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 일본 개헌의 배경과 헌법문제를 둘러싼 현 국면을 어떻게 볼 것인가(1)

[역자 주: 이 글은 2005년 2월 25일에 개최된 헌법 개악반대공동센터 주최의 ‘헌법투쟁의 발전을 위한 학습교류집회’에서의 강연을 정리하여, 수정․보완한 글로서, 원 제목은 『改憲の背景と憲法問題をめぐる現局面をどう見るか』이다. 저자는 일본의 대표적인 좌파학자로서 일본의 기업사회와 헌법문제에 대해 많은 저술활동을 하고 있으며 일본공산당 당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흔히 일본이 ‘우경화’․‘군사대국화’ 된다고 우려를 표하기는 하지만 정작 그 문제가 헌법개헌이라는 쟁점으로 어떻게 부각이 되고 있으며 그 개헌 의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헌법문제는 단순히 국내문제가 아니라 그 태생부터 동아시아와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최근의 개헌 움직임은 좁게는 한반도의 안보문제를 비롯하여 넓게는 일본의 신자유주의적 전략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이해를 높일 것으로 생각된다. 본 원고는 서문과 결론, 그리고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번 호에서는 서문과 1-2장만 번역하였다. 다음호에 나머지 3-5장과 결론을 실을 예정이다.]




헌법 개악을 둘러싼 중대국면


개헌의 정치일정으로의 부상

헌법 개악을 둘러싼 정세가 매우 중대한 국면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민당과 더불어 민주당도 개헌을 용인․추진하게 되었으며, 이에 공명당도 합세하기에 이르러, 국회에서는 개헌 발의에 필요한 3분의 2를 훨씬 상회하는 의원이 개헌을 찬성하거나 용인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생겨난 것은 2003년 11월의 총선거에서, 자민당․민주당․공명당이라는 세 정당이 모두 선언문 속에서 헌법의 재평가를 주장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입니다. 이는 일본의 정치 상황이 크게 변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2000년에 성립된 헌법조사회가 올해 4월에는 최종보고서를 제출하게 되는 데, 그 보고서에서는 헌법개정이 대세라고 내세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러분은 자민당이 개헌을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만, 사실은 자민당이라고 해도 개헌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전후 일본의 정치상황을 보면 분명 자민당이 일당 지배를 하고 있긴 했으나, 9조1)를 중심으로 하는 헌법을 개악할 힘은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개헌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정권을 유지해왔다2)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자민당은 평화 헌법을 싫어했으며, 창당 시에도 강령에 개헌을 명기했습니다. 그러나 헌법을 개악하여 군국주의를 부활하려 한 1950년 후반의 시도는 1960년 ‘안보개정반대’라는 국민적 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좌절되었고, 그 이후 헌법에 손을 대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자민당은 2000년도 이전까지는 헌법개정을 총선거 기간 중의 쟁점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개헌을 쟁점으로 제기한 때는 2000년 모리(森)수상 때의 총선거였고, 그것도 24개의 총선거 정책 중에 23번째로 슬그머니 들어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던 것이 2003년 11월의 총선거에서는 자민당도 민주당도 한꺼번에 선언 5번째 조항에서 헌법 재평가를 주장했습니다. 특히 자민당은 단순히 재평가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창당 50주년인 2005년 가을까지 ‘헌법개정초안’을 만든다고까지 약속했습니다. 민주당도 그에 뒤질세라 처음에는 ‘논헌(論憲)’(단순히 헌법논의를 하겠다)이라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것에서 벗어나, ‘창헌’(創憲)‘(헌법을 제정한다)이라는 모토 아래 2006년에는 헌법개정의 초안을 내놓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집권당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미국의 승인도 받지 않으면 안 되고, 재계 지지도 얻어야 하기 때문에 헌법개정을 내세우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이러한 변화가 생겨났을까요? 두 가지의 요인을 들 수 있습니다. 얼마간의 저항이나 반격을 받더라도 헌법개정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생겨났다고 하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뒤에서 자세하게 검토하겠습니다만, 보수세력과 재계는 90년대에 들어선 이후 군사대국화와 구조개혁을 추진하고 있는데, 헌법이 바로 그러한 2가지 개혁의 커다란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개헌을 주장하더라도 더 이상 적어도 국회 안에서는 정권교체나 동요가 일어나는 상황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보수 양당제3)가 사실상 성립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2개의 요인을 합쳐져 개헌이 일약 정치무대에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헌안의 쇄도

두 번째 상황은 헌법 개정안이 쇄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헌안은 개헌이 상당히 정치적으로 논의된 상황이 아니면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개헌안의 수는 개헌 상황의 성숙의 척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후(戰後) 역사에서 어느 시기에 개헌안이 나왔는지를 살펴보면, 1950년대부터 60년대 초까지 총 17개의 개헌안이 나왔습니다. 이 시기는 일본에서 헌법 개악의 위험성이 가장 컸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후 1964년부터 81년까지 헌법개정안은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근 2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헌법개정안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 계속된 것입니다. 80년대 초가 되면 다시 개정안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 3년 동안에 3개 정도가 등장했습니다. 이는 나카소네(中曾根) 내각 때로서 아주 작은 움직임이긴 했지만 '헌법개정의 제2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서고 나서 15년 동안에 30개 이상의 개헌안이 나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과반수인 20개 가까이가 1999년 이후에 갑자기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개헌의 물결은 실은 전후 최대의 개헌의 물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료 1> 헌법개정안 연표

 연도

개정안 수

                작성 주체

 1949

 2

 공법연구회, 동대(東大)헌법연구회

 <헌법개정의 제1파>                              계 17

 1953

 1

 와타나베(渡辺)경제연구소

 1954

 2

 자유당헌법조사회, 개진당헌법조사회

 1955

 2

 헌법연구회,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자주헌법을 위한 개정요강사안」

 1956

 2

 자민당 헌법조사회, 오오니시 쿠니토시(大西邦敏)

 1957

 2

 히로세 쿠우에(広瀬久恵), 변리사회

 1958

 2

 자주헌법기성청년동맹, 사토미 키시오(里見岸雄)

 1961

 1

 나카소네 야스히로(고도민주주의 민정헌법초안)

 1962

3

 오오이시 요시오(大石義雄), 전일본애국자단체회의, 대일본생산당

 1963

 1

 헌법조사회 공동의견서

 1964

 1

 헙버조사회 보고서

 1972

 1

 자민당 헌법조사회 「헌법개정대강초안」

 <헌법개정의 제2파>                               계 3

 1981

 1

 자주헌법기성의원동맹․ 자주헌법제정국민회의

 1982

 1

 자민당 헌법조사회 중간보고

 1984

 1

 나카가와 야쓰히로(中川八洋)

<헌법개정의 제3파>                               계 32

 1991

 1

 니시베 스스무(西部邁)

 1992

 1

 코모리 데츠(小森節)

 1993

 3

 자주헌법기성의원동맹․자주헌법제정국민회의, 자민당 헌법조사회 중간보고,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1994

 3

 요미우리신문, 이토우 다카시(伊藤孝), 니시 오사무(西修)세미나

 1996

 2

 신진당 헌법조사회, 키무라 무츠오(木村睦男),

 1997

 1

 아이치 카즈오(愛知和男)

 1999

 2

오자와 이치로우(小澤一郎),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起夫)

 2000

 5

 나카소네 야스히로, 요미우리 제2차 개정시안, 일본경제신문, 자민당, 자민당 하시모토(橋本)파 

 2001

 3

 일본회의, 야마사키 타쿠(山崎拓), 민주당 헌법조사회 중간보고

 2002

 3

 경제동우회 헌법문제조사회 중간보고, 민주당 헌법조사회 보고, 국회 헌법조사회 중간보고

 2003

 2

 동우회 헌법문제조사회 의견서, 자주헌법제정국민회의

 2004

 3

 요미우리신문 제3차 개정시안, 자민당 헌법개정프로젝트팀 논점정리안, 자민당 헌법개정 초안대강

 2005

 3

 일본경단련, 하토야마 유키오, 세계평화연구소

    


1990년대 이후의 개헌안에는 몇 가지 주목해야 할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90년대 이후의 개정안은 예외 없이 헌법 9조의 개정뿐 아니라 헌법의 전면적 개정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그런 것인지가 앞으로 밝혀야 할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다음으로는 이들 개헌안은 다양하긴 하지만, 최근에는 명백히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조문은 거의 흉내낸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같은 조문이 몇 개나 있습니다. 개헌이 정치일정으로 부상하면서, 한층 개헌의 내용이 현실적인 합의점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을 개헌안의 이러한 수렴 현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국민투표법의 부상

또 하나의 큰 특징은, 국민투표법안이 상정되려고 하고 있는 점입니다. 중의원의 헌법조사회장이고 개헌의원연맹의 중진인 나카야마 타로우(中山太郎) 씨는 올해 안에 통과될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어쩌면 통상국회에서 서두를 열고, 경우에 따라서는 계속 심의에 들어갔다가 자민당․민주당․공명당의 3당의 조정 아래 올해 중에 통과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개헌안이 쇄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헌법 개악을 위한 극히 중요한 정치적 포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헌법개정을 하는 데에는 2개의 커다란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개헌안을 발의하는 데에는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2/3의 의원의 찬성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항입니다. 전후 지금까지 보수세력은 이 장애물을 넘지 못해왔습니다. 자민당은 1990년대의 초까지는 과반수를 간신히 차지했었으며, 자민당 1당으로는 개헌안을 발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자민당과 민주당이 달라붙고, 공명당도 달라붙어, 바야흐로 중의원의 96%를 개헌을 요구하는 정당의 의원들이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1의 장애물은 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헌법 96조에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국민투표입니다. 국민투표에서 국민의 과반수의 찬성을 얻지 못하면 헌법개정은 실시할 수 없습니다. 일본국헌법은 이러한 두 개의 커다란 장애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헌법이 제2의 장애물을 설치한 것은 헌법개정에 관해서는 국민에게 직접 의사를 묻는 것이 필요하다는 발상입니다.

이 제2의 장애물을 넘어서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국민투표법이라는 법률입니다. 국민투표로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고 헌법 96조에 써 있지만, 과반수는 어떤 수인지, 그 투표는 어떤 형태로 할 것인지, 즉 각 조항마다 O․X로 물을 것인지, 전부 일괄해서 물을 것인지, 국민투표를 위해 운동은 어느 정도로 자유롭게 할 것인지, 어떤 규제가 있는지, 어느 정도의 운동 기간을 가질지, 이러한 총 사항을 결정하는 것이 국민투표법으로서, 실은 국민투표법이 없으면 헌법개정은 불가능합니다.

전후 60여년, 헌법이 생기고 나서 58년이 흐른 지금까지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국민투표에 관한 법률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배경에는 헌법 개악에 대한 국민의 강한 경계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민투표법을 만든다는 것은 개헌을 강행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경계가 있었기 때문에 자민당 정권은 끝끝내 6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국민투표법을 만들지 못해왔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이러한 부담을 뒤로 하고 국민투표법을 제출한다는 것은 확실히 본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헌법 개악을 하겠다, 그를 위해서는 이는 어떻게든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개헌론 ― 해석개헌최악론의 등장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헌법조사회와 매스컴 속에서 새로운 개헌론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해석개헌최악론’이라고 제가 이름 붙인 개헌론입니다. 이 논의는 특히 9조에 초점을 맞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헌법 9조는 훌륭한 이상이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9조는 정부의 해석개헌4)으로 갈기갈기 찢겨 너덜너덜한 상태이다. 9조가 있으면서도 자위대는 이라크에 파병되었다. 오히려 9조의 신학 논쟁으로 인해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의 시시비비가 확실히 논의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고이즈미(小泉) 수상은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하지 않는다’, ‘전투지역에는 가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위대는 이라크에 갔다. ‘전투지역 아닌 곳은 어디입니까’라는 민주당 등의 질문에 고이즈미 수상은 아시다시피 ‘자위대가 간 곳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자위대가 나간 곳은 전투지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위대는 전투지역에 나가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보스러운 질문과 답변이나 국회에서 주고받는다면, 9조라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장식용처럼 되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한번 헌법 9조를 수정해서 군대를 가지지 않는다든지, 해외파병은 하지 않는다든지, 그렇게 말도 못하는 헌법이 아니라, 국민적인 논의를 거쳐 확실히 가능한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자위대를 제어하지 않으면, 어처구니없이 된다.”


이러한 논의가 바로 ‘해석개헌최악론’입니다. 민주당의 오카다(岡田) 대표 등이 이러한 논의를 했으며, 텔레비젼 아사히(朝日) 프로젝트의 다하라 소이치로(田原総一朗) 씨 등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정말 타당할까요. 이러한 질문을 검토하기 위해 “도대체 그렇다면 왜 지금 헌법 개악인가”라는 문제를 검토하고자 합니다.

1. 헌법 9조는 죽은 것인가?


정말로 헌법 9조는 해석개헌으로 휴지조각이 돼버려,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일까요?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만일 휴지조각이 되어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라면, 헌법을 일부러 개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헌법개정안을 만들기도 하고 국민투표를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인데도, 보수정권이 위험을 감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부러 무리를 해서 헌법 개악을 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지금 나오고 있다는 것은 사실 헌법 9조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헌법의 이념과 현실은 일치하지 않는다

우선 헌법은 죽었다든지, 헌법 9조는 힘이 없다든지 이야기되고 있습니다만, 과연 헌법의 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헌법의 힘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일본국 헌법을 몇 번이고 읽어보아도, 그것이 현실 사회 안에서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개헌파의 사람들은 해석개헌으로 헌법 9조는 현실과 너무나 달라져 있다고 말합니다.5)

그렇다면 헌법 14조에서 남녀평등을 선언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사회는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있을까요? 중소기업에서도 대기업의 노동현장을 보아도,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있다고는 누구도 믿지 않을 겁니다. 확실히 정년 차별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승진․승격에 있어서는 엄연히 차별이 있습니다. 학교의 교수도, 초등학교의 교사의 경우에도 여성 교사가 훨씬 많지만, 교장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압도적으로 소수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고 현실과 헌법의 괴리가 크다고, 헌법 14조를 개정해야 한다라는 논의가 통용되는 건가요?

또 헌법 25조는 “국민은 건강하고 문화적으로 최저한도의 생활을 영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을 해도 생활보호기준 이하의 삶을 영위하는, ‘워킹푸어’(일하는 빈곤자)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이 도쿄에만도 수십만 명이나 있습니다. 헌법 25조는 대체 어디에 가버린 걸까요? 또한 보험료를 지불하지 못해 건강보험증을 압수당해, 자격증명서만을 갖고 있는 세대도 26만 세대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단기수급자증의 교부세대는 95만 세대에 달하고 있습니다. 자격증명서를 받아도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의료비 전액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의사에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연 25조는 실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실현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들이 최저한도의 생활조차 누리고 있지 못하다고 하여 25조를 개정하여 이를 현실적으로 만들면 되는 걸까요?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무릇 헌법이라는 것은 현실과 완전히 같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헌법의 규정은 그것을 향해 정치를 움직여가도록 국가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입니다. 헌법이 현실과 완전히 일치한다면, 남녀평등 등의 선언은 필요가 없습니다. 헌법에서 선언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방향을 향해, 우리들이 특히 정치가,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 재계나 기업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의무지운 것이 헌법입니다. 따라서 헌법은 현실과 항상 긴장관계에 있고, 거리가 있습니다.


투쟁에 나서는 사람들의 무기

그렇다면 헌법에는 대체 어떤 힘이 있는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것이 쓰여 있다고 해도, 아무것도 실현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헌법은 읽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권리의 침해라든지, 평화의 유린이라는 문제에 침묵하지 않고 투쟁하는 노동자나 여성이나 시민에게 있어 좋은 헌법인가 나쁜 헌법인가의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예를 들어 전전(戰前)의 메이지(明治)헌법에서는 평화적 생존권조차 선언하고 있지 않았으며, 남녀평등도 조항에 없었습니다. 즉 아무리 기업에 의해 여성이 차별을 받아도 헌법을 무기로 해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운동이 있었습니다만, 헌법은 그것을 지원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전후에도 여성차별은 의연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전후에는 차별에 반대하는 여성들이 싸울 때 헌법은 큰 힘을 발휘해왔습니다.

고도성장 속에서 일본 대기업 직장에서 여성차별은 횡행했습니다. 여성차별을 이용하여 대기업은 값싸고 유동적인 노동자를 사용해 왔습니다. 연공임금제도 아래서는 젊은 노동력의 수를 늘리면 싼값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취업규칙 안에도 결혼퇴직제도가 종종 들어가 있었습니다. 물론 여성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결혼하면 퇴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남성에게 결혼하고 퇴직해야 한다고 하면, 기업의 샐러리맨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많은 기업주의적 노동조합은 그것에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64년에 스즈키(鈴木)라는 여성이 그것에 대해 “말도 안 된다”며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스즈키 씨는 도쿄지방재판소에 ‘결혼퇴직은 헌법위반’이라고 제소했습니다. 2년간의 재판 후에 스즈키 씨는 승소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스즈끼 씨는 스미토모(住友)시멘트라는 회사를 그만두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다만, 회사에 ‘반항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66년까지 일했던 것에 대해 퇴직금과 임금을 받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스즈끼 씨의 싸움은 많은 여성들에게 커다란 권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이후에 노동성의 행정지도에 의해 대기업의 ‘결혼퇴직제도’는 취업규칙에서 철폐되었습니다. 대기업이 그렇다고 차별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차별정년제’를 채용했습니다. 이에 대해 닛산(日産)자동차에서 일하는 여성에 의해 다시 소송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1981년 최고재판소에서 차별정년제도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렇게 헌법을 방패로 한 여성들과 차별을 존속시키려는 이들과의 줄다리기 속에서 헌법 14조는 차례로 실현되어 갔습니다.

이는 헌법 25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조합과 시민이 싸우지 않을 때에는 이 헌법조항은 ‘프로그램 규정’[한국의 헌법학에서는 ‘훈시 규정’: 역자]이라고 불리는 정도였습니다. “그런 것은 단순한 이상의 표명에 지나지 않는다, 재정상황에서 무리라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많은 헌법학자의 해석이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대에 아사히 시게루(朝日茂)라는 사람이 오카야마(岡山)결핵요양소에서, “생활보호수급의 빈곤한 상황은 헌법 25조에 위반 된다”라고 하여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싸움을 ‘일본환자동맹’이나 노동조합 중에서는 전일자노(全日自勞; 전국일본지방자치노조)가 응원했습니다. 아사히 씨가 나서기 전까지는 많은 민주적인 변호사도 포함하여 누구도 헌법 25조를 방패로 현행의 빈곤한 생활보호 기준은 헌법위반이기 때문에 생활보호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재판을 제기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사히 씨가 헌법을 읽다가 병마 중에 싸움을 제기하게 된 것입니다.

1심 판결은 아사히 씨의 주장을 인정한 판결이 나왔으며, 이에 힘을 얻어 1961년에는 총평, 전일자노, 사회당, 공산당을 포함하여 ‘아사히 소송중앙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통일된 운동이 전개 됩니다. 이러한 운동에 밀려 후생성은 생활보호 기준을 올려갔습니다. 아사히 씨의 싸움에 고무되어, 호리키(堀木) 소송 등 다양한 투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25조도 그러한 싸움 속에서 사회보장의 현실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이러한 싸움이 후퇴하면, 헌법의 규범은 현실과 크게 괴리되고, 현실이 좋지 않은 상황으로 되어 갑니다. 헌법 9조도 이러한 싸움에 의해서 현실을 바꾸는 힘을 획득해온 것입니다.


헌법 9조를 구체화한 운동의 힘

헌법 9조에도 물론 훌륭한 내용이 써있습니다만, 일본이 독립된 직후부터 소홀히 취급되었습니다. 안보조약에 의해 일본 전토에 미군기지가 세워졌고, 자위대는 점점 커졌습니다. 게다가 자민당도 강화 후 개헌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195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평화운동의 힘은, 헌법 개악 움직임을 중지시키고, 헌법 9조를 현실적으로 힘 있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이것이 헌법 9조가 현실에 대한 규제력을 갖게 된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우리들의 운동에 교훈이 되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헌법 9조를 힘 있는 것으로 만든 운동의 중심에는 당시 노동조합의 내셔널센터였던 총평과, 사회당, 공산당이라는 정당, 그리고 학자, 지식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스크램을 짜고 투쟁에 나섰던 것이 참으로 컸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헌법 개악과 군국주의 부활이라는 움직임에 대해 사회당과 공산당을 하나의 운동체로서 연대하게 하기 위해 총평은 꽤 힘을 발휘했습니다. 특히 일본의 헌법옹호운동을 하는 데에는 커다란 대중운동의 힘을 가지고 있는 공산당과 의회에 의석을 가지고 있는 사회당이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1950년대 후반에 총평은 다양한 형태로 사공(社共) 공투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경직법[경찰관직무집행법] 반대와 안보개정 반대에서는 국민회의라는 형태의 공동투쟁 조직을 만들어, 총평, 공산당과 사회당이 같은 테이블에 앉는 노력을 했습니다. 최초의 경직법 반대 때에는 공산당 등은 보좌역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공산당은 안보개정반대국민회의 때에는 정식 멤버가 되었습니다. 간사단체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만, 몇몇의 공산당 간부들이 안보반대국민회의의 간사단체회의 중에 항상 멤버로 들어가며 실질적으로는 함께 운동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각 지역의 안보반대 국민회의에 많은 공산당이 정규 멤버가 되면서 실질적으로는 간사단체에 들어가 함께 싸우는 체제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통일된 싸움이 안보투쟁 고양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안보반대투쟁이 헌법을 개악하려고 하는 기시(岸) 내각, 자민당 정치를 저지하기 위한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안보투쟁과 개헌종언

1960년의 안보투쟁6)은, 전후 정치사 속에서 이제껏 없었던 대투쟁이었습니다. 특히 안보조약 개정 추진을 강행․체결한 5월 19일 후에는 50만 명의 사람들이 국회 주변을 에워싸는 큰 운동으로 고조되었습니다. 많은 매스컴은 당시를 ‘시민의 투쟁’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시민의 투쟁만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조합인 총평과 사회당․공산당의 강고한 공투 관계가 이러한 큰 운동을 만들어내면서 그들이 동원한 주변에 광범위한 시민의 투쟁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안보투쟁의 고양에 보수세력은 크게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만약 보수세력이 국민의 의사를 거슬러 헌법 개악이나 군국주의 부활을 강행한다면, 기시(岸)내각이 무너질 뿐만 아니라 보수정권 자체가 위험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미국도 일본에 공산혁명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정말로 우려했습니다. 그러한 운동의 힘으로 인해 보수정치는 전환되어 이후 노골적인 헌법 개악의 움직임을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민당이 선거 중에 한마디도 헌법개정문제를 끄집어내지 않았던 것은 이 1960년에 시작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평화와 헌법 9조를 지키라는 운동은 안보투쟁 이후에도 계속되어 버전엎되어 갑니다. 국회에서는 사회당과 공산당 의원에 의해 매년 방위예산 등에 대해 그것이 위헌이 아닌가 하는 추궁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위대는 위헌이지 않은가”, “자위대를 해외에 파병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추궁이 계속되자 자민당 정권은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더 이상 “헌법 9조를 변경하지 않는다”라는 궁여지책의 발언만으로 끝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67년에 오키나와 반환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오키나와 반환과 함께 일본에 핵무기를 들여오는 것은 아닌가”하는 사회당 위원장의 추궁에 대해 당시 사토우 에이사쿠(佐藤英作) 수상은 “일본은 핵을 갖지 않고, 반입하지 않으며, 만들지 않는다”고 하는, 후에 “비핵3원칙((非核三原則)”이라고 불리는 원칙을 표명했고, 이 원칙은 이후 거듭거듭 확인되었으며, 마침내 1972년에는 국회에서 의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외에도 국회 안과 밖에서 연대한 투쟁에 의해, ‘무기수출금지 3원칙’, ‘방위비의 GNP 대비 1% 이하’, ‘해외파병은 하지 않는다,’ ‘집단적 자위권은 행사하지 않는다’, ‘무력행사는 하지 않는다’, ‘전투지역에는 가지 않는다’는 등의 답변이 계속되는 등 정부의 행동에 대한 구속은 계속 있었습니다. 헌법 9조는 실은 형해화되기는커녕 다양한 형태로 정치와 군사를 제약하며, 일본의 평화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운동에 의해 구체화된 군사대국에 대한 브레이크는 아직도 정부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습니다. 일본경단련이 일찌기 ‘무기수출금지3원칙’의 수정을 제언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렇게 헌법 9조는 일본정치를 엄격하게 제한해왔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서자 이러한 헌법 9조를 바꾸어 일본을 군사대국화하려는 움직임이 다시 대두했습니다.



2. 헌법 개악의 배경과 두 개의 목표


헌법 9조를 개헌해 자위대를 해외에 출동시키려고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은 사실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15년 전인 1990년대에 들어서부터 입니다. 90년대에 들어와 전부 32개의 개헌안이 나오고 있듯이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일본정치를 크게 바꾸어 헌법을 개악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군사대국화․구조개혁 추진과 개헌

이러한 헌법 개악의 움직임은 크게 2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9조입니다. 9조를 바꾸지 않는 한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완성되지 않고,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실행하여 ‘보통국가’가 되기 위해 헌법 9조를 개헌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는 개헌의 단기적이고 초미의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라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1990년대에 나온 30개 이상의 개헌안은 모두 하나의 예외도 없이 헌법 9조만이 아니라 전면 개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천황의 원수화(元首化)’라든지, ‘새로운 인권’이라든지, ‘수상공선제’라든지, ‘행정권을 내각에서 내각총리대신으로 바꾼다’든지, ‘헌법재판소를 만든다’든지, ‘헌법 96조의 개정절차의 변경’이라든지 등의 헌법 전반에 대한 개정으로서, 이는 국가 전체의 틀을 바꾸려는 것이 명백합니다. 군사대국화만이 목적이었다면 9조만 개정하면 됩니다. 전부 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전면 개정을 한다는 것은, 일본국가 전체의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보다 장기적인 목적은 지금 일본의 대기업과 정치를 석권하고 있는 구조개혁의 움직임 속에서 지금까지의 사회를 대신할 새로운 구조개혁 후의 사회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 구조개혁에 좀더 속도를 올려 흉폭하게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헌법을 개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2개의 목표가 합류하여, 지금의 헌법 개악의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9조가 중심이긴 합니다만, 이것만이 아니라는 것이 큰 핵심입니다.


자본의 글로우버리제이션과 2가지 개혁

1990년대에 군사대국화와 구조개혁이라는 과제가 기존의 정치와 경제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대두한 배경에는 경제의 글로우버리제이션[=세계화]이 있었습니다. 미국과 일본 등의 글로벌 기업이 자신의 국내시장과 수출만을 통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 공장을 세우고 진출하여 그곳에서 노동자를 고용하고 거기에서 자금 융통을 하는 식으로 전개되고, 그리하여 세계 각지를 뛰어다니며 활약하는 기업을 ‘다국적기업’이라고 합니다만, 이러한 다국적기업화, 글로벌화 아래 대기업의 이익에 부응하기 위해 2가지 개혁이 제기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국내시장에서 주로 경쟁해왔기 때문에 자동차라고 하면 닛산과 도요타가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해 왔습니다. 물론 미국시장이 있기 때문에 미국시장에 진출해 도요타도 닛산도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요타도, 닛산도,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는 기본적으로는 일본 국내에서 생산해서, 그것을 국내에 팔고, 또는 세계에 수출하는 형태로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로벌화라고 하는 것은 닛산이라고 해도 세계 각지, 예를 들어 미국에 공장을 세우고, 거기서 미국 노동자를 고용하고, 미국 국내차로 만들어 자동차를 팝니다. 혹은 중국에 진출해, 중국산 도요타 자동차로서 팔기도 합니다. 이러한 형태로 세계기업으로서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현상이 생겨났을까요? 기업의 생산규모가 확대되어 세계시장을 상대로 하고, 국내생산과 수출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게 된 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상대국에 직접 생산거점을 세우고, 거기에서 노동자를 고용해서 생산을 하는 것은 상대국의 시장을 보다 깊이 장악할 수 있게 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대기업이 가장 최적의 조건에서 생산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시아 지역은 임금이 쌉니다. 중국 광동성의 임금 수준은 일본 임금의 32분의 1입니다. 32명의 여성노동자 대 일본인노동자 1인. 그렇게 되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제조업은 이러한 곳에 공장을 만들고, 첨단기술과 높은 수준과 기술을 요하는 것만 일본 국내에서 만듭니다. 일종의 분업형태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제조업 공장은 최근에 점점 동남아시아나 중국으로 이전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대기업은 세금이 싼 곳으로 본사를 이전하는 일도 있습니다. 법인세가 높은 복지국가나 선진국보다는 개발도상국에 본사를 이전해 세금을 지불하지 않는 쪽이 더 유리하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대기업이 세계 각지로 뛰어다니며 생산을 전개하기 시작하자 2가지 문제가 나왔습니다.


군사대국으로의 욕구

하나는 군사대국화입니다. 냉전이 끝난 후에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된다든지 중국처럼 시장을 개방해 개발주의가 되기도 해, 글로벌기업들이 활약할 수 있는 세계가 단숨에 확대되었습니다. 소련과 동구권의 6억, 중국 10억 명의 시장이 새롭게 글로벌 경제에 편입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로운 시장에서 글로벌 기업의 활동을 안정시키는 위해서는 시장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라크 같은 나라가 있으면 글로벌경제의 동맥인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은 위협받게 되고, 북조선의 핵제조 등으로 조선반도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중국이나 한국, 대만 등의 동아시아 시장은 크게 불안정해집니다.

그리하여 시장의 안정을 유지하는 역할을 미 제국이 담당해왔습니다만, 미국은 1국 혼자서 부담을 담당해오지는 않았습니다. NATO 국가들과 일본에게도 군사 분담을 요구해온 것입니다. 또한 일본의 재계(財界)도 정부에 군사대국화라는 압력을 가했습니다. 원래 일본 기업은 일본 사회구조가 기업사회로 형성된 덕에 해외진출에 소극적이었습니다만, 엔고와 경제 마찰의 압력을 받게 되면서 1980년대 후반에 해외진출을 시작하게 됩니다. 특히 일본의 거대기업이 임금이 싼 아시아 국가들에 진출했기 때문에 군사적 주둔에 대한 요구가 한층 더 강해졌던 것입니다. 게다가 일본은 헌법 9조 아래에서는 마음대로 자위대를 해외에 보낼 수 없기 때문에 더욱더 ‘보통국가’로의 압력은 높아지고, 군사대국화를 저지하고 있는 9조의 존재가 돌연 눈에 거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글로벌경쟁과 구조개혁

또 하나는 구조개혁7)입니다. 대기업 간에도 경쟁하게 되면서 지금까지와 같이 편안하게 자신들의 이윤을 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대기업은 국내 생산을 할 때에도 격심한 기업사회의 경쟁 속에서, 한편으로는 기업주의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이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를 ‘과로사’ 할 때까지 부려먹는 방식으로 이윤을 증대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대경쟁 시대가 되자 일본의 유례가 드문 경쟁력이라고 하더라도 32분의 1의 임금과는 도저히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기업은 정규종업원을 잘라내고, 연공임금도 고쳐 비정규종업원이나 시간제 노동자, 파견 노동자를 점점 늘리는 구조개혁을 감행하는 것과 병행하여 제조업 현장은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재계는 기존의 자민당 정치에 대해서도 철저한 주문과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일본은 복지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기업에게는 극진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더욱 철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법인세의 인하를 요구했습니다. 대경쟁 시대에 구조개혁을 선행시킨 미국에서 법인세가 인하되어 30% 정도가 되면, 일본이 법인세 50%인 상태로는 승부가 되지 않습니다. 세금이 가격을 상승시키기 때문에, 같은 100만 엔으로 차를 만들어도, 120만 엔에 팔리는 나라와 150만 엔으로 파는 나라가 나오게 됩니다. 특히 복지라든가 공교육에 돈을 사용하는 복지국가일수록 법인세와 소득세의 누진율이 높고, 그렇게 되면 대기업은 승부가 되지 않습니다. 법인세를 내리려면 재정지출을 삭감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중에서도 재정을 압박하고 있는 사회보장비를 삭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법인세와 소득세 대신에 소비세를 증대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경쟁 시대가 되자 구조개혁, 복지 축소라는 요구가 나왔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번역: 정혜윤 회원] ≪노사과연≫




개헌의 배경과 헌법문제를 둘러싼 현 국면을 어떻게 볼 것인가(1)



와타나베 오사무 (渡辺治) | 一橋대학 대학원 교수 |




1) 일본의 헌법은 ‘평화헌법’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헌법9조에 있는 ‘전쟁 포기’와 ‘전력(戰力)보유 금지’ 조항 때문이다. 9조는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 내지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하게 이를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 해, 공군 기타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 헌법에서도 볼 수 없는 이러한 조항이 만들어진 것은 당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연합군 사령부가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일본의 재무장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이는 헌법 제정 당시에는 주로 연합국 그 중에서도 일본과 전쟁을 수행한 미국을 염두에 둔 것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의 피해를 입은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과의 약속’이라고도 볼 수 있다. - (역자) 


2) 90년대 이전까지 개헌을 않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보수정권의 정치적 이익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60년 ‘안보투쟁’ 같은, 지배정권을 위험에 빠뜨릴 만한 저항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 안정적 정권 유지가 가능했다. 또한 평화 조항을 기반으로 군비최소화와 안보의 대미의존, 경제 우선주의라는 ‘정치․외교적 현실주의’ 노선을 채택할 수 있었다, 즉 ‘평화주의’와 ‘정치․외교적 현실주의’가 결합되어, 일본의 고도성장을 용이하게 이룩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자민당의 장기 집권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 - (역자) 


3) 일본의 정당제도는 1955년부터 93년까지는 ‘일당 우위 다당제’ 시스템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자민당이 1당지배로 정권을 계속 담당하기는 했으나, 일본사회당이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일본공산당, 일본민주사회당 등까지 합쳐 개헌 저지선인 1/3이상의 의석수를 혁신세력이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3년의 정치변동, 즉 일본사회당의 정권 참여 이후 일본사회당이 몰락하고 공산당 등의 혁신세력의 의석이 급격하게 감소했으며, 제1야당의 자리는 1995년 자민당 이탈파를 중심으로 창당된 보수정당인 민주당이 차지하게 된다. 이로써 자민당-민주당이라는 보수양당제로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 (역자) 


4) ‘해석개헌’이란 현실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헌법 조항의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다. 일본은 1954년 자위대를 창설하고 자위대의 무력을 증강하면서 헌법과 충돌할 때에도, 미일안보조약에 대해 위헌성 논란이 제기될 때에도 해석개헌을 통해 이를 정당화했다. 즉, 지배세력의 개헌에 대한 요구가 일시적으로 ‘해석개헌’을 통해 완충되어온 것이다. 또한, 탈냉전기 자위대를 해외에 파견할 때에는 “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 “테러대책특별조치법”, “이라크부흥지원특별조치법” 등의 법률 제정을 통해 헌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사실상 헌법 9조를 무의미하게 만든 측면이 크다. - (역자)


5) “즉, 그렇게 현실과 달라져 있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개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 (역자)


6) 1958년 자민당 정부는 미국과 51년에 맺은 안전보장조약을 개정하여, 일본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의 혁신세력들은 새로운 개정 조약이 일본의 재무장을 유도하고, 일본의 전 국토가 미국의 군사기지화 된다는 것을 이유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1959년 3월 28일 전국 노조인 총평, 사회당, 공산당을 포함한 134개 단체가 참가한 '미일안보조약개정저지국민회의'가 결성되었다. ‘국민회의’는 각 단체의 통일행동을 통해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제8차 통일행동에는 전국 650개소에 300만 명이 파업, 직장 집회, 시위 등에 참가했다. 그러나 1960년 1월 9일 워싱턴에서 신안보조약과 신행정협정의 조인이 이루어졌다. 1960년 2월 기시 노부스케 내각은 신안보조약을 국회에 제출했고, 반대운동은 조인 저지의 성격으로 변화하였다. 국민회의는 국민의 청원권을 행사하는 전술을 택했는데, 5월 14일까지 청원 서명자 수는 1,3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60년 5월 19일 기시 내각은 중의원에서의 의결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안보투쟁은 전국민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중의원 통과 후 1개월간 국회․수상관저․미국대사관에 대한 항의 시위와 청원이 계속되었고, 6월 4일에는 전국에서 560만 명이 참가하는 파업이 진행되었다. 6월 15일에는 우익단체와 경찰들이 시위대를 공격하고 유혈사태가 발생한다. 이후 투쟁은 더욱 격렬해지지만 기시 수상이 사퇴하면서 투쟁의 열기는 사그라들었다. 또한 신안보조약은 6월 19일 참의원에서 자동 승인된다. 이리하여 1960년 안보투쟁은 신안보조약 개정저지라는 원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미국과 일본의 지배층들에게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이후 일본의 지배계급은 안보문제에 있어 신중하게 되었으며, 정치적 쟁점이 안보문제나 이데올로기적 쟁점이 아니라 경제문제로 변해가도록 전략을 변화시키게 되었다. - (역자) 


7) 일본의 ‘구조개혁’이란 기업에 대한 규제완화, 국영 공영기업의 민영화, 복지 등의 재정 축소와 자기책임의 원리 확대, 중앙과 지방의 재정분리, 작은 정부 등 일본판 신자유주의적 개혁 전반을 가리킨다. 특히 고이즈미(小泉) 수상은 “성역 없는 구조개혁”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구조개혁 없이 일본경제의 회복은 없다”고 선언, 일본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역자)


덧붙이는 말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4호 (2005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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