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나누기

스펙 쌓기의 광풍과 함정

문화연대 소식지 “상상나누기” 2010년 10호 밥보다 문화


스펙 쌓기의 광풍과 함정

 

김성일
(문화사회연구소)

 

미국을 진원지로 한 세계경제의 위기는 국내 고용시장을 크게 위축시키고 있다. 그런데 현 시기 글로벌 금융위기가 초래한 고용시장의 결빙은 외환위기 때와 확연히 다른 형태를 보인다. 즉, 전반적인 고용난을 불러온 외환위기와 달리 이번에는 주로 여성과 영세자영업자 같은 취약계층에 집중되어 있다.

 

성별로 볼 때,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의 취업자는 전년보다 127만 6천명이 감소한 가운데 남성이 63만 6천명, 여성이 64만 1천명으로 비슷하게 감소했다. 그러나 현 시기의 경우, 남성은 지난해 3만 1천명 증가했지만 여성은 10만 3천명이 감소했다. 자영업자의 경우, 외환위기 때는 종업원을 둔 자영업자가 24만 7천명 감소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번 에는 종업원을 두지 않은 영세자영업자가 25만 명 감소해 이들에게 피해가 집중되었다.

 

이와 더불어 연령대별 고용난 역시 외환위기 때와 다르다. 외환위기 때는 모든 연령대에서 취업자가 감소했지만, 이번에는 50대 이상이 정부의 공공일자리 정책에 힘입어 증가한 반면 청년세대(15-39세)는 30만 명 감소해 저연령층에서의 감소세가 뚜렷이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외환위기 이후 단행된 신자유주의 재구조화가 초래한 사회양극화의 또 다른 결과이다. 즉, 고용의 사각지대라 할 여성, 영세자영업자, 청년세대에게 집중된 이번 고용난은 이들 계층에게 나타나고 있는 만성적인 삶의 불안전성과 위기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로부터 삶의 안전에 대한 희구는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보다 나은 경제적 기회와 보상을 위해 자본이 주형한 거푸집에 자신의 몸을 내맡긴다.   

 

취업경쟁에 살아남기 위한 대학생들의 처절한 스펙 쌓기 경쟁은 위의 정황을 반영한다. 이들의 스펙 쌓기는 높은 점수의 학점과 토익은 물론 인턴, 자격증, 아르바이트, 공모전, 봉사활동이라는 ‘취업 5종 세트’가 추가로 결합된다. 그런데 대학생들의 스펙 쌓기는 청년세대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즉, 스펙 쌓기는 무한경쟁에서 삶의 주변부로 추방되지 않으려는 대중(모든 세대)의 생존권적 자원이요 아이템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스펙 쌓기는 진학과 직결된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국제중과 특목고 진학에 필요한 자격을 얻기 위해 토익과 수학은 물론 예체능과 한자까지 공부한다. 고등학생은 대학입시를 위한 스펙을 쌓는데, 국ㆍ영ㆍ수는 기본이고 수시에 필요한 다양한 자격(외국어, 봉사활동, 예체능 특기)까지 갖춰야 한다. 물론 이러한 스펙 쌓기는 사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스펙 쌓기의 열풍은 학생시절로 끝나지 않는다. ‘직딩’이라 불리는 직장인들은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자발적(?) 연장근무에 돌입하여 외국어뿐 아니라 각종의 트렌드를 수집하고 업무에 필요한 정보를 갈무리한다. 대한민국 미혼여성이 원하는 배우자 연봉 4579만원에 도달해야 이들에게 결혼할 자격도 주어진다. ‘사오정’에 속한 40대 역시 명퇴 후 경제생활을 영위할 창업 설계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이들에게 퇴직금으로 연명하기에는 너무도 많이 남은 생애가 버거울 뿐이다.     

 

원래 스펙이란 용어는 제품 설명서를 뜻하는 영어단어 ‘specification’에서 따온 말이다. 이 뜻이 현재는 진학 혹은 취업준비생들에게 학점, 토익, 자격증, 교내외 활동, 경력사항을 합한 총체적 노동능력의 인증지표로 사용된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의 습득이 문제될 바는 아니지만, 작금의 스펙 쌓기는 노동력을 획일화ㆍ표준화하고 언제든지 교체 가능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노동력이 획일화ㆍ표준화된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스스로 개발하지 못하게 만들며, 상시적인 교체 가능성은 고용불안의 만성화로 이어진다.

 

결국 스펙 쌓기는 삶의 안정을 위한 유효한 아이템이 아니라 삶의 불안을 지속시키는 원인이다. 엄청난 노력과 공을 들인 화려한 스펙 목록이 야기한 이러한 역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잡초는 없다’는 말과 같이, 저마다의 존재들은 나름의 생존 이유가 있다.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찾고, 그 일을 하면서 들리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삶의 안전을 보장하는 지름길이다. 이로부터 자신의 능력이 대체 불가능한 고유의 특이성으로 평가받을 때, 자본이 만든 스펙 쌓기의 함정은 무용지물이 된다.

 

※ 메인사진출처 : '스펙보다 인성쌓기로 취업불황 뚫어라'/ 한겨레 200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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