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변동의 시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9세기 후반 이후, 역사적 관점을 중시해온 학자들은 사회와 정치의 변화를 재산 관계와 생산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술적 변화의 결과로 이해해왔다. 자본주의는 국제 국가 체제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았고, 국가는 대체로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를 유지하는 데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와는 다른 사유의 전통도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이 전통에서는 국가가 관료제와 군사력의 집중을 통해 경제 관계를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 자본주의적 착취는 국가가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재정을 마련하는 수단이며, 동시에 국가 간 경쟁 속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략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기후 변화, 전쟁, 긴축 정책, 국가 부채 등 거의 모든 주요 문제의 밑바탕에는 국가와 시장의 관계가 놓여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전개를 자본의 이해관계로 봐야 할까, 아니면 국가 간 경쟁과 권력 투쟁의 결과로 봐야 할까? 이 질문은 단순히 분석적 흥미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디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세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상상력 자체가 달라진다. 만약 기후 변화와 전쟁이 국가 간 경쟁의 산물이라면, 더 큰 국제적 협력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반면 그것들이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면, 경제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오래된 논쟁을 되짚어보고, 그동안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하나의 전환점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강대국 정치의 부상이다. 그러나 나는 궁극적으로 오늘날의 세계 질서는 그것이 출현한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 맥락은 단일한 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
출처: Unsplash+, Illo Design
자본주의와 국가 체제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의 기념비적 저작 ⟪근대 세계체제⟫(The Modern World-System)는 오늘날 세계 질서의 기원을 16세기 북서유럽으로 설정한다. 그는 이 시기, 그 지역에서 “끝없는 자본 축적”을 목표로 하고, 세계적 무역을 기반으로 한 분업 구조에 기초한 새로운 생산 양식이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이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최대 이윤 실현을 목적으로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한 생산”으로 정의된다. 그의 설명에서 국제 국가 체제는 자본주의 경제의 출현 직후 등장했으며, 베스트팔렌 조약(Treaty of Westphalia, 1648) 시점에는 제도적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이 과정은 우연한 발전이 아니었다. 월러스틴은 중국이나 로마 같은 세계제국에서는 관료제가 지나치게 많은 이윤을 흡수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등장하거나 유지될 수 없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지속되려면 “법적으로 정의된 어떤 정치 단위보다 더 큰” 경제적 연결망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시사하는 바는, 세계 경제와 세계 정치에 대한 진지한 분석은 주요한 역사적 변화를 자본주의 내부의 작동 원리으로 되돌려 설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존 G. 러기(John G. Ruggie)는 월러스틴의 접근을 요약하며, 국제 국가 체제가 “자본가들 간 경쟁의 부수적 산물이자 동시에 자본주의의 존재와 지속적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구조 조건”이라고 말했다. 월러스틴의 대작이 출간된 지 10년 후, 역사사회학자 찰스 틸리(Charles Tilly)는 보다 신중한 비판을 제기했다. 그는 누군가가 자본주의와 국가 체제라는 “근대 시대의 두 개의 상호의존적 주된 과정” 모두의 전개를 아우르는 ‘총체적 역사’를 쓰는 데 성공하길 바란다고 언급했다.
월러스틴의 이론에서 핵심 쟁점은 자본주의의 출현과 국제 국가 체제의 등장이 동일한 역사적 시간축 위에 놓여야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일정 정도 먼저 등장하고, 이후 국제 국가 체제의 등장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기원에서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입증할 수 없다면,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도 존재해 온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두 과정은 충돌할 수 있는 별개의 자율적 사회 현상으로 간주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월러스틴이 주장한 이러한 시간적 정렬은 점점 더 성립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였다. 첫 번째 본격적인 도전은, 월러스틴의 자본주의 개념과 시대 구분을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국제적 영향을 추적하려 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나왔다.
자본주의 정의하기
자본주의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 기원 논쟁에 참여하는 많은 학자들이 맞서고 있는 핵심 쟁점은 로버트 브레너(Robert Brenner)와 엘런 M. 우드(Ellen M. Wood)가 방어한 논제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정의한 자본주의―“교환을 통한 이윤 생산”―는 그 기준이 지나치게 넓어, 14세기 르네상스 이탈리아, 13세기 중세 유럽의 도시들, 심지어 5,000년 전에도 자본주의의 기원을 찾을 수 있게 만든다. 이에 브레너와 우드는 자본주의를 역사적 현상으로 보다 명확히 한정해야 하며, 자본주의를 마치 영원한 것처럼 ‘자연화’하여 극복 불가능한 체제로 만드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자본주의를 생산과 계급 관계의 문제를 중심으로 재정의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생산자는 생산수단에 접근하기 위해 시장에 의존해야 하며(예: 농민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채 임차하거나 고용되어야 하며), 잉여를 추출하는 자는 군사적·정치적·사법적 강제력과 같은 ‘비경제적’ 수단이 아닌, 오직 시장의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존해야 한다. 다시 말해, 봉건 영주처럼 비경제적 수단으로 농민에게서 잉여노동을 강제로 추출하는 방식은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월러스틴의 정의보다 훨씬 더 좁고 엄격하며, 노예 노동을 자본주의 범주에서 배제하고, 다양한 생산 양식이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은 이 정의가 지나치게 협소하여, 생산과 재생산 과정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노동―특히 노예제―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비판자들이 자본주의의 범주를 확장하려 할수록, 자본주의를 명확히 정의할 가능성은 오히려 희박해진다. 그럼에도 브레너–우드의 좁은 정의를 기준으로 할 때, 자본주의의 출현은 15세기 영국 농촌에서 시작되어, 17세기에 이르러 그 전환 과정이 완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특정 국가 수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는 월러스틴이 주장한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다. 이후 이 정의를 채택한 많은 연구는 다른 나라들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밝히거나, 영국의 자본주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던 국제적 조건을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내게 더 중요한 것은, 브레너–우드 논제에서 파생된 연구들 가운데 자본주의의 정의와 국제 질서의 성격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려 한 흐름이다.
브레너–우드의 정의를 국가 체제 맥락에 적용한 대표적인 연구는 벤노 테슈케(Benno Teschke)의 ⟪1648의 신화⟫(The Myth of 1648)이다. 테슈케에 따르면, 초기 근대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한 결과, 왕조적 주권은 점차 탈인격화되고 의회 중심의 주권으로 전환되었다. 이 전환은 1688년 명예혁명 이후 확고해졌다. 그 결과 영국은 최초의 “근대 국가”로 자리 잡았으며, 서열과 명성에 집착하는 왕조 정치에서 벗어나, 대륙으로부터의 위협을 상쇄하기 위해 ‘세력 균형’이라는 명시적인 외교 정책을 채택했다. 이와 함께 영국은 영국은행, 국가부채 등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여 경쟁국들에게 압도적인 재정적 부담을 가할 수 있었다. 테슈케는 유럽에서 국제 관계가 1688년 이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그리고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 점진적으로 “근대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국가들이 근대 국가가 행사하는 경제적·군사적 힘에 대응해야 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적응 과정은 지정학적으로 서로 연결되고, 사회정치적으로는 불균등하게 발전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결국 현대 국제 질서가 형성되었다.
테슈케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영토적으로 분절된 국가 체제의 형성은 자본주의에 선행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와 지정학적 다중세계 사이에는 구성적 또는 유전적 연결이 없다.” 즉, 월러스틴이 주장하듯 경쟁적 국가 체제가 자본주의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자본주의가 없는 국가 체제는 단지 이론적 상상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존재했다. 따라서 세계 질서의 기원을 자본주의의 국제적 작동에서 찾는 대신, 테슈케가 말하는 “지정학적 다중세계”가 행사하는 구조적 압력을 분석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국가 체제를 넘어서는 국제 질서
우리가 방정식의 다른 한쪽—즉 국가 체제—의 기원을 고려하면 무엇이 일어나는가? 위에서 다룬 연구들은 근대 국제 질서를 근대 초 유럽의 어느 시점에서 등장한 국가 체제로 묘사한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국제정치(IR) 학자들, 국제 역사학자들, 국제법 학자들은 이러한 “근대 초 논제”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여러 연구들은 이 국가 체제의 탄생을 훨씬 뒤인 19세기 동안에 나타난 것으로 식별한다. 예컨대 데이비드 아미티지는 “국가들의 세계의 창조는 대체로 지난 200년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며, 안드레아스 오지안더는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것은 19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조던 브랜치는 “주권적 영토 국가성은 […] 나폴레옹 시대 유럽의 잔해 속에서 구성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전통적 역사 서술을 약간 수정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이전 시기에 어떤 국가 체제도 식별하지 않는다면, 국가성이라는 언어는 초기 근대의 광범위한 시기를 세계 정치를 이해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국가들의 국제 체제를 식별하는 것은 국제 관계가 점점 국가라고 불리는 추상적 법적 인격들 간의 관계로 상상되었고, 그들이 서로의 외적·내적 주권을 인정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는 유럽과 비유럽 세계 사이에서 점점 더 위계적 제국적 배열이 등장한 사실을 흐리는데, 이러한 배열은 유럽에서 등장한 국가 체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없으며, 주권 평등이 아니라 주권의 분할에 기반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많은 이들이 주권 국가 체제가 세계 전체를 덮게 된 것은 탈식민화 이후, 즉 월러스틴이 글을 쓰던 시기 무렵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국제 관계는 단일한 질서 패턴으로 환원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하면서도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역사적 전개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세계 정치를 점점 더 경쟁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강대국 체제”의 탄생이다.
강대국과 강대한 정치
국제 정치에서 권력이라는 언어는 사실 18세기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우리는 사소페라토의 바르톨루스 같은 14세기 인물의 저술, 조반니 보테로의 16세기 저작 ⟪국가 이유⟫(Reason of State), 그리고 앙리 드 로한의 17세기 저작 ⟪기독교 세계의 군주와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관한 논고⟫에서 “권력”에 대한 논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언어, 특히 “강대국”이라는 개념이 광범위하게 퍼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마블리 신부는 강대국, 중견국, 소국 등 다양한 “계급”의 권력을 구분하고 있었으며, 독일의 정경학자인 고트프리트 아헨발과 영국 저널리스트 존 캠벨 같은 인물들은 이 권력을 측정하려고 분주히 움직였고, 전자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해 통계학이라는 학문을 발명했다. 이처럼 권력이 국제 관계의 전부이자 본질이라고 보는 국제 정치 사상의 한 형태가 널리 퍼졌다.
이 사유 전통은 “주권 국가들”을 논하는 사유와 뚜렷이 달랐다. 두 전통 모두 세계 정치를 개인들(예: 신성로마 황제, 교황, 헤세카셀의 방백)이 아니라 추상적 인격들(“국가들”, “권력들”) 간의 관계로 이해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권력의 언어는 불평등과 군사 능력을 강조한 반면 “주권 국가들”의 언어는 평등과 권리를 강조했다. 에메르 드 바텔의 자주 인용되는 공식은 후자의 관점을 잘 요약한다. “난쟁이도 거인만큼 사람이며, 작은 공화국도 가장 강력한 왕국 못지않게 주권 국가다.” 그러나 결국 권력과 주권의 언어는 부분적으로 병합되어, 법적으로는 평등한 주권 국가들이지만 권력은 매우 다른 국가들로 구성된 세계라는, 매우 현대적인 국제정치 사고를 만들어냈다.
놀랄 것도 없이, 주권 평등의 원칙은 권력의 언어와 불편하게 공존했다. 1815년 빈 회의 이후 강대국들은 주권 평등의 원칙에 대한 예외를 만들어냈고, 국제법의 내용 자체를 형성하는 데 특정한 특권—개입을 승인함으로써 주권의 법적 한계를 결정할 권리—을 주장했다. 여기서 부분적인 논리는 국제 체제에서 군사력이 극도로 불평등하게 분포했기 때문에 그들이 국제법을 집행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점이었다(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그 점에서 특정한 의무를 가진다고 여겨졌다). 오늘날까지 이 법적 특권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구조에 내재된 주권 평등의 핵심 예외를 이룬다.
18세기 후반 권력 중심의 국제 체제가 점진적으로 등장한 것은 군사 경쟁을 증가시켰고, 그에 따라 파괴적 전쟁의 가능성도 높였다. 이러한 이유로, 권력에 대한 원초적 경쟁과 영토 획득 및 전쟁을 통한 국제 행위자들의 소멸은 초기 근대보다 19세기 내내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해석은 초기 근대 유럽을 전쟁 때문에 현대 국가들이 탄생한 잔혹한 세계로 묘사하는 찰스 틸리 같은 저명한 사회과학적 해석과는 상반된다. 틸리와 많은 이들에게 “최근까지 다른 국가와의 전쟁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던 국가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프랑스 혁명 이전에 “자신을 방어하지 못해 소멸된 유럽의 행위자”를 거의 찾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 시기에는 정복이 널리 “소유권에 대한 의심스러운 근거”로 간주되었다—이는 19세기와 상당히 다른 상황이다. 오직 19세기가 열릴 무렵이 되어야 권력이 국가의 서열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고, 추가적 권리를 부여하게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그들의 생존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에서 군사 능력의 확보는 절대적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강대국 체제의 경제적 결과
강대국 체제의 부상과 그것이 낳은 군사 경쟁은 막대한 자본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의 국가는 여전히 초기 단계였으며, 이는 근대 초에 “절대주의”라는 개념이 19세기에 발명되어 과거로 투사되면서 종종 가려졌다. 국가는 약한 중앙 정부를 가지고 있었고, 통일된 정치·법적 질서를 강제할 수 없었으며, 극히 미약한 경찰력에 의존할 뿐이었고, 내부 관세와 여러 경쟁 통화들로 갈라져 있었다. 이러한 신생 국가들의 자본 수요는 주로 차입으로 충족되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유럽 대륙 전역을 가로지르는 초기 금융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베어링가와 로스차일드가 같은 금융 가문이 장거리 무역 자금을 위해 설립한 이러한 네트워크는 18세기 후반에야 등장했다.
동시에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대출자를 지칭하는 새로운 명사, ‘자본가’ (le capitaliste)가 나타났다. 이 단어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것은 “프랑스 왕실 정부의 특정 부문 중 어느 하나에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자본을 제공한 사람” 또는 더 간단히 “왕실 및 공공 부채에 투자한 사람”을 의미했다. 1830년대까지 프랑스어 화자들은 18세기 후반 이래 이어져 온 전쟁 재정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단어 ‘자본주의’(capitalisme)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시기는 “국가와 통치자가 전쟁 또는 전쟁 위협으로 인한 갑작스럽고 종종 대규모 정부 지출 증가를 충당하기 위해 거액의 돈을 차입한” 시기였다.
이 논의에서 완강하게 포함되지 않은 것은 노동에 관한 문제였다. 노동 문제는 대체로 “상업 사회”의 본질적 특징인 “분업”에 관한 논쟁 맥락에서 다뤄졌다. 그 문제는 거의 본질적으로 세계적이었고, 초기에 자본과 자본주의의 문제보다 훨씬 해결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다. 결국 두 문제가 엮여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범주 아래 묶였지만, 마이클 소넨셔가 탁월하게 주장하듯, 우리는 이 결합 과정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19세기 초 동시대인들에게 자본주의—로스차일드 같은 상업 은행 가문이 상징하는 “주권자들의 주권자”—는 주권 부채의 빠른 발전과 폭발로 도래했다. 이는 공동체의 지위와 생존 가능성이 궁극적으로 군사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인식의 증가에 의존했다. 이 세계에서 멋진 말은 실제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프랑스 혁명과 구제도 국제 질서 규칙의 붕괴 이후 이러한 현실은 더욱 분명해졌다. 몇십 년 후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은 엄청난 금융적 사건이 되었다. 프랑스에 부과된 거대한 전쟁 배상금은 진정한 국제 채권 시장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고, 동시대인들이 자본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을 확립했다.
국제사회에 자본주의를 내재시키기
국제 정치·법적 질서의 성격(그것이 국가 체제인지 어떤 다른 것인지)은 인류에게 자본주의와는 별개의 독립적 제약이다. 따라서 현재의 세계적 국면을 이해하려는 어떤 시도도 자본주의 내부 작동 원리만을 중심으로 한다면, 작동하는 힘들의 전체 복잡성을 포착할 수 없다.
자본주의와 국가 체제를 대립시키는 논쟁의 언어 자체가 부적절하다. 한때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국가 체제(states-system)” 개념이 근대 국제 질서의 패턴을 정확하고 완전하게 묘사한다는 가정은 지나치게 제한적이다. 국제 질서의 정치·법적 조직은 단일한 논리로 환원될 수 없다. 어떤 시대에도 국제 질서를 구성하는 다중의 논리들이 존재하며, 그 논리들은 거의 조화롭게 작동하지 않는다. 국가 체제의 등장은 19세기에 세계를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이었지만, 근대 권력 정치와 강대국 체제의 발전도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 자리 잡은 방식이었다. 좁은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이러한 새로운 국제 질서의 산물이었다.
내가 방금 묘사한 이러한 새로운 국제 질서 패턴은 깊은 경제적 변화를 낳는 원천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이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학자들이나 평론가들이 힘의 균형 변화, “패권 전환”, 전쟁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닌가? 그러나 분석적으로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특정 국가의 흥망이나 특정 전쟁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는 국제 관계의 “결” 자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주목해야 하며, 이는 단일 사건이나 단일 국가의 의도를 넘어서는 변화다.
국제 관계의 이러한 변화하는 “결”(texture)을 정확히 어떻게 포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일한 해답이 없는 열린 질문이다. 한 가지 잠재적 경로는 잘 알려진 “내재성(embeddedness)” 개념을 통하는 것이다. 세계 경제는 미국 경제처럼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데, 이 사회는 우리가 거의 생각하지 않지만 많은 법학자들, 역사학자들, 역사에 관심 있는 국제정치학자들이 “국제사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계 경제의 변화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 경제가 내재된 사회의 변화하는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
[출처] Between Capitalism and the State-System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
퀑텡 브뤼노(Quentin Bruneau)는 뉴 스쿨 사회연구대학원(Department of Politics, 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과 유진 랭 칼리지(Eugene Lang College)의 정치학 부교수다. 그의 저서 ⟪국가와 자본의 지배자들: 과거와 현재의 주권 대출(States and the Masters of Capital: Sovereign Lending, Old and New)⟫(컬럼비아대학교출판부, 2023)은 19세기 초부터 오늘날까지 주권 대출의 변화를 탐구한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