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선언 이어져도 박근혜 지지율이 오르는 것은

[양규헌 칼럼] 공상과학영화 같은 세상

영화 같은 세상, 스크린 보듯 만나는 현실

댓글 공작과 NLL정상회담 불법 공개로 하나씩 드러나고 있는 국정원의 범죄와 새누리당 의 대선 관련 정치 공작이 분명해 보이는 국정원관련 게이트가 여의도 정치를 뒤흔들고 있다. 민심이 어디로 향하는지 오리무중인 가운데 24명의 목숨을 앗아간 쌍용차 대한문 영정들은 추모의 자유조차 유린당하고 있다. 그 이유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집단폭력과 협박을 했다’는 이유다. 그러나 쌍용차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한 거라고는 현 정권이 약속한 국정조사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쳤을 뿐이다. 영정사진을 부여잡고 있는 쌍용차 해고자들을 끌어내고 짓밟고 집어던지고 때린 게 경찰들 아닌가. 그도 모자라 영정사진을 부수고 향로 등을 훔쳐간 경찰들의 유치한 집단폭력이 대한문의 실상이다.

지난 정권에 이어 그들의 권력을 보장하기 위한 상상초월의 공권력 범죄는 가히 공상과학영화수준급이다. 외국의 보수 언론기관마저 비판 기사를 낼 정도로 황당하고 리얼하고 비상식적이다. 정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한 참 벗어난 이런 작태에도 우리의 정상국가(?) 는 단지 황당한 공상영화를 한 편 내보내고 있고 다수 국민은 그걸 그냥 관조하고 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소수의 국민들에게 이것은 리얼하고 비주얼감이 생생한 공분의 현실감을 준다. 그런데도 단지, 어찌해 볼 수 없는 스크린을 보고 있는 기이한 느낌에 빠져있는 이유는 뭘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는 한 그 영화가 아무리 불의하고 부조리하게 전개 되어도 짱돌하나 던질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진다. 욕을 하거나 원성을 드러낼 수도 없다. 단지 숨죽이며 속으로 안타까워하거나 그 불의를 조용히 구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영화 속 현실에 우리가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현실을 보는 기분에 묶여있는 우리의 처지란 어떻게 해도 현실을 바꾸어 낼 수 없다는 정치적 무기력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수년간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고 불법파견에 저항하며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탑에 머물고 종탑에 올라가며 전국도처에서 자본과 권력을 향한 투쟁의 몸부림이 처절함을 넘어 가중되는 절망으로 버티기 어려운 지경에 처했음에도 노조운동의 동력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민중에게 자신의 절박한 현실을 공상과학영화로 보이게 하고 있다. 노동운동 스스로 자신의 생생하고 어처구니없는 모순의 현실을 외면하다가 끝내는 스크린 속으로 박제화 되어 노동운동의 전망마저도 흐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떻게라도 극복을 해야만 하는 감정과 현실이다. 어떻게 할까. 노동자 현실을 생각하면 단 일초라도 공상과학에 머무르면 안 되는 데도 말이다. 안타깝고 속이 탄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허약함

해마다 1조원의 세금을 펑펑 써댄다는 그들은 나라의 안보와 국익을 위하여 일하는 국가정보기관, 수사기관이 결코 아니었다. 세금을 내는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게 아니라 한 무리의 기득권 세력과 그 수괴를 주인으로 떠받들어 일하는 폭력기관에 다름 아니었다. 범죄 집단이란 말할 것도 없이 불법을 자행하는 정권과 검찰을 비롯한 그 하수인들이다.

계급이 적나라하게 살아있고 돈이 주인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기구는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폭력기구로 행세한다는 게 새삼스러울 건 없다. 자본주의 국가기구에 대한 오래 전의 과학적 통찰이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들어맞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온 몸으로 겪고 있는 역사적 시기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미래를 내다 본 가설이나 이론에 한 치 어긋남이 없는 자본의 권력아래, 허울뿐인 민주공화국이라고 해도 지금은 민주노조의 정신과 노선을 외쳐야만 하며 노동자계급의 정치부대를 만들어 당면한 모순에 맞서야 한다.

왜냐면 국정원의 옛날에 해당하는 안기부나 중정의 폭력을 거쳐 온 민주주의도 피의 대가가 있었던 현실을 우리는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위를 해보지 않은 비 운동권 학생들도 민주주의를 위해 시국선언을 시작했고, 그 뒤를 이어 많은 대학교수와 법조인, 사회운동 단체들이 시국선언과 촛불 시위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국정원게이트는 절차상에 머무른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망하게 과거로 회귀하는지 명백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박정희는 통치시기에 맘대로 중정을 휘둘렀지만 국정원은 알아서 박정희유령을 대접한 꼴이 된 것이다. 국정원사건의 혜택을 보았을 당사자는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발뺌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국가의 통치기구의 내용이 전혀 변하지 않았고 노동자, 민중이 실질적 권력을 잡지 않는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노동조합운동도 마찬가지다.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어용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고 민주노조운동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미래에 희망을 안겨올 것이라는 확신으로 자본가계급에 맞서 투쟁하다 수 천 명이 구속되고 해고되면서 계승 발전시키고자 했던 민주노조운동의 열정과 결의는 어디에 있을까. 노동해방쟁취를 위해 강조되었던 민주노조정신은 흘러간 노래가 되었고, 반자본 노선에 입각한 변혁노선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과거로 회귀하는 작금의 상황이 설익은 절차적 형식만으로 민주노조임을 강조하는 앙상함은 현재의 민주노조운동과 무관하지 않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국민의 정서를 감안한다며 강조했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과 발전적 노동운동이라고 주장했던 사회적 합의주의는 노동자에게 희생과 양보만을 안겨준 게 아니라 배신감과 무기력과 패배의식을 안겨주고 말았다. 그 결과 자본과 권력의 영악한 지배전략에 순진하게 놀아난 꼴이 되었으며 노동운동의 위기가 고조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면서 시국선언을 하고 촛불시위를 시작했는데도 동력은 없어 보인다. 길바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내 몰아도 오히려 박근혜의 지지율이 오르고 있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보수언론이나 지상파 종편 등은 투쟁현장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국정원 사건도 본질을 흐리는 쪽으로 단편 보도를 하거나 안 좋은 일에선 철저하게 박근혜를 숨긴다. 즉 꼬리자르기를 영리하게 하거나 민주당의 무능(적에 앞선 전략 전술의 철학이 없으니 능력도 없을 것이다)을 보여주는 식으로 해서 국민들에게 다른 대안이 없음을 철저히 주지시키는 전략으로 어부지리 지지율을 얻어가는 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치밀하게 박정희식 정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언론환경이 이렇다고 해서 대중의 다수가 개념이 없어서 시위에 동참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될 것이다. 다수국민들이 언론에 속아서 민주주의를 몰라서 박근혜를 선택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진짜 민주주의를 한 번도 가져 본적이 없는데 민주당의 민주주의나 새누리당의 거짓말 선동을 놓고 어떻게 적당한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겪어보니 노무현의 민주주의가 좋을 것 없다는, 오히려 일자리를 잃고 불안해지는 삶의 경향성이(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박정희식 성장과 안정을 좋게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그 긍정성의 근저는 그것이 일하는 사람들의 생존권 그자체이기 때문이었고. 생존권의 박탈과 노동자계급을 분할 통치했던 민주정권 10년과 그 이후는 더 민주주의를 누릴 수가 없는 역설의 공간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노동자 민중에게 무슨 기본권이 있으며 자유가 있는가.

자유란 굶어죽는 자유밖에 더 있는가

이제 우리는 명확해 져야한다. 국민들이 바보라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누가 해도 변하지 않거나 더 나빠진다고 생각해서, 관성적으로 많이 노출이 되어 편안해 보이고 박정희 향수의 애틋함에서 그녀를 대통령으로 뽑았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 그 연장선에 있다. 불법의 범위를 침범하며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 어쩔 수 없는 지지를 보낼 것이다. 다음 대선을 지루하게 기다리면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현실이 이러하니 의회정치의 구획 안에서 제도권의 요구대로 상식과 절차를 회복하는 민주주의의 회복만이 최선인가는, 한 번 더 아래로의 각성을 요구하게 한다. 민주노조운동의 투쟁성 계급성 복원은 이미 지난 시절의 유물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민주당과 자유주의 세력이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헌법과 법률의 질서 회복에 값하는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외침은 지난 대선에 이어 이미 국민과 노동계급에게 사망선고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지방도시에서 촛불이 조금씩 동력이 살아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그렇게 잘 하는 것이 없는 데도 대통령 지지율과 새누리당 지지율이 오르거나 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엄연히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인 것이다.

이런 현실은 동전의 양면으로,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민중의 삶은 어느 때 보다도 더 절박하고 더 치열하게 불안정한 생존에 처해있다. 어떻게 이룬 민주주의인데 너희가 근간을 흔드냐고 떠들어봤자 먹고 살기 힘든 민중들의 귀엔 잘 들어오지 않는다.

노동자 민중을 생각하는 진짜 진보정당이라면, 노동자 서민을 위한 변혁을 추구하는 정치세력이라면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이 만들어 놓는 그들의 야만적인 통치 프레임에 걸려 허우적거릴게 아니라 절대 다수의 노동계급을 위한 정치이념으로 새로운 21C형 노동 아젠다를 만들어내어 그들의 억지주장에 쐬기를 박고 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우리 노동자 민중은 새누리당과 민주당과 민주당의 2중대로 활동하고 있는 듯 보이는 진보정당조차도 뛰어넘는 직접행동의 전사들로 나서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의 투쟁성과 민주성의 회복과 더불어 개인화된 각자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자기 능력껏 오늘도 각개전투를 준비하여 연대계급으로 조직화에 박차를 가해야한다.

지금은 예열의 시간이다. 그러나 거인이 되어 진격할 시간이 어느 순간에는 오고야 말 것이다. 그 순간이라는 것은 정세의 발전을 의미한다. 그것이 먼 미래에 다가올지 가까운 미래에 올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피지배세력의 저항과 투쟁의 성과가 시기를 결정할 것이다. 역사벌전의 합법칙성이라는 것은 한발 전진 두발 후퇴의 모습으로라도 변혁은 다가 올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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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 NLL , 시국선언 , 쌍용차 ,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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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자

    비록 부족할지언정 그나마 박근헤에 유일하게 맞써는 진보당조차 이중대라고 하는 글쓴이의 편협함이 바로 투쟁의 전망을 망치고 있음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만좀 싸우자 언제까지 정파싸움할래 다 꼴보기 싫다

  • 노동자

    아님녀 확고한 노동자 정당을 만들어 보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비난만 현장은 속찬다 이제 다포기 해야하나 ?

  • 보스코프스키

    적의 프레임에서 허우적대는 것은 진보언론의 칼럼니스트 중에도 있습니다. 찾아보세요...^^

  • 참 진보맨

    극좌나 극우는 망하는게 진리이다...지금은 입만가지고 선동한다고 될까? 왜 국민들 마음을 모를까?

  • 정재진

    이런 쓰레기같은 인간들 이제 그만 사라졌으면 한다. 국민들간 위화감만 조성하는 이런 종북인간들 다 쓰레기통에 집어 넣어야 세상이 평안할 것이다.

  •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다

    결론은 언론이 제역할을 못하니까. 시국선언을 방송중계하는 방송이 단 하나라도 있습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nll발언은 연일 떠들어 대면서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국선언은 입닺고 있는 방송이 있는한 민주주의는 멀은거죠

  • 시국선언

    시국선언을 하는 주체들이 이미 국민의 마음에서
    떠났는데 오히려 시국선언을 한다는 주체들을
    더 위험하게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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