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마술사: 토마스 만,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연금술

새롭게 사회화된 세계, 계획과 협력의 세계는 도래할 것이다. 인류는 지성의 수치라 할 불필요한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퀴퀴하고 몽매하며 소부르주아적인 감상주의 숭배에 등을 돌린 모든 사람이 이미 그 기치 아래 모여, 거대하면서도 냉철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이를 이뤄낼 것이다. 그런 세계는 도래할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도달한 계몽의 수준에 걸맞은 합리적인 외적 질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격렬한 격변을 통해서라도 그런 질서가 탄생할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인간의 마음도 떳떳하게 자신의 권리를 다시 주장할 수 있다. 부르주아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은 이들은 부르주아적 본성 안에 무한한 가능성, 즉 스스로를 해방하고 스스로를 극복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우리 시대는 중산계급에게 자신에게 내재된 이러한 힘을 기억하고,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그 힘에 의지해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하라고 요구한다. 권력을 누릴 권리는 자신에게 수행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다는 확신을 전제로 한다. 어떤 계급이 이 사명을 거부하거나 이를 감당하기에 너무 나약하다면, 그 계급은 물러나 권력을 내려놓고 다른 유형의 인간에게 자리를 내줘야 할 것이다. 그들은 시대착오적인 감상주의가 만들어내는 억압이나 속박을 전혀 모르는 인간들이다. 유럽의 중산계급이 이러한 감상주의에 얽매인 나머지 정치와 경제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 자격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때때로 떨치기 어렵다.

오늘날 역사가 부르주아 공화국에 아직 신용을 허락하려 하는 이유는 의심할 여지 없이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아직 완전히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신용의 만기는 짧다. 민주주의가 점점 더 강력해지는 적들이 자신들의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능력, 즉 우리를 새로운 시대로 이끌 능력을 민주주의 역시 갖추고 있으리라는 믿음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중산계급은 자신들이 배출한 위대한 인물들을 기념하는 행사를 연다고 해서 그들에게 걸맞은 존재임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인 괴테가 중산계급을 향해 외친다.

죽은 장식물에는 등을 돌리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자!

이 말은 누가 했을까? 때는 1932년 봄이다. 주제는 낯설지 않다. 역사의 전환점에 선 교양 있는 중산계급을 향한 호소,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인식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하지만 이 글은 분명 케인스의 것이 아니다. 우선 이 글을 케인스가 썼다면 지금쯤 매우 유명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표현도 조금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고, 계급 범주를 환기하는 방식도 지나치게 유럽적이다. 괴테를 언급하는 것 역시 케인스답지 않다.

사실 이 글은 토마스 만(Thomas Mann)이 자신의 위대한 문학적 영웅인 괴테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1932 322일에 한 연설을 위해 쓴 원고다.

그럼에도 당시 현실을 진단하는 케인스와 만의 시각이 서로 닮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차트북 463>에서 시작한 생각을 이어가자면, 1920년대부터 1940년대에 이르는 시기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자유주의 지식인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토마스 만과 존 메이너드 케인스(왼쪽부터)

두 사람 사이에 교류가 있었을까? 우리가 아는 한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다. 따라서 이어지는 내용은 지성사의 서술이라기보다 추론에 바탕을 둔 병치에 가깝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연관성이 단순한 상상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만이 케인스를 몰랐을 리는 거의 없다. 당시 교육받은 독일인이라면 누구도 《평화의 경제적 결과》(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 1919)를 모르기 어려웠다. 실제로 만은 19202월 이 책의 발췌문을 읽었다고 일기에 기록했으며, 윌슨(Wilson)을 묘사한 대목을 읽고 즐거워했다. 예상할 수 있듯 만은 케인스의 책이라는 표현을 누구나 알 만한 말처럼 사용했다.

반대로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Buddenbrooks, 1901)과 《마의 산》(The Magic Mountain, 1924)이 평단의 호평을 받은 데 이어 만이 1929년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으니, 블룸즈버리 그룹(Bloomsbury Group)도 분명 그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케인스가 토마스 만의 작품을 읽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당대 유럽 대륙의 소설보다 입센(Ibsen)의 희곡과 러시아 발레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놀랍고 어쩌면 시사하는 바도 크다. 특히 20세기 초 영국에서 중산계급 문화의 상당 부분이 얼마나 폐쇄적인 세계를 이루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관심사는 깊은 곳에서 맞닿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19세기에서 물려받은 사회 엘리트들이 20세기에 어떤 운명을 맞을 것인지, 그리고 이들이 어떤 역할과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근본적인 관심을 두었다.

케인스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 첫머리는 마치 만의 소설에서 그대로 가져온 듯하다. 다만 만이 썼다면 그 안에는 짓궂은 반어가 담겼을 것이다.

만 자신도 훗날 1939년 프린스턴에서 한 강연에서 말했듯, 1914년 이전의 부르주아적 삶을 회고한 그의 대작 《마의 산》은 자본주의가 온전하게유지되던 조건에서만 상상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케인스에게 근본적으로 걸린 문제는 다름 아닌 문명이었다. 이 말에는 희망과 불안이 동시에 짙게 배어 있었다. 애초에 《평화의 경제적 결과》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것도 전쟁 이전 유럽의 질서를 놀라우면서도 취약한 성취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주데텐 위기(Sudeten crisis)가 한창이던 19389월 블룸즈버리의 친구들에게 읽어준 회고록 《나의 초기 신념》(My Early Beliefs)에서 전쟁 이전 젊은 시절 자신이 품었던 자신만만한 합리주의를 되돌아보며 그것이 재앙이 될 만큼 잘못된생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와 친구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은 대부분의 인간에게 악행을 불러일으키는 비합리적인 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문명이 극소수 사람들의 인격과 의지가 세워놓은 얇고 위태로운 껍질에 불과하며, 교묘하게 주입하고 영리하게 지켜온 규칙과 관습에 의해서만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문명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에 대한 이 놀라운 고백은 케인스가 쇄신과 재창조를 모색하게 된 밑바탕을 이룬다.

반면 젊은 시절의 만에게 문명이라는 말은 거의 모욕에 가까웠다. 1차 세계대전 당시, 그리고 특히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Reflections of a Nonpolitical Man, 1918)에서 그는 문명쿨투어(Kultur)’, 즉 문화와 대립시키며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축했다. 문명은 피상적이고 사교적이며 모든 것을 합리화하려는 서구를 뜻했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민주주의, ‘문학’, 심지어 정치 자체가 문명을 대표했다. 반면 쿨투어는 독일 특유의 것이었다. 영혼에서 솟아나 깊이를 지니며 음악과 형식, 예술, 나아가 악마적인 것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만은 이렇게 썼다. “정신과 정치의 차이에는 문화와 문명, 영혼과 사회, 자유와 선거권, 예술과 문학의 차이가 담겨 있다.” 마법이 살아 숨 쉬는 곳은 문화였다.

이렇게 계몽주의적 합리성과 마법이 깃든 문화의 영역을 깔끔하게 분리하는 지도를 그렸던 만은 불과 몇 년 만에 그 지도를 다시 그렸다.

이미 1920년대 초에 만은 이러한 이분법을 허물었다. 192210월에 한 놀라운 연설 독일 공화국에 대하여’(Von deutscher Republik)에서 만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한다고 선언해 우파 지지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이것이 과거의 신념을 단순히 철회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그는 노발리스(Novalis)와 휘트먼(Whitman)이라는 뜻밖의 두 인물을 끌어와 인간성과 민주주의의 동일성을 선언하면서, 인간성이란 민주주의를 고전주의적으로 낡은 이름으로 부른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쿨투어와 문명, 독일의 낭만주의자와 미국의 민주주의자가 하나로 만난 것이다. 전시의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을 떠받쳤던 여러 대립항은 이제 공화국이라는 국가를 통해, 그리고 인간성이라는 이름 아래 화해해야 했다. 1932년에 이르러 만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사회를 합리적인 새로운 질서로 이끌라고 촉구하면서, 과거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을 쓴 자신이 조롱했던 문명론의 언어와 거의 똑같은 언어로 말한다. 바로 이러한 지적·정치적 이동 덕분에 만의 괴테 연설은 케인스의 목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1930년대 초에 이르러 두 사람은 결국 하나의 질문을 공유하게 되었다. 풍요롭지만 동시에 불안으로 가득한 상황에서 현대 문명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과 마찬가지로 케인스도 물려받은 사상이 강력한 힘을 지니면서도 현실과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했다. 낡은 질서가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으며, 이를 구하려면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한 인식은 두 사람이 공유한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마지못해 받아들이면서도 현실적으로 현대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부르주아의 속물주의에 맞서 현대의 지적·문화적 진보를 이루려면 노동계급을 뜻밖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동맹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만과 케인스는 의견을 같이했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두 사람은 당대 현실에 대한 개입과 역사적 성찰을 모두 하나의 역사적 이행이라는 틀 안에서 바라보았다.

만이 1932년에 한 괴테 연설은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ács)가 만을 마지막 위대한 비판적 리얼리스트라고 평가하는 근거가 되었다. 울프(Woolf), 조이스(Joyce), 프루스트(Proust) 등 같은 세대의 모더니스트들처럼 만도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데 몰두했다. 루카치에 따르면 후기 자본주의라는 조건에서는 다른 길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만은 동시대 작가들과 달리 더 넓고 포괄적인 역사관에 계속 뿌리를 두고 있었다. 바로 그의 괴테 연설에서 제시한 사회경제적 궤적, 새롭게 사회화된 세계, 계획과 협력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관이었다. 따라서 만의 《마의 산》은 앞선 <차트북 463>에서 주장했듯 주관적 방향 상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에 그치지 않는다. 주관적 시간과 객관적 역사가 서로 갈라져 표류하는 과정을 구조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루카치에게는, 그리고 아도르노(Adorno)에게도, 바로 이것이 후기 자본주의 조건에서 리얼리즘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특징이었다.

루카치의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케인스도 자신의 영역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해냈다고 보는 것이 지나친 비약일까?

루카치의 해석대로 만이 주관적 시간과 객관적인 역사 발전의 고전적 통일이 해체되는 과정을 소설의 거대한 구조 속에 담아냈기 때문에 마지막 위대한 비판적 리얼리스트였다면, 케인스도 《일반이론》(General Theory, 1936)에서 정치경제학의 영역을 대상으로 비슷한 일을 하려 한 것은 아닐까? 케인스는 19세기 후반까지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를 이루던 것이 흩어져버린 뒤, 그 파편들을 새롭고 더욱 일반적인 틀 안으로 다시 모으려 한 것이 아닐까? 이는 급진적인 개입인 동시에 기존의 것을 보존하고, 더 나아가 보수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케인스가 내린 기본적인 진단은 원활하게 작동하는 시장경제가 과거에 지녔던 특성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며, 그와 함께 부르주아의 정체성과 소비, 개인적 자유를 떠받치던 자신감 넘치는 주체성도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앞으로 나아갈 유일한 길은 냉혹한 19세기의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케인스가 보기에는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에 불과했다. 당대에 이루어진 다른 거대한 실험들, 1920년대 소련이 선보인 새로운 문명 모델과 혐오스러운 중앙집권적 권위주의 체제였던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은 적어도 기존 질서가 단절되었다는 현실만큼은 직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이런 나쁜 선택지에 자신을 내맡겨야 할 이유는 없었다. 자유주의가 실제로 성··죽음의 영역, 즉 생명정치의 영역이자 만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던 영역에 자리 잡는 동시에, 경제정책을 계몽된 거시경제학 안에 위치시킨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거시경제학을 특수한경우를 다루는 이론이 아니라 일반이론으로 구성한다면, 즉 서사의 차원에서 만의 소설이 했던 일을 경제학에서 해낸다면, 자유주의는 다시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교양 있는 엘리트가 사회 전체를 더 나은, 더 문명화된 미래로 이끄는 특별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만과 케인스가 모두 강조했듯 자유주의는 소극적일 필요가 없으며 미래를 파시스트들에게 넘겨줄 필요도 없었다. 다만 역사의 흐름에서 앞장서야 했다. 만이 괴테 연설에서 표현했듯 자유주의는 사회를 이끌능력이 있음을 보여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설명해야 했다. 케인스와 마찬가지로 만은 이러한 부르주아적 관점에 내재한 모순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살아갔다. 루카치는 만의 일흔 번째 생일을 기념해 1945년에 쓴 부르주아적 인간을 찾아서’(In Search of Bourgeois Man)에서 이미 이 점을 지적했다. 루카치는 만을 마지막 위대한 부르주아 작가라고 부르면서 그가 중산계급에 대해 보인 변증법적으로 복잡한 태도를 강조했다.

경제학과 소설을 부르주아 사회가 의미를 구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서로 다른 두 가지 근대적 기술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러한 장치들이 19세기 초에 처음으로 통합된 고전적형태를 갖추었다고 본다면, 만과 케인스는 모두 그 기술을 쇄신해 극단의 시대에 맞게 옮겨놓을 방법을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루카치의 설명에 따르면 만의 소설이 19세기 선배 작가들의 소설과 맺는 관계는, 케인스의 거시경제학이 마셜(Marshall) 경제학의 선구자들과 맺는 관계와 같다.

하지만 이러한 평행 관계가 두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이를 통해 더 깊은 또 하나의 모티프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추론적 작업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바로 근대 독일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를 기념하는 연설이다.

만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그리고 루카치가 역사적 사상가이자 작가로서 만을 해석하는 관점에서 핵심은 제1차 세계대전의 위기만이 아니다. 1932년 위기의 한복판에서 만이 18세기와 19세기 사이의 근대로의 전환기(Sattelzeit)’를 가로지르는 괴테를 자신의 핵심적인 기준점으로 다시 삼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더 나아가 만은 괴테 자신의 역사적 시야를 통해 17세기와, 계몽주의적 합리성이 이미 극복했다고 여겼던 연금술의 시대로까지 시선을 넓힌다. 여기서 파우스트 박사는 인물이 등장한다.

최근 제프 만(Geoff Mann, 토마스 만과는 무관하다)은 역시 근대로의 전환기라는 관점에서 케인스주의를 매우 탁월하게 해석했다. 다만 그는 헤겔(Hegel)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했다. 이는 케인스가 헤겔에게 특별히 어떤 지적 빚을 졌기 때문이라기보다, 제프 만이 케인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 무엇보다 토니 네그리(Toni Negri)의 해석과 생산적으로 씨름한 결과다.

제프 만은 케인스를 혁명 이후의 보수적 안정화, 테르미도르를 이론화한 사상가로 재해석하면서, 모든 의미에서 눈부신 역작을 보여준다.

그러나 토마스 만을 통해 케인스를 바라보면 이와는 다른, 덜 보수적인 가상적 역사를 그려볼 수 있다. 우리의 해석에 따르면 만과 케인스의 자유주의에 역사적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헤겔과 그의 국가관이 아니다. 오히려 괴테와 같은 부르주아적 천재들, 그리고 케인스의 경우에는 그가 위대한 영웅으로 여겼던 17세기와 18세기 초의 인물들이다.

토마스 만이 말년의 괴테를 해석한 대목은 길게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부르주아 질서를 뒤이어 등장할 새로운 사회를 이처럼 대담하고 꿈처럼 미리 내다보았다는 사실은, 노년의 괴테가 유토피아적 규모의 공학 사업에 갈수록 더 큰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만큼이나 놀랍고 인상적이다. 그는 파나마 지협을 관통하는 운하 건설 같은 사업에 열광했다. 그는 마치 그런 일들이 세상의 모든 시보다 자신에게 더 중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끈질기게 이야기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들었는데, 결국 실제로도 그러했다. 특히 교통과 통신에 관한 문명의 과학적 측면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며 즐거워했던 것도 《파우스트》(Faust)의 결말을 생각하면 놀랄 일이 아니다. 파우스트는 늪지의 물을 빼낸다는 실용적인 꿈을 실현하면서 생애 최고의 순간을 경험한다. 오로지 미학과 철학에 치우쳐 있던 당시 시대정신에 대한 참으로 기묘한 도전이었다!

마찬가지로 괴테는 노년에도 멕시코만과 태평양을 연결할 가능성을 놀라울 정도로 지칠 줄 모르고 논했으며, 그런 위업이 문명세계와 비문명세계를 가리지 않고 전 세계에 미칠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미국이 이 사업을 맡기를 바랐고, 자연이 좋은 항구를 마련해 인간에게 더없이 좋은 터전을 제공한 태평양 연안을 따라 번영하는 도시들이 하나씩 솟아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는 그런 일이 실현되는 날을 거의 기다리지 못할 정도였다. 도나우강과 라인강을 연결하는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실로 엄청난 계획이었다. 여기에 세 번째 거대 사업으로 영국이 건설할 수에즈 운하까지 있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그 모든 것을 볼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앞으로 50년을 더 버텨볼 만도 하겠군.”

그는 자신의 나라 국경에서 시선을 멈추지 않고 온 세계를 바라보았다. 미래를 향한 그의 열정은 온 세계를 품을 만큼 거대했으며, 다른 민족의 삶이 활기를 띠고 그들이 기쁨과 슬픔을 겪는 모습은 자기 민족의 일만큼이나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가 품었던 것은 사랑의 제국주의였다. 국적이라는 장벽을 넘어선 위대한 정신의 제국주의였으며, 특히 위대함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었다. 이는 앞서 그가 세계문학의 도래를 선언했을 때 이미 확인했던 바로 그 특징이다. 응용과학을 통해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하면서 부르주아적 세계관은 전 세계적인 규모로 확장된다.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말을 충분히 넓고 비교조리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공산주의로 변모한다.

이것은 냉철한 종류의 열정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감정적 잔재에 목이 졸려 죽어가는 세계를 냉철하게 만드는 일이다. 독일인들이 50년 동안 게뮈트(Gemüt, 독일 특유의 감상적 정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바로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었다. 중산계급의 인간이 여전히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는 치명적인 감상주의와 생명력을 갉아먹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다가오는 시대에 길을 잃고 결국 밀려나고 말 것이다. 그는 용감하게 미래의 편에 서야 한다. 이성을 경멸하면서 시대착오적인 감정을 완고하게 숭배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런 태도는 철저하게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절망적이고 악의적이며 살인적인 감상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다.

마치 토마스 만이 19306월에 발표된 케인스의 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of our Grandchildren)을 통해 괴테를 읽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토마스 만이 아니라 제프 만의 논의를 변주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진정한 케인스주의자들은 헤겔의 후예라기보다 괴테의 자손이 아닐까?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괴테와 실러(Schiller)가 형성한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교과서식으로 설명한다면,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와 질풍노도의 낭만적 야성적 충동을 종합한 사조라고 할 수 있다. 지극히 케인스주의적인 표현이다. 단순히 시대적 선행성과 위상만 놓고 보더라도 헤겔보다 괴테를 앞세울 근거는 충분하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괴테는 헤겔과는 차원이 다른 문화적 거장이었다. 헤겔이 나폴레옹 시대의 역사를 경외심에 찬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이었다면, 젊은 보나파르트(Bonaparte)의 침대 머리맡에는 괴테의 책이 놓여 있었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180810월 괴테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실제로 나폴레옹 시대의 역사가 니콜라 브루사르(Nicolas Broussard)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헤겔은 로마사 강의를 시작하면서 괴테와 나폴레옹 사이에 오간 유명한 대화를 전한다. “어느 날 그는 괴테와 비극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는 현대 비극이 고대 비극과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는 이제 인간이 굴복해야 할 운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고대의 파툼(Fatum, 인간의 의지로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을 대신해 정치가 등장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정치는 현대 비극에서 운명으로 활용해야 한다. 개인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힘으로 말이다.” (《강의》, 215)

다시 말하지만 이는 케인스 자신의 글에서는 직접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지적 연상의 사슬이다. 이 연관성을 제시하는 목적은 네그리를 경유한 제프 만의 탁월한 마르크스주의적·헤겔주의적 해석에 맞서, 게오르크 루카치를 경유한 토마스 만에게서 또 다른 해석을 끌어내기 위해서다.

케인스 자신은 어느 쪽의 연관성을 들어도 상당히 당혹스러워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는 스스로를 홉스(Hobbes)와 로크(Locke)로부터 이어지는 영국 정치사상의 전통 속에 자리매김했다. 그가 가장 강한 동질감을 느낀 인물들은 ‘19세기가 납작하게 만들어버린 사람들이었고, 케인스는 이들을 다시 발굴하는 작업에 나섰다.

첫 번째 인물은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였다. 그는 괴테와 거의 정확히 동시대를 살았으며, 케인스가 거듭 강조한 표현을 빌리면 케임브리지 경제학자들의 첫 번째 인물이었다. 케인스가 맬서스에게서 높이 평가한 것은 바로 19세기가 버렸던 것이었다. 맬서스는 근대 정치경제학이 선택하지 않았던 길이었으며, 리카도(Ricardo)에게 패배해 묻혀버린 인물이었다. 경제학은 귀납적이고 직관적인 탐구자였으며 경험의 구체적인 결을 놓치지 않았던 맬서스의 사고를 토대로 발전하는 길을 거부했다. 그 대신 리카도의 더욱 추상적인 지적 체계가 승리를 거두었다. 더 깔끔하고 차가운 체계가 승리하면서 경제학은 순수한 이성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에 맞춰 새롭게 만들어졌다. 케인스는 이후 한 세기 동안 이어진 리카도 경제학의 지배가 왜 재앙이었는지, 경제학이 왜 인위적으로 파놓은 홈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생각했다.

맬서스를 되찾는다는 것은 그 홈을 다시 열어젖히는 일이었다. 19세기가 묻어버린 선조야말로 더 풍요로운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경제 문제에 접근할 때 가능한 모든 길 가운데 가장 좋은 길을 택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일이기도 했다. 맬서스는 철학자이자 도덕과학자로 출발해 역사를 거친 뒤에야 이론에 도달했다. 케인스는 마침내 1933년에 발표한 전기적 에세이에서 그 의미를 분명히 밝혔다. 맬서스가 경제학에 도달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케인스는 놀라운 변신의 이미지를 동원했다. “도덕과학자라는 애벌레와 역사가라는 번데기였던 그는 마침내 사상의 날개를 펼쳐 경제학자로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이는 마법과 변신의 이미지다. 하나의 고정된 형상에서 다른 형상으로 뛰어넘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달라지고 더욱 생생한 존재가 되는 변신의 이미지다.

케인스는 맬서스에서 더 낯설고 더욱 카리스마 넘치는 선조로 시선을 돌려 18세기를 넘어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갔을 때, 훨씬 더 웅대한 규모로 바로 이 이미지를 다시 끌어냈다. 그 인물은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었다.

오랫동안 뉴턴을 존경해 온 케인스는 1936년 소더비 경매에서 이 과학자가 남긴 미공개 원고를 구입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3,000파운드를 지불했는데,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오늘날 약 20만 파운드에 해당한다. 케인스는 자신이 구입한 원고를 살펴보다 뜻밖에도 뉴턴이 연금술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케인스의 추산에 따르면 뉴턴은 연금술과 관련해 무려 100만 단어에 달하는 기록을 남겼다. 케인스는 점차 뉴턴이 최초의 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마술사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케인스는 뉴턴 탄생 기념일인 194212월을 위해 쓴 놀라운 기념 에세이를 다음과 같은 양해의 말로 시작했다. “전쟁 때문에 이토록 위대한 주제를 제대로 다룰 만한 여유도 없었고, 내 서재와 자료를 살펴보며 내 생각을 확인할 기회도 없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뉴턴의 실제 모습이 사람들이 흔히 그려온 모습과 달랐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가 덜 위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19세기 사람들이 묘사하고 싶어 했던 것보다 덜 평범하고 훨씬 더 비범한 사람이었다. 천재란 매우 독특한 존재다. 오늘 내가 뉴턴을 묘사함으로써 케임브리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의 위상을 낮추려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나는 그의 친구들과 동시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던 방식으로 뉴턴을 바라보려 한다. 그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뉴턴을 가장 위대한 인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겼다. 18세기 이후 사람들은 뉴턴을 근대 과학자 시대를 연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인물, 합리주의자, 차갑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이성을 따라 사고하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뉴턴이 1696년 케임브리지를 완전히 떠나면서 꾸려놓은 상자의 내용물을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를 그렇게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자료들은 일부 흩어지기는 했지만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뉴턴은 이성 시대 최초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 마술사였으며, 마지막 바빌로니아인이자 수메르인이었다. 그는 1만 년보다 조금 덜 오래전부터 우리의 지적 유산을 쌓기 시작한 사람들이 세상과 정신세계를 바라보았던 바로 그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 마지막 위대한 정신이었다. 1642년 성탄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유복자로 태어난 아이작 뉴턴은 동방박사들이 진심으로, 그리고 마땅히 경의를 표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신동이었다.”

토마스 만이 1932년에 괴테를 새롭게 읽어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에세이에서 놀라운 점은 역사를 창조적으로 다시 바라보는 방식이다. 케인스는 19세기가 덧씌운 굳은 껍질에서 벗어난 새로운 뉴턴을 불러낸다. 그렇게 되살아난 뉴턴은 더 낯설면서도 더욱 생생하다. 밀랍인형처럼 굳어진 모습에서 벗어나 20세기에 다시 살아 있는 존재로 등장한다. 당시 한 인물이 지적했듯 케인스는 뉴턴을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와 파우스트(Faustus)가 한 몸에 들어 있는 인물로 묘사했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도 그 두 사람을 모두 닮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바로 이 점이 케인스와 만을 정신적으로 이어준다. 두 사람은 20세기 부르주아 계급의 위치와 당대의 긴장 속에서 자유주의 정치가 차지하는 위치를 새롭게 사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웅대한 의미에서 그 정치에 새로운 역사를 부여하려는 야심까지 공유했다.

[출처Chartbook 465 The Last of the Magicians: Thomas Mann, John Maynard Keynes and the Alchemy of Bourgeois Liberalism

[번역] 이꽃맘

덧붙이는 말

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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