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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juncture’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은 어원을 가진다.
… 라틴어 어근 coniugere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묶다, 결합하다, 합치다, 어형 변화시키다’는 뜻을 가진다. Conjuncture는 결합과 공존의 상황을 의미한다. (제이미 펙(Jamie Peck), 2024)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경제지리학자 도린 매시(Doreen Massey)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이 개념을 자세히 설명했다.
“Conjuncture는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여러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모순들이 한데 모여 특정하고 독특한 형태를 구성하는 시기를 의미한다… conjuncture는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시간이나 정권 교체 같은 단순한 변화로 정의되지 않는다. 물론 그런 변화도 나름의 영향을 미친다. 내가 보기엔 역사는 하나의 conjuncture에서 다음 conjuncture로 이동하며, 진화하는 흐름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동을 추진하는 원동력은 보통 위기다. 위기는 언제나 존재하는 모순들이 응축되거나, 알튀세르(Althusser)가 말했듯 ‘단절적 통합’으로 융합될 때 발생한다. 위기는 변화의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지만, 그 해결 방식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람시(Gramsci)는 평생 ‘경제주의(economism)’와 싸웠고, 위기는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위기는 언제나 다양한 방향에서 ‘과잉결정’된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어떤 위기든 그것을 이해하려면 ‘경제 핵심’을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금융 부문이 전체 경제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 방식이나,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세계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중심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를 전체적으로 복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어려운 균형이지만, 위기는 언제나 ‘과잉결정’된다는 점에서 필연적이다. 사회의 다양한 수준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상식 등이 함께 모이거나 ‘융합’된다. 그렇지 않으면 즉각적인 정치적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미해결된 이데올로기적 위기가 생기거나, 경제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위기로 남을 수 있다. conjunctural crisis의 정의는 이처럼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들—서로 다른 기원을 가지고, 서로 다른 모순에 의해 추진되며, 각기 다른 시간적 리듬으로 전개되는 영역들—이 하나의 순간에 소환되거나 응축될 때다. 그때 위기, 단절, ‘단절적 융합’이 발생한다.
(이상 2010년 도린 매시와의 인터뷰에서 스튜어트 홀)
가르침은 세상을 열 수 있다. 때로는 진정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접하게 되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익숙했던 것이 지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는 일이 생긴다. 이번 학기에 내가 홀을 가르치며 그런 경험을 했다. 예전에 읽었던, 출간 당시에도 읽었던 텍스트들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홀의 ‘conjunctural analysis’ 개념 안에서 이 순간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도움 준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누군지 알지?)
그리고 홀의 개념을 (재)발견한 후의 또 다른 기쁨은, 다른 사람들도 같은 개념을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와 ‘중간에서 사고하기(thinking in medias res)’ 같은 개념들을 채택하는 모습을 읽으며, 내가 차트북이나 다른 곳에서 전개하고 있는 분석 프로젝트와 긴밀히 맞닿아 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특히 경제지리학자 제이미 펙은 conjunctural analysis를 위한 의제를 생산적으로 구상해 왔고, 나는 그가 최근 『휴먼 지리학 대화』(Dialogues in Human Geography)에 발표한 ‘접합적 방법론 실천하기: 중국 자본주의와의 접속(Practicing conjunctural methodologies: Engaging Chinese capitalism)’이라는 글에서 그의 접근을 매우 설득력 있게 느꼈다. 제목과 부제목 모두 내 관심을 끌었다.
다음 글은 펙의 글을 통해 conjunctural analysis 이론가들과 홀을 연결하는 3자 대화이다. 나는 풍부하게 인용하고, 내 코멘트를 병렬로 배치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소 장식적인 구조가 되었음을 양해 바란다. 하지만 이 방식이 이론적 논의를 다룰 때 나에게는 더 수월하다. 나는 이론을 ‘처음부터’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종종 막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medias res에서 글쓰기”(2021), 안나 칭(Anna Tsing)에 대한 오마주(2022), 최근에는 『상하이 리뷰 오브 북스』(Shanghai Review of Books)의 딩시옹페이(Ding Xiongfei) 인터뷰(2024), 그리고 Chartbook 343: 다중위기와 자본중심주의 비판(Polycrisis & the critique of capitalocentrism, 2025) 등을 포함한 일련의 사유 흐름의 일부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시도하는 것을 “conjunctural analysis의 실험”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1)
… conjunctural 분석은 공간과 시간 속에 명확히 위치한다. (펙)
공간과 시간 속에 구체적으로 자리 잡은 분석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970년대 영국 국가의 위기, 2008년 북대서양 금융위기, 중국의 당-국가 자본주의 발전 등.
이것은 평범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일반 개념(예: 금융위기)과 특정한 시간과 장소 사이의 긴장 관계를 상기시킨다. 시간을 이론적으로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은 실은 아주 무거운 형이상학적 문제를 수반한다.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는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의 헤겔식 질문이 제기된다.
실제 일상에서 이는 ‘사례 연구’라는 개념을 쉽게 호출하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는다.
예를 하나 들자면, 내가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것처럼, “패권 계승(hegemonic succession)”이라는 틀로 미국 권력의 20세기 초 위기를 설명하려는 방식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고 본다.
(2)
분석 대상이 이런 식으로 위치를 부여받는다면, 분석가/관찰자/행위자인 우리 자신도 우리의 ‘상황’—공간과 시간 속 conjuncture—에 자신을 위치시켜야 한다. 말하자면, 모든 conjunctural analysis는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inter-conjunctural analysis’가 된다.
(3)
모든 분석은 위치를 가진다. 홀은 1980년대 중반에 “현재라는 모순적이고 단단한 토양을 일구기(working the contradictory, stony ground of the present conjuncture)”라는 유명한 표현을 남겼다. 그러나 ‘단단한 토양’ 너머에서 분석의 작업은 일종의 도박을 수반한다. 이 도박의 이름이 바로 ‘이론(theory)’이다. 홀은 “할 수 있다면 이론 없이도 좋겠지만, 문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론 없이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세상은 혼란스러운 외양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현재의 conjuncture를 이해하고, 분해하고, 분석하고, 파악해서 어떤 행위를 하려면, 우리가 가진 유일한 도구—개념, 아이디어, 사유—로 이 혼란스러운 외양의 층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이 층을 뚫고 들어가 분석하고, 다시 상황 혹은 conjuncture의 표면으로 돌아와야 한다. 바로 그것이 ‘이론을 경유한 우회(detour through theory)’다.” (홀, 2018: 310)
‘뚫고 들어간다(breaking into)’는 표현과 ‘우회’라는 개념은 이 순환적인 논의에서 나중에 다시 다루게 된다.
(4)
이론을 하지 않고는 안 된다. 하지만 펙이 말했듯이 “개념화와 방법론적 실천의 문제는 대부분의 conjunctural 분석 사례에서 ‘유기적’ 방식으로 흡수된다.” 펙은 도린 매시를 인용해 다음과 같은 통찰을 남겼다.
매시의 경우, 그는 conjunctural analysis를 특정한 방식으로 실천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경력 후반에서야 “conjunctural하게 사고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신하게 되었다”(클라크, 2018: 201, 강조 추가)고 말했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conjunctural analysis는 명확히 정형화된 방법론이라기보다는, 비판적 태도나 ‘장인정신적 실천(craft practice)’에 가깝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내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나는 ‘polycrisis’라는 개념을 이론적 보상보다는, 건강한 일상적 ‘실천’으로 받아들이라는 조언을 종종 들어왔다. 현실을 매일 직면하며 사고하려는 태도를 하나의 윤리로 생각해 왔다. 핵심적으로 이 윤리는 우리의 개념적 틀을 기꺼이 작동 상태로 놓으려는 의지를 포함한다.
(5)
이론을 스트레스 테스트하거나 충돌 실험에 던지기
conjunctural analysis의 핵심적 태도는 일종의 순환성 안에 우리를 놓는다. 이론화는 피할 수 없고 선행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강압적이어서는 안 된다. 펙은 이렇게 표현했다:
“conjunctural 연구가 직면하는 닭과 달걀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설명 지도를 갖지 않고는 시작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 국가자본주의 구성을 보여주는 지도, 자본-노동 갈등의 지형, 기업 공급망의 구조, 금융위기의 역사적 지리 등). 하지만 동시에 비판적 지향은 이런 지도들을 다시 그리도록 요구한다.” … 따라서 “이론화를 뒤로 미루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론화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미완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말이다. 초기 이론 또는 ‘출발점 이론’은 관심의 축과 설명의 핵심 원칙을 개략적으로 그리는 역할을 할 수 있고, 동시에 명백한 이상 현상이나 긴장의 지점을 부각시킨다. 여기서 이론은 반복적으로 생성되는 ‘지도’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결코 완전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분석을 통해 전개되고, ‘사용하면서 나아지는’ 것이다.” (맥마이클, 1990; 틸리, 1984: 125)
conjunctural analysis는 기존 이론에서 사례로 향하는 직선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설명 지도를 단순히 채색하거나, 사전에 규정된 세계 시스템에 따라 사례를 배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탐색적 성격을 지니며, 새로운 이해를 지도화하는 데 그 목표를 둔다.
나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것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집착해 왔다. 이 문제야말로 현재라는 순간이 던지는 가장 큰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이 도전 앞에서 익숙한 이론들은 필수불가결하면서도 동시에 현실도피나 덫이 될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펙(Peck)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론’을 왕좌에 앉혀 수정이 불가한 절대성으로 만들 수도 없고, 한편으로 자유로운 귀납적 탐구가 가능한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이론을 ‘연기’할 수도 없다면, 우리는 그것과 어떻게 건설적으로 맞설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마이클 부라보이(Michael Burawoy)의 ‘확장 사례 연구법’ 재구성에서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이 방법은 비판적 태도를 전제로 하지만, 결코 양가적이지 않게 가설적 이론과 초기 설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탐구 프로그램을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에 뿌리를 내려야 할지를 묻는 이 고질적이고도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여기에는 완성된 지도는 없지만 나침반 정도는 제시된다. 연구 장소, 사례, 문제 공간은 ‘선호하는 이론’을 뒷받침하거나 입증하기 위한 출발점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들이 도전받고, 확장되며, 스트레스 테스트를 거치고, 때로는 흔들리는 지점에 위치해야 한다. 부라보이는 이론적 기대와 충돌하거나 긴장을 이루는 ‘이상(anomalies)’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했다. 이러한 이상은 ‘선호하는’ 비판 이론에 대해 정의되고, ‘결정적 실험(crucial experiments)’을 통해 그것들을 스트레스 테스트하고 재구성하는 목적을 가진다. 설명적 자세는 긍정적이되, 비판적이고 때로 자기 대면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현장에서 확인이 아닌 반박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의 이론에 대한 입장은 가미카제적이다”(Burawoy, 1998: 20)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가미카제”보다 “충돌 실험(crash-testing)”이라는 개념을 더 선호해 왔다. 그러나 ‘가미카제’가 불러일으키는, 지적 공격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그 실존적 긴장은 분명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고방식의 한 예는 무엇일까? 예컨대, 나치 독일의 경제사를 아주 길게 써내려간다고 상상해 보자. 그 목적은 ‘결정판’ 역사 서술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물질주의적 논리가 어디서 작동을 멈추는지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동조하는 마르크스주의 독자들이 실망하겠지만, 이 책의 목적은 지배 계급의 특정 분파를 정밀히 추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권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공허의 감각’을 탐색하는 데 있다.
(6)
Conjunctural analysis는 “형식화(formalized)”된 접근이 아니라 “탐색적(exploratory)” 접근이다. 이 분석은 “즉각적이거나 근접하거나 선제적인 인과 설명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탐색적 탐구는 자주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외부로 확장되며, 고정된 설명의 지평이나 사전에 정의된 연구 장소 안에 갇히지 않는다”(펙).
여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선점(preemption)’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함축한다:
“아, 네가 X에 대해 쓰고 있다면, 당연히 Y부터 시작하겠지?”
혹은,
“글쎄, A가 B의 사례이니까, C를 논의하지 않으면 실수가 되겠지.”
이런 말들은 모두 선점적 해석의 사례다. 그것은 새롭게 출발하려는 시도를 기존 지식의 틀로 미리 끌어당기려는 시도다.
이런 선점적 해석의 반례로 나는 다음을 제시하고 싶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를 “유럽적인 것”으로 다루기
2008년 금융위기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라는, 평소에는 주목받지 못한 주변부에 미친 상반된 영향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7)
이 모든 점들을 종합하면, 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conjunctural analysis는 추상적인 것, 구조적인 것, 역사적인 것을 구체적이고 특수하며 현실적인 것을 통해 다룬다. 그것은 구체적인 상황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그 자체로 하나의 관심 지점으로 삼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시스템적이고 세계적이며 일반적인 것을 독해하고, 지도화하고, 자리매김하려 한다. 이 접근은 언제나 변화하는 지형 위에 (종종 혼란을 불러오는) 개입을 시도하며, 사회적 타당성과 정치적 긴급성을 고려할 뿐, 어떤 특정한 진입점이나 순간을 특권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분석은 일관되게 경계를 넘어서고, 지평을 확장하고, 성급한 결론을 거부한다. 문제나 상황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breaking in)’ 방법론적 행위는 항상 흐름의 중간(midstream)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결코 고립된 것이 아니라 ‘사이에서(in medias res)’, 즉 사물들 한가운데에서 발생하며, 맥락화하고 역사화해야 할 의무에 본질적으로 연결된다(Tooze, 2021 참조).
(8)
이로부터 우리는 conjunctural analysis를 역사 안에, 보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특정한 역사 철학 안에 위치시킬 수 있다:
실험실과 같은 폐쇄적이고 통제된 환경과 달리, ‘열린’ 사회 시스템에서는 A가 발생하면 항상 B가 일어난다는 식의 일대일 인과관계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단일하거나 중재되지 않은 인과 조건은 거의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과학에서는 필연적으로 우연적이고 conjunctural한 인과관계만이 적용될 수 있다”(Steinmetz, 1998: 181). Conjunctural analysis는 이처럼 사회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인과의 원천들을 분명히 하고 ‘풀어내려는(tease apart)’ 데 주력한다. 이런 상황은 시공간적으로 가까울 수도 있지만, 종종 그렇지 않기도 하다(Li, 2014 참조). 이 분석이 다루는 영역은 항상 일정하지 않은 결합 상태들이며, 이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의미심장하게 변화한다. Conjunctural analysis는 단일한 근본 원인의 ‘신호’를 잡기 위해 우연성을 ‘잡음’으로 취급하며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다성적이고 복잡한 현상들, 즉 ‘불협화음과 푸가(fugue)’의 상태를 그대로 마주한다.
나는 이 음악적 비유가 정말 마음에 든다. 누군가 내 접근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나는 《Wages》와 《Crashed》를 ‘베이스(base, 중의적 의미) 소리를 강조한 리믹스’라고 묘사해 왔다.
최근 나는 인과관계를 ‘어질러진 레고 조각 가방’에 비유해 왔다. 그 어딘가는 불협화음과 푸가 사이 어디쯤에 있다. 여기엔 반복적이며 어쩌면 필연적인 소규모 논리 구조도 들어 있지만, 전체 구조는 열려 있고, 따라서 우연적이며, 구체적이고, 역사와 창의성의 놀이에 따라 결정된다. 펙의 말을 빌리면,
“이는 사건들이 ‘다중의 교차하는 힘들’의 연쇄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는, ‘사건적(eventful)’ 인과 이해를 호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형성은 이질적이며 조합적으로 구성되며, 반복 불가능하고 복제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역사적이고 지리적으로 고유하다”(Decoteau, 2018: 89; Paige, 1999; Sewell, 2004: 100–101).
내 ‘레고 조각들’은 펙의 ‘교차하는 다중의 힘들’과 동일하다.
(9)
가장 일반적이면서 즉각 떠오르는 분석 틀은 ‘불균등하고 결합된 발전’이다.
conjunctural analysis와 그 설명은 절제되거나 미니멀하지 않으며, 이상형적이거나 논리적으로 완결된 간결한 모델을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내적으로 일관되고 독립적인 사회 시스템의 형태로 표현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다중적이고 매개된 인과, 불안정하고 ‘지역적인’ 결합 조건들은 시간적·공간적으로 고유하거나 ‘비정형적인’ 구성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Conjunctural analysis는 보편성, 수렴, 균형보다는 불균등 발전, 혼종성, 단절이라는 존재론을 전제로 한 특수성의 공간에 거주한다. 예컨대 질리언 하트(Gillian Hart, 2020: 241)가 ‘글로벌 conjunctural analysis’ 접근에서 말했듯이, 연구의 공간은 “미리 주어진 경계 안의 국가나 지역 단위 또는 별개의 사례”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글로벌하게 연결된 역사적 지리 안에서 역사적으로 특수한 연결 지점이며, 단지 글로벌 과정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그 과정을 생산하는 장소”로 이해된다.
(10)
자, 자본주의로 가보자. 물론 자본주의를 논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리하되, 홀의 conjuncture 개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conjuncture는 ‘복합 구조’이며,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완전하거나 고정된 방식이 아니라 불완전하게 꿰매어진 것이다.” 따라서 conjunctural 구조의 결정적 특성은 단일한 본질이나 우위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결합된 조합(articulated combinations)’으로 존재하고, 어떤 경우에는 ‘모순적 통일체’로 응고되기도 한다(Hall, 2021: 220). 이 접근은 자본주의 사회 형성에 대한 비환원주의적 독해—즉 불균등하게 발전하고, 다양하며, 조합 가능하고, ‘구축된’ 것으로서—와 공명한다. 자본주의의 구성 요소는 고정된 결합 상태에서 마찰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구성 상태에 놓인다(Jessop, 2018; Peck, 2023; Sewell, 2008 참조). 이 조합된 질서 혹은 질서들의 생태계 안에서 ‘이음매’나 ‘용접부’는 일정한 ‘제도화된 조건’ 아래에서는 유지되지만, 위기의 단절 순간이나 급격한 전환기에는 종종 풀리고, 갈라지고, 무너진다(Hall and Massey, 2010). 이와 유사하게, 경제 ‘재구조화’ 과정도 단일하거나 불가피하거나 목적론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모순된 변형의 방향성을 띠며, 변화하는 지형 위에서 관계적으로 구성된다.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싶다면 해도 좋다. 그러나 그 용어를 한 번 호출했다고 해서, 그것이 두께 있는 이해를 의미한다고 착각하는 ‘자본중심주의(capitalocentrism)’의 함정에 빠져선 안 된다.
자본주의가 세웰(Sewell)의 말처럼 팽창하지만 방향은 없고, 세계화하지만 다형적이며, 우연하지만 사건이 과잉 발생하는 구조라면, 불균등한 지리적 발전은 “자본주의 안에서 (공간적으로 묶인) 사건이 나타나는 구체적 형태”를 뜻한다. 또는 그 반대로 말하면, 사건들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불균등 발전의 형태로 변형된다는 뜻이다(Sewell, 2008: 528). 따라서 자본주의의 사건 과잉(hypereventfulness)은 반드시 불균등한 공간적 발전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형상은 conjuncturally contingent하며, 그럴 수밖에 없다. 브로델(Braudel)의 사유를 반영하면, 경제적 삶과 사건이 전개되는 (지역화된) ‘장소들’은 그 자체의 리듬과 패턴을 가진 생산적 과정이며, 사건들의 단순한 집합이나 자본주의의 추상적 법칙의 부수물 이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conjuncture는 미시적 기반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주어진 거시 질서의 단순한 부산물도 아니다.
이 지점에서 나는 펙의 논의를 읽다가 안나 칭(Anna Tsing)을 떠올렸다. 펙의 참고문헌에 칭이 우연히 병치된 것을 보고 나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나는 펙(Peck)의 각주를 보면 안나 칭(Tsing)이 경제지리학자들의 논의에서 그렇게 두드러지게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다. 인류학자들과 지리학자들이 실제보다 더 적게 교차하고 있는 건 아닐까? 펙의 다음 문장을 읽을 때 칭과 그의 버섯 채집꾼들을 떠올리지 않기란 어렵다:
conjunctural analysis는 그 목표 지점과 상황에 가까울수록 가장 밀도 있고, 강렬하며, 미세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너머의 공간이나 그 사이의 공간이 비표시되고, 구조화되지 않으며, 이론화되지 않은 영역으로 전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도시가 원형이나 전형으로 대체되고, 특정 지역 경제가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제시되며, (겉보기에) 별개이고 독립적이며 자족적인 사례들을 형식적으로 비교할 때 자주 일어나는 문제다. Conjunctural analysis는 어떤 장소를 지리적 ‘고립체’나 내부적으로 일관된 ‘모형’의 시험장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도린 매시(Doreen Massey)가 말한 ‘함께 던져진 것들(throwntogetherness)’의 개념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즉, 장소는 이질적인 상호작용과 결합의 장으로서, 다른 장소들과의 구성적 관계와 연결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인식 가능한(그리고 단지 일시적이지 않은) 형태로 서로를 지탱한다(Clarke, 2018; Massey, 1999 참조). Conjunctural 분석의 장소는 접점, 노드, 만남의 지점으로 나타날 수 있고, 얽힘이나 네트워크의 ‘매듭’으로 보이기도 하며, 재조합된 형성체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내부적 특성과 외부적 관계의 근본적인 불가분성을 지시한다. 따라서 conjunctural analysis는 비교와 다중 장소 분석에 대한 관계적 접근(relational approaches)과도 연관성이 크다(Hart, 2023 참조). … 이는 장소, 사례, 연구 현장과, 그들이 속한 구성적 세계 사이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이론적인) 질문이라는 뜻이며, 동시에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1)
Conjunctural analysis는 골치 아픈 작업이다. 홀(Hall)이 묘사한 “단단한 토양을 일구는 것”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는 이 점을 잘 상기시킨다. 이 분석은 확실히 까다롭고 불확실하다. 그러나 진지하게 접근하면 그것은 열정과 노력을 불러일으킨다. 펙은 이를 다소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conjunctural analysis는 ‘두터운 이론화(thick theorization)’를 향한 초대이다. 여기서 이론 주장의 맥락화와 조건화는 경험주의, 귀납주의, 서술 중심의 후퇴가 아니라, 이론적 주장과 입장, 명제를 생산적 긴장 안에 묶어두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매시는 한 번 이렇게 말했다(1989: 695): “목표는 일반 이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특정한 맥락에서 활용하는 것이다—왜냐하면 그런 의미에서 ‘일반적인’ 맥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론화와 맥락화는 동일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런 이유로, 연구 장소, 문제 상황, 분석 개입의 순간을 ‘사이에서(in medias res)’ 결정하는 일은 결코 이론 이전의 작업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규범성과 분석성을 결합한다. 규범적으로는 위기, 갈등, 사회정치적 긴급성의 순간과, 새로운 설명이 필요한 장소에 주목한다.
나는 개념적, 방법론적 논의에서 실천적 문제로의 전환이 정말 마음에 든다. 이것이 내가 conjunctural analysis에 매달리는 중심적 동기이다. 유용하기 위해서다.
펙이 그의 방법론적 논의를 무술에 비유하면서 끝맺는다는 사실에 나는 아직도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어쩌면 그가 옳은 방향을 제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conjunctural analysis는 불안정, 갈등, 논쟁이 벌어지는 지대, 구조조정과 변화가 가속화되는 장소, 이론적·규범적 정통성과 경계를 정의하는 극한 사례 또는 경계 공간에서 탐구를 시도하는 독특한 근거를 제공한다. 이런 분석은 일종의 유도술(jujitsu)과 같은 전략적 움직임으로, 기존 이론 설명의 무게를 그 핵심 주장에 반작용하도록 이용한다. 이는 예상 밖이거나 비스듬한 각도에서 접근해 중심축을 흔들고, 재조정하고, 교란하려는 시도다. 이 과정은 때로는 조르기나 제압을 포함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공격적일 필요는 없다. 이런 전략은 자기 방어로도 작동하며, ‘선호된’ 이론을 재작업하고, 새로운 관점을 발전시키며, 새로운 연대를 형성한다.
Conjunctural analysis를 ‘자기 방어’로 이해하는 것—지금 이 시대에 걸맞은 결론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펙의 “방법론, 지향, 헌신, 실천 규칙” 목록을 항상 곁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쩌면 내가 처음부터 이 리스트를 염두에 두고 있었더라면, 내가 하고 있던 일이 conjunctural 접근과 그렇게 잘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더 빨리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일수록, 리스트는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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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China).
펙(Peck)의 에세이 두 번째 부분은 중국, 중국공산당(CCP) 정권, 그리고 자본주의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집중한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conjunctural analysis의 '사례 연구'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말해 온 모든 내용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중국은 그 무엇의 ‘사례’가 아니다. 중국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아니 어쩌면 가장 전략적인 장소로서, 오늘날 현실 속으로 ‘뚫고 들어가기’ 위한 시도의 거점이다. 그리고 중국의 정치경제를 이론화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은 단순히 부차적이거나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의 급진성을 마주한 우리의 개념들이 겪고 있는 위기의 징후이다.
마무리하며, 나는 펙의 서평이 설정한 학문적·방법론적 범위를 넘어서는 역사적 추측을 하나 제안하고 싶다. 우리는 conjunctural analysis 그 자체를 역사 안에, 하나의 conjuncture 안에 위치시켜야 한다:
펙이 적절하게 요약한 바와 같이, conjunctural analysis는 마르크스주의, 관념론, 실용주의, 역사주의, 실존주의 등—가장 눈에 띄는 것들만 나열하자면—비판적 철학 전통의 독특한 산물이다. 이들 전통은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근대성에 대한 서구의 경험, 예컨대 영국의 산업화, 제국과 제국주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기술과 과학의 국가들, 포디즘, 미국의 패권, 단극체제 등과의 맥락 속에서, 그와의 대화 안에서 자리 잡았다. 트로츠키(Trotsky)의 ‘불균등하고 결합된 발전’ 개념, 알튀세르(Althusser)의 역사 개념, 홀(Hall) 자신의 작업도 이 역사와 씨름해 왔다. 칭(Tsing)은 일본의 부상과 베트남전 이후 미국의 위기 속에서 형성된 세계의 얽힌 역사(entangled history)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오늘날의 이 순간, 우리가 마주한 세계는 엄청난 영향을 받으며, 압도되고, 각인되고, 정의되고 있다(적절한 동사를 선택해도 좋다). 바로 펙이 “중국의 당-국가 자본주의”를 다루며 씨름하는 바로 그 질문에 의해서 말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맞서야 할 핵심이다. 마르크스에게는 영국의 공장 자본주의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게는 파시즘과 대중문화가 그러했듯, 우리에게는 이것이 그러하다.
만약 지난 25년간의 세계를, 그리고 우리가 conjunctural analysis로 반드시 마주해야 할 그 현실을 간단히 묘사해야 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부상, 그리고 그것이 국가 단위 석탄 소비로 요약되는 세계.
왜 석탄(coal)인가?
그 이유는 석탄이 중공업화를 견인하고, 전 세계 기후 위기의 속도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중국의 석탄 소비량은 미국의 정점 소비량의 다섯 배, 현재 미국 소비량의 열 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19세기 산업혁명을 석탄과 석탄 광부를 기반으로 이끈 영국—마르크스가 ‘자본주의 혁명’이라 불렀던 바로 그 혁명의 출발지였던 영국—은 지난해 전력 생산을 위한 석탄 연소를 완전히 중단했다.
물론 이것이 단선적인 유물론적 결정론, 다시 말해 “중국 → 석탄 → 모든 것”이라는 단순한 도식에 기반한 주장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왜 2020년대 중반인 지금, 홀(Hall)과 매시(Massey)가 대처리즘과 탈대처 시대의 영국을 분석하며 펼쳤던 conjunctural analysis 일반론에서 펄 강 삼각주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지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지를 과장된 형식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다음 차트북 뉴스레터는 작년 중국의 녹색 에너지 투자와 거대한 재생에너지 메가베이스들의 모순에 관한 내용이 될 것이다. 이는 이론을 시험하고, 이론을 파괴하는 정신으로 이 믿기 힘들고 놀라운 역사,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위치화된 conjunctural analysis로 분석하자는 초대이다.
이는 하나의 “방법을 찾는 시도(Search for a method)”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변화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줄 도구와 접근법을 찾기 위한 여정이다.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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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