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와 트로츠키 해석을 둘러싼 몇 가지 보충

알렉스 캘리니코스에게 보내는 짧은 답변

트로츠키(왼쪽)와 레닌(가운데), 카메네프(오른쪽). 출처: 위키피디아

몇 해 전 레셰크 코와코프스키(Leszek Kołakowski)의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Main Currents of Marxism)을 다시 읽다가, 나는 그가 트로츠키를 가차 없이 묘사한 대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코와코프스키의 평가는 신랄했다. 그러나 그가 마르크스 이후의 모든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를 똑같이 혹평한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을 집필한 1968년 이후의 시기에도 그는 젊은 시절의 공산주의에서 벗어나, 훗날 보수주의자이자 종교적 근본주의자가 되기까지의 과도기에 있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 다룬 많은 사상가들, 예컨대 루카치(Lukács), 그람시(Gramsci), 플레하노프(Plekhanov), 심지어 레닌(Lenin)에 대한 그의 평가는 훨씬 균형 잡혀 있으며, 종종 깊은 존경심마저 담고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에 대해서만큼은 달랐다. 코와코프스키는 그를 허세를 부리는 인물이라고 규정했고, 후대의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썼다. “트로츠키주의 이론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있었던 것은 오직 자신의 지위를 되찾으려 필사적으로 애쓴 실각한 지도자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력이 헛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자신이 기이한 타락이라고 여긴 현실에 대해서도 결코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3, 219)

나는 왜 코와코프스키가 이토록 혹독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 의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20218월에 쓴 글에서 제시했고, 어제 그 글을 다시 올렸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한 독자가 그 글을 좋게 평가하며 언급해 주었고, 덕분에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참고로 그 글은 ⟪자본주의 아래의 세계⟫(World Under Capitalism)에는 실리지 않았다. 나는 서평은 책에 싣지 않기로 했고, 그 글도 일종의 서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매우 존경하는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는 오늘 내 글을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짧은 글은 캘리니코스와 다른 독자들에게, 그들이 코와코프스키의 평가와 나의 해석에서 잘못됐다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 내 생각을 설명하려는 시도다.

나는 코와코프스키가 왜 그렇게까지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트로츠키에게는 분명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원래 글에서 열거했듯이 그는 뛰어난 지성, 용기, 사람과 군대, 외교 협상을 이끄는 능력(1905년 최초의 소비에트, 붉은 군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 탁월한 문장력, 폭넓은 교양을 갖춘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장점은 자신이 존경하는 누군가의 2인자 역할을 맡았을 때 가장 빛났다. '누군가'는 레닌이었다. 내 견해로는(이 역시 새로운 주장은 아니지만), 트로츠키는 레닌이 사망한 뒤 원칙적으로 자신의 것이 되었어야 할 최고 지도자(1인자)의 자리를 결코 진심으로 원하지 않았다. 당시 볼셰비키 회의실에는 으레 레닌과 트로츠키 두 사람의 초상화만 걸려 있었다는 사실만 떠올려도 충분하다. 당 역시 흔히 '레닌과 트로츠키의 당'이라고 불렸다.

레닌이 있을 때 트로츠키의 뛰어난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러나 레닌이 사라지자 그의 약점이 드러났다. 오만함, 교육 수준이 낮은 볼셰비키 간부들에 대한 조바심, 그리고 거의 모든 동시대인이 지적한 특유의 고압적인 태도가 그것이다. 그 결과 레닌 사후 불과 넉 달 뒤인 19245월 중앙위원회 투표에서 트로츠키는 두 번째로 적은 표를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당과의 갈등을 이어갔다. 그는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장(소브나르콤, Sovnarkom)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 이후 소련 공산당(Communist Party of the USSR) 내부에서 분파를 만들었지만, 그 활동은 미온적이었고 효과도 크지 않았다. 이러한 투쟁은 1927년까지 계속됐다.

191710월혁명 10주년이 되던 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마지막으로 공개적인 집회를 열어 독자적인 기념행사를 조직했다. 그러나 1년 뒤 그들 대부분은 감옥에 갇혔다. 바로 그 무렵 스탈린은 돌연 노선을 뒤집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산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원래 트로츠키와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가 주장했지만, 스탈린 자신은 한때 반대했던 정책이었다.

내가 왜 이런 세부적인 이야기까지 꺼내는가? 그것은 훗날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됐는지를 이해하는 데 이런 사실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트로츠키 자신은 물론이고(그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가족 전체를 희생시켰다), 운동의 수많은 구성원 역시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원죄'는 권력을 잡을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책임지는 일을 주저했다는 데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운동에는 언제나 일종의 패배주의의 씨앗이 있었다. 토론하고, 논쟁하고, 훈계하고, 프랑스어 표현대로 '머리카락을 네 갈래로 쪼갤 정도로'(couper les cheveux en quatre) 사소한 문제까지 따지는 일은 좋아했지만,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고 통치하는 일에는 나서지 않았다. 이는 구성원 개개인의 뛰어난 자질과는 별개의 문제다. 나는 이전에도 이런 점을 보여주는 세 가지 사례를 다룬 적이 있다. 첫째는 트로츠키 자신과 그의 뛰어난 저서 ⟪배반당한 혁명⟫(The Revolution Betrayed)(여기에서 서평을 썼다), 둘째는 스탈린 체제를 포함해 거의 모든 정권에서 투옥당했던 인물이자 아름답고도 암울한 일기를 남긴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여기에서 서평을 썼다), 셋째는 따뜻한 인간성과 용기, 해박한 지식을 갖춘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 왕판시(Wang Fan-hsi)(그의 회고록 역시 여기에서 서평을 썼다). 이 밖에도 비슷하게 뛰어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얼마든지 더 열거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은 다섯 대륙으로 퍼졌음에도 어느 곳에서도 권력을 장악하는 데 근접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이 내 주장인데, 그들은 권력을 잡고 싶어 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공업지대에서 상당한 기반을 갖고 있었지만, 농민 반란을 강조한 마오쩌둥의 노선에 밀려 주변부로 밀려났다. 어쩌면 트로츠키주의가 실제로 의미 있는 정치적 역할을 했던 거의 유일한 사례는 스페인 내전이었을 것이다. 만약 공화파가 승리했다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을 상대로 정부 내 영향력을 놓고 진지하게 경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트로츠키주의 정당들이 권력 장악을 진지하게 추구하지 않았다는 내 주장이 충분히 반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그런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고,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내 인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통치의 책임을 떠맡기를 주저하고,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 태도가 처음에는 트로츠키에게서 나타났고, 이후에는 트로츠키 개인이나 트로츠키주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공산주의 운동의 다른 흐름으로까지 스며들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실제로 정권을 잡기보다는 야당으로 남는 편을 더 편안하게 여겼다는 주장에는 그리 큰 논란이 없을 것이다. 1976년 총선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은 35%의 득표율을 기록해 기독교민주당에 불과 4%포인트 뒤진 제2당이 되었다. 물론 당시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국에 대한 '제한된 주권'이라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투쟁적인 '레닌주의' 정당이었다면 권력 장악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공산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68년의 프랑스 공산당(PCF)도 마찬가지였다.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과 레몽 아롱(Raymond Aron)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공산당이 결정적인 승부수를 던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공산당은 산업 노동계급을 장악하고 있었고, 학생운동은 부르주아 블록을 완전히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정반대에 서 있던 드골과 아롱은 곧 프랑스 공산당이 사실은 질서 유지의 정당, 체제를 뒤흔들지 않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산당은 노동자들을 위해 일정한 양보를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실제로 그렇게 했다), 결국에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쪽에 찬성표를 던지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노동운동 내부의 많은 사람들은 어느 시점부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 혹은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그러한 신념이 요구하는 책임과 행동으로부터 물러섰다.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를 통치할 기회가 말 그대로 은쟁반 위에 올려진 채 주어졌음에도 그 책임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거부한 인물이 바로 레프 트로츠키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 결정이 스탈린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

[출처More on Trotsky and interpretation of Trotsky

[번역] 이꽃맘

덧붙이는 말

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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