세는 없어 마음을 놓고 나는 지난 밤 그분과 나눈 이야기들을 이리저리 헤집어 보다가 잠이 들었다. 잠결에 어머니가 끙끙거리시는 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누가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 씨 보호자 되시는 분?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에서 벗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젊은 의사 하나가 다가와 CT 촬영과 엑스레이 촬영, 심전도 검사 모두 이상이 없다고 했다. 지금으로선 어지럼증 주사를 맞고 경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검사 결과 딱히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병실에 입원할 수는 없다고도 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꼼짝도 못하고 누워 어지럽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계셨다. 이상이 없다니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냐고 의사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었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다.

간호사 하나가 와서 포도당 주머니를 하나 어머니 손등에 찔러 넣고 갔다. 시간은 연이어 바뀌는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모습으로 흘러갔다. 동생은 다시 꾸벅꾸벅 졸았고 나는 누워 계신 어머니 옆에 서서 시푸르죽죽한 이마와 눈두덩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맞은편 빈 침상에 앉았다. 마음이 더는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손전화를 꺼내 야구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생긴 의사가 와서 이번엔 이비인후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동생을 깨웠고 어머니는 바퀴 달린 침상이 움직이는 동안 꼼짝 않고 누워 계셨다. 이비인후과에는 젊은 의사 둘이 있었는데 어머니의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나와 내 동생이 들으라는 듯 이석증이라는 낯선 병 이름을 꺼냈다. 사람의 양쪽 귀에는 몸의 균형을 잡아 주는 이석이라는 돌멩이가 하나씩 들어 있는데 그것들이 어떤 이유로 조각이 나거나 제자리에서 벗어나게 되면 심한 어지럼증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고 수술로 되는 것도 아닌 이석증은 고개를 한쪽 방향으로 거듭 돌리면서 이석을 제자리에 가게 해야 낫는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차츰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누워서 고개도 못 돌리시던 어머니가 겨우겨우 일어나 앉을 수는 있게 되셨다. 이틀 뒤에 다시 나오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 우리는 어머니의 침상을 밀며 이비인후과를 나섰다. 이석증이고 뭐고 우선 큰 병이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맥이 탁 풀렸고, 인간의 병을 맡아 다스리는 신이 있다면 뺨을 한 대 갈기고 나서 꼭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응급실로 돌아오는데 그제야 다른 침상들 위에 누가 누워 있고 누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지 눈에 하나하나 들어왔다. 코에 관을 꽂은 채로 누워 있는 할아버지, 손등으로 이마를 짚고 죽은 듯 자고 있는 젊은 남자, 빽빽 울어 대고 있는 작은 아이, 왜 또 피검사냐고 볼멘소리를 늘어놓는 아저씨,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이쪽저쪽으로 서성이는 아주머니,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한 십대 아이들, 그 사이를 흰옷 펄럭이며 비집고 다니는 의사와 간호사들까지, 그제야 전부 다 보였다.

문득 저 아픈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곧 며칠 전에 만났던 그분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건 뭘까? 내가 내 어머니를 위한다는 것은, 내가 세상의 아픈 이들을 위한다는 것은, 내가 현장의 노동자들을 위한다는 것은 저마다 뭐가 어떻게 다를까? 그리고 그중에서 나는 무엇을 틀어쥐고 무엇을 솎아 내야 할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한 적이 있었을까?

그러자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이 떠올랐는데, 한창 이 세상의 그릇된 일들과 사악한 힘에 대해 알아 가던 무렵에 만난 한 선배가 너의 마음 다 안다는 표정으로 내게 이런 말을 해 주는 장면이었다. 힘들지? 힘들 때는 청계천 시장에 가 봐. 거기 가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힘을 받을 수 있어. 노동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살아간다는 건 정말 위대한 거야.

천지인의 노래 ‘청계천 8가’에서 따 왔을 법한 말을 늘어놓던 그 선배가 몇 학번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이 났다. 그때만 해도 하늘같은 선배님들을 우러러보던 시절이라 아마 나는 눈을 빛내며 그 선배의 말을 귀담아 들었겠지만 그 말이 시시껄렁한 흰소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 시장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을 동물원 원숭이 보듯 바라봐야 하지? 저 사람들은 내게 힘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잖아? 정말 저들도 산다는 것이 위대하다고 생각할까? 저들이 거짓 없는 노동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모습을 지켜보려는 나는 대체 뭘까?

맨 처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무척 화가 났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뿐인 그 사람들을 나와는 다른 무엇으로 갈라놓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민이고 나는 지식인일까? 지식인의 도리를 잊지 않기 위해 서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과 동일한 입장에 설 수는 없다 해도 그들의 삶을 멀리서 바라보며 자위나 하는 구경꾼이 되고 싶진 않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픈 사람들. 아픈 이를 걱정하느라 더 아픈 사람들. 그들 모두를 위해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한다는 것은 청계천 시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려는 것과 비슷할까 다를까? 동생과 함께 어머니의 침상을 밀며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라는 걸 금방 알게 되었다. 단지 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청계천 사람들을 구경하러 간다는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아파하고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속이 뜨거워지면서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감정이 생겨나 내 온몸을 싸고돌았다. 아, 나는 그 자리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는 곧 누군가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느냐의 문제였다.

어머니의 붓고 멍든 얼굴을 보며 나는 내 목숨을 어머니에게 드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게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라 여겼다. 어머니가 다시 건강해지시는 것 말고 어머니에게 나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저마다의 침상에서 병들어 누운 이들을 바라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내가 무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주제에 나는 저들이 따스한 손길 아래서 편히 쉬다가 깨끗이 나았으면 싶었고 작은 일이라도 해서 도움이 되고 싶었으며 그 대가로 무언가를 받고 싶다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에게도 병원의 아픈 이들에게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뭔가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현장의 노동자들을 위해서는? 나는 그들이 자존감―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감정―마저 송두리째 빼앗긴 존재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누군가가 구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불쌍한 이들이 아니라 자기 줏대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로 세상에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마치 거지의 동냥 주머니에 동전을 던져 주듯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줘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 연대라면 그따위 연대는 갈가리 찢어발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일한 입장에 서지 않으려는 자들의 연대는 가짜라고, 그 가짜야말로 우리가 먼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못내 미련이 남는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을 ‘위해서’ 무언가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정말 가짜이기만 할까? 그런 마음은 언제나 노동자들을 동정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낮추어 보게 만드는 걸까? 어머니에게 자기 목숨을 내어 주려 하듯,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노동자들을 위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려는 이들의 마음을 내가 너무 쉽게 재단한 것은 아닐까? 노동자들과 동일한 입장에 서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동일한 입장에 서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마음은 오래 전 내게 청계천 시장의 사람들을 보고 오라며 등을 두드리던 그 선배의 마음과 분명 다르지 않을까? 세상 살아가는 힘을 얻기 바라고, 자신의 양심에 방부제를 뿌리기 바라고, 죄책감을 묽게 만들기를 바라고,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니라 확신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런 이들이 연대라는 이름으로 농성장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전부는 아니지 않을까?

장사꾼처럼 무언가를 받아야 자신의 것을 내놓으려는 마음씨로는 무엇을 하든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 지녀야 하는 잣대였다. 나는 그곳에서 (혹은 그들 사이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이 물음은 자기가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물음이어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내어 줄 수 있는지를 묻는 물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침상을 원래 있던 곳에 밀어 넣고 동생과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는 아까보다는 한결 편한 얼굴로 누워 계셨다. 어지럼증이 많이 가라앉으신 것 같았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누가 내 뱃속에서 칼질을 해 대는 것처럼 속이 쓰렸다. 어머니는 더 살아 계셔야 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니 간호사 하나가 와서 어머니 손목에 이어진 포도당 주머니를 빼고 내게 바코드가 붙은 종이 쪼가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걸 병원 원무과로 가져가서 돈을 치르면 된다고 했다. 가진 돈이 없었던 나는 조합 운영위원장님에게 손전화 문자를 보내 일삯을 좀 당겨서 달라고 부탁드렸고 잠시 후 고맙게도 내 통장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왔다.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아 원무과에 내고 응급실로 돌아왔더니 어머니는 어느새 침상 위에서 일어나 앉아 계셨다. 우리는 병원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나절을 누워만 계시던 어머니는 해질녘이 되자 집안을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셨고 나는 그때야 비로소 세상일에 마음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뉴스들을 뒤지고 다녔지만 미국에서 쫓겨 왔다는 어떤 멍청이 얘기를 빼고 나면 그 소식이 그 소식이었다. 한쪽에서는 싸우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짓뭉개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마음에선지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고, 여기까지 쓴 지금은 어느새 밤 열두 시가 다 되어 있다. 어머니는 거실에서 의사의 말에 따라 ‘왼쪽으로 드러누워’ 주무시고 있고 집안은 시골의 밤처럼 고요하다.

적지 않은 나이에 어머니는 머리를 다치셨다. 내일부터 나는 언제든 가장 나쁜 상황과 마주할 수도 있다는 상상에 늘 젖어 살게 될 것이다.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숨을 쉬시는지부터 확인하고, 낮에는 그때그때 집에 전화를 걸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고, 밤에는 집에 돌아갈 때까지 아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손전화 야구 게임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머니 덕분에 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이란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라는 걸 어머니는 내게 그 시퍼렇게 부은 얼굴로, 힘없이 감은 눈꺼풀로 가르쳐 주셨다.

연대라는 것도 그 비슷한 것이 아닐까. 연대는 노동자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자기 자신이 무엇을 얻으려 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들을 위해 대가 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얼마큼이나 내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며칠 전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분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노동자들을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방문 밖으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평온하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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