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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 10월 |지금지역에서는] 대전 질판위, ‘중요자료’ 누락시킨 채 삼성백혈병 심의회의



대전 질판위,‘중요자료’누락시킨 채 삼성백혈병 심의회의


노무법인 참터 김 민 호


#1. 2009년 9월 2일 근로복지공단 대전지역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이하 ‘질판위’)가 열렸다. 삼성전자 조립공정 도금작업장에서 일하다 퇴직한지 10년 만에 발병한 송00 씨의 ‘비호지킨 림프종(악성, 백혈병과 같은 혈액암의 일종)’이 업무상 질병인지를 판정하는 심의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2008년 12월 산재를 신청한지 9개월만의 일이다.


#2. 이에 앞서 근로복지공단은 삼성전자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투병중인 노동자들과 사망한 노동자들의 유족들이 산재를 신청하자,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하 ‘연구원’)에 <집단역학조사>를 의뢰했다. 집단역학조사는 2008년 1년간 진행됐으며,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반도체산업 종사자들’과 ‘일반인구’의 백혈병 등 림프조혈기계질환 발병률을 조사하여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반도체산업 종사자에 대한 정확한 자료 확보가 어렵고, 건강노동자 효과(처음부터 건강한 노동자들이 공장에 취업하게 되고, 건강에 문제가 있는 노동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이직했다. 때문에 지금 현재 공장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건강 조사를 하면, 이들이 일반 인구 집단보다 건강한 것으로 왜곡되어 나타나는 효과)와 1년이라는 턱없이 짧은 조사기간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처음부터 커다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역학조사를 실시한 연구원 측은 거센 항의를 받고서야 보고서에 이 같은 한계를 담았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2009년 발표된 집단역학조사결과에 따르면, <백혈병>은 반도체산업 종사자와 일반인구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비호지킨 림프종>은 조립공정 여성사원의 경우 일반인구보다 무려 5.16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3. 2009년 송 씨가 근무한 삼성전자 온양공장 조립공정 도금작업장에 대한 <개별역학조사>도 진행됐다. 그러나 지난 10~15년이 지난 현재의 도금작업장은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다. 당시의 낡은 설비는 오간데 없고 환기시설 등 작업환경도 상당히 개선돼 있었다. 여기에 이미 다 깨끗하게 청소된 상태에서 작업환경측정이 이루어졌다는 점가지 고려하면, 현재의 작업환경에서 유해화학물질이 법적 기준치 미만으로 검출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현재의 작업환경측정결과를 근거로 10~15년 전의 작업환경을 추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백혈병에 걸린 다른 노동자들에 대한 <개별역학조사>도 마찬가지였다. 개별역학조사보고서에도 이러한 역학조사결과의 한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4. 잠복기가 긴 직업병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세월인데 하루가 멀게 발전하는 산업사회에서 특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는 반도체산업의 작업환경은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송 씨의 비호지킨 림프종 역시 백혈병에 걸린 다른 삼성전자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질병이 업무와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을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하는 건 가능하지 않다.
대법원이 질병과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도 업무관련성에 대한 입증이 있는 것으로 폭넓게 인정하는 것은 직업병의 이러한 특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도체 조립공정 여성사원들의 비호지킨 림프종 발병률이 일반 인구에 비해 무려 5. 16배나 높다는 집단역학조사결과는 송 씨의 비호지킨 림프종 사건에 있어서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5. 그런데 지난 9월 2일 열린 대전 질판위 심의자료에는 집단역학조사결과가 쏙 빠졌다. 이날에 앞서 열린 전문가 소위원회(혈액종양내과전문의 2명, 산업의학과전문의 1명으로 구성했다고 한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전 질판위는 소위원회 전문가들에게 집단역학조사결과를 알려주지 않고 검토 의견을 제시하도록 했고, 이날 심의회의에서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심의회의 당일 송 씨의 생생한 육성증언을 판정위원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대전 질판위를 방문했다가 아주 우연히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7 대전 질판위는 집단역학조사를 실시한 사실을 몰랐다고 해명했다. 삼성전자에서 림프조혈기계 질환이 집단 발병(사망)하자 공단이 연구원에 의뢰해서 실시한 집단역학조사이거늘, 대전 질판위가 이를 전혀 몰랐다면 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심의회의를 보류하고 전문가 소위원회부터 다시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항의 끝에 나와 송 씨가 심의회의에 함께 들어가서 판정위원들 앞에서 대전 질판위의 중요자료 누락 사실을 소상히 밝히고, 업무상 질병으로 판정하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로 했다.
송 씨와 나의 진술과 설명을 들은 위원들은 새로운 사실에 관심을 보였다. 집단역학조사보고서를 달라고 해서 읽어보는 위원도 있었고, 같은 부서에 발병자가 몇 명이나 되냐고 묻는 위원도 있었다(당시 송 씨가 일한 부서원은 약 150명이었고 그 가운데 3명이나 림프종과 백혈병에 걸렸다).


#6. 대전 질판위가 이날 ‘중요자료’를 누락시킨 채 전문가 소위원회와 이날 심의회의를 개최한 사실은 실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전문가 소위원회와 심의회의에 어떤 내용의 심의자료가 제출되는지 재해노동자들이나 유족들로선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질판위 제도가 시행된 지 1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이번 일을 계기로 질판위 제도에 대한 냉철한 평가와 함께 근본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 이 기사는 미디어충청에서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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