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즈 오브 인디아>(Times of India)의 11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유럽 국가에게 이민을 제한하라고 요청했다. 그 이유는 “서구 문명(Western Civilization)”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제3세계 사람들에게는 이 ‘서구 문명’이라는 표현 자체가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특히 그것이 마치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인 것처럼 사용될 때는 더욱 그렇다. 수 세기 동안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저질러 온 만행은 너무도 끔찍해서, 그런 행위를 두고 ‘문명’이라 부르는 것은 그야말로 기괴하게 들린다.
영국 식민주의는 인도에서 수많은 농민에게 세금을 짜내기 위해 기근을 유발해 수백만 명을 죽였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왕은 과거 콩고라 불린 지역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잔혹함을 저질렀다. 독일은 나미비아에서 집단 학살을 자행하며 전체 부족들을 말살했다. 이 모든 것은 탐욕 외에 어떤 명분도 없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참혹한 폭력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한 기자가 간디에게 “서구 문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냉소적으로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답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 모든 잔혹함을 차치하고, 서구가 이룩한 물질적 발전에만 초점을 맞춰 보자. 사실 이 물질적 발전조차도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제3세계와 맺어온 착취적 관계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제3세계는 오늘날 자국민들이 탈출을 갈망할 정도로 황폐해졌다. 서구의 번영은 결코 독립적이고 순수하게 근면함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민자들이 떠나오는 국가들의 경제를 철저히 파괴하는 과정에서 성취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점은, 서구 제국주의가 이민 유입을 막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민자들의 고향 나라에서 개발이 이루어져 이주가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들은 이를 막기 위해 무력 개입조차 하려고 한다.
물론 나의 주장은 과장이라며 일축될 수도 있다. 사실 서구 경제는 혁신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크게 높였고, 이것이 실질임금과 소득 증가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놀라운 혁신이 서구를 구별 짓는 요소이며, 제3세계에는 그것이 결여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이 점이 세계의 양극화된 경제 성과를 낳았고, 이민을 초래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혁신에 대해 두 가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혁신은 일반적으로 해당 상품의 시장이 확장될 것으로 기대될 때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 침체기에는 혁신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 혁신 자체가 실질임금을 올리지는 않는다. 실질임금은 독립적인 요인들로 인해 노동시장이 긴장 상태일 때만 오른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서구 상품의 시장 확장은 제3세계 시장을 강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도, 식민지 시장이 없었다면 지속될 수 없었다. 이 시장에서는 지역 수공업이 새로운 기계 제품으로 대체되었다. 서구의 혁신성은 결국 식민지 경제의 탈산업화와 노동력 잉여를 낳았다.
혁신이 도입된 국가 내부에서도 기술 진보로 인해 노동 잉여가 발생했지만, 캐나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 온대 기후의 이주 가능 지역으로 노동자들이 대거 이주함으로써 이러한 잉여가 줄어들었다. 이주한 사람들은 그곳의 토착 부족들을 학살하고 쫓아낸 후, 그들의 땅을 경작했다. 이에 따라 노동시장이 빠듯해졌고, 혁신으로 생산성이 올라가는 동시에 실질임금도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식민지 및 반식민지 지역에서 발생한 노동력 잉여는 그런 식으로 이주할 수 없었다. 이들은 열대 및 아열대 지역에 갇혀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는 엄격한 이민법 때문에 저임금 상태에 묶여 있다. 만약 본국의 자본이 이들의 저임금을 활용해 세계시장을 겨냥한 상품을 생산하러 들어갔다면, 임금 격차는 줄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저임금이었지만, 본국 자본은 1차 상품 부문을 제외하고는 이 지역 경제에 진입하지 않았다. 저임금 노동력과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생산된 현지 제품들은, 고율의 관세 장벽 때문에 온대 국가의 시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서구의 혁신성은 이처럼 세계경제가 계층화된 구조 속에서만 물질적 번영으로 이어졌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자본주의의 확산 또한 이 계층화 구조 안에서 이루어졌다. 유럽의 노동력이 북미,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 온대 지역으로 이주함과 동시에, 유럽 자본도 함께 이동했다. 그런데 이 자본은 어디서 조달되었을까? 바로 열대 및 아열대 식민지들과 반식민지들에서 강제로 수탈한 외화수익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잉여의 유출(drains of surplus)”로 알려진 과정이다.
출처: Peter Chirkov, unsplash
19세기 전체에 걸쳐 영국에서 유럽 본토, 캐나다, 미국으로 자본주의가 확산한 방식은 이러했다. 영국은 이들 지역의 상품 수입에 대해 자국 시장을 개방했으며, 동시에 이들 지역으로 자본을 수출했다. 즉, 영국은 이들 지역에 대해 경상수지와 자본수지 모두 적자를 기록했다. 1910년 기준으로, 영국은 이 세 지역에 대해 총 1억 2천만 파운드의 적자를 기록했는데, 경제사학자 S.B. 솔(S.B. Saul)에 따르면 이 중 절반은 인도에 전가되었다. 영국은 인도가 전 세계를 상대로 올린 수출 흑자 전액을 강탈했고, 인도가 영국에서 수입한 탈산업화된 상품의 비용도 부담시켰다. 유럽 본토와 미국만 보더라도, 영국은 9,500만 파운드의 적자를 기록했는데, 그중 거의 3분의 2는 인도의 희생으로 메꿨다.
이렇듯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는 철저하게 분절된 세계 체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서구의 물질적 번영을 지탱한 혁신성조차도 이 구조 속에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서구가 번영하고 제3세계가 정체되거나 몰락한 원인은 ‘혁신’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분절화(segmentation)라는 사실에 있다.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처럼 혁신이 물질적 번영의 원인이라고 보는 이론조차, 모든 노동자가 그 혜택을 누린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일부 지역의 노동자들만 그 혜택을 누리고, 다른 지역의 노동자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혁신 자체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한 지역을 발전 과정에서 배제한 구조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분절화의 본질은 바로, 한 지역의 상품에 대해 관세 장벽을 부과하면서 동시에 그 지역에는 자국 상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금지하고, 이 지역의 생산된 경제 잉여 일부를 무상으로 획득하는 데 있었다.
이제 식민주의 시대는 끝났고, 오늘날 자본은 제3세계에 들어와 저임금 노동력과 신기술을 활용해 세계시장용 상품을 생산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제3세계의 빈곤은 해소되지 않는 걸까?
다시 강조하지만, 혁신 자체는 실질임금을 올리지 않는다. 슘페터식 이론들은 자본주의가 자동으로 노동 잉여를 흡수해 완전고용으로 나아간다고 가정하지만, 이는 틀렸다. 오늘날 제3세계에 확산하고 있는 기술 진보(그것이 본국 자본이든 현지 자본이든)는 대체로 노동절약형이다. 이에 따라 노동력 잉여가 줄어들지 않고, 따라서 빈곤의 규모 역시 줄어들지 않는다. 제3세계 노동자들은 여전히 어느 온대 지역으로도 이주할 수 없다.
앞으로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킬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도널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인데, 이는 미국의 실업을 제3세계로 전가하려는 시도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인공지능(AI)이 도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출처] Apropos “Western Civilisation” | Peoples Democracy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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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