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1일 ‘근로자의 날’ 명칭이 ‘노동절’로 바뀌었다(‘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노동절 제정에 관한 법률’로 개정). 2026년 4월 6일 국무회의 의결로 노동절은 법정공휴일이 됐다(3월 31일 ‘공휴일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국회 본회의 통과). 이로써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게만 적용되던 유급 휴일이 관공서, 공공기관 등으로 확대된다고 한다.
이리되기 전, ‘5월 1일’은 ‘노동절’이었다. 그런데 1959년 이승만 정권이 노동절을 3월 10일(대한노총-한국노총 창립일)로 바꿨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바꿨다. 문민정부라 내세웠던 김영삼 정권은 1994년 날짜는 5월 1일로 돌려놨지만, 명칭은 ‘근로자의 날’을 유지했다. 그로부터 다시 32년 만인 2026년에 ‘5월 1일 노동절’로 돌아왔고, 법정공휴일인 빨간 날이 됐다. ‘노동절’이 ‘노동절’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절은 결코 ‘법조문’에 머물지 않았다. 달력의 ‘1일’이 검은 글씨였어도, 그 아래 ‘근로자의 날’이라 쓰여 있었어도, 노동자계급에는 어김없이 싸우는 ‘노동절’이었다.

1백년 넘도록 해마다 싸웠다
1989년 7월 14일,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프랑스 파리) 결의로 1890년부터 전 세계 노동자들이 5월 1일 노동절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기치 아래 대규모 시위·행진·파업에 나섰다. 그 전통과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메이데이는 전 세계 노동자가 하나로 뭉쳐 노동자계급의 위력을 과시하고 투쟁과 해방의 결의를 다지는 날로 자리 잡았다.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 빈민 등과 연대하는 투쟁의 날임과 동시에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날이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조선노동공제회 등 노동자 조직이 결성되기 시작한 1920년부터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동맹파업, 시위행진 등의 형태로 전개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제가,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단독정부 수립 후에는 남한 정부가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행사를 감시하고 봉쇄했지만, 한국의 노동자들은 갖은 탄압과 폭력, 수배와 구속에도 노동절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다.(한내레터, “5월 달력 ‘1일 근로자의 날’” 참조)
‘3월 10일’도 ‘근로자의 날’도 거부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처음 맞은 1988년 노동절, 노동운동단체들은 노태우 정권의 거센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세계노동자의날 기념 노동3권 쟁취 수도권노동자 결의대회’(연세대)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8시간 노동, 지역 및 산별노조 쟁취, 파업의 자유 등을 결의하고 교문 밖으로 진출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해 노동운동진영은 단일한 노동법 개정안으로 ‘3.10 근로자의 날 폐지와 5.1 노동절 복원’을 제출했다.
세계노동절이 딱 100년째 되는 1989년 민주노조들의 전국조직인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는 노동절의 전통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고 대중적인 집회투쟁을 벌였다. 정부의 원천 봉쇄 방침에 맞서 4월 29일부터 시작된 노동절 투쟁은 5월 1일 전국 13개 시·도(서울, 인천, 성남, 부천, 안양, 안산, 수원, 대구, 울산, 마창, 부산, 광주, 전북)에서 총회, 집회, 가두투쟁으로 확산했다. 메이데이 투쟁은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동맹휴학 등 전체 민중진영의 연대투쟁으로 발전했다.
1990년 출범한 전노협은 정부가 강제해온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을 폐기하고 ‘5월 1일 노동절’을 공식 발표했다. 5월 1일 경찰의 봉쇄 속에서도 15개 지역, 250여 개 노조에서 일제히 노동절 기념식을 진행했다. 194개 노조, 10만여 명의 조합원이 5월 1일 전면 휴무에 돌입했고, 휴무에 돌입하지 않은 노조도 사업장별로 기념식을 한 뒤 지역별 기념대회에 참가했다. 그해 노동절 투쟁은 5월 4일까지 312개 사업장에서 연인원 34만 명이 참여한 전노협 전국총파업으로 발전했다.
1991년 노동절에도 정권의 강경대 열사 폭력 살인 사건을 계기로 전국 14개 지역에서 노동자·학생·시민 등 10만여 명이 모여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노동절 쟁취를 위한 5월 1일 휴무 방침 결의는 법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이미 단체협약에 5월 1일을 휴무로 쟁취한 사업장들로부터 시작한 유효한 투쟁이었다.
그해 핵심 요구 집약해 정권과 자본 압박
노동자들은 해마다 5월 1일이면 그해의 핵심 요구를 집약해 강력한 투쟁의 포문을 열며 정권과 자본을 압박했다. 그렇게 5월 노동절은 11월 전국노동자대회와 함께 민주노조와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투쟁으로 자리 잡았다.
1994년 근로자의날법이 개정돼 날짜가 3월 10일에서 5월 1일로 바뀌었다. 35년 만에 합법적으로 맞이하는 메이데이였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정권은 임투 승리와 민주노총 건설을 결의하며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노동절 집회를 원천 봉쇄했고, 가두로 나선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노동자들은 최루탄을 쏘며 막아서는 경찰에 맞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싸워야 했다.
1995년 민주노총 출범 후에도 노동절은 ‘투쟁’하는 날이었다. 1997년 5월 1일 장충단공원에서 노동절대회를 마치고 마무리 집회 장소인 종묘공원을 향해 행진에 나섰다. 합법적 절차에 따라 집회신고까지 마친 행진이었지만 경찰은 대회 시작 전부터 행사장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고 검문 검색을 벌이더니 행진이 시작되자 페퍼포그를 동원해 최루탄을 쏘아대며 이에 항의하는 참가자들을 곤봉으로 구타하고 연행했다.
1998년 노동절은 5말 6초로 예정된 총력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전국 집중 투쟁이었다. 노동자·시민·학생 5만여 명이 ‘고용안정과 민중생존권 사수’를 외쳤다. 그러나 집회가 끝나기도 전에 금속 대오가 모여있던 종로3가 거리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싸움이 시작됐다. 참가자들은 위력적인 가두투쟁을 전개했지만, 무수한 노동자·학생이 다치고 연행되고 구속됐다.
노동자 승리하는 그날까지 ‘휴일’ 아닌 ‘투쟁’
1999년 11월 23일 민주노총이 합법화된 후 2000년 노동절 집회는 4월 29일, 토요일에 진행했다. 서울역광장에서 2만여 명이 서울역광장을 메운 가운데 5월 총파업을 결의했다. 대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명동성당을 거쳐 종각까지 거리행진을 벌인 뒤 종로 2가 일대의 왕복 10차로를 점거하고 마무리 집회를 했다. 마무리 집회를 경찰이 진압하는 바람에 10여 명이 다쳤고 이에 격분한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1시간가량 공방이 벌어졌다. 당시 노동절 투쟁을 5월 1일에 하지 않는 데 비판이 일었다. 민주노총은 “애초 노동절 당일인 5월 1일 기념대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이날이 이틀(사흘) 연휴의 마지막 날임을 감안해 더 많은 노동자의 참가를 이끌기 위해 날짜를 조정했다”(<노동과 세계> 100호, 2000.4.21)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May Day’가 ‘April Day’가 돼버렸다며, “노동절을 사수해야 한다”는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 몇몇 지역에서는 방침을 거부하고 5월 1일에 노동절 집회를 했으며, 또 일부 단위는 5월 1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노동절 민중연대 투쟁대회’를 독자적으로 진행하다 다수가 연행됐다. “민주노총이 합법화됐으니 이제 날짜가 중요한 게 아니라 노동절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5월 1일 노동절’을 지키고자 하는 열망과 투쟁의 필요성이 더욱 강력했다.
한편 메이데이 계기(1886년 헤이마켓광장 투쟁)를 만들었던 미국의 노동절은 ‘9월 첫째 월요일’이다(1893년 미국노동총동맹이 변경, 1894년 미 의회가 공휴일 지정).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 노동자가 투쟁하는 날이었던 건 1백여 년 전이고, 지금은 그저 여름 끄트머리에서 쇼핑과 여가를 즐기는 긴 주말 휴가일 뿐이다.
노동절 의미 되새기는 민주노총 투쟁 계속되길
정권의 입맛 따라 날짜를 바꾸고 이름을 바꿔왔지만, 노동절은 그 법에 따라 흔들려온 게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일관되게 ‘5월 1일’로 지켜왔다.
정부는 “노동의 가치를 전 국민이 함께 기념할 수 있도록” “공휴일 지정을 적극 추진했다”고 밝혔다.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노동절 명칭 복원에 이은 공휴일 지정은 노동의 가치와 존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새로이 했다는 점에서 하루 휴일, 그 이상의 의미와 상징성이 있다”며 “일하는 사람 모두의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행복한 일터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다. 좋은 말이고, 좋은 일이다.
그런데 한국의 어떤 공휴일에 ‘모든 노동자’가 쉴 수 있었던가. 특수고용, 플랫폼, 교대제,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떠오른다. 137년 전 요구였던 ‘8시간 노동’을 아직도 외치고 있는 노동자들이 떠오른다. ‘노동절’의 의미보다 공휴일 하루 늘렸다는 공치사로만 들린다면 속 좁은 걸까. 노동부는 노동절로 명칭 변경과 공휴일 지정을 기념해 노동자를 초청하는 기념식과 ‘걷기대회’ 등 여러 행사를 진행하겠다고 한다. 노동자에게 필요한 건 생존에 절실한 법·제도의 실현이지 걷기가 아니다. 노동절 행사 기념한답시고 자본과 정권이 모여 애국가 부르는 광경을 보고 싶지는 않다.
2026년 노동절에 그들이 말하는 ‘전 국민’에서 배제되고 있는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는 민주노총을 기대한다. 노동절이 아직 축제일 수 없는 이유는 너무 당연하게도,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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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미는 오랜 노동운동의 길 위에 있는 활동가로서 현재는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기획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칼럼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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