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 사무실에 위치한 조각상. 조각상의 모델은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젊은 여성 노동자 황유미다. 2007년, 황유미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속적인 권리 투쟁을 이어오며, 오늘날 전자 산업의 직업 안전을 지키는 중심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2007년, 산업재해로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여수 외국인 보호소에서 발생한 화재로 중국 노동자 9명을 포함해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8년, 이천의 Korea 2000 냉동창고에서 발생한 화재로 40명이 사망했고, 이 중 13명은 중국 이주 노동자였다.
2020년, 경기도의 한 물류센터에서 화재가 발생해 38명이 숨졌고, 그 가운데에는 해외 동포 비자 소지자 3명이 포함되었다.
2022년, 안성의 한 물류창고에서 이주 노동자 5명의 사상자를 낸 붕괴 사고가 발생했고, 이 중 3명은 중국 국적의 조선족 동포였다.
2024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Aricell 사건으로 살펴보는 이주노동자의 안전권’ 토론회에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소속 이주노조(MTU) 활동가 정영섭 씨는, 지난 20년간 이주노동자가 관련된 주요 재해 사건들을 제시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사례들이 비록 이주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더라도, 전체의 빙산 일각에 불과하다. 보도되지 않은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사지 절단과 장애, 만성 질환, 사망에 이르는 사례는 이루 다 셀 수 없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전국에서 업무 사고나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 수는 2,200명을 넘어섰으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치다. 게다가,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많은 사례가 늘 존재한다. 한국 언론에서는 ‘산재 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현재의 산업안전 제도를 비판하는 데 쓰인다.
이에 상응하여, 산재 운동도 고된 투쟁 속에서 성장해왔다. 산재 운동은 한국 노동운동 내에서 매우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분야로,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들의 10여 년에 걸친 장기 투쟁이든, 최근 젊은 세대에게 큰 호소력을 지닌 김용균 사건의 투쟁이든, 모두 강인한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주제로 활동해온 시민단체들—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김용균재단,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은 모두 장기적인 조직과 제안 활동 경험을 축적해왔다. 2020년과 2021년, 이 오랜 투쟁은 두 개의 이정표를 맞이했다. 하나는 ‘산업안전보건법’의 대대적인 개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제정이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기업에 대한 벌금뿐 아니라, 경영 책임자에 대한 유기징역까지 명시했다. 이처럼 엄격한 처벌 조항은 당연히 재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일련의 힘겨루기는 한국 산재 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잘 보여준다. 즉, 이 투쟁의 성과를 지켜내는 것뿐 아니라, 이 법률이 적용되는 범위를 점차 확대해나가는 과제가 동시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산재 운동은 언제나 다양한 전문 지식을 결합한 사회운동이었다. 의학적 분석에서부터 각종 소송과 산재 인정에 필요한 법률 지식, 그리고 일터를 개혁하고 감시하기 위한 전문 역량까지, 모든 단계가 빠짐없이 중요하다. 업종, 성별, 민족적 정체성이 서로 다른 노동자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아리셀 사고의 권리투쟁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총 9개의 시민사회 단체를 접촉했다. 여기에는 산재 의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민단체, 노동조합, 이주민 권리 단체, 그리고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익변호사들이 포함되었다. 우리는 아리셀 사고에 내포한 제도적 원인을 추적하면서, 동시에 ‘중대재해처벌법’ 이후 한국 산재 운동의 현황을 그려보려 했다.
‘중대재해처벌법’ : 누가 책임지는가?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2018년 12월, 태안군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하청노동자 김용균이 석탄 운송 벨트를 점검하던 중 기계에 머리가 끼어 사망했다. 정규직 취업이 어려운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이 사건은 많은 청년 노동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장기적인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 투쟁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발의 8일 만에 신속하게 통과되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성과는 2019년 10월에 설립된 김용균재단이다. 이 재단은 이후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추진하는 주요한 동력이 되었다. 2020년 말부터 2021년 초까지 단식 투쟁을 거쳐, ‘중대재해처벌법’은 시민사회 단체들의 압박 속에 마침내 통과되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중대재해처벌법’을 둘러싼 재계의 맹렬한 비난과,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려는 다양한 시도였다. “‘중대재해처벌법’을 대할 때 기업들은 항상 왜곡한다. 법이 통과되면 자기들의 경영이 위축될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중소기업일수록 더 그렇다.” 권미정 김용균재단 운영위원장이 말했다. “사업주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아리셀 사건에서도 이 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리셀의 박순관 대표이사는 법정에서 줄곧 자신은 ‘형식적인 대표이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말은 어디에서도 통용될 수 없는 주장이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오직 ‘중대재해처벌법’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다. 이는 사업주들이 ‘중대재해처벌법’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형적인 방식 중 하나이기도 하다.”
권미정 김용균재단 운영위원장
“아리셀 사건은 ‘중대재해처벌법’의 두 가지 주요 문제점 중 하나인 ‘책임 주체의 규정’을 그대로 드러낸 사례다. 아리셀 대표이사는 ‘형식적인 이사’라는 말을 통해 책임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이는 기업주들이 흔히 쓰는 수법 중 하나일 뿐이다. 더 흔한 방식은 ‘안전보건책임자’를 지정함으로써, 기업의 실질적인 이사들이 책임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다. 삼성 같은 대기업들은 ‘안전보건총괄사장’이라는 직책을 따로 두어, 법적 책임을 특정 직위로 전가하고, 이를 통해 최고경영자의 책임 추궁을 피하려 한다.”고 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은 말했다.
어느 정도까지는 안전 업무를 전담하는 직책을 두는 것이 입법 취지에 부합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손진우 소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법의 핵심 취지는 개인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안전에 투자하고 법적 의무를 다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기업이 실제로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적절한 보호 조치를 취했다면, 설령 사망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일정한 관용이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집행에서 ‘안전보건총괄사장’의 지위는 항상 매우 모호하다. 건설업체를 예로 들면, 이러한 직책은 직원들이 헬멧을 제대로 착용했는지 같은 실수 여부를 감독하는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생산 계획이나 안전 대책을 조정할 권한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형사 책임의 추궁 대상이 실질적 권한을 가진 책임자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2023년 5월 있었던 ‘중대재해처벌법’ 제1호 사건인 경기 양주 채석장 붕괴 사고에서, 검찰은 사건에 연루된 삼표그룹 회장을 직접 기소했고, 이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긍정적 해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피고 측이 혐의를 부인함에 따라,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계속 재판이 진행 중이며 아직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다.
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중대재해처벌법’의 두 번째 쟁점은 바로 적용범위다. 법 제정 초기, 중소기업이 사업 조정을 제때 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정부는 상시근로자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 2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었다. 이 유예기간이 2024년 1월에 종료되었고, 바로 이 시의적절한 종료 덕분에 아리셀 사는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으로 기소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체 법체계는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는 전혀 규제하지 않으며, 이 같은 소규모 사업장이야말로 안전 위험이 가장 심각한 곳이다. 대구시에서 이주노동자 조직 활동을 해온 차민다 성서공단지역지회 부지회장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가장 작은 규모의 사업장은 대개 근로자가 5인 미만이다. 이들 사업장은 중대재해가 가장 쉽게 일어나는 곳이며, 치명적 사고나 중환자 치료가 필요한 중상해가 자주 발생한다.”
이 외에도, 이 법의 하위 법령인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은 다양한 제약을 두어 법 적용의 범위를 좁혔다. 직업병 관련 사건에 대해 현재 ‘중대재해처벌법’은 급성 질환에 한정해 적용되며, 그것도 업무와의 명백한 인과관계가 확인된 질병이어야 한다. 따라서 직장에서 수년간 누적되어 발병하는 장기 질환들—예를 들어 진폐증이나 백혈병 등—이 이 법의 처벌 규정에 포함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아 있다. 또한, 공공시설의 관리 소홀로 발생한 재해에 대해서도, “공공시설”이라는 개념 자체에 논란의 여지가 많다. 예컨대 “시내버스”는 “대중교통수단”의 범주에 명확히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중대재해처벌법‘이 완전히 적용되지 않는다. 김용균재단의 경우, 이 새로운 법률의 집행 상황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그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향후 일정 기간 동안의 주요 투쟁 과제가 될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적용 대상 문제에서, 우리의 핵심 요구는 ‘누구도 제외하지 말고, 모두에게 이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미정 김용균재단 운영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 참여가 강조된 위험성 평가 제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2020년과 2021년의 법 개정과 입법 이후, 오랫동안 경시되었던 한 가지 고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위험성 평가’다. 2013년 ‘산업안전보건법’이 처음으로 사업장 위험성 평가 조항을 포함한 이후, 이 제도는 줄곧 실효성이 떨어졌다. 조항은 기업이 매년 노동자를 참여시켜 안전 위험성 평가를 해야 한다고 명시했지만, 많은 경우 노동자들은 위험성 평가가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실제 참여한 적은 없었다. 2022년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은 이 점에 대해 대대적인 정비를 가했다. 해당 법은 “사업주 및 경영책임자는 안전보건을 확보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했고, 여기에 “조치를 취하여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구축·이행할 책임”을 추가했다. 동시에 2022년 말, 고용노동부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 로드맵의 4대 전략 중 첫 번째는 “위험성 평가 중심의 자율 예방체계 구축”이었으며, 이는 상시근로자 5인 이상 사업장에서 위험성 평가 제도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보다 엄격한 규제는 분명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고용노동부의 통계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3년 사이 전체 산업에서 인구 1만 명당 사고 사망자 수는 0.46명에서 0.39명으로 완만히 감소했다. 민주노총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이후 원래는 위험성 평가를 시행하지 않던 사업장들 대부분이 이제 이를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공동 발간한 2023년 <신판 위험성평가 안내서>는 기업이 안전 위험성 평가를 시행할 때 따라야 할 절차를 명시했다. 사전 준비부터, 유해 요소의 식별, 위험 정도의 평가, 위험 저감 대책, 결과 공표 및 기록까지 모든 단계에 규칙이 설정되어 있다. (번역: 중국노동추세)
이에 따라 노동조합과 노동단체의 관심은 ‘노동자 참여’에 집중되었고, 그것은 바로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가 실제로 일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손진우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위험성 평가의 핵심은, 노동자가 스스로 작업 현장에서 직면한 위험을 평가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며, 거기에 일정한 통제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시행 과정에서 위험성 평가는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다. 예를 들어, 일선 노동자들이 기업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지 못하거나, 작업 흐름을 방해할까 봐 안전 장비 추가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아리셀 사건은 위험성 평가 제도의 또 다른 큰 결함을 드러냈다. 비정규직 고용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작업장에서는 이 제도가 거의 무력화된다. 한편으로, 현행 규정상 기업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위험성 평가에 참여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 또 다른 한편으로, 단기 고용된 노동자는 설령 참여하더라도 작업장의 안전을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아리셀의 대형 화재 사건이 발생하기 며칠 전, 리튬 배터리 단락으로 인한 소규모 화재가 이미 한 차례 발생했다. 그럼에도 관리자는 리튬 배터리를 쌓아놓는 방식을 즉시 수정하지 않았고, 다음 날 바로 생산을 재개했다. 이러한 배터리 적재 방식은 경험 있는 직원에게는 명백한 위험 요소였지만,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된 단기 노동자에게는 막연히 위험하다고 느끼더라도 그 심각성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권미정 운영위원장은 이렇게 지적했다. “위험성 평가에 참여한 사람은 오직 아리셀의 정규직 직원과 단기 계약직뿐이었고, 그것도 평가가 이뤄지는 시점에 직접 고용된 자만 참여할 수 있었다. 이외의 노동자 유형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비정규 고용 형태 자체를 고려하지 않고 ‘완전한 위험성 평가’를 설계하려 한다면, 그 결과는 참여 범위의 점점 더한 협소화일 뿐이며, 그 실제 의미 또한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규모가 작고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사업장을 위험성 평가 제도 범위 안에 효과적으로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의 단일 사업장 단위 위험성 평가 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지역 공동 관리’ 체계 구축을 개혁 방향으로 제안했다. 손진우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산업단지를 단위로 할 경우, 지역 단위의 안전 관리자 직책을 신설하고, 여러 기업이 안전 관리 자원을 공유하거나, 동일 지역 내 노동자들이 함께 위험성 평가에 참여하는 방식이 가능할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산재 신청은 여전히 하늘의 별 따기
중대재해 예방과 산업 안전 개선 측면에서는 최근 몇 년간 성과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재해 발생 이후의 신고, 책임 추궁, 보상 절차에 있어서는 여전히 제도적 결함이 뚜렷하다. 많은 이주노동자에게 있어, 산업재해가 발생한 순간부터 인정, 치료, 보험 수령까지의 정식 절차로 나아가는 일은 매우 험난하다. 한편으로는 이주노동자들이 관련 절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동포들 간 구전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기 쉽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용자들이 노동자의 산재 신청을 적극적으로 막기 때문이다. 이주노조(MTU) 위원장 우다야 라이(Udaya Rai)는 이렇게 밝혔다. “산재 기록이 잦은 기업에는 고용노동부가 감사를 나오고, 불법 상황이 발견되면 벌금을 부과하거나 작업 중지를 명령한다. 그래서 기업들은 보통 산재 사고를 은폐하고, 노동자에게 신고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일부 공장주는 피해자에게 치료비를 사적으로 지불하는 방식으로 합의를 시도하며, 이를 통해 노동자가 산재 신청을 하지 않도록 만든다.
이주노조(MTU) 위원장 우다야 라이(Udaya Rai)
EPS 이주노동자는 직장 변경 제한으로 인해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 E-9 비자 제도에 따라 EPS 이주노동자는 고용계약이 종료된 후, 직장을 성공적으로 옮기지 못할 경우 일정 기간 내에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EPS 제도하에서 직장을 옮기려면 원래 고용주의 동의를 먼저 얻어야 한다. 이로 인해 고용주는 ‘해고를 통해 강제 귀국시키겠다’는 협박으로 이주노동자를 위협할 수 있게 된다. 이주노동자는 해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위험한 작업을 거부하지 못하고, 사고가 발생한 후에도 관계 당국에 신고하지 못한다. 최근 우다야가 접수한 한 사례에 따르면, 한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가 작업 도중 손가락 세 개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는데, 고용주는 산재 사고를 신고하지 않았고, 곧바로 그를 해고했다. 이 피해자는 극심한 불안과 무력감에 빠졌고, 결국 노동조합의 개입으로 다른 사업장으로 전환하여 EPS 노동자로서의 합법적 지위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산재가 신고되었다고 해서, 이후 치료와 보상을 순조롭게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이주노동자지원부 소속이자 아리셀 사건 유가족을 지원해온 최정규 변호사는 이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다. 그는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의 사례를 들었다. 이 이주노동자는 농기계 공장에서 일하던 중 유해한 분진을 흡입하여 영구적인 질병에 걸렸다. 하지만 기업 측은 이 노동자가 질병을 얻은 직후 설비를 교체했고, 작업장 증거를 보존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해당 산재 신청은 고용노동부로부터 승인되지 않았다. 노동자는 행정소송을 통해 고용노동부에 재심사를 요구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법무부는 해당 노동자에게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고, 단지 출국 기한 연장만 허용했다. 결국 체류 상태는 ‘기한 안에 출국해야 하는 카운트다운’이 되었고, 피해자는 소송 기간 내내 삶과 권리를 크게 제한받았다. 이 사례는 모든 이주노동자의 산재 사건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두 가지 문제점을 드러낸다.
첫째, 산재 인정에 필요한 입증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으며, 피해자는 대개 작업장에 다시 들어가 증거를 수집하기 어렵고, 기업 측은 증거를 없앨 능력을 갖추고 있어 조사 난이도가 급격히 높아진다. “이주노동자에게는 이런 문제에 직면했을 때, 즉시 변호사나 법률 전문가와 연락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종교단체나 시민사회단체를 통해 대응 절차를 시작하는데, 그 사이에 증거는 이미 파기되거나 유실된 경우가 많다.”
둘째, 산재 인정이나 소송 절차가 진행 중인 동안, 만약 비자나 EPS 계약 기간이 종료된다면, 피해자는 체류 불안정 문제에 직면한다. 최정규 변호사는 단지 출국 기한을 연장해주는 방식은 당사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 보았다. “출국 기한 연장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노동자를 불안정한 임시 상태로 밀어넣는 조치일 뿐이다. 소송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노동자에게는 합법적인 체류 자격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자가 자신의 법적 권리를 충분히 행사할 수 있으며, 강제 출국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불안과 스트레스를 겪지 않아도 된다.”
최정규 변호사
최정규 변호사는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제도적 변화가 여전히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보다 먼저, 객관적이고 명확한 안전 점검 메커니즘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안전 점검을 통과한 작업장과 기숙사만이 고용 허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입증 책임과 관련해서는, 기본적인 입증 책임을 노동자만이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완화하거나 전환할 수 있어야 비로소 공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방향으로 제도적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성 산재: 체계적인 무시
산재에 대한 보상과 진료가 모든 사람의 권리라고 할 때, 신분·인종·성별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고용노동부의 수치는 매우 이상한 현상을 보여준다. 한국의 경제활동인구 중 남성은 약 1,630만 명, 여성은 약 1,240만 명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재해(사고성 재해와 직업병 포함)로 인정받은 사례에서 여성의 승인 건수는 오랫동안 남성의 4분의 1 수준에 머물러왔다.
이 수치는 겉으로 보기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위험한 일을 한다”는 결론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보다는 오히려 여성이 산재 제도 바깥으로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우선, 이는 성별과 비정규 노동의 관계를 무시한다. 한국의 20대 미혼자 가운데, 정규직으로 일하는 남성의 비율은 동 연령층 여성보다 7.7% 더 높으며, 반대로 여성의 임시직 비율은 남성보다 10.3% 더 높다. 그리고 비정규·단기 고용 노동자는 본래 산재보험 보장 범위에서 제외되어 있다. 가사노동, 돌봄 등 비정규직 사용이 많은 업종에서는 여성 노동자의 비율이 더 높다. 제조업에서도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아리셀 중대 재해 사건의 사례를 보면, 23명의 사망자 중 20명이 비정규직이었고, 그중 17명이 여성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산업안전 문제를 오랫동안 주목해 온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공동대표에게 이것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는 줄곧 기술도 낮고 임금도 낮은 일에 배정되어 왔다. 특히 이주노동자의 경우, 회사가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않는 경우도 있다. 기술이 필요 없는 일만 시킨다. 필요할 때 불러서 쓰고, 필요 없을 때는 내보낸다. 한국 노동운동의 맥락에서 보면, 아리셀 사건 이전까지는 여성 이주노동자가 공장에서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들이 근로계약서도 없고,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 채 떠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 산재로 인정받는 사고 유형을 세세히 살펴보면, 서비스업이나 돌봄노동에서 흔히 발생하는 사고들은 애초에 산재 인정 범주에서 배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업안전보건법’에서 “근골격계에 부담을 주는 작업”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매일 10킬로그램 이상의 물체를 무릎 아래, 어깨 위 또는 양팔을 뻗은 상태에서 25회 이상 드는 작업.” 이 정의는 건설업이나 광산업 같은 현장을 기준으로 설정되었고, 그 결과 요양원, 물류, 외식업 등 다양한 일터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는 인정받기 어렵게 되었다.
전수경 공동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은 건설업, 중공업 위주로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남성의 산재가 더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산재와 남성을 자동으로 연결짓고, 여성이 하는 일은 단순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정부의 산재 신청 시스템도 조립이나 운반 중 발생한 손상에 대해, 그것들을 기준으로 포함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여성 노동자의 산재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접한 사례는 다르다. 예를 들어, 한국은 화장품을 대량 수출하는데, 하루 종일 화장품 용기를 조립하다 손톱이 빠지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또 쿠팡 물류센터에서 허리를 다친 여성의 이야기, 오랫동안 어깨를 사용하는 업무를 하다가 결국 수술을 받아야 했던 여성들 이야기도 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돈으로 치료받았다. 왜냐하면 산재 신청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공동대표
노동건강연대는 3년 연속으로 ‘산재사고 회복 지원 계획’을 시행했고, 어려움에 처한 여성 산재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건강 회복 지원금을 제공했다. 접수된 지원자들의 사례 내용을 모아 매년 한 차례씩 산재 연구 보고서를 발간했다. 2022년, 지원금을 받은 피해자 50명 중 사고 당시 정규직이었던 사람은 단 13명뿐이었고, 정식으로 회복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할 당시에는 단 6명만 남아 있었다.
산재 신청에 실패하면 피해자의 치료 권리는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 회복 지원 프로그램에 신청한 모든 피해자들 가운데, 노동자 보험을 통해 진료비를 지급받을 수 있었던 이는 2%도 채 되지 않았다. 약 50%의 피해자는 국민건강보험을 통해 진료비를 충당했고, 30%가 채 안 되는 수는 민간 보험을 통해 해결했다.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20% 전후를 유지했고, 이는 곧 다섯 명 중 한 명은 치료조차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산재는 어디까지나 신체적으로 입은 외상과 통증에 국한된 것이었다.
여성 노동자를 둘러싼 또 다른 흔하지만 보상 체계가 없는 손상이 존재한다. 바로 성희롱과 성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이다.
현실에 대한 비판은 다시 법제도 개혁 요구로 이어졌다. “산재보상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정부에 산재보상 제도의 전면 개혁을 계속 요구하고, 여성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법을 계속 개정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산재보상보험법’과 ‘산업안전보건보험법’은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 전수경 공동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맺음말: 산재 운동, 멈출 수 없는 역류 속 노 젓기
한국 취재 마지막 날, 취재진은 마침 또 다른 이주노동자의 추모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2024년 8월, 겨우 32세였던 몽골계 노동자 강태완은 공장에서 시험용 원격 조작 차량에 치여 숨졌다. 강태완은 <한겨레신문>이 4년간 이어온 몽골계 이민자 추적 보도의 주인공이었고, 그 보도는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중단되었다. 사고 발생 이후, 해당 업체의 대표는 사고 책임에 대해 유가족과 입장 차이를 보여왔고, 결국 11월 말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사과 성명을 공식 발표했다. 형사 책임에 대해서는 사건이 아직도 재판 중이며, 마감 시점까지도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다.
강태완 추모식 현장
이 사고와, 산업 재해로 인해 다치고, 사지가 절단되며, 목숨을 잃은 무수한 사고들은 각종 신법들이 시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산업재해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다시금 보여준다.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놓인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정체성이 얽혀 더 쉽게 희생당하고, 더 어렵게 책임을 묻는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산재 운동은 바로 이런 거센 역류 속에서 거칠게 노를 젓는 싸움이다.
제도 하나를 바꿔내면, 그것을 유지하고 감시하며 확대해나가는 데에 더 많은 힘이 든다. 어떤 국가의 사회운동을 이런 식의 점묘식 글쓰기로 다룬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누락을 동반한다. 한국 전역에서 펼쳐지는 산재 운동은 전체를 조망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작업이다. 본 글에 담긴 인터뷰 내용은 어디까지나 아리셀 사고의 맥락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취재 과정에서 수집된 것이며, 그만큼 여러 측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의 전자업계 백혈병 피해자 투쟁이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과로사 관련 연구 등은 별도의 글에서 다시 다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2024년 한국 산재 운동의 단면을 제시하는 일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것은 단지 그들의 투쟁이 세계에 더 알려질 가치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년에 걸친 이들의 투쟁은 매우 다양한 측면을 관통하며, 예방, 보상, 책임 규명의 각 단계에서 보여준 깊이 있는 접근은 일부 국가에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수준이기 때문이다.
한 차례의 취재를 마무리한 뒤 진행된 잡담 자리에서, 권미정 운영위원장은 현재 한국 사회운동이 저조기에 들어섰다고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한국 노동운동의 현장에 오래 머물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판단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른바 ‘저조기’라 해도, 산재 운동에 투입된 인력, 자원, 정책 제안의 폭과 깊이, 시위 동원력 등은 동아시아 국가 기준으로 이미 감탄할 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 노동운동을 보도하는 의미다. 단지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더 넓고, 그만큼 더 어려운 조건 속에서 이 운동이 어떤 형상으로 진화하고, 어떤 갈등을 마주하는지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런 경험은 중국어권의 독자들에게 — 그것이 현장에서 활동 중인 노동운동가이든, 새롭게 길을 모색하는 청년 세대이든 — 모두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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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 노동자의 상황과 노동 문제를 다루는 비정부 웹사이트인 'China Labor Trends'의 탐사팀이 쓴 글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