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내희
(사)참세상 이사장,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 대학 학장으로 일하고 있다.

영국에 본부를 둔 국제 구호 단체로 해마다 세계 빈부 격차 실태를 분석해 온 옥스팜이 올해 초 발표한 보고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근래에 빈부 격차가 심화된 것을 누가 모르랴만 그 극단적 양상이 놀라웠던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끈 점은 2015년 현재 세계 상위 1% 인구가 하위 99% 인구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최근 부쩍 심해졌다. 세계 인구 절반이 소유한 것과 같은 규모의 부를 소유한 최상위 갑부 수의 최근 추이가 그 점을 말해 준다. 최상위 갑부는 2010년 388명, 2011년 177명, 2012년 159명, 2013년 92명, 2014년 80명, 그리고 2015년 62명으로 그 수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상위 1% 인구의 재산이 세계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09년 44%, 2014년 48%이던 것이 2015년에는 50.1%를 돌파했다. 반면에 하위 절반 인구의 재산은 2010년보다 오히려 41% 이상 줄어들었다고 한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라면 36억이다. 고작 62명이 36억 명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니 믿기 어렵다. 부의 놀라운 집중이 아닐 수 없다.

부의 이런 극단적 집중이 일어난 시기는 2007년 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서브 프라임 모기지) 시장이 붕괴되며 미국발 금융 위기가 터진 뒤로 세계 경제가 유로존 위기, 신흥 시장 위기 등 지속적으로 위기를 겪은 시기와 일치한다. 이 시기에 세계 도처에서 해고를 당하고, 연금을 깎이고, 주택을 차압당하며 생활고를 겪는 민중이 급증했다는 사실을 새삼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옥스팜 보고서는 바로 이때 상위 인구는 오히려 더 많은 이득을 챙겨 재산을 늘렸음을 전해 준다. 이것은 경제 위기 속에서도 그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는 말로, 그런 일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기제가 작동한 결과일 것이다.

문제의 기제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 최근 폭로된 ‘파나마 문건’의 내용이다. 파나마 문건은 1150만 개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해서 연루된 기업과 개인의 숫자도 엄청나다. 문건에 나오는 기업 이름만도 21만 5천 개이고, 고객은 1만 4천여 명에 이른다. 여기서 말하는 ‘고객’과는 별도로 문건에는 수많은 개인들이 언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에 중국인이 2만 명, 타이완인이 1만 6천 명 포함되었다고 한다. 한국인의 경우 195명으로 비교적 적은 수로 보이나, 문건 내용이 다 공개되면 그 수가 늘어날 수도 있다.

파나마 문건은 탈세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는 세계 특권층의 면모를 보여 준다. 거기에는 홍콩 출신의 세계적 영화배우 청룽, 미국의 인기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의 유명 심사위원 사이먼 코웰,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 아르헨티나의 세계적 축구 선수 메시, 영국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미드필더 윌리안과 유명 골퍼 닉 팔, 전직 축구 스타 앤디 콜 등 문화 예술인과 스포츠 인사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문건의 더 중요한 의미는 세계 곳곳에서 정치적 권력이 부의 축적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해 준 데 있지 않은가 싶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도 세계의 많은 전·현직 국가 지도자와 그 친인척이 파나마 문건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알라위 전 이라크 총리, 샤리프 전 파키스탄 총리, 귄뢰이그손 아이슬란드 총리, 알 사우드 사우디 국왕, 푸틴 러시아 대통령,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 카메론 영국 총리 등이 그들이다. 한국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현의 이름이 포함된 것으로 보도되었고, 중국에서는 집권 이후 ‘부패 척결’을 강조해 온 시진핑 주석의 두 누나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에 유령 회사를 차려 놓은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전·현 상무위원 7명의 친인척이 재산을 빼돌린 것으로 나타났다.

탈세를 위해 재산을 외국의 유령 회사로 빼돌리는 것은 이번에 들통난 로펌 모색 폰세카를 통해서만 이루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파나마 문건에는 중국인 이름이 유독 많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 미국인 이름은 없어서 일각에선 중국을 곤란에 빠뜨리려는 미국 측의 공작이라는 해석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미국인 이름이 이번에 많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미국인의 경우 굳이 외국으로 재산을 빼돌리지 않아도 미국 내에 탈세 수단이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파나마 문건은 오늘날 세계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중요한 일면을 보여 준다. 유출된 문건은 대부분 탈세 목적으로 설립된 유령 기업 또는 계좌와 관련되어 있다. 이런 기업, 계좌가 설립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정치적 질서가 그것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 이름이 파나마 문건에 대거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의 의미도 이 맥락에서 따져야 한다. 세계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재산을 해외 도피시키고 있는 마당에, 오늘날 극소수 최상위 갑부가 세계의 부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은 전연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금 세계는 자본을 공개적으로 굴리는 기업가만이 아니라 유명 연예인, 스포츠 인사, 정치 지도자가 한통속이 되어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해 불평등을 앞장서 조장하고 있다. 이 리그는 갈수록 높은 진입 장벽을 쌓아 민중을 배제하며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담합하는 집단이다. 이들에게 부가 집중되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새로운 정치 질서를 세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총선 결과가 만족스럽지만은 않다. 총선 뒤 한국 사회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해체할 정치적 질서를 구축할 전망이 밝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사회적 부와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세력의 힘을 약화시킬 필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일을 어떻게 신나게, 열정적으로 하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새로운 정치적 힘을 기르려면 민중은 그래서 그런 일을 할 신명도 되찾을 필요가 있다.

(워커스 6호 2016.4.20)

Leave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