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반대를 넘어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프랑스 CPE 반대 투쟁, 그 성과와 한계





들어가며


지난 4월 10일, 시라크 대통령의 CPE[Contrat Premiere Embauche, 최초고용계약제1)] 철회(대체 입법 추진) 담화가 발표되고, 여름처럼 뜨거운 봄을 보낸 프랑스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노조와 학생들은 이 날의 승리를 “노조단결의 성공”, “역사적 항의운동 이후 역사적 승리” 등으로 표현하며 자축했다.

몇몇 노조와 학생들은 CPE의 전례가 된 CNE[Contrat Nouveau Embauche, 신고용계약제2)]의 철회까지 요구하고 있지만, 이미 뜨거운 봄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이번 투쟁의 승리는 큰 의미가 있다. 프랑스 정부의 고용유연화 정책에 제동을 걸었고, 2003년 연금제도 개혁반대투쟁의 패배 이후, 침체된 프랑스 노동운동에 새로운 활력과 희망을 주었다. 또한 12개로 분열된 프랑스 노조에게 연대투쟁을 통한 승리의 경험을 맛보게 해주었고, 노동자와 학생, 시민 연대투쟁을 통한 승리를 경험하게 했다. 이번 투쟁의 승리는 프랑스 인민에게, 나아가 세계 인민에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승리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번 투쟁의 승리를 누구보다 기뻐하며, 승리의 주역인 프랑스 노동자-학생들에게 연대의 축하 인사를 보낸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기쁨과 축하만이 우리의 몫은 아니다. 투쟁의 성과와 한계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이 투쟁의 경험을 계급대중들과 공유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임을 잘 알고 있다.



1. 투쟁의 경과

―무기력한 노조와 좌파 정당


지난 해 CNE가 도입되었을 때, CGT(노동총동맹) 등의 노조와 사회당은 별다른 반발(실질적 저지투쟁)을 하지 않았고, CNE는 지난 해 9월부터 시행되었다. 이 같은 노조와 사회당의 대응에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올 1월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한다는 구실로, CPE를 제안했다. 그때까지도 노조와 사회당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단지, 반대 의견을 담은 성명을 내는 것이 그들 행동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CPE가 강행될 것으로 전망되자 2월 7일 주요 노조와 학생 조직이 40만 명의 시위를 조직하였고, 3월 7일 2차 ‘행동의 날’에는 100만 명의 시위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노조는 시위 참여 외에는 총파업 등의 실질적인 움직임을 취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학생들은 동맹 휴업을 결의하고, 철로를 점거하며 투쟁을 강화해 갔다. 8일과 9일, 법안이 하원과 상원을 통과하자 학생들은 강의실을 점거하며 투쟁의 수위를 높여 갔으며, 동시에 정부의 강경한 진압이 뒤따랐다. 하지만 사회당은 대중행동을 통한 투쟁 대신, 통과된 법안을 헌법위원회에 제소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고, 정부의 강경진압에 대해서는 강한 우려를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할 뿐이었다.

11일, CGT 전국조직위원회 회의에서는 ‘23일’ ‘하루’ 파업을 조직하고, 파리에서 전국 집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16일에는 학생들의 ‘행동의 날’이 진행되었고, 50만 명이 참여하였다. 학생들은 이날의 지지파업을 포함한 지속적인 노조의 파업을 요구하였다. 18일, 150만 명이 참가한 학생과 노조, 좌파정당 등의 시위에서 학생과 노조, 좌파정당은 “48시간 내 CPE를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더욱 강력한 투쟁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다음 날 CGT의 베르나르 티보 위원장은 프랑스 앵테르 라디오와의 회견에서, “이 같은 모멘텀이 유지되면 빠른 시일 안에 CPE 철회를 받아낼 것으로 생각한다”며, “정부가 고집하면, 하루 동안의 총파업이 벌어질 수 있다”(강조는 인용자)고 말하면서, 어제의 “강력한 투쟁”이 ‘하루 동안의 총파업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은 총파업 결의․경고는 학생들의 강력한 투쟁과 여론에 밀려, 아래로부터 강제된 것이었다.3)

그러나 이틀의 기한이 지난 20일에도 시라크 대통령과 빌팽 총리가 여전히 CPE에 대한 강행의지를 보이자, 학생들과 노조는 회의를 열어, 28일에 총파업과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28일의 총파업 결의도 학생들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시간이었는데, 이 역시 당초의 23일안(案)에서 유보된 것이었다.

23일에도 시위는 이어졌으며, 24일 빌팽 총리와 노조 대표들 간의 협상이 있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28일, 노조는 처음으로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하는 하루 총파업을 벌였다. 언론이 “검은 화요일”이라고 부른 이 날의 파업으로 철도‧지하철‧항공‧우체국‧병원‧학교‧언론 등의 기능이 크게 마비되었으며,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270여만 명에 이르렀다.

31일, 시라크 대통령의 중재안이 발표되었지만, 학생들과 노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투쟁을 계속 진행한다. 4월 4일에는 300여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하여, CPE의 철회를 외쳤다. 그리고 5일에는 17일까지 법안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고,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시, 대규모 시위에 다시 돌입할 것을 발표한다.

그리고 10일, CPE 철회를 담은 담화가 발표된다. 11일에도 일부 학생과 노조는 대체입법에 유리한 내용을 강제하기 위해, 그리고 CNE 등, 유사한 고용불안계약제의 철회를 위해, 예정된 시위에 나섰지만, 주요 노조는 참가하지 않았다.

13일, 상원이 청년층 고용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대체법안인 ‘청년고용촉진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일부 학생과 노조의 투쟁을 제외한다면, 2개월 간 계속된 투쟁은 마무리되었다.

살펴본 것처럼, CPE 반대투쟁은 노조와 학생, 그리고 좌파정당이 공동의 승리를 이끌어낸 투쟁이었지만, 주도적인 투쟁은 어디까지나 학생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노조와 좌파정당은 지지와 연대를 보내면서도 막상 행동에는 머뭇거리다 뒤늦게야 투쟁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비록 총파업 투쟁을 통해 법안 철회를 이끌어 내긴 했지만, 이번 투쟁은 프랑스 주요 노조들의 무기력함을 보여준, 그리고 법안 통과를 사실상 방관했다가 뒤늦게 투쟁에 동참한 좌파 정당의 무기력함을 보여준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2. 투쟁의 정치적 한계

―국가와 체제에 대한 투쟁의 실종


이번 투쟁의 성과는 이미 많은 글에서 제출되었고, 필자 또한 앞서 이야기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 투쟁의 한계도 명확하게 지적해야 한다. 이 또한 이 투쟁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주요 산업국가의 대규모 노조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제국주의적 경제성장의 떡고물을 자본과 함께 나누며, 그들의 투쟁을 임금과 노동조건의 부분적 개선이라는 경제적 투쟁으로 한정지었고, 그것도 자본주의적 사회질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로 제한해오고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의 CPE 반대투쟁 역시 그것을 강제하려는 독점자본의 일방적 의지를 좌절시켰다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혹은 언제든 독점자본의 일방적 의지를 좌절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러한 체제내적 투쟁이라는 본질적 한계 내에 머문 투쟁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뜨거웠던 봄으로 돌아가 보면, 연일 시위가 계속되고, 시위 대오는 40만, 50만, 150만, 270만, 300만 이상으로 늘어간다. 그들은 동맹 휴업을 결의하고, 학교‧관공서‧철도를 점거하며, 바리케이드를 치고, 총파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은 외친다 ― “CPE를 철회하라!”

물론 몇몇은 '자본주의의 철폐'를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대중 속에 울려 퍼지지 못하고, 투쟁을 체제 내의 것으로 한정하려는 흐름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주도적인 투쟁에 나선 학생 대표도, "이번 시위가 고용불안문제를 넘어 불법체류자 문제 등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은 반대한다"며, 투쟁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고용불안 해소와 미래의 고용안정 확보에 국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재로선 정권퇴진 운동이나 혁명적 상황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4)

3월 29일에 발표된 학생-노조 공동선언문 역시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게 “헌법적 특권을 이용하여 CPE가 철회될 수 있도록”할 것을 요구하며, “국가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국가 최고권력이 상황에 대한 조치를 취하고 요구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하는 것이 긴급하다”고 주장하면서, CPE 문제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5)

다름 아니라, 300여만 명의 파업․시위였지만, 그것은 CPE라는 정부의 특정 정책에 대한 반대였을 뿐, 자본주의체제와 그 국가권력에 대한 어떠한 대항의사도 찾아볼 수 없는 것. 바로 이것이 CPE 반대투쟁의 특징이자 한계이다. 심지어 그들은 “국가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국가최고권력[자]”에게 “헌법적 특권”의 발동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투쟁의 한계는, 대체입법이 통과된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프랑스를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그들은 특정 법안의 철회를 바랐을 뿐, 그 특정 법안이 만들어진 구조와 기초의 철폐는 요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꿈조차 꾸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CNE에 반대하는 투쟁은 지금 대중적인 저항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이야말로 이번 투쟁이, 체제내적 투쟁일 뿐 아니라, CPE를 도입하려는 특정 법안에 대한 반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조직노동자운동과 대중운동의 이러한 한계, 그 체제내화는 물론 노동자 정치운동의 체제내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프랑스 사회당을 비롯한 서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의 ‘사회자유주의’는, ‘고용의 유연화’와 ‘경제성장’의 전략에서, 우파의 그것과 동일한 기반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 이른바 좌파정당들은, 조직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긴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더 이상 노동자계급의 정당이 아닌 것이다. 그들 좌파정당은 사실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사회․역사의식을 오도하고, 그 전망을 자본주의적 생산의 틀 속에 가두면서, 자본주의체제의 정치적 위기에는 감압밸브의 역할을 하는, '독점자본가계급 좌파'의 정당인 것이다.

공산당은 또 어떠한가? 주지하는 것처럼, 서유럽 주요 국가의 공산당은, 1970년대에 이미 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의 노선을 포기하고, 합법주의‧의회주의로 돌아서 버렸다. 그들은 이러한 틀에 갇혀, 이미 사실상 사민주의 정당화돼버렸고, 더 이상 변혁을 잉태할 수 없는 불임의 정당으로 돼버린 지 오래이다.

한 마디로, 혁명적 노동자계급 정당의 부재 시대이다. 그리고, CPE 반대투쟁의 정치적 한계는 바로 그러한 혁명적 전위정당의 부재라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3. 교훈과 전망


300여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학생․시민의 1개월여의 투쟁이 CPE 철회라는 특정 정책의 반대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 이는, 이렇게 혁명적 전위정당의 부재라는 노동자계급정치의 한계․상황을 반영하는 동시에,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이 혁명적 전위정당 부재라는 상황을 타개하지 않고는 결코 전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역사적 맥락은 다르지만, 1960년의 4월 혁명에서, 광주의 민주항쟁과 학살로 그 정점을 이루었던 1979-80년의 대위기와 투쟁,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화대투쟁과 7-9월의 노동자 대투쟁 등으로 점철된 우리 한국 현대사의 여러 정치적 격변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혹은, 바로 그렇게 혁명적 전위정당 없이는 노동자계급이 그 해방을 달성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저들 독점자본과 제국주의는, 국가보안법 등을 통한 피의 억압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이 그러한 정당을 갖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런데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전위정당을 갖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 국가보안법 등을 통한 피의 억압에 있지만, 서유럽이나 일본,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 국가들에서는 좀 다르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상황도 한편에서는 갈수록 그에 닮아가고 있다.) 이들 국가들이라고 해서 혁명적 노동자, 혁명적 노동자 조직에 대한 직접적인 정치적 억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억압과 더불어 노동자계급 상층부의 독점자본과의 제국주의적 공생이 혁명적 전위정당 부재, 그 해체의 주요 원인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전위정당 부재라는 상황이 정착하기까지는 물론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 긴 과정이었다. 여러 요인 가운데에서도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주도의 제국주의에 의해서 수행된 반공정책, 반공선전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고도로 발달한 대중매체를 동원한 이데올로기 조작과정이자, 다른 한편에서는 케인즈주의적 사회보장 정책, 즉 현대 사민주의 정책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을 체제 내로 매수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서유럽 주요 산업국가의 경제적 성장은 이들 국가의 노동자계급에게 일정한 경제적 풍요를 제공하였다. 노조 관료를 위시한 노동자계급 상층부는 자본의 떡고물을 받아먹으며 그들에게 기생하고,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은 점차 옅어져갔다. 거기에 자본의 신문, 잡지, 라디오, TV, 영화, 광고 등의 매스미디어가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더욱더 교묘하게 마비시켜 간 것이다.

더욱이 그들에게 더 나은 사회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현실사회주의의 모델은 붕괴하였다. 아니, 선진 산업국가의 노동자들은, 제국주의의 앞선 생산력과 소비수준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묘하게 조직된 반공선전 때문에, 그 모델이 존재하고 있을 때조차 이미 그 모델을 후진적으로 바라본 경험이 있다.

그리하여 지금 선진 산업국가의 노동자들에게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대열에 함께하자고 하는 것은 쉽지 않음이 분명하다. 뜨거운 봄을 보낸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이제 뜨거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5주간의 여름휴가 장소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프랑스의 상황이다. (물론 5주간의 유급 휴가는 프랑스 노동자들이 지켜내야 할, 투쟁의 산물이지만!!)

그러나 CPE 반대투쟁의 한계를 규정한 이러한 정치적 후진성은 사실은 이미 객관적인 경제적․사회적 상황과는 크게 어긋나 있는 타성에 불과할 것이다. CPE 추구도 그 한 예에 불과한, 전반적인 신자유주의 개혁 드라이브야말로 자본이 더 이상 노동자들에게 과거에 보장했던 제반 권리를 보장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더러, 그것을 보장하려 해도 보장할 여유․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조응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해버린 생산력은 전세계적으로 전반적․항상적인 과잉생산으로 자신을 입증하면서 최강의 제국주의, 최강의 독점자본조차 생존을 위한 처절한 경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CPE였고, 신자유주의 개혁인 것이다.

그 때문에 CPE가 좌절되었다고 해서 손놓고 있어도 좋은 프랑스의 독점자본이 아니며, CPE를 좌절시켰다고 해서 프랑스의 청년․노동자들이 고용과 생활의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프랑스만의 얘기가 아니고, 모든 자본주의 국가, 바로 우리의 얘기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자본은 그 간에 노동자계급이 획득해온 제반의 권리를 파괴하기 위해서, 제2차 대전 후 고도성장기에 쏘련을 위시한 사회주의와 체제경쟁을 벌이면서 노동자계급에게 양허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노동자계급의 권리를 파괴하기 위해서 '개혁'에 나서고 있다. 바로 신자유주의 개혁! ―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CPE에 반대하여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 노동자들은 어디에서나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사상적으로 철저히 무장해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 노동자들의 CPE 반대투쟁처럼, 미적거리다가도 때때로 강력한 반격을 가해 승리를 거머쥐기도 하지만, 그 투쟁은 전혀 혁명적 전위정당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맹목적․조건반사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넘어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대중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06년의 프랑스의 상황은 1917년의 러시아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 동시에 2006년의 프랑스 노동자는 1917년의 러시아 노동자가 아니다. 따라서 2006년의 프랑스, 2006년의 프랑스 노동자들에겐 1917년의 러시아와는 다른 전망과 전략전술이 필요하다.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이 고도로 발전하여 세계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의 반열에 들어선 2006년의 한국과 한국의 노동자도 1917년의 러시아보다는 2006년의 프랑스에 더 가깝다. (물론 동시에 프랑스와도 다르다.) 즉, 우리에게도 1917년의 러시아와는 다른, 그리고 프랑스와도 다른 전망과 전략전술이 필요하다.

그 전망을 찾기 위해, 우리에게는 더 많은 경험과 실천, 그리고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이것이 1917년의 경험, 그를 통해서 확립된 원칙을 무시․망각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확립된 그 원칙에 입각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전망과 전략전술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투쟁을 넘어선, 혁명적 전위정당에 의해서 인도되는 목적의식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사회적 생산관계 및 그것을 보증하는 부르주아 국가체제 자체를 극복하지 않고는, 임금노예제와 그 수호자인 부르주아 국가를 극복하지 않고는 착취와 억압으로부터의 어떠한 해방도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글을 나가며


승리한 CPE 반대투쟁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CPE와 유사한 비정규법안에 맞서는 투쟁에서 효과적인 저항을 못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사치’로 들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투쟁의 성과와 동시에 한계를 명확하게 분석하여 교훈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다음 투쟁을 통해(!), 그리고 그 다음 투쟁을 통해(!!), 더 많은 노동자 대중이 근본적 변혁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래야만, 지금은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철폐의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지만, 미래의 우리는 법안의 철폐를 넘어,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현재의 수세적 투쟁을 넘어, 또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넘어, 임금노예제의 철폐를 위한 근본적 투쟁의 대오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물이 수증기가 되는 것은 99.9° C에서 100° C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100° C에서 물은 액체에서 기체로, 전혀 다른 상태로 변화한다. 우리의 운동도 비타협적이고, 전투적인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이윽고 99.9° C에서 100° C에 이르고, 전혀 다른 사회적 단계로 변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 경험을 통해 확립된 원칙을 견지하면서, 노동자계급 대중과 경험을 함께 하며 그 원칙을 구체적이고 풍부한 전략전술로 발전시켜 노동자계급 대중이 해방의 길로 나갈 수 있게 하는 것, 이를 위해 그 경험을 분석하고, 다시 노동자계급의 언어로 이론화하는 것, 이것이 선진노동자들의 몫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CPE 반대투쟁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전위정당을 획득해야 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을 넘어서는 반자본주의 투쟁이 필요하다! ≪노사과연≫


1) 기회균등법안의 8조로, 기업이 26세 미만(25세 이하)의 청년을 고용하는 경우 2년간의 시험기간을 거쳐 정식으로 채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


2) 20인 이하를 고용하는 기업의 경우 새로운 직원을 2년간의 시험기간을 거쳐 정식으로 채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


3) 예컨대, 다음과 같은 보도들을 보자. ① “최근 프랑스 신문 르 피가로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의 55%가 ‘이 법안이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25세이하 사원 2년내 언제든 해고 가능?”,[ 문화일보], 2006-03-10.), ② “르 파리지앵이 이번 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지난 주보다 13%포인트 증가한 68%의 응답자가 'CPE는 철회돼야 한다'고 답해, 최초 고용법 철회 요구 학생·노동계 시위 확산...”(“최초 고용법 철회 요구 학생·노동계 시위 확산”, [문화일보], 2006-03-17.), ③ “르 파리지앵의 설문에 따르면 여론의 68%가 CPE 철회를 바라며... 63%는 이번 시위를 지지...”(“수십만 청년 또 거리로 ‘발등의 佛’”, [서울신문], 2006-03-18.), ④ “19일 르 주르날 뒤 디망슈에 보도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CPE에 반대하는 여론도 54%에서 61%로 급상승해...”(“佛 실업정책 반대 최대규모 시위(종합2보)”, [연합뉴스], 2006-03-19.).


4) 파리10대학(낭테르대학)의 학생 대표 라시드 타예브(법학 전공, 석사과정 1년차)의 인터뷰 중에서 ("68운동 때처럼 우리를 막을 수 없다", [한겨레], 2006. 4. 5.).


5) "세계노동소식", [국제노동브리프], 2006년 4월 (Vol.4, No. 4), 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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