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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노동자 투쟁의 역사

74호 특집

1. 여성 노동자 투쟁의 역사 찾기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따로 살펴보는 것은 남성 중심적인 노동운동사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역할이나 주체적인 모습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보편적인 운동사로 보아온 이전의 노동운동사에서 여성들이 주도한 투쟁조차 여성노동자는 드러나지 않고, 주변적인 인물로 취급되거나, 남성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여성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받는 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은 어떻게 발현되어 왔는가를 돌아보기 위한 것이다. 여성노동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로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과 맥을 같이 해왔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으로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는 침체와 단절을 경험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여성노동운동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주도했지만, 여성노동자들이 이룩한 업적에 대한 인정과 평가는 아직까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 이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기업 남성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이 주도하면서, 중소규모 경공업 분야의 여성노동운동에 덜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동안 '잊혀진'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되살려 보기 위한 시도이다. 특히 여성노동자의 투쟁과 조직, 사업장 안과 밖의 여러 활동 가운데 '아래로부터의 여성노동자 투쟁'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2. 일제 식민지 시기 여성노동자운동

조선 후기를 거쳐 일제 식민지 초기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은 대부분 가사보조원, 지게꾼, 막벌이꾼 등 도시 잡업 층과 농촌의 품팔이로 일했다. 공업이 발전한 것은 일제가 조선의 공업자본형성을 억제하려 했던 회사령을 철폐한 1920년부터였다. 이 시기 공업노동자 수는 빠르게 늘어났다. 여성노동자의 수는 1921년 약 1만여 명에서 1940년에는 약 8만 여명으로 8배 증가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의 남성노동자(약 4만에서 20만 명)보다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여성노동자들은 섬유, 고무, 정미업 등에 집중됐다. 1930년대 후반 대규모 방적공장이 가동되면서 여성이 더 많아졌고, 통조림공업에도 여성노동자의 비율이 증가했다.
일제시대 공업노동에 종사한 조선 여성노동자들의 임금, 노동조건과 생활상태는 어떠했을까? 한국인 성인남자의 임금이 일본인 성인남자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면, 한국인 성인여성의 임금은 일본인 성인여성 임금의 절반 정도였다. 예로 1929년 공장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 남자가 2.32원, 일본인 여자가 1.21원, 한국인 남자가 1.00원, 한국인 여자가 0.59원이었다. 노동시간은 1930년 전체 공장의 79.4%에서 10시간 이상의 노동을 했으며 46.9%의 공장에서는 12시간 이상의 노동을 강요당했다. 조선인 여성노동자와 유년공의 노동시간은 남성노동자보다 길었으며, 보통 한달에 두 번의 휴일이 있었지만 휴일이 아예 없는 공장도 35%나 됐다. 그 밖에 여성노동자들은 인격 모독이나 남자 감독이 행하는 몸검사, 욕, 구타 같은 수모를 겪었다. 아래의 기사는 아기가 딸린 기혼여성들 노동현실을 보여주는 예이다.
"정미소나 고무공장에서 보는 애기 딸린 어머니들의 노동이란 너무나 비참하였다. 고무 찌는 냄새와 더운 김이 훅훅 끼치는 공장 속에서 애기에게 젖을 빨리며 쇠로 만든 룰러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돌가루가 뽀얗게 날리는 정미소에서 갓 까놓은 병아리같이 마른 자식을 굴리는 것을 볼 때는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신가정』1935.2)

1918년까지 노동자 투쟁은 적었다. 1919∼1940년 사이에 여성이 참여한 투쟁 사례는 122건이었는데, 그 가운데 여성노동자만 참가한 것이 94건, 남녀가 함께 참가한 것이 28건이었다. 보통 '직공파업'이라고 표현된 것은 남성노동자의 단독투쟁으로 간주하지만 실제 남녀가 함께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노동자투쟁은 1920년부터 1930년대 중반에 활발하게 일어났다.
1920년대는 임금인하에 반대하는 투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는데, 정미, 제분업계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가장 많이 참여했다. 정미업 선미여공들의 파업은 주로 임금문제, 감독·검사원의 횡포, 여공구타 등에 항의한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1924년 3월 10일 인천 가등정미소의 300여 여성노동자들이 "요즈음의 쌀은 뉘와 티끌이 많으니 한 말에 3전 받던 것을 올려 달라", "일본인 감독 중 2명이 여공에 대한 태도가 좋지 못하므로 파면시켜 달라"며 5일 동안의 파업으로 요구를 관철시켰다. 1930년대 선미여공파업의 요구조건에는 이런 문제 외에도 민족차별 철폐, 여직공 임금차별철폐, 경찰간섭 반대, 단체가맹가유, 8시간노동제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선미 여공들의 파업은 다른 직종 여공들의 파업보다 요구가 분명하고 격렬했으며, 한 곳에서 파업이 일어나면 바로 파급되어 동정파업의 형태로 연대의식을 과시했다. 또 무조건 투쟁의 주모자를 검속하는 일제 노동탄압에도 정면으로 맞서 '경찰간섭 반대'를 외치면서 경찰서까지 몰려가 시위데모를 하여 파업여공 전부가 검속되는 등의 투쟁의욕을 보였다.
제사업은 미혼 여공들이 집과 부모를 떠나 공장의 기숙사에 기거하며 공장생활을 했으며, 1920년대 이후 많은 투쟁이 있었다. 예로 대구 조선제사공장에서는 1924년 4월 20일 13세에서 17, 18세의 소녀 공들이 자연발생적인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그들의 불만사항은 13시간의 장시간노동, 기숙사의 불결, 식사문제 등이었다. 이 투쟁은 억압적인 식민통치의 분위기 속에서도 어린 여성들이 저항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제사업은 1930년대 더 많은 투쟁이 일어났다. 파업건수는 1930∼35년 사이에 47건이었다. 요구조건은 임금인상, 노동시간단축, 식사차별반대, 벌금제 폐지, 최저임금 보장, 감독해고, 구타금지, 부당해고 철회 등이었다. 대표적인 투쟁은 함흥, 전주 등지에 대규모 공장을 가지고 있던 카다쿠라 제사공장의 파업과 동양제사 진해공장의 파업이 있다.
섬유업의 대규모 공장은 조선방직공장과 경성방직으로 투쟁은 조선방직공장에서 주로 일어났는데, 첫 파업은 1922년에 일어났고, 1930년에도 파업이 있었다.
고무공업은 1920년 고무신공장이 처음 서울에 설립된 지 10년 뒤인 1930년에는 약 50개의 공장이 있었다. 고무공장이 집중된 경성(11건), 평양(26건), 부산(15건)에서 투쟁은 52건이 일어났는데, 대부분 1929∼1935년에 일어났다. 투쟁 요인은 임금문제, 불량품 배상제도나 벌금제도 문제, 감독원 또는 검사원 문제가 중심이었다. 대표적인 투쟁은 1923년 경성고무공장 투쟁, 1930년 평양고무공장의 총파업투쟁과 1931년 평원고무공장 투쟁이다.
고무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최초의 파업투쟁은 1923년 7월 3일 '임금인하반대와 여공에게 무리한 행동을 한 감독의 파면을 요구'하는 경성 고무공장 백십 명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아사동맹파업이었다. 10여 일만에 승리한 이 투쟁은 일제하 여성들만의 최초의 파업으로 노동운동사에서 처음으로 주위 노동자들이 동정금을 보내고 동정연설회를 개회하면서 노동자들의 연대성을 높이기도 했다.
평양고무공장 총파업투쟁은 자본가들이 1930년 3월 8일 공동으로 임금인하를 선언하자 9일 아침 12개 고무공장 여성노동자 1,800여 명이 이에 맞서 투쟁한 것이었다. 이들의 요구는 임금인하반대 등 20여 가지였으며, 그 가운데 '산전산후 3주간 휴양 및 생활비 지급, 수유시간의 자유' 같은 여성특수요구가 포함됐다. 이 투쟁은 일본관헌과의 충돌을 계기로 일제통치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발전했으나, 9월 4일 200여명의 해고자를 내고 종결됐다. 이 투쟁은 패배했지만 1931년 평원고무공장 여성 노동자의 투쟁으로 계승됐다.
마지막으로 1931년 평양의 평원고무공장에서 자본가가 임금인하를 하자 47명의 여성노동자들은 단식동맹을 조직, 공장을 점령하여 농성을 벌였다. 34세의 여성노동자 강주룡은 40척이 넘는 을밀대 다락 위로 올라가 7시간 40분 동안 버티며 노동자들의 단결과 노동조건의 참상, 고용주의 횡포와 착취를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그 뒤 여성노동자들은 투석, 전찻길에 눕기, 오물끼얹기 등 격렬한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이 파업은 20여 명의 희생자를 냈지만 여성노동자들의 힘만으로 25일간의 강렬하고 지속적인 투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투쟁의 결과로 자본가들의 임금인하 기도를 저지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1920년대에 노동운동이 활발해지고 파업이 자주 일어나자,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공포하며 노골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탄압이 심해지자 노동자들의 저항은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투쟁의 요구도 임금인상요구에서 민족 차별철폐, 노조의 자유보장, 경찰간섭 폐지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 중일전쟁을 위한 전시체제에 들어간 일제의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1937년 이후 극에 달한다. 수많은 노동운동가들이 검거되거나 구속을 피해 지하로 잠적해 조직적인 노동자투쟁이 어려웠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결근, 이직, 탈주 등으로 그들의 불만을 표출하고 항거했다.


3. 해방, 전쟁 그리고 1950년대 여성노동자운동

[미군정기 : 1945∼1948] 미군정기의 노동운동은 전체 노동자의 권익신장과 이익을 위한 정치투쟁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해방 직후 자주관리운동이나 전평의 50만여 명의 조합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25%로 나타났지만, 전평지도부에 여성이 포함되었다든지, 전평계열의 노조지부에 여성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같이 제사공장, 방직공장 등 여성사업장에서의 투쟁은 모두 '여공들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
경성방직 여성노동자들은 1945년 8월 30일 종업원대회에서 '야근철폐, 8시간 노동제실시, 직원과 공원간의 차별배급 철폐, 식사개선, 체불임금 지급, 공장관리위원회에 의한 공장관리' 등을 요구하며 투쟁을 시작했다. 9월 25일 회사 측의 요청으로 군대가 출동했으나,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의 지도로 야근을 거부하고 8시간노동제를 실시해나갔다. 1946년 2월 8일 광주 도시제사공장의 노동자들은 '집회결사의 자유보장, 지배인축출, 해고반대' 등을 내걸고 파업을 했다. 광주 약림제사에서도 1946년 3월 친인관리인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투쟁은 모두 친일파 공장관리인의 문제를 둘러싼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또 동양방직 인천공장 900명의 노동자들이 메이데이 행사에 참여하려하자 회사에서 대신 휴일에 일하라고 했고, 노동자들이 이를 거부하는 싸움을 했다.
이러한 투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미군정은 점차 전평을 배제하다가 1946년 9월 총파업을 계기로 전평을 무력화시키면서 이 시기 노동운동은 침체됐다.

[이승만 정권기 : 1948년∼1960년] 1948년에는 대부분의 여성취업자들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공업부문 종사자들은 아주 적었다. 제조업 여성노동자의 수는 35,197명으로 전체 노동자 136,769명 가운데 25.7%였으며, 그 가운데 66.1%가 방직공업에 종사했다. 1958년에는 전체 취업자의 4.3%인 377,000명이 제조업에 종사하고 그 가운데 85,000명(22.5%)이 여성노동자였다. 이 시기는 산업발달이 미흡하여 실업문제가 심각했다. 취업한 노동자들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사회에 범람하는 실업자들의 홍수 속에서 직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몇 달씩 임금이 체불되는 조건 속에서도, 그 직장을 차버릴 수 없는" 상태였다.
여성 노동자 투쟁은 간헐적으로 일어나 노동운동의 맥을 이었다. 중요한 투쟁은 조선방직투쟁(1951∼52년), 대구 내외방직투쟁(1954.10.22), 대구 대한방직쟁의(1955.5.20) 등이다.
남한 최대의 방직 공장인 부산의 조선방직(6,000여명)에서 전쟁 중에 파업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1951년 9월 자기 심복 강일매를 사장으로 임명했다. 강일매는 근속노동자를 해고하고 120명을 신규채용하고, 상공부 지시의 인상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후생용 광목을 지급하지 않으면서 욕설과 구타를 예사로 하여 비난을 받았다. 노조간부 2명에 대한 해고를 기점으로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투쟁이 시작됐다. 노동자들은 '강일매 파면', '인사문제 원상복고' 등 4개 항목을 요구했다. 1952년 1월 21일 여성노동자 1,000여 명이 개회중인 국회의사당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이어 노동자들은 시가행진을 하며 조선방직 본사 앞에서 농성을 벌이다 경찰과 충돌했다. 지속되는 투쟁에도 노조간부들이 구속되고 어용노조가 만들어진 상태에서 대한노총 위원장의 투항으로 파업은 종결됐다. 자본가는 1,000여 명의 노동자를 파면시켰다. 조선방직 투쟁은 실패했지만 대규모의 투쟁이 전쟁 상황에서 진행되어 노동자의 기본권 수호의 중요성을 사회에 인식케 하고, 노동자들의 단결력을 과시했다.

[1960년 4·19혁명∼ 1961년5월15일] 이 시기에는 여성노동자투쟁은 제일모직 대구공장의 사례를 통해 4.19시기 여성노동자들의 노조민주화투쟁 상황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의 역할을 볼 수 있다. 제일모직 여성노동자 400여 명은 1960년 6월14일 '부당노동행위중지', '152명에 대한 불법휴직조치 철회', '불법폐업 중지와 정상 작업실시'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회사 측은 노조 내부를 분열시켜 노조를 어용화하려 했으나 4.19 민주화의 분위기로 상황이 불리해지자 공장을 폐업하고 노동자들에게 불법휴직조치를 내렸다. 전국노협은 노조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취해진 이 조치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며, 여성 노동자들은 6월 17일 농성을 했다. 7월 4일 공장사무실에서 점거농성을 하다가 경찰과 충돌로 많은 노동자들이 부상당했다. 대구시내 1,500명의 노동자들이 지원투쟁을 하는 등 투쟁이 길어지자 8월 10일 회사 측은 폐업조치를 철회하여 여성노동자들이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밖에 인천의 흥한방직에서는 59명의 해고 노동자들이 복직과 법적보상금을 요구하며 1960년 5월19일 농성에 돌입했고, 5월 25일 공장 내에서 어용노조에 반대하는 새로운 노조의 결성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났다. 1960년 5월 26일 약 800여 명의 대전방직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8시간노동실시, 악질간부 추방, 사원과 공원간의 차별철폐'등을 요구하며 연좌데모를 했다. 또 경성방직 야간부 노동자 700여 명이 1960년 9월13일 노조위원장의 사임을 요구하며 회사 광장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이 싸움은 여성노동자들이 자기들의 의사를 반영할 노동조합을 갖지 못했기에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투쟁이었다.
이러한 투쟁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노동자 개인이나 지도자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방직공장에서 여성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4.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 '새로운' 민주노조운동을 싹 틔우다.
1970년대 유신정권은 저임금 정책에 기반을 둔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의 추진으로 외국기업의 직접투자 유치와 수출자유지역을 설치했다. 여성노동자들은 섬유, 의류, 고무, 전자, 식료품 분야에 모여 있었으며, 그 가운데 53.7%가 섬유산업에서 일했다(1971년). 1970년대 유신체제가 등장하면서 한국노총의 어용화가 더 심해져 '권력의 시녀'역할을 하면서 민주노조를 파괴하는데 앞장섰다. 섬유노조에 의한 동일방직지부 파괴공작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노조의 어용화를 거부하는 여성노동자들은 민주노조운동을 아래로부터 만들었다. 1970년 11월 27일 청계피복노조결성을 시작으로 1972년 5월 동일방직 어용노조의 민주화, 1973년 12월 콘트롤데이타 노조결성, 1974년 4월 반도상사노조결성, 1975년 5월 YH무역노조결성 등을 통해 여성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조직했다.
민주노조의 투쟁활동은 (1)임금인상과 노동조건개선투쟁, (2)여성의 특수요구 실현을 위한 투쟁 (3)민주노조탄압에 대한 투쟁, (4)연대투쟁의 시도로 나눠 볼 수 있다.
우선 (1)임금인상과 노동조건개선투쟁은 청계피복노조의 노동시간단축투쟁과 임금인상투쟁, 원풍모방과 동일방직노조도 임금투쟁의 결과는 임금수준을 동종 다른 사업장보다 20∼30%나 높은 수준으로 올렸으며, 상여금, 퇴직금 누진제를 투쟁을 통해 확보해 섬유노조 소속 조직 가운데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콘트롤데이타는 통근버스 운행확보투쟁, 해마다 30%가 넘는 임금인상과 상여금 400%를 확보투쟁, 주 42시간으로 노동시간단축투쟁 등을 통해 장시간노동이 일반화 된 시대에 파격적인 요구를 확보했다. YH는 회사 측의 휴·폐업 위협에도 임금을 대폭적으로 인상했다.
(2) 특히 콘트롤데이타 노조와 삼성제약 노조는 여성노동자의 특수과제를 제기하여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콘트롤테이타 노조는 생리휴가 확보, 남성관리자들의 권위적이고 성차별적인 언행금지, 결혼퇴직금제 철폐(1977), 산전산후휴가의 정착(1980), 생산직여사원 승진·승급쟁취, 결혼휴가 6일과 축의금 확보 등 여성들의 문제를 많이 해결했다. 삼성제약 노조 역시 생리휴가 확보, 남성관리자들의 권위적이고 성차별적인 언행금지, 결혼퇴직제철폐, 산전산후휴가의 정착 등을 확보해냈으며, 법적으로 부여된 1시간의 수유시간을 2시간으로 연장시켰다. 특히 관행으로 난무하는 성희롱을 없애기 위해 가해자 해고를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교섭한 결과 성희롱을 없앴다.
(3) 유신정권은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드러내놓고 탄압했다. 이에 맞서 청계피복노동자들은 목숨을 건 노동교실사수투쟁(1977.9.9)을 전개했으며,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자본과 섬유노조 그리고 정권이 공조하여 가한 1976년의 노조탄압에 알몸으로 저항했으며, 1978년 똥물을 뒤집어씌우는 탄압에 대항하여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이 시기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확보투쟁이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한 것은 YH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한 사업장의 노동자투쟁에 공권력이 직접 개입하여 여성노동자 김경숙을 죽음으로 몰아 사회문제로 확산됐다.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은 정국을 경색시켰고 마침내 부산·마산 민중항쟁으로 이어져 유신정권이 몰락하는 계기가 됐다.

(4)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1970년대 후반부터 연대투쟁으로 점차 발전했다. 1977년 7월 2일 가스질식사한 민종진의 죽음에 대한 항의 투쟁은 1970년대 최초의 노동자 연대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모든 노동자들이 함께 느끼는 비인간적 노동조건의 문제를 민주노조들의 연대를 통해 사회에 폭로했다는 점에서 민주노조운동 발전의 계기가 됐다. 또 1978년 3월 20일 여성노동자들이 복직을 요구하며 기독교 방송국 항의투쟁을 벌였으며, 3월26일 부활절 예배투쟁에서 6명의 여성노동자들은 '노동3권 보장과 박정권퇴진'을 외치며 함께 싸웠다.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파업투쟁, 가두투쟁, 점거투쟁 등 '탈법적'인 방식으로 자본과 정권에 맞서 싸우는 전투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여성노동자들의 민주노조운동은 한국전쟁으로 단절되었던 '아래로부터의 노동자투쟁과 조직건설'의 역사를 복원시켜냈다.


5. 1980년대 전반기(1980∼1987) 여성노동자들, 동맹파업·연대투쟁의 장을 열다.

198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사업장 단위를 뛰어 넘어 지역적으로 공동투쟁과 활동을 시작하여 노동운동의 연대투쟁을 만들어냈다.
1980년 3,4,5월 노동자투쟁때 원풍모방노조, 청계피복, YH노조 동일방직 해고자 등 3천여 명이 한국노총 대강당에 모여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여성노동자들은 이 대회에서 '노동3권 보장', '어용노조간부 퇴진과 노조민주화요구'를 내걸고 2일간 농성을 하다 해산했다. 그러나 1980년 5.17군사쿠데타로 등장한 신군부정권에 의해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강제해산당했다.
신군부정권은 3년간의 탄압에 자신감을 갖고 다가오는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유치 등의 일정을 무사히 치르기 위해 1983년 말부터 부분적인 '자유화조치'를 취했다.
일시 열린 정치공간을 활용하여 그동안 눌려있던 노동자들의 요구가 터져 나왔다. 그 출발은 1983년∼1984년 이리 태창메리야스와 인천지역의 해고 여성노동자들의 블랙리스트 철폐투쟁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은 해고자 1,000여명의 명단을 사업주에게 배포했는데, 이 명단이 1983년 12월에 발견되면서 블랙리스트 철폐 투쟁으로 발전됐다. 이 투쟁은 블랙리스트의 정체와 현 정권의 폭력성을 폭로했고, 유화국면 초기에 고립 분산된 노동운동의 힘을 모아내 노동운동이 활기를 되찾는 계기가 됐다.
이어 1984년 청계피복노조 복구투쟁이 일어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연대투쟁이 처음으로 이뤄졌다. 이 시기에 투쟁의 성과는 노조결성으로 나타났다. 인천 대한마이크로 여성 노동자 109명은 1984년 노조를 결성했다. 회사가 12시간 여성노동자들을 감금시키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노조를 지켜냈다. 특히 구로지역에 세워진 민주노조들은 지역연대의 기반을 만들어 갔다. 그 결과 1985년 6월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3명 구속을 계기로 한 민주노조 탄압에 대해 구로지역 10개 사업장 여성노동자 2천5백여 명이 구로동맹파업을 벌였다. 이 투쟁은 구속자가 43명, 불구속 38명, 구류 47명을 비롯하여 총 1,5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하고 노조가 와해되었다. 그러나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이후 최초의 정치적 동맹파업으로 노동자간의 연대투쟁의 가능성을 열어 젖혔다.
이처럼 1980년대 중반 다시 활발해진 여성노동자투쟁은 열악한 노동조건의 문제해결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성차별문제를 둘러싼 움직임도 일부 나타났다. 1983년 한국전력통신공사의 여성 전화교환원이 여성의 차별정년문제로 '고용상 성차별 소송'을 냈으며, 울산 태광산업의 남녀차별임금 철폐요구, 현대중공업의 여사원 장기근속수당지급 요구, 한일합섬 상여금 남녀차별지급 반대, 경원세기기계의 가족수당 남녀동일지급요구 등 여성특수과제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6. 1987년∼1996년 : 사무직여성과 기혼여성들, 노동운동의 주체로 나서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사업장에 민주노조가 결성되면서 여성노동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는 조직기반이 마련됐다. 노동자대투쟁 시기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첫째 임금인상을 하면서 신규노조를 결성한 경우(제일피복-뱅뱅 청바지, 오리엔트 계열 영송전기 투쟁 등), 둘째 신규노조를 결성한 뒤 임금인상이나 단체협상을 한 경우(무극사, 삼성제약, 맥스테크 등), 셋째 이미 결성된 노조에 대한 탄압이나 와해에 대한 저지투쟁( 인천의 한세실업, 부산의 화성 등), 넷째 노조민주화투쟁(이리 후레아 훼숀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특히 노동자의 투쟁에 위장폐업으로 탄압하는 자본에 대응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국 최초의 위장폐업 사업장인 일성섬유는 180여 명의 중소기업으로 노동자들이 '임금 50%인상, 상여금 300%지급'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자 회사는 폐업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저항에 밀려 다시 폐업철회를 했다. 일성섬유의 폐업은 1987년 이후 전국적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되었으며,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위장폐업을 자본가들이 적극적인 공격으로 활용하여 사회문제가 됐다.
1987년 민주노조운동과 함께 발전된 여성노동자운동은 노조결성과 노조운영을 적극적으로 했다. 이 시기 부각된 민주노조운동의 특징은 사무, 판매, 서비스직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예로 1987년 7월 의료보험연합회노조결성, 6월 동서증권노조결성(호봉조정하면서 여직원들이 2∼3년 감봉조정을 당하자 고참 여성 34명이 모여 노조를 결성), 7월 서울대병원의 간호원, 간호보조원, 약제사, 방사선기사등 40여 명의 여성이 중심이 되어 노조를 설립하여 두 달 만에 1천5백 명의 조합원을 확보했다. 또 LG화재는 여직원회가 임금인상을 문제 삼아 정시출근과 사복착용으로 항거한 것이 노조결성의 도화선이 됐다. 웨스트팩은행도 대부분 조합원이 여성으로 차등임금인상제의 철폐투쟁을 했는데, 지점장이 대자보위에 탭댄스로 조합원들을 우롱하고 14시간 감금하는 상태에서도 농성을 하는 등 격렬한 투쟁 끝에 권리를 쟁취했다.

여성노동자들은 여직원만의 책상 닦기 거부, 유니폼 거부운동부터 차별임금 철폐까지 누적되어 왔던 각종 성차별과 비인격적 대우에 맞서 싸웠고 승리했다. 이 시기 가장 두드러진 여성노동자들의 요구는 '결혼퇴직철폐투쟁'이었다. 교육보험(현 교보생명)은 노조결성과 함께 30세 정년과 결혼퇴직을 철폐했다. 현대해상은 1987년 노조에서 단식농성 후 결혼 뒤 계속 근무할 것을 명문화하는데 성공, 대한투자금융은 노조결성 후 결혼퇴직싸움을 벌여 승리했다. 제일투자의 결혼퇴직철폐 싸움은 5명의 여직원들이 철야농성을 하고 투자금융노조협의회가 연대투쟁을 하는 모습으로 발전됐으나 남자 직원들이 여직원들 얼굴과 책상에 소금을 뿌리고 손찌검을 하는 등 뼈아픈 남녀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 시기 사무직 여성노동운동의 주요한 법, 제도개선투쟁은 남녀고용평등법, 영유아보육법, 성폭력 특별법, 노동법 등의 제정, 개정운동과 파견법, 시간제법 등의 입법저지활동으로 축약할 수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이 1987년 제정되었으나 남녀차별 중 가장 핵심인 동일노동 동일임금 규정의 누락과 법구속력의 미비 등의 문제로 뒤에 개정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1988년∼1996년] 여성노동자의 조직률은 1975년 15.8%로 정점에 있다가 차차 감소했고, 노동자대투쟁이후 1989년 18.6%로 증가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정권과 자본의 탄압 그리고 산업구조조정에 의해 다시 감소하여 1997년에는 11.2%까지 하락했다.
1990년대 전반기 여성노동자운동은 (1)임단협투쟁(1991년 태평양화학노조투쟁과 원진레이온의 일방적 교대제반대투쟁, 1992년 한국후꼬꾸 임금인상투쟁, 1993년 마산의 한국시티즌 단협체결투쟁 등), (2)산업구조조정에 따른 정리해고 저지투쟁인 고용안정투쟁 (1992년 부산 부영노동자들의 인원감원 저지투쟁, 1995년 마산창원지역의 한국산본의 인원감원저지투쟁 등), (3)위장부도나 폐업저지투쟁(1991년 중원전자, 인천지역의 1990년 명성전자, 1991년 코스모스 전자 투쟁, 1992년 부산 삼화고무의 직장폐쇄분쇄투쟁 등), (4)노조 와해 및 탄압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1990년 마산의 한국스타, 대구의 남선물산 그리고 부천 신광전자 노조사수투쟁 등)등을 벌였다. (5)여성특수과제를 중심으로 한 투쟁은 1992년 전북지역의 삼일공사의 차별정년퇴직 반대투쟁, 1995년 인천 영창악기의 남녀 차별임금 폐지 투쟁, 경신공업 해고노동자들의 남녀 임금차별철페투쟁 등이 전개됐다.
특히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남성 폭력에 의해 저지당하기도 했다. 예로 1988년 부산 신발업체인 원창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에서 남자관리자들이 여성노동자들에게 성고문등을 자행하며 강제사직서를 쓰게 했다. 또 1990년 마산의 한국스타에서는 술 취한 남자사원 40∼50명이 농성중인 임산부 두 명의 배를 걷어차는 등의 집단구타를 가해, 한 명은 유산하고 나머지 한 명은 정상 분만이 어렵게 됐다.
이 시기 여성노동자들은 죽음으로 노동현실에 저항하기도 했다. 인천 진흥요업 산업재해를 당해 반신불구가 된 여성노동자 김성애는 18살의 나이에 '산재 없는 세상'을 염원하며 병원에서 투신자살(1987)했으며, 이리 후레아훼션의 기혼여성노동자가 화장실에서 동맥을 끊기도 했다. 부산 신발업체인 (주)대봉은 작업강도를 강화하기 위해 현장에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다같이 죽자"라는 말을 써놓는 등 '일 더하기 운동'을 강행하면서 여성 노동자들의 인격을 무시했다. 이에 항거하여 여성노동자 권미경은 공장 옥상에서 투신, 죽음으로 항거했다.
이 시기 여성노동자투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혼여성들'이 투쟁 중심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기혼여성들의 투쟁 예는 1988년 서울 주파의 기혼여성들은 파업자위대로 활동하였으며, 부산의 원림상사 기혼여성들은 파업기간 중 100%의 참여율을 보이면서 오히려 집에 가서는 가족들을 설득해가며 투쟁을 이끌어갔다. 또 미국회사 피코전자의 기혼여성노동자들은 일방적인 자본철수에 대항하여 미국 본사까지 찾아가 국제적으로 외자 기업의 횡포를 폭로하면서 외국 민간단체들과 연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7. 단절을 딛고 나아가는 여성노동자 투쟁의 역사

이 글은 여성 노동자 투쟁의 뿌리를 찾아 임금노동자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일제시기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역사를 개괄했다. 일제 시대 여성노동자투쟁은 노동계급의 주체로서 임금과 근로조건개선을 위한 투쟁에서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발전했으며, 작업장안의 성차별 관행에 대한 저항을 하기도 했다. 전평이 불법화된 1946년 이후 노동자 투쟁이 급격하게 침체되었으나 섬유산업의 여성노동자들은 좀 더 오랫동안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다. 1970년대 섬유, 봉제, 전자업종의 여성노동자들은 가장 먼저 노동운동의 단절을 뛰어넘어 민주노조운동을 새롭게 싹틔웠다. 여성노동자들은 노조운동의 중심에 서서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왔고, 선도적으로 여성과제를 해결해 나간 사업장들도 있었다. 1980년대 신군부정권의 탄압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와해됐으나, 여성노동자들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으로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의 기틀을 마련했다. 1987년 대투쟁 이후 여성노동자들은 민주노조운동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건 개선, 노조결성, 노조 민주화 투쟁을 활발히 전개하면서도, 차별임금해소, 모성보호확보 등 여성의 권리확보를 위한 노력을 전개했다. 또 기혼여성노동자와 사무전문직 여성노동자들이 투쟁의 주체로 참여하면서 여성노동자투쟁은 확대됐다. 민주노조를 탄압하려는 휴폐업과 산업구조조정으로 인한 임시직, 시간제 고용이 확대되면서 고용불안정 문제가 대두되어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휴폐업, 감원, 자본철수, 비정규직화에 대항한 투쟁을 전개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80여 년이 넘는 여성노동자 투쟁의 역사는 한국노동운동사가 단절을 뚫고 발전해 왔듯이, 단절을 딛고 역사적 경험을 계승하는 투쟁의 역사로 이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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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순 | 노동자의 힘 회원, 역사학 연구소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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