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전위와 대중

계급의식의 불균등 발전에 대하여

들어가며 -


ꡔ다함께ꡕ 62호에 「김해인 씨에 대한 반론―대중 의식의 불균등 발전을 이해할 필요성」(이하 「반론」)이라는 제하의 글이 실렸다. 글에서는 내가 “대중 의식의 불균등 발전을 이해할 필요성”이 있으며, “개량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오랜 공식에 기초”해 있고, 또한 “비관적 엘리트주의[자]”라며 비판하고 있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대중 의식의 불균등 발전”은 올바른 명제임과 동시에 매우 시의적절한 명제이다. 논쟁이 이 문제로 전개된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올바른 명제가 항상 올바른 결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반론」에서 제기한 문제를 확장하여, 노동자 계급의 의식이 불균등하게 발전하는 것에 대해 살펴볼 것이고, 이를 통해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더불어 현 시점에서 이 문제가 가지는 중요성에서 대해서도 말해보려 한다.



1. 계급 의식의 불균등 발전(1)―전위와 대중의 구분


‘계급 의식은 균등하게 발전하지 않는다.’

첫째, 이것은 상식적인 문제이다. 개인이 환경과 경험이 상이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바, 노동자 계급의 개인 또한 환경과 경험이 상이한 노동자로 현실에 존재한다. 이렇게 환경과 경험이 다른 개인의 의식이 일시에 균등하게 발전한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둘째, 이것은 역사적 경험이다. 현재까지 어떤 사회에서 계급 의식이 균등하게 발전한 경우가 있었는가? 가장 혁명적인 상황에 기반하더라도, 다수의 의식이 급격하게 성장할 수는 있었지만, 일시에 계급의 모든 일원의 의식이 균등하게 발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주의 국가 성립 이후에도 계급 의식은 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나, 이 또한 일시에 계급의 모든 성원의 의식이 균등하게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노동자 계급 의식이 불균등하게 발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본질적인 원인은 앞서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이 동일한 공통의 환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동일한 신체와 뇌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 계급 의식의 불균등 발전을 이야기한다면, 좀 더 구체적인 몇 가지 원인을 추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선전이다. 자본주의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한 상부구조로서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기구는 끊임없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을 포섭하고 있다. 교육, 언론, 매스미디어, 문화, 예술,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전 영역에서 노동자 계급의 의식을 포섭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소위 ‘진보적 학자’들까지도 상당부분 그들의 이해에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노동계급 상층의 성장과 체제 내적 포섭이다. 노동자 계급 의식은 일정하게 성장하지만, 동시에 일정하게 후퇴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독점자본의 막대한 독점이윤은 숙련노동자들의 상층부를 매수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매수된 상층부는 ‘계급화해’를 위한 개량적 길을 노동자 계급에게 제시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계급을 내부로부터 분열시킨다.

셋째, 새로운 노동자의 충원이다. 노동자 계급은 계속적으로 새로운 성원으로 충원되기 때문에, 계급 전체의 의식이 균등하게 발전할 수 없다.

이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 구조에서 자본주의적 의식이 발생하며, 동시에 이를 극복할 의식 또한 생겨난다. 하지만 그러한 의식의 발전은 살펴본 것처럼 균등하지 못하다. 따라서 계급 전체보다 먼저 자본주의적 의식으로부터 깨쳐난 부분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 부분을 계급의 전위라고 부른다.

전위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계급 의식을 전취하였기에, 대중을 지도한다. 하지만 대중을 지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대중에게 명령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사상으로 대중을 인도하고, 조직하며, 이를 위한 체계적인 전략과 전술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대중과 긴밀히 결합하고, 대중의 이해 정도를 살피며, 대중의 이해와 지지를 바탕으로 사업을 실천하는 것이다. 전위는 이상의 의미로 대중과 구분되지만, 대중과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전위가 대중과 분리된다면, 그것은 전위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며, 곧 이미 전위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반론」에서 “혁명가는 노동계급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계급에게서 배우기도 한다. 맑스는 파리 꼬믠의 경험에서 배웠고, 레닌은 1905년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에서 배웠다.”는 올바른 명제로 나를 비판한다. 이것은 올바른 명제이다. 이론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현실을 과학적으로 고찰하고, 실천을 통해 검증하고, 검증되는 것이다. 전위와 대중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전위는 대중을 지도하며, 동시에 대중의 실천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이론과 실천, 대중과 전위의 관계는 변증법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거로 나를 “노동계급을 근본에서 수동적 존재로 바라보”고 있으며, “당이 노동계급의 자생성보다 언제나 우위라는 개량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오랜 공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올바른 것인가? 올바른 명제가 올바른 결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미 말한 바 있다.



2. 우리 변혁운동의 상황―전위와 대중


「반론」의 상당 부분은 논리 전개와 선택된 단어의 유사성 등으로 미루어, 토니 클리프의 ꡔ새천년의 마르크스주의ꡕ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든 사회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는 명제와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동을 통해 가능하다.”는 명제 사이의 모순을 혁명정당의 필요성으로 지양하고 있다.

그런데 「반론」의 필자는 위의 논리와 “혁명가는 노동계급을 가르치기도 하고 계급에게서 배우기도 한다.”는 명제 등을 통해 이 문제를 전혀 변증법적으로 지양하고 있지 못하며, 비판의 날을 나에게 세우지만, 사실 그 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는 그의 생각이 전혀 현실에 기반하고 있지 않으며, 무슨 교리공부하듯 토니 클리프의 책에서 이런저런 명제를 끌어다 쓰면 과학적이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을 보자.

한국의 과학적 변혁운동은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악독한 탄압을 뚫고 성장하였다. 하지만 미 군정기를 지나 잇달아 들어선 독재정부의 반공주의적 탄압에 의해, 지하를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70-80년대 다시 성장하기 시작한다. 80년대 들어 운동은 국내외적 모순의 심화와 더불어 이론적 자기 반성의 길로 접어들고, 80년대 중‧후반 소위 ‘사회구성체논쟁’으로 이론적 절정의 시기를 맞이한다. 이러한 과학적 운동의 노력,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관계를 모색하던 노력들은 90년대 초, 동구의 몰락으로 변절과 청산주의‧이런저런 포스트(post)주의로 퇴색된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이론적 혼란과 전망의 불투명이 한국의 과학적 변혁운동의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    

살펴본 것처럼 현재 한국의 변혁운동은 전망의 불투명으로 인한, 이론적 혼란의 시기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모순의 확대‧심화로 인해, 계급 대중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며, 언제라도 폭발할 태세이다. 전국에서 폭발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러한 계급의 분노와 혁명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보자. 1902년 레닌은 분명 계급 대중의 자생성보다 전위의 의식성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1905년의 경험을 통해 대중의 혁명성으로부터 배웠고, 1902년 ꡔ무엇을 할 것인가?ꡕ의 관점에 머물러 있던 볼셰비키들을 깨우쳤다. 하지만 그가 대중에게서 배우는 것으로 그쳤는가? 1905년 1차 혁명의 상황에서도 그는 대중으로부터 배우는 동시에, 그러한 경험을 고찰하고 그들을 지도했다. 그는 게릴라 전술을 지도하고, 의회의 보이콧과 참여, 의회에서의 투쟁을 지도했다. 1차 혁명의 실패 후에도, 실패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또 지도했다. 1917년 그는 막 짜르를 타도하고, 열광하는 대중들에게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외쳤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후일 ꡔ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ꡕ에서 그는 이야기한다.   


지금 확실히 누구나 깨닫게 된 것은 만일 우리 당에 가장 엄격하고 정말로 강철같은 규율이 없었더라면, 또는 노동계급 전체 대중으로부터, 곧 후진계층을 지도하거나 그들을 자신들과 나란히 가도록 할 수 있었던 사려깊고 정직하고 헌신적이며 유력한 노동계급 내의 모든 분자들로부터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지원이 없었더라면, 볼셰비키가 2년 반은커녕 단 2개월 반도 권력을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 있어서 절대적인 중앙집중화와 가장 엄격한 규율이라는 것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승리의 한 본질적 조건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먼저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겨난다. 곧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 당 규율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그 규율은 어떻게 검증되는가? 그것은 어떻게 강화되는가? 첫째,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의식성에 의해서, 그리고 혁명에 대한 그들의 헌신, 곧 전위의 끈기와 자기희생 및 영웅적 행동에 의해서이다. 둘째, 일차적으로는 가장 광범한 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 대중들과, 뿐만 아니라 비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 대중들과도 연결을 갖고 가장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며, 그리고 당신들이 원한다면 어느 정도는 융합할 수 있는 전위의 능력에 의해서이다. 셋째, 이 전위가 발휘하는 정치 지도력의 올바름에 의해서, 곧 전위의 정치 전략 및 전술의 올바름에 의해서인 바, 이것은 가장 광범한 대중들이 자신들의 경험으로써 그 전략 및 전술의 올바름을 인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이러한 조건들 없이는 부르주아지를 타도하여 사회 전체를 변혁시키고 말 선진계급의 당이 진정으로 될 수 있는 혁명적 당의 규율이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조건들 없이는 규율을 세우려는 시도들은 불가피하게 수포로 돌아가고, 말장난과 광대짓으로 끝나버린다. 다른 한편, 이러한 조건들은 단번에 생겨날 수 없다. 그것들은 꾸준한 노력과 고난 속에서 얻어진 경험에 의해서만 창출된다. 이들 조건의 창출은 올바른 혁명이론에 의해 촉진되며, 역으로 이 혁명이론은 도그마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대중적인, 진정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실천과 밀접히 연관될 때에만 완전히 나타나게 된다.*1)(강조는 인용자)


이것이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다.

다시 우리의 상황으로 돌아가자. 모순은 심화되고, 계급의 투쟁은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개량적 지도부는 투쟁을 방기하고, 투쟁이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 계급의 정신적 무기로 무장된 전위가 필요하다. 계급의 투쟁은 자생적으로 더욱더 고양되고, 혁명적이 될 수도 있다. 「반론」에서 말한 1905년의 경험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하지만 철의 규율로 단련된, 준비된 전위, 볼셰비키가 없었다면 1917년의 혁명이 성공했겠는가?

둘째, 보다 철저한 이론적 투쟁이 필요하다. 현 시기 한국의 변혁운동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이론이 계급의 정신적 무기로 복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며, 오히려 이것은 계급의 정신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올바른 변혁 전망을 가진, 혁명적 이론이 필요하다.

셋째, 상술한 것처럼 이론과 전위는 대중과의 결합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계급 대중의 현재 운동 속에서 그들을 단련하고, 지도할 때만 그것은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계급 대중의 운동에 긴밀히 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상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과제이다. 현재 한국 변혁운동의 전위는 이론적 혼란을 극복해야 하고, 전위를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대중 운동에 밀접하게 결합하고, 그들을 조직하고, 투쟁을 지도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의 변혁 운동은,

첫째, 이론에서 계급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계급 대중의 실천으로 검증된, 계급 대중의 무기로서의 이론이 정초될 것이며,

둘째, 전위에서 현실의 요구를 명확하게 반영하고, 이를 해결할 이론‧강령‧전략‧전술을 가진 계급의 전위, 즉, “그 어떤 부르주아 당의 꼬리”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 고유의 목표, 자신 고유의 정책을 가진 독자적인 당”**2)인 노동자 당이 건설될 것이며,

셋째, 계급 대중의 의식은 정초된 이론과 전위를 통해 더욱 성장할 것이며, 동시에 성장한 대중의 의식의 통해 이론과 전위는 더욱 발전할 것이다.

이러한 변혁운동의 맹아를 전노투에 볼 수 있다고 한다면, 혹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3. 계급 의식의 불균등 발전(2)―포섭과 계급 의식의 불균등 발전


「반론」의 필자는 내가 말한 포섭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말한 포섭은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적 포섭이며, 현재 노동관료층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직접적 매수 형태의 포섭이 아니다.***3) 또한 지난번에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의 형태는 일상생활에서의 체화된 무의식적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포섭의 정도는 큰 폭으로 상이하다. 이러한 포섭이 자본주의 하에서 계급 의식의 불균등 발전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반론」의 필자는 포섭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한 채, 나에게 “대중 의식의 불균등 발전을 이해할 필요성”을 이야기하니, 참으로 당황스럽다. 「반론」에서는 포섭을 인정한다면,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자기 해방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라고 묻고 있으며, 나아가 이러한 나의 주장을 “지배자들에게 끌려다니느냐 혁명가들에게 끌려다니느냐의 차이일 뿐, 노동 계급을 근본에서 수동적 존재로 바라보기는 매한가지”라고 비판한다. 또 내가 대중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기 시작하면 그들이 그 한계에 완전히 갇혀 더 왼쪽으로 갈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듯 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계급 의식이―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자본에 포섭되어 있기에―물론 다른 요인도 존재하지만―의식의 발전이 불균등한 것이며, 따라서 전위와 대중의 구분이 생기는 것이다. 또 「반론」의 필자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도 심지어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하는 노동자도”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는 내가 말한 포섭의 형태와 정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한 결과이다. 이데올로기의 포섭은 체화된 형태로 나타나며, 포섭된 부분과 양은 개인에 따라 상이하다. 즉, 한 사람의 개인에 있어서도 어떤 부분은 친자본주의적이며, 또한 어떤 부분은 진보적일 수 있다. 또한 사고의 대부분을 포섭당한 노동자가 있는 반면, 이데올로기적 포섭을 극복하고 사고의 극히 일부분만을 포섭당해 있는 노동자도 존재한다. 이러한 포섭의 형태와 정도를 이해한다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도 심지어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하는 노동자도”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4)

그런데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도 심지어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하는 노동자도”를 넘어, 이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국가에서까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물론 포섭의 정도는 확연히 차이가 나겠지만 말이다.

이에 대한 원인을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외적 요인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포위하고 있는 제국주의 국가의 존재와 이들의 끊임없는 직‧간접적 공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둘째, 내적 요인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초기 아직 남아 있는 전(前) 자본가들의 존재와 그들의 직‧간접적 공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셋째, 내적 요인으로 아직 남아있는 소생산의 존재와 그로 인한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넷째, 전통과 관습의 형태로 남아있는 상부구조의 잔재를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종합해 보면, 물질적 요인과 정신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물론 물질적 기반에 의해 정신적 요인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나(특히, 소생산제의 존재에 의해), 동시에 전통과 관습의 형태로 남아있는 전(前) 시대 상부구조의 잔재 역시 무시할 수 없다.*****5)

이렇게 포섭은 계급 의식의 불균등발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며, 따라서 동시에 전위와 대중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변혁운동에 종사하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반론」에서는 포섭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나에게 “대중 의식의 불균등 발전을 이해할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대중 의식의 불균등 발전”을 이해하지 않고, 전위와 대중에 대해 논하고 있다. 덧붙여 더욱 심각한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반론」의 필자가 현재 우리 상황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4. 「반론」의 문제


앞서 「반론」의 필자가 “대중 의식의 불균등 발전을 이해할 필요성”을 주장하나, 사실 이 명제에 대해 아무런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말했다. 이제 그가 현실의 이해와는 무관한 독경주의자(讀經主義者)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할 때가 되었다.

먼저 그가 말한 스탈린주의를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자.


“당이 노동계급의 자생성보다 언제나 우위라는 개량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오랜 공식”


그가 언급하고 있는 스탈린주의가 무엇인가는 모르겠으나, 그러한 스탈린이 서기장으로 있던 시기의 소련의 정책(전략‧전술)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는 당시 제국주의에 포위된 소련과 소련의 국내 경제적 상황에 대해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시기에 어떤 정책이 필요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엄혹한 시기에조차 당은 당과 계급 대중의 관계를 철저하게 변증법적 관계에 입각해 사업을 진행했다. 「반론」의 필자가 생각하는 노동계급의 창발성을 억누르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창발성과 지지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과업을 이룩하였다. 단,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노동계급의 자생성”에 대한 비판은 1902년 레닌이 비판했던 그러한 경향(경제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이었지, 노동계급의 창발성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는 당시 현실에 기대지 않은 채,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사족이지만,) 이러한 경향은 필경 레닌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나아갈 것이다.]  

다음 「반론」의 문제를 보자.

그는 “혁명적 조직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고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지난한 투쟁과 우여곡절...[의] 과정에는 노동계급의 자생성에서 배우고 그것을 고무하며, 또한 노동계급의 모순된 의식에 비롯하는 개량주의와 협력하는 동시에 경합하며 실천에서 입증받는 급진 좌파의 존재가 필수적이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혁명적 조직”의 필요성은 “지배 계급의 사상이 지배적 사상”이라는 명제에서 끌어내고, “자생성에서 배우고 그것을 고무”할 필요성은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동을 통해 가능하다”와 “혁명가는 노동계급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계급에게서 배우기도 한다”는 명제를 통해 이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나를 계급대중을 무시하는 “비관적 엘리트주의[자]”로 낙인찍기 위해서였는지 몰라도, 「반론」의 전체 내용은 지나치게 대중의 자발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과정에 전위와 노동계급 대중의 관계에서 전위의 지도의 중요성은 사라지고 없다. 말로만 “혁명적 조직이 매우 중요하다”고 되뇔 뿐이다. 내가 전위를 강조한 나머지 노동계급 대중을 무시했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비판의 날은 오히려 대중을 강조한 나머지 전위와 계급대중을 분리해버린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포섭에 대한 이해부족, 계급 의식의 불균등 발전에 대한 이해부족, 전위와 계급 대중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이해부족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더 정확하게는 현실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지금 우리 변혁운동의 상황을 보자. 전술한 것처럼 모순의 격화로 인한 대중의 분노와 동시에 이론적으로 무장된 계급의 전위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런 현 상황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나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통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앞서 말했다.

이론 투쟁, 전위의 형성, 계급 대중의 현재 투쟁에 적극적인 결합!!!

구체적으로는 현재 투쟁을 조직하고, 하나로 묶어가며, 올바른 방향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구심력을 가진, 올바른 이론적 무기를 가진 전위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 변혁운동에서 그러한 역할(올바른 이론, 대중 투쟁 결합 등)을 하는 전위의 형성이 시급한 과제이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워야한다. 1917년 러시아의 혁명이 볼셰비키 없이 가능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현 시기에 무엇이 중요한지 「반론」의 필자는 잊고 있다.


「반론」의 몇 구절에 대해 해명을 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의식적’이고 ‘자각적’인 형태로 사회주의 사상을 온전히 수용하고 혁명을 지지하지 않으면 모두 ‘포섭된 대중’이라는 초좌파적 이해 방식은 현실에 존재하는 운동을 냉소하거나 기피하는 종파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악적이다.”


: 내가 말한 포섭의 의미에서 대해서는 이미 상술한 바 있다. 따라서 포섭의 정도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이 부분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이해 방식이 초좌파적 발상이며, 종파주의이며, 해악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대중의 투쟁에 대해 명확한 지도를 포기하고, 그들의 투쟁을 찬양하기에만 바쁜, (따라서 실천활동의 상당부분을 이슈화된 투쟁에서의 피켓팅으로 가져가는) ‘다함께’가 종파주의적이며, 해악적이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김해인 씨의 태도는 이 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노동계급을 ‘포섭된 대중’으로만 보기 때문에 마치 노동계급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기 시작하면 그들이 그 한계에 완전히 갇혀 더 왼쪽으로 갈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듯하다.”

“노동계급이 자신의 저항을 ‘부르주아 의회 공간’이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성장’으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거나 그런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김해인 씨의 주장과 달리...”


: 나는 민주노동당의 성장이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민주노동당의 경험을 통해, 대중은 배울 것이라고 분명 이야기했다. 다만, 이것이 「반론」의 필자가 말하는 ‘급진화’의 일례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급진화’의 예는 현재 계급대중의 투쟁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나가며


한 마을에 가뭄이 들었다. 누구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한다고 하며, 또 누구는 무당을 찾아가보자고 한다. 누구는 여기저기 우물을 파 보자고 하며, 또 누구는 정확하게 수맥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오자고 한다. 그 외 무수한 의견들이 있었다.

누가 마을을 가뭄에서 구했겠는가?

인간의 축적된 경험의 산물을 가지고, 정확하게 수맥을 찾고, 지하수를 끌어올린 사람이 마을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지금 우리 변혁 운동의 상황을 보자. 동구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험이 실패하였다. 이제 그것은 아니라는 사람부터, 무슨무슨 주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견해가 난무하고 있다.

누가 우리 변혁 운동에 도움이 되겠는가? 물론 여기저기 우물을 파다보면, 언제가 물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것이 계급대중의 혼란과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경험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금까지의 인류의 경험으로부터 축적된, 무수하게 검증된 올바른 사회과학이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노사과연》


추기 : ꡔ정세와 노동ꡕ 제4호(2005.8.)의 졸고 「대중의 의식과 급진화」에서 p. 111의 각주 5의 ‘1892년’을 ‘1872년’으로 바로잡습니다.



이론

전위와 대중

―계급 의식의 불균등 발전에 대하여



김해인|회원





*) V.I. 레닌, ꡔ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ꡕ, 돌베개, 1995, pp. 17-19.


**) F. 엥겔스, 「노동자 계급의 정치 활동에 관하여」, ꡔ저작선집 4ꡕ, 박종철 출판사, 1995, p. 96.


***) 물론 노동관료층 역시 직접적으로‘만’ 매수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직‧간접적인 형태로 포섭되어있다.


****) 나 역시 자본주의 하에서 태어나고 배우고 살아가고 있기에, 의식의 어떤 부분에서나마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필경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항상 경계하고, 또 경계하고, 이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반론」의 필자도 이 부분을 경계하고, 경계하길 바란다. 또한 ‘다함께’ 활동가로서 어떠한 부분이 자본에 의해 포섭되어 있는지를 더욱 생각해보고, 경계하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 이 하나의 예에서 보이는 것처럼,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는 만만하고,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니다. 전(前) 시대의 잔재와 적의 포위에 의해 생겨나는 끊임없는 반동적 경향과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목적의식적 노력의 싸움이다. 이러한 시기에 전위와 대중의 변증법적 관계에 입각한, 당의 무한한 노력과 대중의 끊임없는 창발성이 강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덧붙이는 말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7호 (200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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