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3월 베이징에서 칭화대학(淸華大學)의 왕후이(汪晖) 교수와 만나 대화를 나눌 특권을 누렸다. 이 편집된 대담록은 <이퀘이터 매거진>(Equator Magazine)과의 협력으로 출판되었고(그곳 편집팀에 깊이 감사한다), 나의 친구 카이저 궈(Kaiser Kuo)가 서문을 썼다.
<카이저 궈(Kaiser Kuo)의 서문>
3월 말 베이징에 앉아 애덤 투즈와 왕후이가 대화에 빠져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내 지적 삶을 형성해 온 두 개의 주요 흐름이 갑자기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을 목격하는 경험이었다. 이들은 매우 다른 전통에서 나온 사상가들이고, 서로 다른 정전과 서로 다른 논증 습관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서는 즉각적이면서 점점 깊어지는 상호 인식이 형성되었다. 나는 이런 장면을 직접 목격할 기회를 얻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투즈는 이퀘이터 독자들에게 이미 익숙한 인물일 것이다(주: 여기서부터는 카이저가 나에 대해 쓰고 있다). 그는 경제사학자이며, 오늘날 가장 설득력 있는 공적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에너지 전환에 관한 책 원고를 막 제출했으며, 그 책에서 중국은 필연적으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는 중국어 공부에도 진지하게 몰두해 왔고, 내가 증언하건대 그는 실제로 상당한 진전을 이루고 있다. (고맙다, 카이저!) 그가 중국과 맺어온 지적 관계를 특히 생동감 있게 만든 것은 그의 관점이다. 그는 해당 분야 내부자가 아니라 외부자의 위치에서 이 주제에 접근한다. 그 거리감은 그의 비교적 권위와 결합되면서, 우리처럼 이 주제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것을 그가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게 만든다. (AT: 카이저와 나의 최근 대화 기록은 시니카 팟캐스트(Sinica Podcast)와 서브스택(Substack)을 참고하라)
왕후이는 보다 충분한 소개가 필요하다. 그는 칭화대학 교수이자 의제 설정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학술지 <두수>(读书)의 전 편집자이며, 중국의 ‘신좌파’와 연관된 지식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 평가는 정당하다. 이 명칭은 1990년대에 등장했는데, 당시 중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시장으로의 진전을 찬양하던 시기에 왕후이는 그 과정이 요구하는 사회적 비용이 축하가 아니라 정산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다양한 저서와 논문은 하나의 거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맴돈다. 서구 바깥에서 근대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그는 애덤 투즈와 함께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짧은 20세기’, ‘후쿠야마의 순간(Fukuyama moment)’,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위험한 천재성, 마오쩌둥(毛泽东)의 ‘인민전쟁’ 개념, 그리고 무엇보다 절망을 거부한 실패의 이론가로서 루쉰(鲁迅)을 논의한다.

애덤 투즈: 많은 독자들처럼 나 역시 당신의 모든 작업에 스며 있는 전기적 자기성찰을 깊이 평가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사유,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사유가 어떻게 정치적 조건에 의해 형성되고 역사 속에 위치 지워지는지를 기꺼이 질문한다. 당신의 사례를 염두에 두고, 나는 내 자신의 중국에 대한 지적 관여가 내 전기와 내가 성장한 시대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간략히 되돌아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나는 1989년 여름 서베를린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그해 여름의 사건들은 물론 극적이었고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냉전이 끝날 무렵 독일, 그리고 유럽의 문화는 상당히 지방적이고 내향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중국을 진지하게 사고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나의 시야는 200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바뀌기 시작했는데, 그때 나는 영국 석유회사 비피(BP)를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경영 교육 팀의 일원으로 일하면서 세계 자본주의를 보다 밀접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내가 중국에 대해 직접적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스스로를 압박한 것은 세 번째 책 ⟪대격변⟫(The Deluge, 2014)에서였다. 그 책에는 5·4운동에 대한 포괄적인 서술이 포함되어 있다. 5·4운동은 중국 정부가 베르사유 조약에 순응하면서 자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일본에 넘긴 데 대한 학생들의 항의 시위로 시작되었다. 물론 많은 독일 학자들은 이 사건을 20세기의 근본적인 정치적 위기로 간주한다.
나는 당신의 작업을 접하면서, 우리의 지적 탐구가 유사한 출발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20세기 초를 특징 지은 극적인 변화와,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었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오시프 만델슈탐(Osip Mandelstam)은 그의 위대한 시 ‘시대’(The Age, 1923)에서 이 단절을 암시하면서, 두 세기를 이어주는 척추가 부러진 ‘등이 부러진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말한다.
에릭 홉스봄이 ‘짧은 20세기’라고 부른 시대는 19세기의 이중 논리, 즉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혁명을 통해 완성함으로써 그것과 단절하려 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구상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당신이 일련의 글에서 주장했듯이, 적어도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20세기 말에 이르러 혁명적 에너지는 전 세계적으로 소진된 것처럼 보였고, 우리는 다시 19세기로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당신은 이 전개를 ‘19세기의 귀환’이라고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이 해석은 이른바 ‘후쿠야마의 순간’이었던 1990년대에 제시되었을 때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오늘날, 202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이 해석은 어떻게 보이는가. 나는 최근 기후 위기에 관한 책을 마쳤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인류세(Anthropocene)의 관점에서 보면 ‘19세기의 귀환’이라는 개념은 너무 온건한 것일 수도 있다. 중국의 오늘날 발전 모델은 19세기 유럽 국가들이 추구했던 것과 상당히 다르다. 그것은 전례 없는 방식으로 행성을 변화시키고 있는 발전 형태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은 마르크스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속도와 규모로 발전해 왔다.
왕후이: 그것은 역설적인 상황이다. 한편으로 인류세는 그 이전의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르다. 생태적 관점에서 우리는 미지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치 무대의 행위자들은 익숙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고, 익숙한 19세기적 각본을 연기하고 있다. 우리는 전쟁과 제국주의의 재등장을 겪고 있으며(이 둘은 주로 미국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동시에 산업화,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해 재산업화의 의미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도 경험하고 있다. 우리의 현재는 이중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귀환’을 단순한 반복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어떤 오래된 것을 재현하려는 시도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모든 새로운 상황, 혹은 새로운 상황의 가능성조차도 역사에 대한 우리의 관념, 더 나아가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킨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오늘날 진보의 서사와 혁명의 서사라는 낡은 역사 서사들은 모두 붕괴했다. 우리는 현재를, 그리고 과거를 사고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한다.
아마 하나의 역사적 사례가 내가 말하는 바를 분명히 해줄 것이다. 1900년에 량치차오(梁启超)는 ‘20세기 태평양가’라는 장시를 썼다. 그는 이 시에서 중국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두 개의 개념을 사용했다. 하나는 시간적 개념인 20세기였고, 다른 하나는 공간적 개념인 태평양이었다. 그때까지 2천 년에 걸친 중국 문명 속에서 누구도 ‘태평양 규모’에 대한 상상적 작업을 수행한 적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량치차오는 일종의 지정학적 감각을 창출했다.
시간적 혁신은 더욱 극적이었다. 중국의 20세기는 매우 독특하다. 그것은 근본적인 단절을 표시하는데, 장기간 지속되어 온 왕조 시대가 종식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강력한 세계적 동시성에 대한 감각이 등장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아마 처음으로 중국의 현재에 대한 답을 그 자체의 과거 속에서 찾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다른 모든 나라들이 우리의 과거의 일부가 되었고, 세계사는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심지어 중국의 18세기와 19세기 자체가 중국의 20세기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날 유사한 상황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류세는 우리의 과거 이해를 재구성할 수도 있다.
당신은 에릭 홉스봄을 언급했다. 그는 현대 세계의 형성을 다룬 자신의 위대한 4부작 가운데 네 번째 권인 ⟪극단의 시대⟫(The Age of Extremes)에서, 가치 있는 아이디어를 거의 산출하지 못했다고 본 20세기를 민주주의, 시장경제, 혁명을 낳은 19세기와 비교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나는 그가 유럽에서는 그렇게 느낄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한다. 그러나 그 논지는 중국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5·4운동, 마오의 ‘인민전쟁’과 같은 사건들은 우리 사회에 막대한 정치적 에너지를 주입했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 개혁 시대에도 여전히 감지된다.
내가 당신이 언급한 글들을 쓰던 1990년대에는 이러한 유산이 고갈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신자유주의 사상이 큰 영향력을 얻으면서 중국 사회는 급격히 탈정치화되었다. 그래서 내가 ‘19세기로의 귀환’을 말했을 때, 나는 탈정치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우리가 극복해야 할 현상으로 본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그것에 의해 압도되기도 한다.
애덤 투즈: 나는 당신이 말한 ‘이중적 현재’라는 관점이 매우 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예컨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핵심 인물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들은 마치 19세기를 안전하게 재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윌리엄 매킨리를 흉내 내고, 먼로 독트린을 부활시키며, 쿠바를 장악하고, 포함외교를 추구하는 식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며, 우리가 완전히 다른 21세기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는 이미 참혹하게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의 이란은 1907년경의 페르시아가 아니다. 제국주의적 침략이 성공할 것이라고, 더 나아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아마 이것은 보다 광범위한 실패, 혹은 제한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역사적 상상력의 실패다. 서유럽인들, 더 넓게는 서구는 20세기에 진입하면서 자신들이 확고하고 안정된 역사 철학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과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 등을 증인으로 하여, 1939년과 1940년에 이르러 이 개념은 파국적으로 붕괴했다. 물론 이는 단지 파시즘 때문만은 아니었다. 예컨대 스탈린 역시 유럽적 진보 개념을 매우 특이한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반면 중국 사상가들은 대체로 19세기적 역사관에 의해 제약받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혁명적 실천에 대해 매우 급진적인 개념들을 발전시킬 수 있게 했다. 유럽은 1960년대에 마오주의가 국제적 현상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는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유럽의 역사 인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사건인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은 중국 사유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워지는가.
왕후이: 내가 말했듯이, 동시성이라는 감각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역사적 상상력 속으로 들어왔다. 20세기 초 중국 사상가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들이 이미 벤야민이나 아도르노가 이후에 다루게 될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루쉰은 패배를 정직한 관찰자의 항구적인 조건으로 서술했다. 그는 역사의 잔해가 남긴 것을 바라보면서도 진보 서사가 제공하는 위안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독일, 러시아, 미국이 걸어온 서로 다른 경로 역시 치열하게 논쟁 되었다.
홀로코스트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나치즘에 맞선 반파시스트 저항과 함께 중국의 역사 서술에서 분명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유럽에서는 홀로코스트를 역사 발전의 완전한 단절, 다시 말해 가장 깊은 수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중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난징 대학살 역시 하나의 역사적 단절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그것은 동일한 수준의 주목, 이론화, 정치화를 한 번도 끌어내지 못했는가.
이 문제는 더 깊은 쟁점을 가리킨다. 마오가 잘 알려진 방식으로 주장했듯이, 중국의 관점에서 근대사를 바라보면 모든 것은 제1차 아편전쟁을 연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독일도 그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영국, 러시아, 일본이 훨씬 더 중요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이해하는 관점 자체가 서로 다소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많은 것들이 종종 축소되거나 주변화된다.
애덤 투즈: 이러한 차이가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폭력이 갖는 의미, 혹은 색조의 차이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가. 서구 역사가들이 홀로코스트와 같은 범죄를 분석할 때 직면한 하나의 난점은 이러한 행위들이 우리가 물려받은 정치적 개념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예컨대 홉스봄의 위대한 4부작에서 이러한 곤란을 확인할 수 있다. 앞의 세 권은 생산관계가 다양한 역사적 행위자들의 변동을 설명하는 기본적인 마르크스주의 논리를 따른다. 반면 ⟪극단의 시대⟫는 파국적인 책이다. 그것은 단지 끔찍한 사건들을 서술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 논리가 붕괴하기 때문이다. 그 논리는 나치즘의 폭력과 광기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나치즘은 무차별적이고, 산업화되어 있으며, 일종의 자율적인 힘처럼 제시된다. 그것은 계급투쟁이나 다른 익숙한 분석 개념에 대한 참조 없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원초적 충격(ur-shock)’에서 생성된 것으로 나타난다. 홉스봄이 지적하듯이, 고문은 20세기에 다시 등장했다.
반면 중국 사상가들은 폭력을 정치와 통합하려는 경향을 더 강하게 보여왔다. 그들은 폭력이 정치의 구성 요소이며, 국가를 형성하고 혁명을 개시하는 토대를 마련한다고 강조해왔다. 물론 그것은 종종 끔찍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적어도 마오 이후 중국 정치 전통에서 ‘인민전쟁’이라는 개념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용어는 레닌이 사용한 바 있으며, 일정한 소련적 기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마오는 그것을 분명히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했다.
왕후이: 당신 말이 맞다. 중국의 정치와 사회는 인민전쟁에 의해 변형되었다. 이것은 20세기가 하나의 단절을 형성했다는 또 다른 방식이다. 중국 땅에서 벌어진 이전의 전쟁들, 예컨대 아편전쟁, 청불전쟁, 청 제국과 다른 제국들 사이의 전투를 살펴보면, 그것들은 대중적 기반이나 참여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911년 혁명, 북벌, 일본 침략에 맞선 저항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다층적인 성격을 띠었고, 사회적 동원, 혁명, 토지 관계의 변화 등과 얽혀 있었다. 그것들은 사회 구조 전체의 재편을 둘러싼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폭력은 창조적 행위이기도 하다. 이 주장은 도덕적으로가 아니라 서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군사적 행위 이상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내전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러나 내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정치적 에너지는 1990년대에 소진되었다. 우리는 지적으로 19세기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정치적인 것의 의미를 다시 사고하기 위해 20세기로의 새로운 귀환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애덤 투즈: 당신이 말한 탈정치화에 대한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나는 20세기의 유산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예컨대 팬데믹 기간 동안 중국 국가는 코로나19에 맞서 ‘인민전쟁’을 수행했고, 스스로의 주장에 따르면 성공을 거두었다.
왕후이: 나는 그것을 진정한 인민전쟁으로의 복귀라기보다는 수사적 제스처로 이해한다. 국가의 코로나 대응은 세 가지 수준에서의 전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전시와 마찬가지로 의사와 자원활동가 등을 대규모로 동원했다. 둘째, 초기 몇 달 동안 백신이 없던 시기에 국가는 현대 기술이 아니라 매우 기초적인 사회적 전술을 활용하는 일종의 게릴라식 대응을 요구했고, 이를 통해 바이러스 확산을 늦추려 했다. 셋째, 특히 백신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대규모 병원 건설과 공공 보건 인프라 확충을 중심으로 하는 하향식 제도적 대응이 이루어졌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20세기 초 유럽 사상가들이 이론화한 총력전 개념에 더 가깝다. 물론 그 결과는 매우 다르다.
애덤 투즈: 당신의 최근 글들을 읽으면서, 당신이 카를 슈미트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당신은 경제적 문제가 이데올로기를 대신해 전면에 등장할 때 발생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그의 ‘중립화(neutralisation)’ 개념을 활용한다. 당신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이것이 순수한 발전주의 형태로 이어졌고, 그것은 정치적 문제를 억누르고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약화시켰다.
탈정치화에 대한 당신의 문제의식을 고려하면, 이것이 놀라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1980년대 이후 유럽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반대자들이 슈미트를 새로운 방식으로 읽으려 시도해왔고, 1920~30년대에 그가 발전시킨 ‘정치적인 것’ 개념을 복원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탈정치화를 극복하려 했다. 이와 비슷한 영향력을 지닌 개념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물론 슈미트는 단지 법이론가가 아니었다. 그는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였고, 나치당 당원이기도 했다. 예컨대 하이데거와 달리 그는 자신의 신념에 걸맞은 정치적 행동 의지를 실제로 실행한 인물이었다.
나 역시 슈미트와 씨름해왔다. 특히 ⟪대격변⟫에서 나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를 슈미트에 대한 자유주의적 대응으로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좌파 비평가들은 자유주의가 약하기 때문에 슈미트가 그것을 압도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견해에서 케인스는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 대한 일반 이론을 제시하며, 그 이론은 중립화를 하나의 선택지로 인정하지만 유일한 선택지로 보지는 않는다.
어쨌든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당신에게 슈미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은 왜 그에게로 향했는가.
왕후이: 슈미트는 뛰어나지만 유해한 인물이다. 통찰력이 있지만 반동적인 사상가다. 그의 글을 읽는 일은 복어를 먹는 것과 같다. 1929년에 그는 ‘중립화와 탈정치화의 시대’(The Age of Neutralisations and Depoliticisations)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글에서 그는 지난 400년의 유럽사를 영원한 이항 대립, 즉 친구와 적 사이의 대립으로부터의 일시적 휴식 또는 그에 대한 부정의 연속으로 요약했다. 그는 이 대립을 유일하게 진정한 정치적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 혁명과 심지어 러시아 혁명조차도 이 진실로부터 시선을 돌리려는 시도였다.
물론 나는 이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슈미트의 저작이 발전주의(오로지 경제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는 입장)와 자유주의(절차주의에 기반한 입장)를 비판하는 데 유용한 도구라고 본다. 나는 이 두 이데올로기 모두 탈정치화 효과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슈미트의 근본 전제, 즉 친구와 적의 관계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이항 대립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은 주권 개념, 나아가 국민국가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 점에서 마오의 글은 더 유연하게 느껴진다. 그는 제대로 된 변증법적 사상가였으며, 친구와 적의 관계가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변화 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했다. 예컨대 전시 상황에서는 통일전선이 형성될 수 있다. 마오는 주권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의 인민전쟁 개념은 일본 내부의 인민, 나아가 이후에는 베트남까지 포괄할 수 있었다.
애덤 투즈: 이 점은 우리가 앞서 나눈 역사와 역사성에 관한 논의로 다시 이어진다. 1920년대에 슈미트를 포함한 많은 독일 사상가들은 유럽 국민국가의 역사로 이해된 역사 자체가 사실상 끝났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오늘날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어설픈 승리 정도로 기억되지만, 독일인들에게 그것은 훨씬 더 파국적인 사건이었다. 슈미트는 자신의 글에서 유럽이 20세기를 주도하지 못할 것이라고, 더 나아가 역사적 의미에서 제대로 된 20세기를 갖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한 역사를 갖게 될 주체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이후 그는 파르티잔의 역사와 글로벌 사우스의 게릴라 반란에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슈미트와 다른 이들은 유럽에 ‘굴욕의 세기’가 도래할 것임을 예견했다. 일부 유럽 역사가들은 대륙이 쇠퇴하는 제국으로 전락하는 ‘오스만화’ 시나리오를 문자 그대로 묘사하기도 한다. 슈미트는 바이마르 헌법을 분석하면서 독일 국가가 자신의 주권을 집행할 능력, 즉 자신이 통제하는 것과 통제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 경계를 그을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유럽이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과 같은 도덕주의적이고 상업적이며 법률주의적인 앵글로아메리카 인물들이 지배하는 세계 체제에 종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바로 이러한 전반적인 위기의식이 당시 독일 사상가들을,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면, 다문화적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는 아시아를 연구했고, 막스 베버(Max Weber)는 힌두교를 다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슈미트 자신도 농민과 인민전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비대칭 투쟁의 이론가로 자신을 재정립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보다 밝은 주제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다. 당신이 깊이 연구해 온 근대성의 핵심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인 루쉰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을까.
왕후이: 나는 루쉰을 실패의 위대한 이론가로 생각한다. 그는 패배의 경험과 화해하는 방식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 영구혁명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어떤 개인이나 제도도 본질적으로 또는 영구적으로 진보적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는 필연적이었다. 그에게 진정한 혁명가는 언제나 실패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사람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결코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오는 인민전쟁 개념을 발전시키면서 이 통찰을 활용했다. 인민전쟁은 실패를 승리로 전환하는 과정이며, 그것은 장기적인 과정이다.
루쉰의 몇몇 글을 보면, 그는 절망과 싸우면서 역사적 무망감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그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유다. 우리는 행성적 규모에서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에 맞서 싸워야 한다.
[출처] Chartbook 441 The Two-Faced Present - A conversation about the “short twentieth century” – and the paradoxical twenty-first with Wang Hui (in collaboration with Equator magazine)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
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