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16일 앙카라. 젤렌스키와 에르도안 대통령. 출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소셜미디어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3년 넘게 전쟁을 벌여온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오랜만에 서로 마주 앉았다. 지난 16일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양국 대표단 간의 대면 협상이 이뤄진 것이다. 이번 회담은 11일 이른 새벽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그동안 우크라이나와 유럽 일부 국가들이 요구해온 ‘무조건 30일 휴전안’에 대한 대응으로 러-우 양국 간 ‘직접 협상안’을 전격 제안해 열렸다. 푸틴은 원래 15일(목요일)에 회담을 열자고 했으나,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튀르키예에 직접 가서 푸틴도 올 것을 요구하며, 그가 올 때까지는 우크라이나 대표단이 회담 장소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 하루 순연했다고 한다. 회담이 연기되는 사이 젤렌스키는 튀르키예 대통령 레젭 타입 에르도안과 3시간 동안이나 만났는데, 둘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공표되지는 않았으나, 그동안의 행태로 미루어 볼 때 젤렌스키가 푸틴의 불참을 빌미로 러시아와의 협상을 거부하려 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우크라이나 집권 세력은 영국, 프랑스, 독일, 폴란드 등 유럽 일부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러시아와의 협상테이블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한사코 반대하면서 즉각적인 ‘무조건 30일 휴전’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11일 푸틴의 협상 제안에 대해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동의를 표시하며 우크라이나 측이 반드시 이스탄불에 갈 것을 압박하고, 트럼프와 소통이 깊은 것으로 알려진 에르도안이 협상 반대를 지지해달라는 우크라이나 측의 요구를 끝까지 수용하지 않자, 젤렌스키도 자국 대표단의 협상 참여를 허용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젤렌스키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어떤 협상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 2022년 2월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국이 종전 협상을 벌여 4월 초에 조인 직전까지 갔으나, 미국의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와 당시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의 반대로 우크라이나 측이 일방적으로 협상을 중단한 뒤의 일이다. 젤렌스키는 그 뒤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의 집중 지원을 받으며 6월에 시작된 대러시아 공세를 통해 전쟁 초기에 빼앗긴 동북부의 하르키우와 남부의 헤르손 지역을 탈환한 것에 고무된 나머지 10월에는 러시아와의 모든 협상을 불법화했다. 당시 그가 내린 협상 금지 명령은 지금도 유효하다. 지난 16일 이스탄불에서 다시 진행된 러-우 양국 회담은 그래서 우크라이나의 법으로는 불법이었던 셈이 된다. 물론 현실정치에서 모든 일이 합법적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기에 이번 회담을 통해 양국 간에 도출되는 합의사항들이 있다면 전혀 무효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회담에서 우크라이나 측은 계속 ‘30일 휴전’을 요구했다고 하고, 러시아 측은 22년 4월 이스탄불에서 도달한 협상안에 내용을 추가해 이후의 전쟁 수행을 통해 러시아가 대부분 장악하게 된 도네츠크, 루한스크, 자포리자, 헤르손 지역에서 우크라이나군의 철수를 요구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이번에 제시한 협상안은 작년 6월 푸틴이 자국 외무부에 가서 밝힌 ‘이스탄불 플러스 안’—22년 이스탄불에서 도달한 협상 내용에 이후 전장에서의 변동을 반영해 내용이 추가된 요구안—과 대동소이한 모양이다. 물론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 측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하고, 러시아 측은 그에 대해 전쟁이 계속되면 우크라이나는 훨씬 더 많은 지역을 잃게 될 것이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2022년 4월 이후 양국 간에 처음 열려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은 회담은 예상대로 큰 성과 없이 끝났지만, 그래도 양국은 포로 1,000명씩을 교환하고, 협상은 지속하며, 앞으로 각국의 관점이 담긴 제안서를 제출하기로 합의한 모양이다. 단, 다음 회담이 언제 어디서 열릴지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협상이 원활하게 진행될 전망은 희박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나토 국가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주요 국가들의 태도 때문이다. 젤렌스키를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 집권 세력은 협상을 통해 갈등을 해결할 의지를 보인 적이 전혀 없다. 그들은 자국 군대가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받고 전장에서 형편없이 패퇴하고 있는데도 2022년 11월에 제출된 젤렌스키의 ‘평화공식’을 고수할 뿐이다. 거기서 우크라이나 측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전의 우-러 국경 복원 즉 크림반도의 반환, 2022년 전쟁 발발 이후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러시아군의 철수와 적대행위 종식, 러시아의 전쟁 범죄 처벌 등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그런 요구가 전장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도 우크라이나군은 계속 궤멸하고 있고, 전문가들의 분석으로는 그런 전황이 바뀔 가능성은 전무라고 한다. 그런데도 우크라이나 지배층이 협상을 외면하는 것은 그 결과 전쟁이 종식되면 권력에서 퇴출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쟁 책임과 처벌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폴란드, 발트 3국, 스칸디나비아 국가 등 유럽의 정치계급도 전쟁 종식을 위한 회담에 반대하기는 우크라이나의 신나치 집권 세력과 마찬가지다. 그들 가운데 선두는 영국 총리 키어 스타머,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독일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 등이다. 이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발을 빼려는 행보를 보이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우크라이나 측이 제시한 즉각적인 무조건적 휴전안을 지지하며 트럼프 행정부 내 네오콘 세력과 손잡아 미국도 그에 동의하도록 온갖 수작을 다 부렸다. 그들은 러시아가 무조건 휴전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새로운 강력한 제재 패키지를 발동하겠다는 엄포를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럽의 정치계급이 우크라이나와 함께 러시아가 받아들일 리 없는 무조건 휴전안을 고집하는 것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직접 협상이 이뤄져 양국 갈등이 해결되면 미국이 러시아와의 갈등을 청산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유럽은 미국과 러시아의 화해가 이뤄져 미국으로부터 우방으로서의 가치와 지위를 평가받지 못하면, 그동안 나토의 끝없는 동진을 추진하며 러시아에 저질러 온 숱한 적대행위의 후과를 염려해야 할 처지가 된다. 유럽은 미국과 함께 나토로 연합해 있지만, 미국이 발을 빼면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상대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봐야 하고, 나아가서 국제무대에서도 가장 큰 뒷배를 잃는 셈이어서 그동안 누리던 영향력을 상실할 공산이 크다. 예컨대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 유엔 안보리의 이사국 지위도 위태로울 수 있다.
2025년 5월 16일 앙카라. 젤렌스키와 에르도안 대통령 회담. 출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소셜미디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요구하는 휴전안을 수용할 의사가 전혀 없음이 명확해 보인다. 러시아가 휴전안을 거부하는 것은 휴전이 성사되어도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우크라이나가 절대 준수하지 않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2014년의 마이단 쿠데타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돈바스 지역 저항군 사이에 생긴 갈등을 해결하고자 체결된 민스크 협정을 어긴 것은 우크라이나 측이었고, 최근 트럼프의 중재로 에너지 시설 30일 공격 중단이 합의된 뒤에도 우크라이나 측의 위반이 이어졌다(단,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도 휴전 협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그래서 휴전안 대신 양국 간 갈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고 장기적 평화 보장을 위한 협상을 요구해왔다. 협상 기간 협의를 통해 휴전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보지만, 협상을 나중으로 미루고 휴전부터 먼저 하자는 것은 본말의 전도라는 것이 러시아의 입장이다.
러시아가 휴전보다 협상을 중시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휴전은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우크라이나군이 인력과 군비를 보강할 시간을 벌게 해준다면, 협상은 양국의 입장 조정으로 전쟁을 초래한 갈등의 근본 원인을 해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동남부 4개 지역에서 우크라이나군의 철수 외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신청 철회, 중립국화, 군대 규모의 축소, 국가 장치 내부 신나치 세력 제거, 러시아계 주민의 기본 인권 보장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이스탄불 회담에서도 러시아는 같은 요구를 반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가 꼭 협상에 목을 매다는 태도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느긋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국이 전쟁에서 확실히 이기고 있는 한, 협상이 좀 늦어져도 문제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번 회담의 러시아 대표단을 이끈 블라디미르 메딘스키는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시절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협상에 도달하기까지 러시아는 21년의 장기 전쟁을 수행한 적이 있음을 환기했다. 그의 발언은 우크라이나가 신실한 태도로 협상에 임하지 않으면 러시아는 앞으로 몇 년이라도 전쟁을 지속할 것이라는 경고인 듯하다.
휴전이든 협상이든 러시아와의 갈등을 빨리 해소하려고 안달이 난 것은 미국으로 보인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전쟁을 되도록 빨리 종식하고 싶은 것은 그만큼 사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전쟁을 계속 지원할 능력이 없는 것은 미국도 유럽과 마찬가지다. 최근에 미국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홍해를 장악한 예멘을 공격하다가 상당한 타격을 입은 바 있다. 항공모함을 동원해 공습을 시작하며 미국은 예멘의 안사르 알라 세력 지도부 제거와 군사적 목표물 타격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막강한 전력으로 겨우 거둔 성과는 민간인 사상자만 양산했다는 것이다. 한 달 넘게 예멘 폭격을 감행했으나 자국의 대규모 군사적 자산 소모만 초래한 뒤 미국은 결국 예멘과 사실상 패배 성격을 휴전 협정을 맺어야만 했다. 서아시아의 빈국 중의 빈국에도 승리할 능력이 없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전쟁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미국은 지금 러시아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는 중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려 한다. 미국이 최근에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려고 동분서주하는 것도 트럼프 취임 이후 중국을 주적으로 잡고 중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트럼프가 계속 푸틴과 전화 통화를 시도하고, 특히 정상회담을 모색하는 것도 미국의 그런 행보와 맞물린 일로 분석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금 관계 개선 노력을 통해 그동안 중국과 사이가 깊어진 러시아를 미국 쪽으로 끌어오고 싶어 안달인 모양새다.
미국과 외교적으로 화해한다고 러시아가 중국과 그동안 다져온 우의를 저버릴 것인지는 의문이다. 미국은 1970년대 초의 냉전 시기 ‘소련 봉쇄’를 목적으로 중국을 개방시켜 그 경제적 굴기를 도와 지금 중국을 자신의 주적으로 두게 되었다. 중국의 개방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미국은 이제 세계체계가 새롭게 구축되는 즈음에 중국의 더 이상의 부상을 막고자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국은 과거의 막강한 미국이 아니고, 중국도 과거의 소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고, 러시아도 소련과는 전혀 다른 국제 관계망을 구축해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협상은 마다하고 휴전만 바란다. 하지만 협상을 거부할수록 우크라이나는 전장에서 더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될 것이고, 더 많은 인명과 군 장비, 영토를 잃게 될 것이다. 러시아군은 여름이 시작되는 6월이면 다시 대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지금 최악의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러시아군이 총공격을 벌이면 대규모 인적 물적 손실을 낼 공산이 크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이번 대공세를 통해서는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자포리자, 헤르손을 모두 장악한 뒤 더 서쪽의 드니프로강 지역으로 진격할 것도 예상된다. 그때쯤이면 우크라이나는 군대의 궤멸과 국가의 붕괴를 겪을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직접 협상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국가를 지켜내지 않으면 우크라이나는 잔존국(rump state)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아마 그 전에 미국이 손을 쓰지 않을까 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의 지배 계급을 대신해서 러시아와 직접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될 공산이 큰 것이다. 사실 우크라이나전쟁은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가 끝없는 동진을 통해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고,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는 신나치 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해 동부지역의 러시아계 주민을 억압하고 학살하고 러시아 언어와 문화를 압살한 것을 미국과 유럽, 나토, 유럽연합 등이 부추기고 지원해서 일어난 면이 크다. 이제 그 원인을 제공한 데 책임이 가장 큰 미국이 러시아와의 직접 협상을 통해 ‘갈등의 근본 원인’을 해소해야 할 시간이 임박한 듯하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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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희는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으로 중앙대학교 교수, '문화/과학' 발행인, '문화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참세상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서울의 생김새⟫, ⟪길의 역사⟫,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