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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성행진', 그 찬란한 이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82호 커버스토리

세계여성행진이 지난 3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3백 여명이 모였는데 얼핏 적어 보이는 숫자 같지만 이들이 현재 진보여성운동을 상징한다는 데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여기서는 세계여성행진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세계여성행진의 의미를 어떻게 이어 나갈까 고민해본다.

세계여성행진의 역사

세계여성행진은 1995년 북경행동강령 채택을 계기로 모인 여성들이 '빈곤'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 투쟁하는 전 세계 여성행진을 제안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같은 해 캐나다 퀘벡에서는 여성들의 빈곤을 추방하기 위한 경제정의와 관련한 9개 요구사항을 가지고 '빵과 장미를 위한 행진'을 진행했는데 이것이 모델이 된 셈이다. 1998년 10월 몬트리올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빈곤'과 '여성에 대한 폭력', '제거'를 주제로 채택하고 이에 관한 17가지 요구 목록을 작성했고, 2000년에 이 요구를 바탕으로 지구를 횡단하는 세계 여성들의 첫 번째 릴레이 행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행진에 참가했던 각 국 여성들은 '세계여성행진'(World March of Women)이라는 세계적인 여성들의 네트워크를 결성하게 된다. 이 여성행진에는 아시아, 중동, 유럽, 아프리카, 미주를 포함 161개국, 6천 여 개 이상의 여성단체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여성행진과 여연의 입장차이

2005년 세계여성행진은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시작되었으며, 지구를 횡단해 '세계 빈곤 철폐의 날'인 10월 17일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에서 마무리 될 예정이다. 여성행진에서는 퀼트(전 세계 여성들의 요구를 담은 거대한 천 조각보)가 공동 제작되고 전 세계를 돌게 되는데 이 퀼트는 여성들의 공동 의제를 만들어 연대하는 상징적 의미를 띤다. 그런데 이번 세계여성행진의 한국 측 코디네이터가 한국여성단체연합(아래 여연)이 되면서 대학로에서 형형색색의 퀼트를 볼 수 없었다. '성노동'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와 접근 때문에 여연이 '세계여성행진과 함께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행진(아래 여성행진)'과 같이 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여성행진은 여연에게 퀼트를 공동 제작할 것을 요구했지만, 여연은 "성매매와 관련 성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여성인권 쟁취라는 여성운동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점, 그리고 세계여성행진의 권리헌장과 위배된다는 점을 근거로 여성행진이 퀼트를 사용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여연은 "가부장적 문화와 억압이 여전히 강하게 자리잡은 한국에서, 성매매를 둘러싼 보수계층과 언론의 왜곡이 심한 지금, 성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수평적 자율주의'를 표방하는 여성운동 내부에서 가부장의 상징인 권위주의와 위계적 질서에 입각한 중심성과 대표성을 부르짖고 있다는 점에서 여연의 여성운동조직으로서의 실천과 관행에 의구심을 떨쳐 낼 수가 없다.

성매매 여성, 피해여성vs성노동자

애초 여성행진과 여연의 입장 차는 역시 성노동 문제에서 첨예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논쟁은 성매매-성노동을 하는 여성들을 성매매 피해여성으로 볼 것인가? 성노동자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다. 또 그녀들 자신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을 옹호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입장에 서는 문제가 게재되어 있다. "우리는 착취와 억압, 불관용 그리고 배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리고 존엄과 다양성, 모든 사람의 권리와 자유가 존중받는 또 다른 세상을 건설할 것을 제안한다. 이 헌장은 평등, 자유, 정의 그리고 평화의 가치에 기초를 둔다"는 세계여성행진 권리헌장의 어디에서도 성매매 여성을 피해여성으로만 위치 짓는 단정은 없다. 권리헌장은 오히려 여성들이 자기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받을 수 있도록 싸우라고 제안하고 있다. 여연이 권리헌장의 의미를 제 멋 대로 해석하고 있을 때 성노동자들은 권리헌장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전투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3일 대학로에 모인 성노동자연대 동지들은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성노동(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성매매방지법)에 대한 여연의 태도는 지난 날 이라크 파병반대 행동에서 보여준 여연의 노무현 정권에 대한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여연은 한국여성운동을 대표한다는 명목 아래 성노동자의 자율성을 짓밟는 부끄러운 짓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노동자도 인간이다! 성노동자도 노동자다! 성노동자는 비정규직이다!…" 성노동자들의 울림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지 않은가? 여연의 이러한 태도는 세계여성행진의 권리헌장을 스스로 위배하는 것임과 동시에 여성의 이름으로, 여성의 착취를 강화 온존시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여성노동, 가족, 그리고 전쟁

이번 세계여성행진의 주요 의제는 '여성노동, 가족, 그리고 전쟁'이다. 신자유주의 무장한 세계화가 빈곤의 여성화를 심화시키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욱 강화한다는 의미에서 여성에게 노동, 가족, 그리고 전쟁이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노동은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노동(성적인 서비스노동)을 다른 범주의 노동과 차별화시키는 것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여성노동권은 끊임없이 도전 받고 있다. 여성노동권의 위협은 자본과 가부장의 결탁과 보수적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부활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여기에 재생산, 양육, 보살핌 노동에 대한 여성의 의무가 강화되고 있는 현실은 여성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최대 피해자로 만들고 있다. 이에 맞서 세계 여성은 여성이 자기 자신의 온전한 소유자가 되고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독립된 주체로서 여성권과 노동권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1.2.3 운동하면 4.5.6 된다(1. 결혼 뒤 1년 내 임신하고, 2. 2명의 자녀를, 3. 30세 이전에 낳아 건강하게 잘 기르자는 1.2.3 운동하다가 4.5.6 신세 못 면한다! 1.2.3 운동을 하면, 4. 40대에 실직하고, 5. 50대에 배우자와 자녀에게 버림받고, 6. 60대에 수급권자에서 탈락한다(부양자가 있으므로)"는 말이 난무하고 있는 요즘, 출산-여성의 신체에 대한 국가권력의 통제, 가족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도를 넘어가고 있다. 12명의 자녀를 둔 여성 주부가 연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가운데 국가는 여차하면 출산파업에 공권력이라도 들이밀 태세다. 건강가족기본법 제정이나 여성가족부 개편과 같은 일련의 여성정책들은 신자유주의 반격 하에서 가족의 위기를 가족 간 유대를 강화하여 극복해보겠다는 얄팍한 보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있다.

'가족'은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다. 역사적으로 가족은 부르주아 모델이었고,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가구는 사회 역사적인 특수성을 드러내면서 생존을 추구해 왔다. '가족의 위기' 담론은 좌우를 막론하고 특정한 가구형태를 보존하려는 보수적인 논거에 바탕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독신여성들이나 아이들이 딸린 한 부모 가구, 그리고 다른 성적 소수자들이 구성하는 가구는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지 않고 보호되어야 한다. 1인 가구 15.5%, 부부 가구 14.8%, 한 부모 가구 9.4%가 보여주는 오늘날 가족의 변화를 외면하고, "혼인ㆍ혈연ㆍ입양 관계만 가족"으로 보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여성가족부는 폐지되어야 한다.

전쟁과 군사주의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체계적으로 재생산한다. 이라크에서 행해진 '명예살인'(미군에게 강간당한 이라크 여성이 이슬람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가정에서 죽임을 당함)은 그 구체적 예에 그칠 뿐이다. 이라크에서는 여성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이 미군에 대한 '저항'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전쟁 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전쟁 이후에 더욱 가혹한 구조적인 폭력을 양산한다. 신자유주의 무장한 세계화는 전쟁과 폭력이며, 여성에 대한 빈곤과 폭력의 악순환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해낸다. 최근 미일 군사주의 동맹이 동북아를 둘러싼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군국주의는 동아시아 여성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전 세계 여성은 전쟁이 야기하는 여성에 대한 무수한 폭력과 성차별주의에 반대해야 한다. 여성의 이름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우리는 한반도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미국 일본의 군사주의를 반대한다. 이라크 파병을 철회하고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저지하는 반전반제운동에 여성들이 앞장서야 한다.

세계여성행진의 과제

'세계여성행진과 함께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행진'이 10월 17일, 그리고 내년 3월 8일까지 자신의 문제의식을 올곧게 이어나가기 위해 고민해야 할 몇 가지를 적어보자. 신자유주의 세계화 아래서 이중고통을 지고 있는 여성에게 노동, 가족, 전쟁에 있어서 권리 확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노동자 계급의 경제 사회적 곤란을 심화시키며, 특히 여성의 노동화, 여성의 빈곤화, 그리고 노동시장과 같은 공적영역에서의 여성의 주변화가 가속화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남성생계부양자모델에 입각한 가족임금-젠더 이데올로기의 제도화 때문인데, 이러한 관행이 오랫동안 자본주의 가족형태-핵가족모델을 지지해왔음을 비판한다. 동시에 우리는 기존 가부장제적 문화와 관행이 여성들에게 가사노동과 육아, 남편에 대한 서비스, 노인 등에 대한 보살핌 등에서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점을 중시한다.

우리는 여성행진이 여성 내부의 차이의 문제들-여성 노동자, 여성 농민, 여성 빈민, 이주 여성, 장애 여성, 동성애 여성, 성노동자, 여학생, 기혼 여성과 비혼 여성, 올드 페미니스트와 영 페미니스트-에 대해 좀더 의미 있는 실천들을 가져가기를 원한다. 여성행진을 준비하는 동안 이들 여성들 사이의 차이의 문제는 부각되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차이 속에 연대' 라는 여성주의 전략은 공허하기만 했다. 이들 여성들이 나와 다른 여성들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나아가 어떻게 소통하려고 하는지 별로 확인된 게 없다. 일례로 3일 여성행진을 목전에 앞두고 '장애여성 공감'은 참가를 안 하기로 했다. 이 문제는 똑같이 '성노동' 개념이 원인이 되었다 치더라도, 여성행진이 여연과 갈라치기 되며 자신의 정치를 더욱 뚜렷이 선보이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장애여성 공감 동지들과는 앞으로 끈질긴 토론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섹스 자원봉사: 억눌린 장애인의 성』같은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며, 처음에 장애 여성 동지들이 장애인의 성=남성의 성, 섹스 자원봉사? 라고 문제제기 하더라도 끝까지 그녀들의 입장을 존중하며 토론해 나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우리는 지난 3일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권리선언'을 20개 항목으로 주장했다. 이 20개 항목은 여성의 권리 확보를 위해 어느 하나 빠질 수 없는 부분들이다. 여성 스스로 이 주장을 내면화하여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내재성의 정치를 해나가자. '건강가족기본법 폐지'와 같은 실천적 주장에 대해서는 여성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여성주의 정치 실천을 해나가야 한다.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사회, 문화적 이슈들에 여성들의 네트워크로서 책임 있는 입장과 대안을 마련해가야 한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문화산업의 성 상품화 공세로부터 여성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는 동시에 스스로 조직화하는 성노동자들에게 연대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여성주의 정치 실천의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끝으로, 2005년 세계여성행진의 의미를 가장 절실하게 되새기게 해주는 7.3 세계여성행진에서 연대 발언을 한 전국성노동자연대(6월 29일 출범한 성노동자들의 자치조직)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리고 우리가 그 약속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자.

"저희 성노동자들은 단언합니다. 성노동자 운동은 빈민운동이며, 사회변혁운동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오명에 시달려온 성노동자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인간선언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성노동자들의 노동권 요구에 더 이상 침묵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공론화에 나서 주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세계여성행진에 초대해주셔서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성노동자들은 여러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한국의 모든 노동자들과 더불어 주권자로서 생존권과 노동권 건강권 쟁취를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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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고싶다.

    1. 선택의 자발성/비자발성 ?
    2. 댓가 유/무 혹은 댓가용도가 생계비/비생계비?
    3. 공식사업장 유/무 혹은 집단적 관계/개별적 관계?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까?
    '공동의 쾌락으로서 성행위가 아닌, 남성의 성적 욕구대상화된 여성의 성'이라는 성매매와 성폭력의 공통점이 위에서 나열된 조건의 차이에 의해 없어지나요?
    성매매여성들이 단결하여 생존권과 인권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성매매에 내재해있는 성폭력에 눈감고 그녀들의 운동에 추수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나라는 의구심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