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은


 

지난 5일에 치러진 영국 지방 선거에서 노동당 후보 사디크 칸이 런던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작년 총선에 참패한 노동당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결과다. 그러나 노동당 넘어 세간의 관심은 온통 파키스탄계 무슬림이라는 칸의 배경에 쏠린 모양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런던 유권자들이 “공포가 아닌 희망”을 택했다고 적었다. 칸이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게 “은폐막”을 제공했을 수 있다며 흑색선전을 펼친 보수당 후보 골드스미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낙선한 데 대한 촌평이다.

한국 언론도 대체로 영국에 첫 무슬림 시장이 탄생했다는 제목을 뽑았다. 칸의 가정 환경을 들어 간혹 ‘흙수저’의 승리란 표현이 나오기도 했으나 칸의 당선은 “반이민자 정서와 인종주의가 거센 2016년의 유럽에서” 런던이 “무슬림 출신 시장을 선택한” 결과로 읽혀야 한단 지적이 뒤따랐다(“세상엔 ‘수저’ 외의 것들도 있으니”, <한겨레>, 2016.5.15.). 필자는 런던의 다양성 정치에 익숙하지 않을 우리에게 여러 설명을 곁들이며 “세상엔 계급 외의 것들도 있으니”라는 한 줄 평도 내놓았다. 하긴 영국 정치판까지 챙길 여유가 우리에게 어디 있나. 그러니 무슬림 시장을 배출한 런던에 박수를 보내고 우리도 다양성 사회를 만들자고 다짐하면 딱 좋은 마무리인 걸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영국 선거를 그렇게만 보는 건 일단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을 비판한 당내 의원들을 규탄·제명하며 선거 직전 노동당을 뒤흔든 ‘반유대주의’ 사태에 대해 칸이 “반유대주의에 조금의 관용도 베풀지 않을 것”이란 말을 얹었단 소식은 그가 런던에서 일군 다양성의 승리마저 미심쩍게 만들었다. 관용을 베풀든 말든 이스라엘 비판을 반유대주의로 전제하는 것은 점령국 이스라엘과 그에 공모하는 자국 정부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인종주의의 문제로 바꿔치기하는 고전 수법이기 때문이다. 칸은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연대 입장을 지키고 있는 노동당 대표 제레미 코빈이 영국에 반유대주의를 부추기고 있다며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과 연계됐을 수 있다는 언급도 덧붙였다. 골드스미스가 자신에게 한 짓을 그대로 코빈에게 되돌려 준 셈이다.

칸에 대한 기사들을 하나씩 찾아봤다. 영국의 스타 좌파 저술가 오언 존스는 <가디언> 칼럼에서 그를 “진보 무슬림”이라고 불렀다. 동성 결혼 찬성 투표를 한 이력과 게이와 유대인 여성을 선거 운동원으로 기용한 사실이 그의 ‘클래스’로 언급됐다. 즉 칸이 진보적인 것은 성소수자·유대인·여성을 차별하는 흔한 이슬람 증상을 자가 치료하고 무슬림답지 않게 다양성을 존중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가 ‘진보 무슬림’의 의미를 보탰다. 이 신문은 벌써 1월에 칸에게 호의적인 기사를 냈다. 기업가들을 잘 설득하고 있다는 에두른 말로 노동당 후보의 친자본 성향을 칭찬한 것이다. 반면 골드스미스에 대해선 자유시장주의자라고 하기엔 “좀 복잡한 인물”이라고 익명 관계자의 입을 빌려 혹평했다. 자본가 관점에서 ‘진보’는 급진주의, 사회주의, 반전주의가 섞이지 않은 친자본 성향을 의미한다. 당명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실제로도 칸은 “역사상 가장 친기업적인 런던 시장”이 되겠다고 공공연히 밝혀 왔다. 그는 “기업과 진정한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것이 “런던 시청 의사 결정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공약했고, 런던에 억만장자가 많아 기쁘다는 너스레도 떨었다. 후보 시절 칸의 일정표는 기업가 단체들과의 만남으로 채워졌다. 한국의 전경련 격인 영국산업연맹(CBI)이 칸에게 보낸 당선 축전에는 약속대로 런던에 건설 붐을 일으킬지 지켜보겠단 글귀가 적혀 있었다.

칸의 실제 공약이 그랬다. 1년 새 집값이 평균 9.7% 상승한 전국적인 주택 위기 앞에 칸은 매년 8만 호의 신규 공급이라는 해법을 내놓았다. 칸의 공약집은 주택 정책이 “모든 런던 시민”에게 유익해야 함을 특히 강조했다. 여기서 “모든 런던 시민”은 때론 “당신, 당신의 가족, 당신의 친구”라는 모호한 말로, 때론 “기업가, 지역 주민, 자선 기관, 마을 조직”이라는 평등한 나열로 묘사된다.

그러나 대규모 건설에 따른 실속이 누구의 몫인지는 투자 유치 방식에서 가장 잘 드러나게 마련이다. 미사여구를 거둬 내면 칸의 투자 유치 계획은 기관 투자가와 기업을 우대하며 외국인의 매입을 제한하겠단 내용을 골자로 한다. 투자에 있어 칸에게 ‘런던 시민’은 다름 아닌 ‘국내 자본가’에 가까운 셈이다. 자본가들은 이 약속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칸은 사무실, 공항 활주로, 기타 교통 인프라의 신규 건설까지도 약속했다. 대기 환경 개선을 위해 교통량과 신규 건설을 축소하려는 최근 런던 시의 노력 속에서 이러한 통 큰 약속은 단순한 선거 전략의 의미를 넘어선다.

민간 중심으로 구상된 칸의 주택 공급 계획은 노동당 지도부의 공공 임대 주택 확대 방침과 어긋난다는 점에서 당의 미래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지난 9월 평당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노동당수가 된 코빈은 국영 투자 은행 설립, 에너지·철도 국영화, 대학 등록금 철폐를 주장하며 영국의 긴축 반대 전선을 이끌고 있다. 지금의 주택 위기 역시 과거 영국 복지 국가의 상징인 공공 임대 주택을 부흥해 돌파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국가 재강화”와 “전략적 국가”를 추진하려는 코빈의 부상은 자본가들에게 눈엣가시 그 자체다. 그러니 자본가들은 민간 건설업 부양을 약속하며 런던 시장 자리에 도전한 노동당 후보에게서 희망을 읽었을 법하다. 코빈과 각을 세울 인물이 당내 유력 정치인으로 떠오른다면 뒷일은 알아서 굴러가리란 계산과 함께 말이다.

그 기미는 칸의 당선 즉시 나타났다. 당선자 신분의 첫 언론 기고에서 칸은 코빈의 “편 가르기” 정치를 꾸짖었다. 자신처럼 “모든 배경의 사람”을 통합하려는 의지 없이는 다음 총선은 필패라고 경고하면서 그는 콕 집어 “운동권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정치를 주문했다. 코빈의 경제 노선에 그간 “비현실적”이란 정도로만 반응하던 칸이 당선을 기점으로 그에 대적할 더 큰 그림을 그리게 됐단 인상이다.

앞으로 칸은 자본과 제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를 본격화하게 될까?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곱씹어야 할 부분은 영국 기득권자에게 칸은 무슬림답지 않아 제격인 동시에 누구보다도 주류의 질서를 따르기 때문에 낙점된 ‘진보’라는 점이다. 국가의 역할을 심각하게 논하는 정치 지도자가 등장하자마자 반인종주의·다양성·통합의 정치에 호소하고 있는 세력에 ‘진보’의 이름을 쉽게 내줘선 안 되는 이유기도 하다.

끝으로 ‘진보’란 이름을 다시 생각한다. 반유대주의 혐의가 노동당을 휩쓸자 유대인 사회 일각에서도 이스라엘 비판은 인종주의가 아니며 반유대주의 규정이 코빈 흔들기에 이용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목소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나 코빈의 국영화 계획에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길 꺼려 온 가짜 좌파를 시험에 들게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진보’ 유대인·무슬림·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억압과 착취의 구조를 은폐하는 가짜 다양성 정치를 거부하면서 파시즘·점령·차별의 편에 저항한 빛나는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진보’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그 뜻이 변화한다. 때론 통합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역사에서 ‘진보’의 힘은 언제나 한쪽 편에 서길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오승은《자본론》 공부 모임과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워커스12호 201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