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1년 5월- 칼럼]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그곳에서 지워진 사람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그곳에서 지워진 사람들!


발전노조 신 현 원

2011년 3월 어느 날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충격적인 보도가 지축을 흔들고 있었다. 분분한 낙화 속에 지는 벚꽃을 바라보며 못 다 이룬 삶과 꿈들이 흩어져버린 후쿠시마의 아픈 재앙들이 달포가 지난 지금까지도 절규처럼 되살아난다.
동북태평양에서 발생한 강한 지진(진도 9.0)이 일본 동북지역을 덮쳤고, 무려 14미터에 달하는 쓰나미까지 겹쳐 막대한 희생과 피해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원자로가 자동 정지되었으며 전원 상실에 따른 물과 지르코늄 반응으로 인한 수소폭발이 있었고, 1~4호기 모두 연료가 녹아 흘렀으며 원자로 용기와 격납용기가 파손되는 등 시시각각 일본 동북지역의 핵시설은 벼랑 끝을 향해 위험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예고된 재앙이었으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죽음의 강요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지질학자가 아닌 필자의 눈에도 날카로운 가시처럼 들어와 박히는 가공할 위험이 원전 자본들과 국가 관료를 포함한 핵 마피아들의 눈에는 먼지처럼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면 이와 같은 대재앙은 결코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당초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핵무기 개발을 목적으로 시작된 핵에너지 기술과 핵 산업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한 참혹한 비극에 직면하여 핵의 거대한 위험성과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치열한 반핵운동이 확산되고 핵무기로 인한 세계 여론이 악화되자 핵무기에 집착했던 이들 국가들과 군수산업자본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핵발전소였다.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허구적 미명하에 이루어진 핵발전소 건설 사업은 핵무기 생산을 위한 정치적 욕망을 은폐한 채 값싼 에너지 생산과 안정적 공급체계 확립이라는 경제적 논리를 반복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핵발전 기술과 핵산업 시설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공생의 기초를 파괴할
그린피스 운동가들이 “핵발전? 사양할께요!” 라고 적힌 표지판을 멕시코 에너지 사무국 앞에 걸고 있다
뿐만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절멸의 위험으로 몰아넣는 죽음의 과학기술이며,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절망의 생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농축우라늄을 핵연료로 사용하는 핵에너지 생산과정은 거대한 규모와 중앙집중성을 특징으로 갖고 있다. 핵발전의 경우 핵폐기물 처분을 제외하고도 에너지 이용을 위해서는 최소한 아홉 개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고도의 기술과 에너지의 집중적 투입이 불가피한 핵발전 과정에서 엄청난 환경오염과 대형사고의 가능성은 그림자처럼 붙어다닐 수 밖에 없다.
윈드스케일 핵사고를 비롯하여 체르노빌을 거쳐 후쿠시마에 이르기까지 주요 핵사고 경험 속에서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그곳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쓰여진 그곳에서 일하던 우리의 이웃인 노동자들이 그들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소유기업인 도쿄전력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이중 삼중의 하청구조 속에서 불안정한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을 뿐만아니라 심각한 저임금과 착취의 사슬에 묶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린당하고 있었다.
한국의 많은 핵발전소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주요 핵발전 설비에 대한 유지·보수를 위한 이른바 ‘계획예방정비’과정에 투입되는 노동자들의 경우에 하청업체의 노동자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래전 핵발전소에 근무하는 어느 선배 노동자는 현장에 들어갈 때 호주머니에 호박씨를 가지고 들어가 싹이 트는지 여부를 살펴본 적이 있다는 말을 했었다. 그가 호박씨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명에 대한 외경이나 건조한 일상에서의 일탈 이전에 건강하게 노동하며 살고자 하는 절실한 삶의 의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오로지 이윤 획득만이 목적인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더 많은 생산과 더 높은 효율을 강요하며 원자력 신화와 원전 르네상스를 확산하려 하지만 자본의 욕망이 범람하는 그 수레바퀴 밑에서 생존을 위한 노동을 지속할 수 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삶은 철저하게 잊혀지거나 지워져가고 있는 현실 앞에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자신들의 위기를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것을 통해 우회하거나 감춰왔던 기업들은 또다시 국가와 민족을 들먹이며 핵발전소 노동자들에게 ‘영웅’의 갑옷을 입혀 그들을 죽음의 현장에 가둬 놓고 마치 가라앉는 잠수함의 토끼처럼 마지막 희생의 제물로 삼으려는 비열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제는 국가경제의 부흥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생산력의 무한 확대를 향한 질주를 멈추고 핵마피아들의 배를 불리는 노동이 아닌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호흡할 수 있는 노동, 노동자들의 존엄과 생명, 그리고 정의와 공존을 실현하는 노동의 미래를 열기 위해 외형으로 드러나는 사고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 현재진행형인 위험 그 자체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들이 더 늦기 전에 시작되어야 한다.
독일 연방환경청은 최근 일본에서의 핵사고를 거울 삼아 2018년까지 원전폐쇄를 추진하고 있으며, 향후 에너지 수요를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것은 에너지체제 전환을 통한 산업재편을 수반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미 설계수명이 지나버린 고리 1호기의 1차 수명연장에 이어 또다시 낡고 위험천만한 그 핵발전소 가동을 연장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는 고리원전 1호기에 대한 정밀점검 결과, 문제가 없다고 판단, 지난 5월 6일 재가동을 공식 승인했다.
조자룡이 헌칼을 휘두르듯이 핵재앙의 검은 그림자를 짙게 드리울 원자력 르네상스를 부르짖고 있는 정부의 제5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전원별 발전량 전망을 통해 앞으로 12년 동안 원자력의 비중을 50%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체 전력생산의 절반을 죽음의 에너지에 의존하여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방사능의 치명적 위험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볼모로 삼아 이윤을 극대화 하겠다는 국가와 자본의 적나라한 탐욕이 응축된 정책을 강행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탈핵의 조건을 창출하고 실제 탈핵의 길을 열어나가는 것은 이른바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핵산업 과정에서 현행 핵발전 정책의 가장 적나라한 희생과 배제를 경험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충분히 사회적으로 환기되고 노동자들
환경운동연합이 쓰리마일 핵 참사 32주기를 맞이해 28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위험한 핵에너지 확대 정책 포기를 촉구하고 있다.
스스로 우리 아이들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자신들의 노동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지... 그리고 생태순환적 에너지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공장 밖의 운동들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고용과 임금이라는 굴레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진지한 성찰을 함께 모색하는 노력들이 무엇보다 절실한 오늘이다.
특히, 핵산업의 기반인 핵에너지 기술은 그 본질상 민주주의와 양립하기 어렵고 핵발전으로 생산된 전력을 향유하는 사람들과 핵발전으로 생성되는 핵폐기물의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다르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평등한 삶을 저해하는 문제가 발생하며, 특히 핵발전은 세대간에도 윤리적인 형평의 문제를 야기한다. 현재 가동되는 핵발전소의 결실인 전기는 우리 세대가 향유하지만 그 찌꺼기인 핵폐기물은 자녀와 후손들에게 매우 커다란 덫으로 남는다. 즉 핵폐기물의 시간적 차원의 윤리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이필렬 교수의 진단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핵없는 세상을 향한 첫걸음은 물론, 전기를 생산하는 노동자들 자신의 투쟁과 만나는 전 사회적 운동의 흐름이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형성될 때 가능할 것이다.
아직은 에너지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발전소 노동자들의 조건이나 역량이 그것을 감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이윤보다 인간을” 살리고 “이윤보다 자연을” 살리기 위한 지향을 분명히 한다면 생존의 덫에 결박되어 교대제와 방호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불안한 노동을 넘어 대안적 노동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는 투쟁으로 한걸음 더 성큼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싸움이 외롭지 않은 모두의 싸움이 될 수 있게 하려면 지금 당장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이라는 허구적 담론과 산업전략에 맞서는 투쟁을 아래로부터 조직해 나가는 한편, 노동운동과 생태(환경)운동이 긴밀하게 만나고 내적인 접합을 이루기 위해 각 운동영역 자신의 벽을 허무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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