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돌보는 일

1. 동물 돌봄과 젠더

(본 글에서 여성/남성은 패싱되는 성별을 의미한다. 스스로 정체화하는 젠더는 다를 수 있다.)

동물 돌봄과 젠더는 관계가 있을까? 어떤 성별이 동물 돌봄을 주로 하는지 생각한다면 답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동물 돌봄 노동 또한 여성에게 전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성별 구분 없이 동물 구조와 보호 시설 마련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도, 남은 일이 ‘매일의 돌봄’이 되면 여성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고양이 돌봄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캣맘’이라는 단어는 흔히 쓰이지만 ‘캣대디’라는 단어는 낯설다.

돌봄은 여성의 것. 이 패턴을 느끼는 건 정말로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저 너무나 익숙해, ‘여기서도?’ 정도의 아쉬움이 일었을 뿐이다. 기존의 경력을 단절해야 하고, 임금이 잘 보장되지도 않으며, 언제나 대기 상태에 있어야 하며, 반복적이고 불안정한 돌봄 노동. 이에 몸을 묶는 자는 여성이고, 여성이어 왔다. ‘헌신’을 하는 자는 여성이어 왔다. 동물 돌봄은 젠더화되어 있다. 

출처: 필자 제공

사랑과 공감은 ‘감성적’이고, ‘여성적’인 특질로 여겨진다. 이는 현 사회의 젠더 설정을 반영한다. 이성적이고 강한 것은 남성성의 가치로, 감성적이고 유한 것은 여성성의 가치로 설정되어 있는 사회 속에서 그 설정치를 보고 듣고 느끼며 교육되기 때문에 횡단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정치적인 일이 된다. ‘남성성’을 요구받으며 길러진 남성이 비인간동물에 대한(사실 어떤 타자에 대해서라도) 돌봄과 공감을 우선하여 사는 것은 사회규범을 거부하는 일로 읽힌다. 반면 ‘여성성’을 요구받으며 길러진 여성이 그렇게 하는 것은 사회규범에 순응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애초에 동물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 중에는 여성으로 패싱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사회가 설정해둔 성역할을 크게든 적게든 주입받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역할의 주입 때문에 동물 관련 활동에 여성이 더 많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동물을 돌보는 일은 특히 여성이 주로 부담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물 돌봄의 노동 조건을 생각해보자. 잠시 머물던 집에서는 고양이 몇 명과 개 몇 명이 살았다. 그들의 인간 보호자 없는 이동은 인정되지 않으므로 실내 생활을 하며 인간 보호자가 함께 외출하는 식으로 지냈다. 매일 산책을 한 시간씩 2회 하고, 고양이 화장실 모래를 뒤적이면서 배변을 치우고, 바닥에 흐르는 오줌을 여러 번 닦다 보면 몸이 뻐근해지며 저녁이 오곤 했다.

일시적으로 오갔던 개 보호소에서는 주 7일, 생계 노동이 따로 있는 책임자 자매가 오셨다. 보호소 땅은 빌린 것이라며, 땅에서 쫓겨날까봐 땅 주인이 올 때마다 조마조마해했다. 그런 불안함 속에서도 마음을 낸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활동하는 ‘새벽이생추어리’라는 단체에서는 두 돼지를 돌본다. 아침 7시까지 두 돼지가 있는 땅으로 가서 아침밥을 주고 저녁 6시쯤 하루의 돌봄이 끝난다. 날씨가 궂을 때나 아플 때도 필요시에 언제나 현장에 갈 수 있어야 한다.

날씨가 궂다고, 돌보는 사람의 몸이 아프다고 돌봄의 대상이 굶을 수는 없다. 돌봄 노동에는 온전한 휴일도 퇴근도 없다. 그러니까 동물 돌봄 노동이란 엄청난 책임감과, 유연성(=불안정성)과, 반복을 요하는 일이다. 저임금 또는 무임금이고, 오히려 나의 것을 소모하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돌봄 노동은 ‘뒤치다꺼리’로 생각될 만큼 사회적 인정이 부족하다. 이런 악조건의 노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쌓여가던 커리어를 중단하고 돌봄 노동을 하는 것이 용인, 더 나아가 장려되는 성별은 무엇인가?

유기견 보호소의 여성들이 ‘영혼을 갈아넣으면서’ 일하는 현상에 대한 한 논문1에서 비인간동물-여성 돌봄 관계를 "가부장적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자연화'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피력하였다(Jun, 2024). 즉, 여성이 동물 돌봄을 하는 것을 정당한 대가가 필요한 노동으로 여기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여성다운 사랑'과 연결지어 당연시하는 패턴이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식과 같다는 것이다.

고양이를 돌보는 여성에 대한 협박 메시지. 출처: 동물권행동 카라

‘여성’이 하는 ‘동물 돌봄’의 일은 중첩된 혐오를 일으키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길고양이를 돌보는 여성/여성의 돌봄을 받는 길고양이에 대한 혐오다. 길고양이는 도시 속 새들을 사냥한다는 이유, 짝을 찾기 위한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 더럽다는 이유 등으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것과 여성 혐오가 합세하여 ‘캣맘 혐오 범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길고양이를 돌보는 여성들에게 언어 및 신체적 폭행, 협박 등 폭력에 노출되는 일은 드물지 않은 일이 되었다. 길고양이 또한 잔인한 방법으로 학대/살해하는 것이 유희거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길고양이와 돌보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캣+맘'이라는 혐오를 위한 지칭어가 생기고 그들이 인식되면서 강화되었다.

더불어, 여성의 동물 돌봄은 전문성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생추어리, 보호소의 실질적 노동자는 여성이 많지만 ‘전문가’의 자리에서 발언하거나 토론을 맡는 경우 직접 살을 맞대고 현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아닌 이론가와 연구자에게 마이크가 돌아간다. 그래서 동물에 대한 토론이나 포럼 자리에 가면 남성의 비율이 더 높거나 비슷하다. 생추어리에 관한 한 대화 자리에서, 어떤 이는 생추어리에서 여성들만 돌봄을 하는 것이 ‘우려 된다’고 표현했다. 돌보는 여성들은 오랜 기간 현장을 책임져 온 ‘돌봄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젠더가 반영되면서 여성 동물 돌봄은 미숙함, 약함과 결합하여 염려의 대상으로 여겨진 것이다.

2. 동물 돌봄의 마땅한 대가

 출처: 새벽이생추어리

여성이 주로 맡고 있는 동물 노동의 노동 조건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동물의 상황이 취약하기 때문에 생기는 동물 돌봄 노동의 불안정성은 정치적 활동을 계속함으로써 개선을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그 외는 개인적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타 임금노동처럼 임금을 얻으면 개선될까? 동물 돌봄 노동을 통한 ‘임금’, 돌봄 전문가들의 생계를 위해 그리고 사회적 인정을 위해 갈급하다는 걸 알지만 망설여지기도 한다.

동물 문제에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쓰이는 대표적인 방식은 동물이 어떤 고통에 놓여 있는지를 강조하며 '연민'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동물이 놓인 처지와 그들이 당하는 폭력을 알게 하면서 동물은 약하고 불쌍한, 연민의 대상이 된다. 이 감정은 무엇인가를 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동물이 불쌍한 대상으로 여겨질 때,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활동을 생각하는 방식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다. 동물을 돌보는 일을 ‘고귀하고 아름다운 선행’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누군가 대가 없이 동물 돌봄을 했을 때 칭송 받고, 동물 돌봄을 통해 수익을 조금이라도 더 창출하려는 욕심이 보이면 신뢰와 후원을 잃을 위험에 놓인다. 하지만 우린 모두 테레사 수녀가 아니다. 동물을 돌보는 일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일이 선행이 아닌 노동으로 읽히고 정당한 대가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동물 돌봄 노동에 대한 금전적인 대가를 충분히 받는 것 또한 임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고민이 생긴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내의 무한 효율성/경제성 경쟁 속에서 비인간동물의 서식처가 파괴되어 많은 동물종이 멸종되었거나 멸종위기에 놓였고, 많은 종이 비인간을 배려하지 않은 구조로 설계된 도시에 정착하기도 했다. 또한 동일 체제 내에서 산업용 동물로 지정된 비인간동물들은 산업 내부에서는 폭력적으로 착취당하고 외부에서는 포획의 대상이 되어 어디서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가 동물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활성화한 주역이기 때문에, 그것에 힘을 싣는 것이 구조적으로 역행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인간동물과 인간 외 동물을 착취하지 않는 방식으로 후원금을 모은다면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다. 애초에 자본주의 화폐경제는 인간동물이든 비인간동물이든 배제와 착취를 기반으로 작동하기에 누구의 돈인지, 어떤 과정으로 벌린 돈인지, 새로운 착취에 동조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망설이게 되는 지점이 많다.

출처: 필자 제공

이어지는 고민은, ‘동물 돌봄 노동의 대가가 반드시 화폐의 형태여야 하는가?’다. 한 동료는 동물 돌봄 노동을 할 때 무엇인가 회복되는 느낌을 받았고, 이에 대해 고민하다가 자신의 노동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돌봄을 상호적으로 주고받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돌봄 노동을 하면서 자신도 돌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동료는 자신에게 생계 유지를 위한 돈이 있고, ‘다른 것들’을 얻고 있기 때문에 임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돌봄의 대상으로만 생각되었던 동물과 동료들은 '깊게 얽혀' 있었다. 이러한 얽힘 속에서의 돌봄 노동의 가치와 대가는 단순 화폐를 넘어서서 고려되기를 바란다.

3. 돌봄은 적극적인 얽힘

사진: 동동

동물 돌봄은 인간종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준 비인간동물에게 있는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돌봄을 제공함으로써 돌봄이 돌아오기도 한다. 돌봄으로 ‘깊이 얽힌’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 상호 돌봄을 하는 두 동물은 운명을 공유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동물이 대피할 때 돌보는 인간들도 함께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재개발구역의 고양이들이 새로 생긴 벽 때문에 나올 길이 없어질 때 벽에 구멍을 뚫어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인간 사회 속에서 위협을 받는 이들을 돌보며 책임지겠다는 것은 몸을 함께 묶는 행위다. 그리고 그러한 동물 돌봄-관계-깊이 얽힘의 과정을 통해 인간 아닌 존재가 인간이 지배하는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다. 그 경험은 향후 돌봄에 대한 더 적극적인 책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고민을 안으면서 동물 돌봄의 책임을 이행하는 인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더 많은 인간동물들이 깊은 얽힘으로 묶여, 돌봄의 과정에서 후원을 받거나 음식을 구할 때 비(덜)착취적인 방법이 무엇일지 함께 고민하길 바란다. 또한 여성의 돌봄 노동이 다시 ‘자연화’되어 착취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싶다. 동물 돌봄이 마냥 ‘선함’이 아니라 전문성이 인정되는 노동으로 인정받고, 그것이 화폐의 형태이든 아니든 돌보는 자들이 정당한 명예와 대가를 받으면서 노동을 하게 되길 바란다.

출처: 필자 제공

[1] GRINDING THE SOULS: Politics of Interspecies Pity and the Labor of Care in a South Korean Animal Shelter(Jun, 2024) 

덧붙이는 말

세원은 동물이 겪는 폭력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동물권 활동을 시작했다. 얇든 굵든 길게 활동하기 위해 살처분폐지연대 등에서 동료들과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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