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문화 평론가로서 중요한 모든 세상사에 끼어들려 한다. 운전 면허, 신용 카드, TV가 없다.

사진 김용욱


 

재생산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마르크스가 《자본》 2권에서 분석한 대로 경제적 생산 과정이 반복되어 나가는 것이다. 앞의 생산 과정에서 만들어진 잉여 가치의 일부가 다음 생산 과정에 투입되면 확대 재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자본 축적이 진행된다.

다른 의미로 생산 과정 자체의 재생산, 즉 축적 시스템을 포함한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있다. 여기에는 일차적으로 군대, 경찰, 행정력 등 국가 장치의 물리적 폭력이 전제되어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형식적으로 또 주기적으로 선거를 통해 사람들로부터 사회적 동의를 얻어 내는 정치라는 장치, 그리고 학교, 종교, 매스컴과 정보 통신 미디어, 가족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훈육 장치가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20세기 전반까지의 자본주의와 각별히 다른 점은 후자에 전자 감시 장치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노동력의 일상적 재생산이라는 것도 있다. 임금, 노동 시간 및 자유 시간, 각종 복지 제도 등이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 나날의 생산 과정에서 소모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활동은, 일상적으로 우리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는, 먹고 자고 입고 쉬고 놀고 하는 많은 것을 포괄한다.

노동력 재생산의 특수한 형태로 노동자 생애 주기의 재생산이 있다. 이것은 세대 간 노동력 재생산 문제로 나타난다. 생애 내지는 세대에 걸쳐 소모된 노동력도 재생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청년 세대는 자본가들에게 고용되기 전까지 교육을 받아야 하며, 고용되기 위해서는 ‘N포 세대’로 살며 각종 스펙을 쌓아 가야만 한다. 극심한 경쟁을 거치고도 끝내 일자리를 얻지 못한 다수의 청년 세대는 ‘잉여’, ‘폐인’으로 살아간다.

자본가는 자기네의 입장에서 엄격하게 노동력의 ‘가성비’를 따져서 생산 과정으로부터 노동자를 퇴출시킨다. 요즘 한국 사회처럼 저성장-저고용의 상황에서는 쫓아내기가 더 쉽다. 애당초 다수의 고용 형태가 비정규직 내지는 불안정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다단계’에 걸쳐서 쫓겨나거나 물러난 사람들, 혹은 애초에 고용되지 못했던 사람 중에서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노년 세대를 이루고 있다. ‘흙수저’ 청년 세대의 할아버지, 할머니뻘인 노년 세대는 다수가 농촌 출신이다.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이주했다는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공유한다.

이분들이 땀 흘리며 일하던 젊은 시절은 바로 1970년대, 즉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가 통치하던 때였다. 이 세대는 대개 반공 이데올로기에 젖어 살아왔고 냉전적 사고에 익숙한 세대이며, 체제에 순응해서 ‘목숨을 유지하고 굶주림을 면하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부모 세대로부터 직접 듣고 배운 세대다.

이 세대는 한국 자본주의 산업화의 초기에 자신의 청춘을 바쳤지만 그 과실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했다. 반면 이 세대는,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사람이 나이 들면서 자연스레 가질 수 있었던 미시적-문화적 권력을 빼앗겼다. 옛날과 달리, 이제는 아무도 이분들의 말과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 세대의 다수는 여러모로 박탈감과 상실감이 클 수밖에 없다.

노년이 될수록 재산이나 권력 등이 인생을 크게 좌우한다. 정신력으로 버티거나 몸으로 때울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노년 세대 중에서 재산과 권력이 없는 분들도 하루 종일 종편 방송을 즐겨 보고, 선거에서는 자신의 ‘계급적 이익’과는 전혀 반대로 보수 정당만을 찍는다. 종편의 막말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인데, 종편 출연자의 막말은 이분들이 세상에 대해서 퍼붓고 싶은 욕을 대신해 준다. 정치적-문화적 노스탤지어만이 이분들의 박탈감과 상실감을 왜곡된 방식으로 보상해 주는 것이다.

일자리 없는 청년들이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와 인터넷에 몰두하는 것과는 달리 이분들은 밖으로 자주 나온다. 한국 사회의 유일한, 보편적 노년 복지 제도인 공짜 지하철 덕분이다. 가진 게 나이밖에 없기 때문에 이분들은 지하철 노인석에 앉아 큰소리로 서로의 나이를 밝히고 따져 가면서 인정을 요구한다. 대개 이분들은 아줌마는 무서워하지만 젊은 여자는 만만하게 보고 쉽게 화내거나 욕을 한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얘기는 이렇다. 청년 세대의 문제와 노년 세대의 문제가 실은 매우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문제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현상적으로만 그러할 뿐이다. 이 두 문제는 한국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과 관련해서 종이의 앞뒷면을 이룬다.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종이를 찢으면 앞뒷면이 함께 찢어진다는 사실이다.

소위 ‘20대 개새끼론’이나 ‘노년 무시 발언’은 멘탈리티가 실상 동일하다. 계급 구조가 역사적, 현상적으로 분절되어서 나타나는 바의 세대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대 문제는 본질적으로 노동자 생애 전체에 걸친 노동력 재생산 문제다. 역사 경험으로 보아도 세대 분할은 성적 분할 및 지역 분할과 더불어서 자본가들이 노동과 자본 간 계급 대립을 은폐하면서 사회 전체를 통제하기 위해 늘 즐겨 써 온 분할 통치 전략의 일부다.

내년 2017년은 여러모로 역사적, 연대기적 의미가 깊은 해다. 러시아혁명 100주년, 6월 항쟁 30주년, 외환 위기 발생 20주년이 되는 해이고, 연말에는 대선이 있다. 변혁에도 ‘80 대 20의 법칙’이 작용한다. 인구의 20%는 열심히 변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전체의 80%가 그 성취에 동의해야만 변혁이 가능하다. 청년 세대의 문제는 물론이고 노년 세대의 문제까지도 변혁적 이행 프로그램의 중심 과제로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중장년 세대가 제조법을 전수해 주는 화염병을 청년 세대가 던지는 날이 와야만 세상은 뒤엎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노년 세대가 만들어 주는 주먹밥을 먹으면서 말이다.

 

(워커스12호 201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