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저출산과 노동자계급

1. 들어가며 -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저출산 문제’는 ‘노령화 문제’와 짝을 이루어 커다란 사회문제로 언급되고 있다. 세계 1위의 저출산율을 자랑(?)하는 것을 넘어 계속 떨어지고 있는 출산율 때문에 최근 크게 부각되고는 있지만 사실 이 문제는 90년대 초부터 진지하게 제기되었으며 90년대 중반부터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던 문제였다.*1)

현재 이 문제는 성별, 계급, 여야, 당파를 초월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는 만큼 여러 단위에서 저마다 원인을 분석하고 이런 저런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제시되는 대부분의 원인분석과 해결책은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 부르주아지의 관점을 따라가고 있거나 기껏해야 소부르주아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개인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저출산 문제’와 그 해결책에 관한 호들갑들을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할 때 우리는 그것에 공감하기 보다는 많은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오랫동안 산아억제정책에 입각한 선전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저출산 극복’은 왠지 낯선 주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한국자본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른바 ‘선진한’**2) 유럽자본주의와 공유하는 문제라는 것도 우리를 의문에 빠지게 한다.***3) 여기에 덧붙여 한국사회가 그 문제에 있어 유럽자본주의에 ‘선진한’다는 것도 우리를 어지럽게 한다.****4)

더 나아가 ‘저출산’에 대한 다양한 원인 분석과 온갖 해결책을 들어보면 그것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잡다하게 제기되는 원인 중 ‘여성의 사회진출’ 및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상승’, ‘늦은 결혼’ 등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의 반동적 성격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점들에 있어서 ‘선진한’ 유럽이 한국보다 앞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출산율은 한국의 그것보다 높다. 이들 주장은 이러한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정부의 출산복지 정책의 부족’을 지적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많은 현실성과 설득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산복지정책에서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유럽보다 미국의 출산율이 높은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외에도 ‘사교육비 인상’, ‘청년 실업’, ‘장시간 노동’, ‘높은 주거비용’, ‘젊은이들의 무책임한 태도(?)’, ‘혼외 출산을 부정하는 사회분위기’ 등의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들 역시 저출산에 어느 정도 기여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설명하는데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5) 따라서 이러한 원인진단에 따르는 해결책 역시 한계가 명확하다.*6)

이글은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로 보이는 이른바 ‘저출산 문제’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 전제하에서 왜 한국사회에서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는가를 검토할 것이고 마지막으로 노동자계급은 이 문제에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주장하고자 한다.



2. 부르주아지에게 왜 저출산이 문제가 되는가?**7)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적은 잉여가치의 생산 혹은 이윤의 획득이다. 부르주아지들은 이윤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라도 판다. 이것은 이 생산양식의 절대적 법칙이다. 그런데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본을 움직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획득한 이윤을 다시 자본으로 전환한다. 자본은 그 전보다 증가한다. 이렇게 “잉여가치를 자본으로 사용하는 것, 즉 잉여가치를 자본으로 재전환시키는 것을 자본의 축적이라고 한다.”***8) 이렇게 자본이 축적되어 그 크기가 증가하는 것은 그 가변자본 부분이 커지는 것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추가되는 자본으로 전환되는 잉여가치의 커다란 부분은 불변자본이 되지만 그 나머지는 가변자본으로 전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단 “다른 사정들이 불변이고 또 자본의 구성도 불변이라고 가정하자. … 그러면 노동에 대한 수요와 노동자의 생활을 위한 재원은 분명히 자본에 비례해 증가하며, 자본의 증가가 빠르면 빠를수록 그것도 그만큼 빨리 증가”하게 된다. “자본은 해마다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그 잉여가치의 일부는 해마다 최초의 자본에 첨가”된다. “또 이 첨가분은 이미 기능하고 있는 자본의 규모 증대에 따라 해마다 증가”할 수 있고 “새로운 시장이 개척되거나 새로운 사회적 욕망이 발전”하는 경우 등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여 그 공급을 능가하게 되며 이 경우에는 “임금이 등귀할 수 있다.” 이런 때가 “영국에서는 15세기 전체를 통해 그리고 18세기 전반기”에 있었다. 이러한 축적조건은 “노동자들에게 가장 유리한 축적조건”인데 이것은 다른 말로 자본가에게는 가장 불리한 축적조건이다. 자본가들은 이러한 불리한 조건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자본축적을 최대한으로 하고 싶어 한다.****9)

이러한 불리한 축적조건을 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경우에서는 자본의 축적이 아무리 급증하더라도 노동력의 공급이 항상 충분하여 임금의 상승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그것에 의해 축적이 조금이라도 방해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어떤 때라도 자신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언제나 대기 중인 노동력이 필요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들이 저출산에 호들갑을 떠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이것이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한 우려이다.*****10)



3.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인구법칙과 그것의 의미

그러나 자본가들의 호들갑은 그들이 가증스럽고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부르주아지들은 ‘언제나 그들을 위해 대기 중인 노동력’에 대해서 절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상대적 과잉인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언제나 존재하게 되어있는 다시 말해 법칙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노동자들에게 가장 유리한 축적조건”은 예외적으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의 증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생산수단의 일정한 양을 운동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동일한 양의 노동력이 요구된다고 가정”했을 때이며 이렇게 되는 경우는 현실에서 예외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자본축적의 일반적인 운동은 이렇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앞서 언급한 임금을 상승시키는 원인, 즉 더 많은 자본의 증가(축적 혹은 집중)는 노동생산성의 발전을 가져오는데 이것은 자본의 구성을 변화시키게 되며, 이 변화는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의 증대”로 나타나게 된다.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의 증대”라는 것은 축적이 진행되면서 자본의 양이 증가하게 되는 경우,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크기가 모두 증가하지만 전자가 후자에 비해 더욱 커다란 정도로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실에서 증명되는 사실이다.*11)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점차 노동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는데, 왜냐하면 “노동에 대한 수요는 총자본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총자본의 가변적 구성부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그 수요는” 앞서 가정했던 것처럼 “총자본의 증가에 비례해 증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하기 때문이다. 결국 “추가노동자를 흡수하기 위해, 또는 심지어 [구자본의 끊임없는 형태변화 때문에] 이미 기능하고 있는 노동자의 취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자본의 가속적 축적이 필요하게”되는데 “이 증가하는 축적과 집중이 자본구성의 새로운 변동 [즉 자본의 불변적 부분에 비한 가변적 부분의 가속적인 감소]의 원천으로” 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가변자본 또는 고용수단의 증가보다 언제나 급속하게 증가하는] 노동인구의 절대적 증가라는 전도된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이 전도된 형태는 “자본주의적 축적 그 자체가 [자기 자신의 정력과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잉인 [즉 자본의 평균적인 자기증식욕에 필요한 것보다 더 큰 규모의] 노동인구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한편으로는 축적과정에서 형성된 추가자본은 그 크기에 비해 더욱더 소수의 노동자를 흡수”하는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구성으로 주기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자본은 종전에 고용했던 노동자들을 더욱더 많이 축출”하는 것으로 결과한다. 한마디로 “노동인구는 그들 자신이 생산하는 자본축적에 의해 그들 자신을 상대적으로 불필요하게 만드는 [즉 상대적 과잉인구로 만드는] 수단을 더 큰 규모로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특유한 인구법칙”인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의 누진적 생산”의 법칙이다.**12)

즉 ‘과잉 노동인구’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필연적 산물 또는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서 부의 발전의 필연적 산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 과잉인구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지렛대로, 심지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생존조건으로” 전환된다. 왜냐하면 “과잉 노동인구는…절대적으로 자본에 속하며 자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산업예비군을 형성”하기 때문인데 산업예비군은 “현실적 인구증가의 한계와는 관계없이”, “변동하는 자본의 가치증식욕을 위해 언제나 착취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는 인간재료를 이”루기 때문이다.***13)

이들 산업예비군은 “실업자와 반실업자”의 형태로 존재하면서 “축적과 그에 수반하는 노동생산성의 발전에 따라 자본”이 “갑작스러운 확장력”을 보일 때-시장이 갑자기 확대되는 종래의 생산부문으로 자본이 몰려들 때나, 혹은 새롭게 형성되는 생산부문들에 자본이 밀려들 때-언제라도 기존의 “다른 분야의 생산규모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결정적인 부분에 신속하게 많은 사람들을 투입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산업예비군들의 존재는 노동의 공급을 그 수요 보다 크게 하는 효과를 갖고 있어 노동자계급 중 취업자들의 과도노동을 강제하여 예비군을 더욱 늘리게 하며, 이러한 예비군의 증가는 거꾸로 취업자들에게 과도노동을 강제한다.****14) 이들 산업예비군은 산업순환의 여러 국면에서도 자본의 축적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데, 이들은 “침체기와 평균정도의 호황기에는 현역노동자군에 압력을 가하고, 과잉생산과 열광적인 확장기에는 현역군의 요구를 억제한다. 따라서 상대적 과잉인구는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작용하는 배경이며, 이 법칙의 작용범위를 자본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욕과 지배욕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한계 안에 국한시”키도록 한다.*****15)



4. ‘상대적 과잉인구’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이중적 태도

“상대적 과잉인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축적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지만 결국 그 생산양식의 생존조건으로 된다. 이러한 상대적 과잉인구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것에는 “유동적 형태․잠재적 형태․정체적 형태”가 있다. 이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자본의 축적을 돕지만 자본주의 착취의 특수부문에서 지극히 열악한 조건으로 노동함으로서도 자본의 축적을 돕는다. 이들의 “최하층은 구호빈민”이다. 구호빈민은 “현역노동자군의 폐인수용소이며 산업예비군의 고정구성원이다.” 이들에 대한 구호, 즉 “빈민구호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공비의 일부를 이룬다.”

그런데 “사회적 부, 기능하는 자본, 그 증대의 규모와 활력, 따라서 또 프롤레타리아의 절대수와 그의 노동생산성이 크면 클수록 산업예비군은 그만큼 커진다.” 또한 “자본의 확장력을 발전시키는 원인”이 “자본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을 발전시”키게 되고 “따라서 산업예비군의 상대적 크기는 부의 잠재적 힘과 함께 증대한다.” “그런데 이 예비군이 현역노동자군에 비해 크면 클수록, 고정적 과잉인구는 그만큼 많아”지며 “그들의 빈궁은 노동의 고통으로부터 축출되면 될수록 더욱 심화된다.” “노동자계급의 극빈층과 산업예비군이 크면 클수록, 공식적인 구호빈민은 그 만큼 더 많아진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 일반법칙이다.”*16)

부르주아지는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그 하나는 그것이 언제나 존재해온 자연법칙과도 같은 것이며 어쩔 수 없는 것 혹은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태도이다. 이들은 자신의 부가 어디서 오는 지는 알고 있고 뻔뻔하게도 그것을 당연시한다. 이들 중 몇몇은 더 나아간다. 이들은 ‘상대적 과잉인구’의 존재가 자신들의 부의 축적의 결과이며 또 그것에 필수적이라는 것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들은 구호빈민의 존재와 그에 의해 지출되는 “공비”에만 관심을 둔다. 왜냐하면 구호빈민의 궁핍에 그들은 뻔뻔스러운 불쾌감을 느끼고, 구호빈민의 투쟁에 몸서리쳐지는 위협을 느끼며, 무엇보다도 구호빈민에게 지불되는 그 “공비”가 아깝기 때문이다.**17)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들을 향해 그들의 숫자를 자본의 증식력에 적응시키라고” 한다.***18) 하지만 이것은 탐욕과 무지에 눈이 먼 부르주아지들의 파렴치하고 어리석은 주장이다.****19) 왜냐하면 이러한 조건을 이용하여 가장 커다란 이익을 얻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며, 이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전도되어 나타나는 문제이기 때문이고*****20) 동시에 노동자의 숫자가 실제로 줄어도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21)

부르주아지가 취하는 태도의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적 부르주아들”에 의해서 표현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대중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자 위선적인 노력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정당성을 근본에서부터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고, 실제로도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 노동자들은 단결하여 부르주아지들에 맞서 투쟁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존재상의 한계로 인해 그 근본적인 해결에 접근할 수 없다.**22)

 


5. 자본주의적 축적―상대적 과잉인구―빈곤―저출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축적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축적은 필연적으로 상대적 과잉인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축적은 이에 대응한 빈곤의 축적을 필연적으로 만들어 낸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축적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이것은 상대적 과잉인구와 빈곤이 끊임없이 증가되고 있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축적이 진행되면서 노동자계급들은 점점 더 빈곤해지고 소부르주아들은 몰락해간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강제하는 필연을 깨닫지 못하고 개별로서 존재하는 한에서는, 또 그에 맞서 싸워 승리하지 못하는 한,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가혹한 운명을 한탄하며 자신들의 삶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강제하는 방식에 맞추어야만 한다.

과잉인구는 줄어야 한다. “공비”를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자들을 향해 그들의 숫자를 자본의 증식력에 적응시키라고” 협박한다.***23) 노동자들과 소부르주아들은 감소하는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자신의 재생산을 줄일 수밖에 없다.****24) 하지만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상대적 과잉인구’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상대적 과잉인구’의 증가와 그에 의한 압박은 노동자들 간에 목숨을 건 경쟁을 야기한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면 그들은 이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감소하는 능력과 치열해지는 경쟁은 젊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결혼을 피하거나 늦추게 한다. 이것은 저출산율의 또 다른 이유가 된다. 결과가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25)

자신의 비참한 운명에 괴로워하는 노동자들과 소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자신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를 아예 낳지 않거나 적게 낳는다. 그리고 자신들의 자녀가 자신들보다는 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신경을 쓴다. 즉 자녀들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자녀들에게 투자한다. 이른바 ‘사교육’이 그것이다. 경쟁이 심해질수록 ‘사교육비’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부담은 커진다. 이것도 저출산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번에도 결과가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26)



6. 한국의 저출산

한국의 출산율은 60년대에 6.0명이었던 것이 70년대 4.5명, 80년대 2.8명, 90년대 1.6명, 2004년 1.16명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출산율의 감소는 엄청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최근의 호들갑 속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빠르다”거나 “서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거나 ‘유럽에서 100-200년에 걸쳐 진행된 것이 한국에서는 30년 만에 일어났다’ 등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이 짧은 기간에 엄청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강의 기적’이니 하는 것도 다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한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이 관철되는 것도 아주 짧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아주 짧은 시기에 이른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빠”른 ‘고도성장’을 하였다. 이것은 짧은 시기에 “서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본이 급속하게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것은 그 짧은 시기에 ‘상대적 과잉인구’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빨리 증가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과잉인구는 자본의 축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이들은 동시에 가장 커다란 골칫거리들 중 하나이다. 이른바 경제개발과 더불어 그토록 강력한 산아제한정책을 폈던 것은 한편으로는 골칫거리를 해결하려는 악랄하고 어리석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산아제한정책을 강력하게 펴게 된 다른 한편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이유에서였다. 그 까닭은 가부장적 잔재가 많이 남아있던 한국적 특수성에 있었다. 당시의 가치관은 ‘무릇 집안의 가장이라면 당연히 제 식구들은 책임져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이것이 가능할 정도의 임금이 보장되어야만 한다**27). 그리고 임금이 그것을 보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윤이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주아지에게 이것은 죽는 것 다음으로 싫은 일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지들에게 출산은 억제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부르주아지들은 지금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얼마 전까지 했던 것이다.***28)

자본이 급속히 축적됐다는 것, 다시 말해 자본이 급속히 증가했다는 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착취가 그만큼 가혹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즉 한국자본주의의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의 기적과 같은 성공은 결국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의 가혹한 착취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었던 것은 한국사회의 국가권력이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악랄한 군사독재였기 때문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있었던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의 가족계획의 성공은 군사독재의 지원을 받은 자본의 급속한 축적에 근거했던 것이다.****29)

누군가 이러한 주장이 과도한 주장이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통계청에서 발표한 한국의 합계출산율을 검토할 것을 주장하겠다. 합계출산율은 1960년 6.0명이었던 것이 1970년 4.53명, 1975년 3.47명, 1980년 2.83명, 1985년 1.67명, 1987년 1.55명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한다. 그런데 이것은 1988년 1.56명, 1989년 1.58명, 1990년 1.59명, 1991년 1.74명, 1992년 1.78명으로 증가한다. 이것은 1993년 1.67명, 1994년 1.67명, 1995년 1.65명, 1996년 1.58명, 1997년 1.54명으로 87년 수준으로 다시 감소하며, 이것은 1998년 1.47명, 1999년 1.42명, 2000년 1.47명, 2001년 1.30명, 2002년 1.17명, 2003년 1.19명, 2004년 1.16명으로 더욱 감소한다.

이러한 출산율 변화는 앞서의 나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즉 1987년까지의 급격한 인구감소는 군사독재정권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자본가들의 혹독한 착취와 그와 비례한 노동자들의 삶의 파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1987년 7,8,9월은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던 때이고 당시 노동자계급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선포하였고 임금을 비롯하여 여러 영역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시기 이후에 출산율은 뚜렷하게 증가한다. 1993년부터의 감소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에 따른 이데올로기적 혼란, 김영삼 정권에 대한 기대 심리, 노동자계급운동의 분열 등에 의해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관철된 결과로 볼 수 있다. 1998년부터의 급격한 감소는 IMF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본격화되고 또한 앞서의 이유가 극복되지 못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자본의 승리가 일방적으로 관철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고 자본의 호들갑 속에서도 출산율의 감소는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30)



7. 노동자계급은 저출산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앞서 살펴본 대로 ‘상대적 과잉인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법칙으로 작용한다. “이 법칙은 자본의 축적에 대응한 빈곤의 축적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한 쪽 끝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반대 편 끝[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노동자계급의 측]의 빈궁․노동의 고통․노예상태․무지․야만화․도덕적 타락의 축적”을 만들어 낸다.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 의미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노동자들과 소부르주아들은 이른바 ‘산아제한정책’의 길을 걸어왔고 지금의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것은 강제된 선택으로 주어진 비극적인 현실이다.

그런데 이제 상황은 일순간 변화하였다. 부르주아지들은 국가경쟁력과 미래 노동력의 부족을 이유로, 소부르주아들은 부르주아지의 그러한 협박에 의해 깜짝 놀라, 이른바 “저출산․노령화” 극복을 목소리 높여 외쳐대고 있다.

이에 대해 노동자계급은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하는가? 부르주아지들과 소부르주아들의 입장을 함께 하며 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신맬더스주의’에 굴복하여 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 것인가?


(1) 과잉인구는 상대적일 뿐이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계급 중 취업자들의 과도노동은 그 예비군을 증가시키고, 거꾸로 예비군이 경쟁을 통해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의 강화로 취업자는 과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일부에게 과도노동을 시킴으로써 나머지 부분을 강요된 나태에 빠지게 하는 것과, 또 그 반대로 산업예비군 때문에 취업자가 과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개별 자본가들의 치부수단으로 되며, 동시에 사회적 축적의 진전에 대응하는 규모로 산업예비군의 생산을 촉진한다. 노동자계급의 일부에게 과도노동을 시킴으로써 나머지 부분을 강요된 나태에 빠지게 하는 것과, 또 그 반대로 산업예비군 때문에 취업자가 과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개별 자본가들의 치부수단으로 되며, 동시에 사회적 축적의 진전에 대응하는 규모로 산업예비군의 생산을 촉진한다. 이 점이 상대적 과잉인구의 형성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예를 영국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에는 노동의 ‘절약’을 위한 기술적 수단이 매우 많다. 그러나 내일 아침에라도 노동을 전반적으로 합리적인 양으로 제한하고 그것을 노동자계급의 각층에게 연령과 성별에 알맞게 배정한다면, 국민적 생산을 현재의 규모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노동인구로는 절대로 부족할 것이다. 현재의 ‘비생산적인’ 노동자의 대다수가 ‘생산적인’ 노동자로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31)


현재 한국사회의 “노동자계급 중 취업자들의 과도노동” 역시 “그 예비군을 증가시키고” 있으며, “거꾸로 예비군이 경쟁을 통해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의 강화”는 “취업자는 과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32) 

“그러나” 과거의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한국사회에서도 “내일 아침에라도 노동을 전반적으로 합리적인 양으로 제한하고 그것을 노동자계급의 각층에게 연령과 성별에 알맞게 배정한다면, 국민적 생산을 현재의 규모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노동인구로는 절대로 부족할 것이다. 현재의 ‘비생산적인’ 노동자의 대다수가 ‘생산적인’ 노동자로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실이 그러하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저출산에 반대하여야 하며, 저출산을 야기하는 모든 원인들, 그것들 중 가장 근본에 있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반대하여야 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 레닌, 「노동자계급과 신맬더스주의」***33)

레닌은 이 글에서 신맬더스주의를 비판한다. 그는 “우리는 어머니들에게, 애들을 낳으면 그 애들이 학교에서 불구화될지도, 군대에 징집될지도, 자살로 내몰릴지도 모른다고 설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 의사의 주장을 “노동자의 관점에서 보”아 “‘사회적 신맬더스주의’의 철저히 반동적인 본성과 추악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는 이것이 “소부르주아 일반의 심리”로 그들이 “파멸을 향해 가고 있고, 생활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으며, 생존경쟁이 더욱더 무자비해지고 있고, 그와 그 가족의 상태가 갈수록 절망적으로 돼가고 있다는 것을 보고, 느끼고” 그에 항의하는 것, 즉 “절망적으로 사라져가는, 장래를 자포자기한, 풀이 죽고 겁먹은 계급의 대표자로서 항의”하는 것으로 비판한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의 심리”를 소유하거나  혹은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라면 “우리 세대를 불구화시키고 파멸시키는 오늘날의 생활조건에 대항하여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보다도 그들은 더 단결하여, 더 의식적이고 단호하게 더 잘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며 묻는다. 그리고 비록 “참기 어려운 억압과 고통에 찬 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또한 자신들이 “아버지들 세대보다도 더 상황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우리의 아버지들이 싸웠던 것보다 더 잘 싸우고 있”는 것처럼 자신들의 “자식들이” 자신들이 “싸우는 것보다 더 잘 싸울 것이고 승리할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진 “열렬한 낙관론자들이다”라고 주장한다. 우리 역시 “소부르주아 일반의 심리”를 벗어던지고 이러한 “열렬한 낙관론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34)


(3) “근원적인 역사 관계들, 혹은 기본적인 활동 양태들”

맑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를 위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전제라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독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까닭에, 모든 인간적 실존의 첫 번째 전제, 따라서 ‘역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은 우선 살아 있어야 한다는 모든 역사의 전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음식, 주거, 의복, 기타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최초의 역사적 행위는 이들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의 생산, 즉 물질적인 생활 자체의 생산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단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오늘날에도 수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시시각각 충족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역사적 행위, 모든 역사의 기본 조건이다.…

두 번째 전제는, 최초의 욕구의 충족은 즉 충족 행위 및 충족 수단은 새로운 욕구를 유도해 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욕구의 창출이야말로 최초의 역사적 행위이다.…

세 번째 전제, 이것은 처음부터 역사를 갖고 있었는데, 곧 자신들의 삶을 매일 매일 재생산하는 인간은 자신들의 종족을 번식시킨다는 것, 즉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부부 간-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즉 ‘가족’이다.…노동을 통한 자기 삶의 생산과 생식을 통한 새 생명의 생산, 이들 모두를 포함한 생명의 생산은 이제 하나의 것의 이중의 관계로 즉, 한편으로는 자연적 관계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이로부터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특정한 생산양식 또는 단계는 언제나 특정한 협업 양식 또는 사회 발전 단계와 결합되어 있으며, 그리고 이 노동 협업 양식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생산력’이라는 사실, 그리고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여러 생산력들의 총합이야말로 곧 사회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사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항상 산업 및 교환의 역사와 관련지워서 연구되고 서술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 등이다.…

이렇게 근원적인 역사 관계들의 네 가지 계기, 혹은 네 가지 측면들을 고찰한 뒤라야 비로소 우리는 인간이 ‘의식’ 또한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35)


“자신들의 종족을 번식시킨다는 것, 즉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부부 간-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즉 ‘가족’”은 “근원적인 역사 관계들의 네 가지 계기, 혹은 네 가지 측면”의 하나이다. “인간의 재생산(가족)”은 역사의 전제다.*36)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젊은 노동자들을 궁핍하게 만들고 피말리는 생존의 경쟁으로 몰아가 결혼을 늦추거나 하지 않도록 만들고 아이를 낳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역사의 전제”를 파괴하는 생산양식인 것이다. 역사와 미래의 이름으로 이를 폐기시키도록 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주어진 역사와 미래의 사명이다.

 


7. 나가며

현재의 저출산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부르주아들이 말하듯이 국가경쟁력이 떨어지고 미래에 일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저출산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노동자와 그 자녀들의 삶이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것을 또 노동자들과 그 자녀들의 삶이 점점 더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출산이 노동자계급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착취당하며 천천히 죽으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또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열사가 되려고 태어나지도 않았다. 우리는 생산수단에 의해 이용당하고 잉여가치를 생산해내는 과잉인간으로 살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비굴하게 숨죽이고 멈추어 있으면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시간이 지나 우리의 자식들이 그러한 비참한 삶을 이어가며 살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동시에 우리의 후손을 위해 “금사슬”을 끊어내야 하고 “쐐기”를 뽑아내야 한다.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그것은 스스로 선택할 문제이다. 《노사과연》



이론

저출산과 노동자계급



전성식|회원, 평등사회를 위한 민중의료연합 회원




*) 대한가족협회가 공식적으로 인구억제정책을 폐기한 것이 1996년이다.


**) 이런 표현을 쓴 것은 민노당의 몇몇 지도급 인사가 한국자본주의가 나아갈 바를 그곳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 요한 바오르 2세는 2002년에 이렇게 말했다. “출산율 위기는 미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그런데 그의 이런 주장은 참으로 이상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분명 “결혼하지 않은 남자들과 과부들에게 말합니다. 나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 좋습니다.”(고린도 전서 7장 8절)라고 했으며 심지어 “그러므로, 자기의 약혼녀와 결혼하는 사람도 잘하는 것이지만,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더 잘하는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7장 38절)라고 가르쳤고, 또 이를 누구보다도 잘 지키는 사람들이 그(녀)들이기 때문이다. 조금 불경하게 말하면 그(녀)들은 오랫동안 또 지금도 저출산율에 가장 기여하는 사람들이다.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 소개한다. “맬더스는 영국국교의 목사였으나 독신의 수도서약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신교적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가 되기 위한 조건의 하나인 것이다. [기혼자는 교수가 될 수 없다. 또 누구든지 결혼하면 즉시 교수직을 그만두어야 한다.](『캠브리지 대학 위원회 보고』, p. 172). 이 사정은 맬더스를 다른 신교 목사들과 구별하는 유리한 점이다. 왜냐하면, 다른 목사들은 목사들에게 독신주의를 강요하는 천주교적 계율을 내던지고 [낳아라, 번식하라]는 계율을 자기들의 특수한 성서상의 사명으로 받아들여 흉칙할 정도로 인구증가에 기여하고 있으며, 동시에 노동자들에게는 ‘인구법칙’을 설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 페티[그는 인구를 부의 토대로 간주했으며,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목사들의 공공연한 적이었다]는 목사들의 꼴사나운 훼방을 예감이나 한 듯이 이렇게 말한다. [변호사들이 가장 할 일이 없을 때에 법이 가장 번영하듯이, 목사들이 가장 많이 금욕할 때에 종교는 가장 번영한다]고. 그러므로 그는 신교목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즉, 그들이 사도 바울을 따라가지 않고 또 독신으로 ‘금욕’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성직이 흡수할 수 있는 숫자 이상으로 많은 목사들을 낳지 말라. 잉글랜드와 웨일즈에 12,000개의 목사직이 있을 뿐이라면 24,000명의 목사들을 길러내는 것은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직이 없는 12,000명이 생계를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현직에 있는 12,000명의 목사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파멸시키고 굶주리게 하며 영혼을 천당으로 인도하지 못한다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맑스, 『자본론 Ⅰ(하)』제2개역판, 비봉출판사,  pp. 842-3.)


****) 물론 이것은 유럽과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일본의 문제이고 대만의 문제이고 싱가포르의 문제이기도 하다.


*****) 이렇게 지적되는 원인들에는 먼저 그것이 왜 발생했는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즉, ‘왜 사교육비가 인상되었는가?’, ‘청년 실업’, ‘장시간 노동’은 왜 발생했는가? ‘왜 주거비용이 높아졌는가?’, ‘젊은이들은 왜 무책임하게 되었는가?’ 또 이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등등.


*) 예컨대 가장 만만하게 거론되는 ‘출산보육지원책’은 이미 유럽에서 오래 전부터 시행되고 있는 정책이다. 그리고 이것은 별로 신통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빈번하고 소란스럽게 지적되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우리사회에서 심각한 문제의 하나라는 것의 반영일 뿐 아니라 (주택 문제처럼) 이것이 노동자계급에 국한되지 않고 소부르주아 층도 함께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다.(엥겔스. 「주택문제에 대하여」,『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 pp. 179-80. 이러한 성격의 문제는 많다.) 그러나 결단코 이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 이 부분은 자본론 Ⅰ권, 제25장에 의존한다.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인용은 모두 이곳에서 따왔다. 맑스는 “이 장에서는 자본의 증가가 노동자계급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하겠다고 한다.(맑스, 「제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자본론 Ⅰ(하)』제2개역판, 비봉출판사, pp. 836-976.)


***) 맑스, 같은 책, p. 788.


****) 물론 이러한 조건이더라도 “임금의 등귀는 자본주의 체제의 토대를 침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점점 더 확대되는 규모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한계 안에 머문다.” 왜냐하면 자본의 축적의 결과 임금이 등귀하는 것은 두 경우가 있는 데 그 하나는 임금이 증가하더라도 많은 이윤을 얻어 축적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임금이 올라 이윤동기가 감소하여 축적이 약화되어 결국 다시 임금을 상승시킨 원인(노동력에 대한 수요증가)을 소멸시켜 원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또 다른 경우다.


*****) 『인구론』을 쓴 맬더스조차도 이런 말을 했다. “공업과 상업에 주로 의존하고 있는 나라의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결혼억제가 상당한 정도로 실시된다면, 그 나라에 해로울 수 있다…특수한 수요 증대에 대응해 노동자를 시장에 제공할 수 있으려면 인구의 성질상 16~18년이 지나야 하는데, 수입의 자본으로의 전환은 저축에 의해 그보다 훨씬 더 빠르게 행해질 수 있다. 한 나라는 언제나 노동기금이 인구보다 급속히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맑스, 같은 책 p. 866에서 재인용)

   한마디 덧붙이면 부르주아지들이 지금 ‘저출산’과 ‘노령화’를 연관 지어 호들갑을 떠는 것은 단지 이 이유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호들갑은 현재의 연금에 대한 공격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결단코 낭만주의자들이 아니다.


*1) “자본의 가변부분에 비한 불변자본의 점진적인 증대라는 이 법칙은 [상이한 경제적 시기를 비교하든 동일한 시기의 상이한 나라들을 비교하든] 상품가격의 비교분석에 의해 모든 단계에서 확인된다.”(맑스, 같은 책, pp. 850-1.)


**) “사실 모든 특수한 역사적 생산양식은 자기 자신의 특수한 [자기의 한계 안에서만 역사적으로 타당한] 인구법칙을 가지고 있다. 추상적 인구법칙이란 식물과 동물에 대해서만, 그것도 인간이 간섭하지 않는 한에서만, 존재한다.”(맑스, 같은 책, p.862.) “제 먹을 것은 갖고 태어난다.”는 속담도 특수한 역사적 생산양식의 특수한 인구법칙의 표현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타당하지 않다.


***)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적인 인구증가가 제공하는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노동력의 양에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기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이 자연적 제한에 구애받지 않는 산업예비군을 요구한다.”(맑스, 같은 책, p.866.)


****) “노동자계급 중 취업자들의 과도노동은 그 예비군을 증가시키고, 거꾸로 예비군이 경쟁을 통해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의 강화로 취업자는 과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일부에게 과도노동을 시킴으로써 나머지 부분을 강요된 나태에 빠지게 하는 것과, 또 그 반대로 산업예비군 때문에 취업자가 과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개별 자본가들의 치부수단으로 되며, 동시에 사회적 축적의 진전에 대응하는 규모로 산업예비군의 생산을 촉진한다.”(맑스, 같은 책, pp.868-9.)


*****) “노동자들이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타인의 부가 그만큼 더 많아지며, 그리고 그들의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면 할수록 [자본의 가치증식 수단으로서] 자기들의 기능조차 그만큼 더 위태롭게 되는 이유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자마자; 또 그들이 자기들 사이의 경쟁의 강도는 전적으로 상대적 과잉인구의 압력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또 그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이 자연법칙이 자기들의 계급에 미치는 파멸적인 영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키기 위해 노동조합의 설립 등등에 의해 취업자와 실업자 사이의 계획된 협력을 조직하고자 노력하자마자; 자본과 그의 아첨꾼인 정치경제학은 ‘영원한’ 그리고 이른바 ‘신성한’ 수요공급법칙에 대한 침해라고 떠들어 댄다.”(맑스, 같은 책, p.874.) 이것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6) “한 쪽 끝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반대 편 끝[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노동자계급의 측]의 빈궁․노동의 고통․노예상태․무지․야만화․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맑스, 같은 책, p.881.)


**) 사실 부르주아지들은 이 비용부담의 대부분을 노동자계급과 소부르주아들에게 넘긴다. 연금이나 각종의 보험들이 이것이다. 최근의 ‘연금개혁 논란’이나 ‘민간의료 보험 도입 시도’ 등도 이런 것들의 좋은 예다.


***) 인구증가를 혐오에 찬 시각으로 보는 맬더스주의나 인구 증가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산아제한을 강력히 주장하는 신맬더스주의는 ‘과잉인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과잉인구가 노동인구가 상대적으로 너무 많아진 것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것을 그저 노동인구가 과도하게 증가했다고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국내 보건대학원 교수로서 유일하게 인구학을 전공한”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영태 교수”는 현재와 같은 사회분위기에서도 다음과 같이 용감하게 주장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구가 조금 줄어들어도 괜찮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의 각종 갈등과 위기는 너무 많은 인구수로 비롯된 경쟁 때문이니까요. 경제사정이 좋아지면 혼인과 출산 연령도 낮아지고, 출산율도 다시 올라갈 것입니다.”(한국일보, 2005/3/10) 그의 경력과 나이로 보아 그는 인구문제에 대해 한국사회에서 꽤 오랫동안 힘깨나 쓸 것 같은데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어 참으로 우려가 된다.


****) “노동자들을 향해 그들의 숫자를 자본의 증식욕에 적응시키라고 설교하는 경제학적 지혜의 어리석음은 이제 명백해졌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의 메커니즘이 이 숫자를 자본의 증식욕에 적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적응의 첫 번째 결과는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의 창출이고, 그 마지막 결과는 현역노동자군 중 끊임없이 증대하는 부분의 빈곤과 구호빈민에 대한 부담이다.”(맑스, 같은 책, p. 880.)


*****) “점점 증가하는 양의 생산수단이 [사회적 노동생산성의 향상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적은 인력지출로 가동된다는 법칙, 이 법칙은 자본주의 체제[여기에서는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한다]에서는 철저하게 전도되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즉, 노동생산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노동자들이 취업수단에 가하는 압력은 그만큼 더 커지며, 따라서 그들의 생존조건-즉 타인의 부 증대를 위한 그들 자신의 노동력 판매-은 그만큼 더 위태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생산수단과 노동생산성이 생산적 인구보다 더 빨리 증가한다는 사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거꾸로 노동인구는 언제나 자본의 가치증식욕보다 더 빨리 증가하는 것처럼 보인다.”(맑스, 같은 책, p. 880.)


*1) 맑스는 “1849년과 1859년 사이에 영국 농업지방에서” 있었던 일(같은 책, pp. 870-1.)과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일(같은 책, pp. 956-976.)에서 이를 예증한다.


**) 이들 “사회주의적 부르주아들은 [현대 사회의 생활 조건들을 원하되],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투쟁들과 위험들이 없는 현대 사회의 생활 조건들을 원한다. 그들은 [현존 사회를] 원하되, 그 사회에 혁명을 일으키고 그 사회를 와해시키는 요소들을 제거한 현존 사회를 원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없는 부르주아지를 원한다. 부르주아지는 물론 자기가 지배하는 세계를 최상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또 그들은 “이러저러한 정치적 변화가 아니라 오직 물질적 생활 상태, 경제적 상태의 변화만이 이로움을 줄 수 있다고 증명”하고자 한다.(맑스-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저작선집』제1권, pp427-8.) 불가능한 소망이다. 인구문제에서 부르주아들의 노력 중 가장 천박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주장이 과잉인구를 줄여야 한다는 것으로 앞서 말한 맬더스주의와 신맬더스주의이다. 부르주아지들은 일반적으로 이것을 먼저 주장했다.


***) “덮어 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이것은 1960년대 가족계획 표어였다.


****) 물론 몇몇은 이기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다. 그들은 이를 통해 일시적이나마 자신에게 강제되는 빈곤과 몰락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아이에게 가야 할 비용을 자기가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요즘 젊은이들의 무책임”이다. 물론 무책임하다. 그러나 이것도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책임이다,


*****) 이 문제는 여성들에게는 더욱 더 절대적이다.


*6)“亞 4개국 전문가들 [출산파업, 교육비 때문]”(문화일보 2005/7/4) 이 4개국은 한국, 일본, 싱가포르, 대만이다. 또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교육비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3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 불황이 심해질수록 가계 소비지출 가운데 사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고 한다. (<2>사교육비 지출도 기업투자처럼, 동아경제, 2005/1/2)

   (http://www.donga.com/fbin/output?f=total&code=total&n=200501020224)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가정에서 말 그대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사교육비를 늘려 자식을 가르치더라도 이것은 애당초부터 경쟁이 되지 않는 싸움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들이나 상층의 소부르주아들도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같은 것을 시키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들의 자녀와 소부르주아들의 자녀들이 받는 이른바 ‘과외’는 노동자들과 소부르주아 하층의 자녀들이 받는 그것과 비교해 그 수준 격차에 있어 하늘과 땅이다.


**) 임금이란 바로 이렇게 노동자 가족이 먹고사는 비용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임금이란 노동자 가족의 생계비이고, 경제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노동력의 재생산비’인 것입니다. 더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현실적으로 “누진적인 규모로 이루어지는 재생산”, 즉 축적 혹은, 같은 말이지만, 확대재생산이기 때문에, 따라서 “이미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의 착취가 외연적 혹은 내포적으로 증대되지 않는다면, 추가적인 노동력이 도입되어야 하기 때문에, ‘노동력의 재생산비’로서의 통상적인 임금은 그들의 유지뿐 아니라 증식도 보증하기에 충분한”크기가 아니면 안 됩니다. (채만수, 「제3강 임금과 잉여가치」,『노동자 교양경제학』3판, p. 101.


***) ‘잘 살려면 선진국 사람들처럼 아이를 적게 낳아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들어왔는가?


****) 군사독재정권의 악랄한 통치에 대한 경험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특히 정치적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소부르주아들의 열광과 노동자․민중 진영의 혼란 속에서 잘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70년대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가 재격화되면서 자본이 노동자․민중이 그간 얻어왔던 성과를 공격하면서 등장했던 반동적인 성격의 것이었고 레이거노믹스나 대처리즘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길이 없는 과정이었다. (채만수, 「제7강 신자유주의」,『노동자 교양경제학』3판, pp. 361―413. 을 참조하라.)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러한 반동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본격적인 자본주의 축적이 시작되었던 경제개발 초반부터 존재해왔던 야만적 군사독재정권의 존재가 이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1987년 6월 투쟁(부르주아 헤게모니하의 민주주의 혁명) 이후부터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데 한국에서는 이른바 ‘개혁’이라는 이름하에 좋은 것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1987년 6월 투쟁을 ‘부르주아 헤게모니하의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나와 인식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사회의 개혁의 속도에 대해서 우리 국민도 놀라고 외국 사람들도 놀란다. 놀라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쪽에는 전혀 개혁되지 않고 있는 부분이 있다. 전국민과 시민단체가 일사불란하게 요구하는 개혁과제는 문민, 국민정부, 우리 정부 약간의 속도에 있어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전체적으로 굉장히 빠른 속도로 개혁돼있다. 어떤 정권이 개혁에 적극적, 저항적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떠밀렸느냐, 주도적으로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속도는 빠르다. 내용은 권력을 합리화하는 것, 소위 권력 힘빼기, 그리고 숨겨진 것을 전부 공개하는 사회적 투명성, 투명성을 높이는 일, 그걸 민주화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정치적 형태의 민주화 개혁은 노태우, 6공 포함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해 왔다. 이제 더 갈 데 없을 만큼, 어떤 것은 너무 많이 와서 약간 뒷걸음 쳐야 하는, 소위 정치적 영역의 개혁은 빠른 속도로 왔다.” “실제 갈등과제를 개혁해야만 비로소 한국사회가 미래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은 대화의 정치, 타협의 정치가 뿌리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도 옛날에는 억압의 문제였다. 부당한 억압과 맞서 싸우는게 과제였다. 그게 우리 모든 문제였고, 그 뒤에는 원칙과 반칙의 문제였다. 투명성, 권력의 합리화는 원칙의 문제다. 왜 불공정 게임을 하자고 하냐. 이미 억압의 문제는 87년 6월 항쟁 때부터 얼추 끝났다. 이제는 게임의 공정성 문제가 권력의 민주화, 투명성으로 문제제기됐다.”([전문]노 대통령 산행-오찬 발언록, 쿠키뉴스, 2005/10/30) 그는 “정치적 형태의 민주화 개혁은…이제 더 갈 데 없을 만큼, 어떤 것은 …약간 뒷걸음 쳐야”한다고까지 한다. 갑자기 탄핵정국의 상황이 떠오른다.


*****) 2000년 출산율의 증가는 이른바 ‘밀레니엄’의 영향인데 당시 세계 각 국의 출산율이 거의 증가했다.


*1) 맑스, 『자본론 Ⅰ(하)』, pp.868-9.


**) 비정규직의 문제도 이 문제의 다른 표현이다.


***) 노사과연, 『정세와 노동』(2005. 11), p. 117을 참조하라.


****)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건물의 토대를 쌓고 있으며, 우리의 자식들은 그 건물을 완성할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식들을 위해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맑스는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을 언제나 축적의 규모에 알맞도록 유지한다는 법칙은 헤파이스토스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결박시킨 것보다도 더 단단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결박시킨다”고 했다.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이 “금사슬”을 지금 끊어내지 못하면 이것은 우리의 자녀들을 옭아매는 더욱 강한 “금사슬”이 될 것이고 그들을 자본에 결박시키는 더욱 강한 “쐐기”가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부모 세대보다 우리 세대가 더욱 어려운 조건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오륙도, 사오정, 삼팔선 등의 표현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영이다


*****) 맑스-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Ⅰ』, 청년사, pp.56-59.


*6) 이 지점에서 나는 『다함께』제65호에 실린 「출산은 여성의 의무인가?」라는 정진희씨의 글을 비판할 필요를 느낀다.  그 글은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여성 정치학교에서” “출산이 여성의 의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한 여성 간부 당원”을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그의 비판은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여성 간부 당원”이 어떤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애매하게 말하는 대신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옮겼어야 했다. 만일 그 간부가 “출산은 애국”이라고 떠들었던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단체의 간부들처럼 말했다면 그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판을 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아무리 민노당의 지도부가 문제가 많더라도 그런 정도의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맑스의 주장처럼 “출산이 역사의 전제”라는 “취지”로 말했다면 그것은 틀린 주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고 말지는 어디까지나 여성 자신이 선택할 문제다.”라는 정진희씨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옳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적 주장과 구별이 어렵다.(그는 “얄궂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근거를 제시해야 옳았다.) 또한 “출산을 여성의 의무라고 주장하게 되면,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 확대를 일관되게 주장하기 어려워진다”는 주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는 자본 측이 저출산 현상에 대해 향후 노동인력이 부족해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일자리가 없어 헤매는 사람들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가 이주를 규제하지 않고 일하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일할 수 있게 한다면, 인력부족문제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한다.(그를 위해서는 프랑스에서의 투쟁이 좀 더 일찍 일어났어야 했다.)

   그는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가율이 증가하고 있지만, 양육 부담 때문에 직장에 다니지 못하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그런 여성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아이의 양육을 위해 직장에 다니지 못하려면 먼저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해야 한다. 즉 그들이 그렇게 하려면 그 여성들은 자신이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재산을 갖고 있거나 그만한 능력을 가진 남편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대부분의 노동자계급의 여성들은 그렇게 좋은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노동시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정진희씨의 주장은 소부르주아적, 그것도 철저하게 소부르주아 상층의 관점에 물든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정진희씨는 “양육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전면 책임지는 사회, 그리하여 양육 때문에 여성이 경제적․사회적 경력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때 여성은 진정한 선택권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사회전체의 이익과 여성의 이익이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경력”운운 하는 사소한 잘못을 넘어가더라도 양육을 사회가 전면적으로 책임지면 “사회전체의 이익과 여성의 이익이 충돌하지 않을 것”(이것은 여성해방이 된 사회를 의미한다.)이라는 그의 주장은 “자유를 향해 고동치는 심장”을 책임지는 사람으로는 너무나 순진한 주장이다. 여성해방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통해서 절대로 오지 않으며 또 그렇게 말처럼 쉽게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 계급해방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인간해방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제8호 (200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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