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는 언제나 비판을 받아왔지만, 최근까지 그 비판의 주된 출처는 우파가 아니라 좌파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가운데 세계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자 많은 좌파 인사들은 세계화의 이익이 불평등하게 분배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세계화가 부유한 나라에서는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가난한 나라들에는 금융 시장 개방, 국영 기업 민영화, 확장적 재정 정책의 포기 등 자유시장 정책을 강요하면서 그 대가로 미국의 기업과 은행만 이익을 봤다고 지적했다.
이는 새삼스러운 우려가 아니었다. 1841년,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는 자유무역이 영국의 세계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군가 위대한 정상에 올라서면, 자신이 올라온 사다리를 걷어차서 다른 이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한다.”
1990년대에 이르러,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같은 인사들은 미국이 그리는 세계 질서에서의 세계화가 개발도상국과 노동자에게 불리하고 미국에만 유리하다고 비판했다. 한편, 작가이자 행동주의자인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다국적 기업의 확장으로 인한 환경적, 문화적 피해를 강조했다.
좌파가 주도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해 세계 경제 관련 회의를 방해했고, 그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99년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였다. 이른바 ‘시애틀 전투(Battle of Seattle)’에서는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고, 이에 따라 당시 빌 클린턴(Bill Clinton) 대통령이 추진하던 새로운 세계 무역 라운드가 출범하지 못했다. 한동안 무역 노동조합, 환경운동가, 반자본주의자들이 연대한 이 대중 운동은 세계화의 흐름에 도전하는 듯 보였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점령하라(Occupy)’ 운동으로 전 세계에 확산했다.
1999년 ‘시애틀 전투(Battle of Seattle)’를 다룬 다큐멘터리로는 질 프리드버그(Jill Friedberg)와 릭 로울리(Rick Rowley)가 공동 연출한 《This is What Democracy Looks Like》(2000)이 있다.
미국 내에서는 세계화의 국내적 영향, 특히 미국 노동자들의 일자리 상실과 임금 하락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고, 이는 더 큰 보호무역주의 요구로 이어졌다. 초기에는 노동조합과 일부 민주당 정치인들이 이러한 비판을 이끌었지만, 점차 급진적 우파로까지 퍼졌고, 이들은 WTO 같은 국제기구들이 미국의 주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그 어떤 역할도 맡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시각에서는, 낮은 임금으로 미국 노동자들과 경쟁하는 외국 기업을 차단해야 번영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민도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맞은 지금, 이러한 비판은 급진적이고 심각하게 혼란을 초래하는 경제·사회 정책으로 변모했고, 그 중심에는 관세와 보호무역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이를 통해 트럼프는 세계 무대에서 과장된 행동을 펼치면서도, 미국 정치와 경제를 자세히 지켜봐 온 이들이 오래전부터 지적해온 사실 즉, 미국의 세계 지배 시대, 그리고 달러의 독보적인 지위가 빠르게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
사실 트럼프가 2017년 처음 취임하기 전부터 미국은 WTO 같은 국제 경제 기구에서의 지도적 역할에서 물러서기 시작했다. 지금 미국 경제의 가장 강력한 분야인 하이테크 산업은 중국의 압박을 받고 있다. GDP의 핵심 지표 하나로만 따지면 중국 경제는 이미 미국을 추월했다. 한편, 대부분의 미국 시민은 정체된 소득, 상승하는 물가, 그리고 더 불안정한 일자리에 직면해 있다.
과거 세기들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세계 지배 시대를 마쳤을 때 그 여파가 국경을 넘어 퍼졌다. 이번에는 세계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밀접히 통합되어 있고, 이를 대신할 단일 지배 세력도 부재하기 때문에, 그 여파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심각할 수 있다. 파괴적일 수도, 재앙적일 수도 있다.
왜 미국을 대신할 나라는 없는가
미국을 대신해 세계의 패권국가가 될 수 있는 실질적인 후보는 유럽연합(EU)과 중국밖에 없다. 하지만 어느 쪽도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 크다. 물론 2022년 당시 조 바이든(Joe Biden) 대통령이 발표한 국가안보전략에서는 중국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국제 질서를 재편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경제력, 외교력, 군사력, 기술력을 점점 갖춰가고 있는 유일한 경쟁자.”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지도자들이 국가 경제를 철저히 통제하고, 선거나 임기 제한 없이 권력을 유지하는 모습에 대해 거의 질투심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 적도 있다. 그러나 법적 견제 장치가 없는 일당 독재 체제는, 중국이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문화적·정치적 패권을 확보하기 어렵게 만드는 핵심 요인이기도 하다. 이는 세계 1위 국가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다. 비록 중국이 이미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말이다.
경제적으로도 중국은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제조업에서는 세계 선두이고, 급속히 첨단산업으로 진입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 수출국이지만, 소비 부문은 여전히 작고, 부동산 시장은 침체해 있으며, 비효율적인 국유기업들이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고, 금융 부문도 국가 통제로 인해 제한적이다. 또한 중국은 글로벌 기축통화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위안화를 국제통화로 만들기 위한 시도는 있었지만 제한적이었다.
2007년 나는 상하이로 취재 여행을 떠나 세계화의 영향을 조사했고, 그곳에서 뉴욕이나 파리에 견줄 만한 번화한 해안 도시들과, 상대적으로 가난한 내륙 농촌 지역 사이의 극심한 격차를 목격했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성장률이 둔화한 가운데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조차 안정적이고 고소득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미국을 대신할 유일한 다른 후보인 유럽은 정치적으로 깊이 분열해 있다. 동부와 남부의 규모가 작고 약한 국가들은 세계화의 혜택에 더 회의적이며, 이민 문제나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사안에 대한 견해 차이도 점점 벌어지고 있다. 모든 회원국 간의 정책 합의를 끌어내는 데 어려움이 많고, 유럽을 대표해 말할 주체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해, 현재의 EU 구조로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주도하고 집행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EU의 금융 시스템 역시 미국에 미치지 못한다. 유로라는 공동 통화를 유럽중앙은행(ECB)이 관리하고 있지만, 금융 시스템은 국가별로 분절되어 있다. 은행은 각국이 개별적으로 규제하고 있고, 정부채권도 각국이 자체적으로 발행한다(최근에야 일부 유로채권이 발행되었다.) 이런 구조는 유로가 달러를 대신해 가치 저장 수단이 되기 어렵게 만들고, 외국인이 유로를 보유할 유인도 줄어든다).
미래에 미국이 세계적 리더십을 되찾을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트럼프의 감세 정책은 동시에 미국의 정부 부채를 사상 최고로 늘렸고, 현재 미국 부채는 38조 달러, GDP 대비 120%에 달한다. 이처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진 적자는 세계 경제의 안정성뿐 아니라 미국의 재정 유지 능력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미국 국가 부채, 사상 최고치 경신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이 한때 지배했던 국제 금융 기구들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이 기구들은 기존 세계 경제 질서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지만, 이제는 외면당하고 있다. 최근 뉴욕타임스에서 미국 무역대표부의 제이미슨 그리어(Jamieson Greer)는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WTO가 지배하고, 명목상 경제 효율성을 추구하며, 166개국의 무역 정책을 조율하는 이 익명의 세계 질서는 지속 가능하지도, 유지 가능하지도 않다. 미국은 이 체제를 통해 산업 일자리와 경제적 안정성을 잃었고, 최대의 수혜자는 중국이었다.”
미국이 IMF에서 당장 탈퇴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막대한 무역흑자를 문제 삼아 공개 비판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후 변화에 대한 관심은 철회했다. 그리어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국가안보적 요구를, 국제적 합의라는 최저 공약수 아래 종속시켜 왔다.”
글로벌 1위가 없는 세계
다가올 위험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지난 세기 초로 돌아가 글로벌 패권국이 존재하지 않던 마지막 시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체결로 공식 종결되었을 당시, 국제 경제 질서는 사실상 붕괴한 상태였다. 한 세기 동안 세계를 이끌었던 영국은 더 이상 자국 주도의 세계화 체제를 유지할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역량이 없었다.
막대한 전비로 인해 영국 정부는 엄청난 부채를 떠안았고, 그 결과 공공 지출을 대폭 삭감해야 했다. 1931년에는 파운드화가 금본위제를 완전히 이탈하는 ‘파운드 위기’가 발생했고, 영국은 실업자 수당까지 줄이는 국제 금융가들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결국 통화를 평가절하했다. 이는 영국이 세계 경제 질서의 주도권을 상실했다는 결정적인 신호였다.
1930년대는 영국과 여러 국가에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동요가 깊어지던 시기였다. 1936년, 영국 북동부 자로우(Jarrow) 지역의 조선소 폐쇄로 실업률이 70%에 달하자, 실직자들은 정치와 무관한 ‘배고픔 행진(hunger march)’을 조직해 런던까지 200마일 넘게 행진했다. ‘자로우 성전(Jarrow crusade)’이라 불린 이 행진은, 200명 이상의 남성이 일요일 차림을 하고 평화롭게 행진하며 전국적인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런던에 도착했을 때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 총리는 청원을 무시했고, 이들은 2주 동안 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업 수당 삭감 통보를 받았다.
1936년 10월, 런던으로 향하던 자로우(Jarrow) 행진자들. 출처: 내셔널 미디어 뮤지엄(National Media Museum)/위키미디어(Wikimedia)
한편, 유럽 전체도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독일 정부는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합의된 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프랑스군은 독일의 산업 중심지 루르(Ruhr)를 점령했다. 이에 독일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고, 정부는 이를 지지했다. 이 투쟁은 독일 내 초인플레이션을 불러왔고, 1923년 11월에는 빵 한 덩이에 2천억 마르크가 필요했다. 독일 중산층의 저축과 연금은 사라졌고, 같은 달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뮌헨에서 ‘맥주홀 반란(Beer Hall Putsch)’이라 불리는 정변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반면, 대서양 건너 미국은 전후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주가는 급등했으며 자동차 산업 등 신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연합국의 전쟁을 금융으로 지원하며 세계 최강 경제국으로 부상했지만, 미국은 글로벌 경제 리더십을 맡을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국제연맹 계획을 저지했고, 유럽 문제에 대한 개입을 거부하며 고립주의로 돌아섰다. 미국은 연합국의 전쟁 부채 탕감을 거부했고, 결국 연합국은 채무 상환을 포기했다. 이에 미국 의회는 미국 은행들이 이들 국가에 대출하는 것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다 1929년, 미국의 호황기 ‘재즈 시대(jazz age)’는 주식 시장 붕괴와 함께 끝났다. 주식 가치는 절반으로 떨어졌고, 최대 제조업체 포드(Ford)는 1년간 공장을 닫고 전 직원을 해고했다. 실업률이 25%에 달하면서 도시 곳곳에 무료 급식소에 줄이 길게 늘어섰고, 퇴거당한 이들은 센트럴파크(Central Park) 등지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으며, 이 지역은 당시 무능한 대통령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의 이름을 따 ‘후버빌(Hooverville)’이라 불렸다.
대공황 시기, 뉴욕 센트럴파크(Central Park)에 형성된 후버빌(Hooverville). 출처: Hmalcolm03/Wikimedia, CC BY-NC-ND
농촌에서는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생계가 막힌 농부들이 무장하여 식품·우유 운송차를 멈추고 물품을 파괴했다. 공급을 줄여 가격을 올리려는 시도였지만 소용없었다. 1933년 3월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취임할 당시, 미국 은행 시스템은 완전히 마비되었고, 누구도 예금을 찾을 수 없었다.
대공황에 집중한 미국은 국제 경제 협력 시도에도 무관심했다. 루스벨트는 1933년 세계 통화 안정을 위한 런던 회의에서 사전 통보 없이 철수했고, "소위 국제 은행가들의 낡은 신앙(fetish)"을 맹비난했다.
미국이 영국을 따라 금본위제를 포기하자, 통화 전쟁이 심화했고 유럽 경제는 더 큰 타격을 입었다. 각국은 보호무역과 무역 전쟁이라는 중상주의 정책으로 회귀했고, 세계 무역은 급감했다.
1931년 오스트리아의 대형 은행 크레디트 안슈탈트(Credit-Anstalt)가 붕괴하자 중앙유럽 전체로 여파가 퍼졌다. 독일에서는 실업률이 급증했고, 중도 정당들이 사라지며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 간의 무장 충돌이 빈번해졌다. 나치가 집권하자, 독일은 자급자족 정책(autarky)을 도입했고, 서방과의 경제 관계를 단절하며 군사력을 강화했다.
서방의 경제 경쟁과 갈등은 독일 파시즘의 부상을 촉진했다. 히틀러는 영국 제국을 동경했고, 경제·군사 패권국이 되려는 야망 속에서 유럽 자원을 정복하고 수탈하는 제국을 세우려 했다.
1923년, 극심한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독일 시민들이 베를린의 라이히스방크(Reichsbank) 앞에서 돈을 찾기 위해 큰 가방을 들고 줄을 서고 있다. 출처: Bundesarchiv/Wikimedia, CC BY-NC-SA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전간기와 놀라운 유사성을 목격하고 있다. 트럼프는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지원한 국가들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며, 달러 평가절하를 통한 통화 전쟁과 보호무역 장벽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1920년대 미국은 우생학 논리를 내세워 북유럽 외의 이민을 극도로 제한했다. 지금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트럼프는 세계 주식이나 채권 시장 붕괴로 발생할 수 있는 파급 효과에 대해서도 별다른 우려를 보이지 않는다. 과거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이 가진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불안정한 세계에서 이런 태도는 매우 위험한 신호다.
미국은 지난 금융위기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오늘날 다시 국제 질서의 규칙이 무너지고 있다. 트럼프의 후임자가 그의 접근 방식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더라도, 미국이 세계화의 혜택에 회의적인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은 크다. 글로벌 경제 규칙이나 협력을 지지하는 흐름은 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회의론은 유럽과 남미의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 속에서도 확산하고 있다. 이 정당들 다수는 트럼프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소득 불평등, 성장 둔화, 이민 문제에 대한 정치권의 무능이 이들을 더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조건들이 겹친 상태에서 글로벌 경제 위기가 다시 오면, 그 파급력은 더욱 클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도 세계는 붕괴 직전까지 갔고, 당시보다 오늘날의 글로벌 금융 시스템은 훨씬 더 거대하고 복잡하다.
당시 위기의 규모는 전례 없었지만, 미국과 영국의 핵심 정부 관계자들은 과감하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나는 워싱턴 특파원으로서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가 파산하여 세계 금융 시스템이 마비된 지 3일 뒤,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 청문회에 참석했다. 당시 정부의 대응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위원장 바니 프랭크(Barney Frank)의 얼굴에는 충격이 역력했다. 그는 당시 미국 재무장관 행크 폴슨(Hank Paulson)과 연준(Federal Reserve) 의장 벤 버냉키(Ben Bernanke)에게 사태를 안정시키려면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버냉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선 1조 달러부터 시작하자. 필요하다면 연준 자산에서 2조 달러 더 꺼낼 수 있다.”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 파산 사태를 다룬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작품
곧이어 미국 의회는 7천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패키지를 승인했다. 이 개입이 없었다면, 글로벌 경제는 훨씬 더 큰 충격을 겪었을 수 있으며, 1930년대 수준의 대공황이 재현되었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적으로, 각국 정부는 은행 시스템의 지급 능력을 보장하기 위해 총 11조 달러를 투입했다. 영국 정부는 자국 연간 GDP에 해당하는 금액을 동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09년 4월 런던 G20 정상회의에서 재정 위기에 처한 국가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1.1조 달러의 신규 기금을 조성했다.
G20 정상들은 또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은행 규제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강력한 글로벌 규제 기준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나는 이 회의를 취재하던 중, 세계 각국이 드디어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려는 듯한 희망과 흥분이 넘쳐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고든 브라운(Gordon Brown)은 이 회의를 조직한 주역으로서 일시적으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그 무렵, 미국 연준은 세계 주요 중앙은행에 약 6천억 달러 상당의 통화 스와프(currency swap)를 비공식적으로 제공하여 이들이 자국 은행 시스템을 구제할 수 있도록 도왔다. 영국은행(Bank of England)도 비밀리에 자국 은행들에 1천억 파운드를 대출하여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았다. 그럼에도 결국 주요 은행 4곳 중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 현재의 NatWest)와 로이즈(Lloyds)는 각각 부분 또는 전체 국유화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은행 구제 조치는 금융 시스템 안정을 위해 필수적이었지만, 위기의 희생자들 대부분(예컨대, 모기지보다 집값이 낮아진 1,200만 가구, 또는 금융위기 이후 18개월간 경제적 고통을 겪은 40%의 미국 가구)에게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개발도상국에 미친 여파는 훨씬 더 컸다.
위기가 시작된 몇 달 후, 나는 아프리카의 잠비아(Zambia)를 취재했다. 이 나라는 외화를 거의 전적으로 구리에 의존하고 있었다. 잠비아 북부 구리벨트 지역의 루안샤 광산(Luanshya mine)을 방문했을 때, 건설과 자동차 산업의 침체로 구리 수요가 급감하면서 광산들이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이곳 노동자들은 잠비아에서 드물게 고소득을 받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가족이 있는 루사카(Lusaka)로 돌아가 아무런 급여도 받지 못한 채 친척들과 함께 살아야 했다.
잠비아 정부는 광산 이익을 재원으로 계획했던 빈곤 퇴치 정책을 취소해야 했다. 수출 붕괴로 인해 자국 통화 가치도 급락했고, 대부분의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던 이 나라는 식료품 가격 급등으로 극빈층이 큰 타격을 입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는 곧 잠비아 루안샤(Luanshya) 구리 광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출처: Nerin Engineering Co., CC BY-SA
나는 루사카 근처의 꽃 농장도 방문했다. 이곳에서 네덜란드 출신 부부 안젤리크(Angelique)와 바체 엘싱가(Watze Elsinga)는 10년 넘게 장미를 재배해 수출하고 있었고, 200명 넘는 직원에게 주택과 교육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렌타인 시즌을 앞두고 장미 수출 시장이 붕괴하자, 은행인 바클레이스 남아프리카(Barclays South Africa)는 모든 대출을 즉시 상환하라고 요구했고, 이들은 농장을 팔고 직원을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IMF와 세계은행의 39억 달러 구제금융이 잠비아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투입되었다.
만약 새로운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친다면, 트럼프 행정부(또는 그를 이은 행정부)가 개발도상국의 고통에 공감하며 이들을 도울 가능성은 매우 낮다. 연준이 외국 중앙은행에 거액을 대출해 줄 가능성도 낮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정치적으로 트럼프에 우호적인 국가,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 정도일 것이다. 트럼프가 다른 나라들과 협력해 세계 경제를 구제하기 위한 1조 달러 규모의 글로벌 패키지를 구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진짜 우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무모한 정책과 금융시장 규제의 약화가 다음 위기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 국채 시장이 무너진다면?
경제사학자들은 금융위기가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현상이며, 1970년대 ‘초세계화(hyper-globalisation)’ 이후 그 빈도가 더 짧아지고 있다고 지적해 왔다.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 부채위기, 1990년대 아시아 외환위기, 2000년대 초 닷컴 버블 붕괴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오늘날 가장 큰 위험은 미국 국채(Treasury bonds) 시장의 붕괴다. 이 시장은 세계 금융 시스템의 핵심이며, 전 세계 금융 거래의 70%에 관여한다.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30조 달러가 넘는 규모의 미국 국채를 연준(Fed)이 보증하는 ‘안전한 자산’으로 오랫동안 신뢰해 왔다.
그러나 규제받지 않는 ‘그림자 금융 시스템(shadow banking system)’이 국채 시장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위험이 커지고 있다. 이 부문은 현재 전통적인 글로벌 은행보다 더 큰 규모이며, 사모펀드, 헤지펀드, 벤처캐피탈, 연기금 등은 규제를 거의 받지 않으며, 은행처럼 지급준비금 보유 의무도 없다.
이미 국채 시장 불안은 전 세계 금융시장에 충격을 주고 있고, 일부에서는 이로 인해 2008년과 유사한 은행위기가 재발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특히 그림자 금융 기관들이 고레버리지 거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 국채는 세계 경제 안정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영상 출처: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를 세금 감면으로 더 키우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계획도 투자자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미국의 국가 부채는 2025년 GDP 대비 120%에서 2035년에는 134%에 이를 전망이다. 투자자들이 국채 매입을 거부하게 되면, 국채 가치가 급락하고 미국 및 전 세계의 금리는 급등할 수 있다.
영란은행 총재 앤드루 베일리(Andrew Bailey)는 최근 “2008년 금융위기의 불길한 메아리”를 느낀다고 경고했고, IMF 총재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Kristalina Georgieva)도 민간 신용시장 붕괴 우려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다”고 말했다.
더 나쁜 상황은, 국채 시장 문제가 달러화 가치 급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세계 기축통화가 더 이상 안전한 가치 저장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각국 정부가 보유한 미국 국채를 대거 매도할 수 있다.
달러 약세는 미국 소비자에게는 수입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겠지만, 미국 수출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는 트럼프가 차기 연준 의장으로 지명하려는 경제자문위원장 스티븐 마이런(Stephen Miran)이 옹호하는 시나리오다.
실제 사례로는, 영국 역사상 가장 단명한 총리 리즈 트러스(Liz Truss)가 2022년 예산안에서 대규모 감세를 예고하면서 국채 금리가 급등하고, ‘길트(gilt)’ 가치가 급락했던 사태가 있다. 이에 영국중앙은행은 600억 파운드 긴급 구제 자금을 투입해 주요 연기금의 붕괴를 막아야 했다.
하지만 미국 국채 시장이 붕괴할 경우, 미국 정부는 이를 구제할 능력도 의지도 없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새로운 금융 혼돈의 시대
더 우려스러운 것은 미국 주식 시장의 붕괴 가능성이다. 현재 시장 가치는 역사적으로 과대평가되어 있다.
최근의 상승은 거의 전적으로 ‘매그니피센트 세븐(Magnificent Seven)’이라는 7개 대형 기술주에 의한 것이며, 이들이 전체 시장 가치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만약 이들의 인공지능(AI)에 대한 베팅이 기대만큼 수익을 내지 못하거나, 중국의 AI가 더 앞서게 되면, 2000~02년 닷컴 붕괴와 유사한 급락이 나타날 수 있다.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 제이미 다이먼(Jamie Dimon)은 “다른 전문가들보다 훨씬 더 우려하고 있다”고 밝히며, 향후 6개월에서 2년 사이에 심각한 시장 조정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거대 기술 기업들의 주가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은, 이들이 경쟁사를 인수하는 데 유리한 수단으로 주식을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실제로 구글(Google)과 메타(Meta, 페이스북)은 높은 시가총액을 무기로 유튜브(YouTube), 왓츠앱(WhatsApp), 인스타그램(Instagram), 딥마인드(DeepMind) 등 주요 자산과 잠재적 경쟁사를 잇달아 인수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독점적 구조는 장기적으로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반복해서 입증되었다.
오늘날 비즈니스와 금융 세계는 어느 때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결과 지난 반세기 동안 금융위기의 발생 빈도는 높아졌을 뿐 아니라, 위기 하나하나가 서로 더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그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글로벌 은행 위기가 촉발한 주가 폭락은 약한 통화 가치의 붕괴, 개발도상국의 부채위기로 이어졌고, 결국 몇 년간 지속된 세계적 경기침체로 귀결되었다.
IMF가 최근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경고로 이 상황을 요약했다.
“자산 가치의 과도한 상승, 국가 채권 시장의 압박, 비은행 금융기관의 역할 확대는 글로벌 금융시스템에 ‘높은 수준의’ 안정성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 깊은 유동성을 갖춘 외환 시장조차도 거시·금융 불확실성에 취약한 상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세계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에 대해 경고했다. 영상 출처: CGTN 아메리카(CGTN America)
나는 지금 우리가 지속적인 금융 혼란의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고 본다. 이 시대는, 세계화의 종말이 초래한 씨앗들과 그것에 대한 트럼프식 대응이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세계 경제·정치 질서를 파괴하는 국면이다.
트럼프가 도입한 높고 변덕스러운 관세는 특히 중국을 겨냥했고, 그 결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자체가 어려워졌다. 더 심각한 갈등은, 하이테크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같은 핵심 전략 자원의 통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이미 희토류 수출을 금지했고, 이에 미국은 100% 관세 부과를 위협하며 맞섰다. 심지어 미개발 자원이 풍부한 그린란드(Greenland)를 차지하려는 희망도 내비쳤다.
AI에 필요한 반도체 핵심 부품 생산에 쓰이는 희토류를 둘러싼 이 갈등은, 4조 달러 이상의 시가총액을 기록한 엔비디아(Nvidia) 같은 고성장 기술주들의 시장 가치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
핵심 자원의 통제권을 놓고 벌어지는 싸움은 더 격화될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무역 전쟁이 진짜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이는 과거 중상주의 시대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기도 하다. 최근 및 현재의 지역 분쟁들, 예컨대 이라크 전쟁(쿠웨이트 유전 장악 목적)이나 수단 내전(금광 통제권을 둘러싼 충돌) 역시 경제적 이해관계가 뿌리다.
지난 400년간의 세계화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글로벌 초강대국의 존재가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일정 수준의 경제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해왔다는 점이다. 부정적 측면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반대로, 역사가 가르쳐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이렇다.
각국이 핵심 자원을 확보하려 싸우고, 경쟁국에 그 자원을 넘기지 않으려는 중상주의적 접근으로 회귀할 경우, 우리는 끊임없는 갈등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오늘날 세계에는 1만 기 이상의 핵무기가 존재한다. 신뢰와 확실성이 무너진 세계에서, 사소한 오판 하나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도전은 실로 막대하다. 그리고 현재 국제기구들의 무력함, 대부분 정부의 빈약한 비전, 시민들의 소외감은 희망적인 신호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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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시퍼레스(Steve Schifferes)는 런던시립대학교 세인트조지 캠퍼스 시티 정치경제연구센터 명예연구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