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나누기

회고 <51+>, 그리고 남겨진 것들

문화연대 소식지 "상상나누기" 2010년 17호 특집기사 2


회고 <51+>, 그리고 남겨진 것들

 

단편선(문화노동자)

 

글에 앞서 미리 알릴 것이 있다. 동교동 삼거리의 ‘두리반’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그리고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겠다. 웹 공간에 많은 기사가 올라와 있으니 조금만 품을 팔면 금방 찾아낼 수 있다. 같은 이유에서 ‘세계노동절120주년기념전국자립음악가대회뉴타운칼챠제공파티 <51+>’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피한다. 지면 상, 언급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을 되짚어보자. 아마도 3월 말이었지. 아직 봄기운 닿지 않아 서늘한 밤이었을게다. 그날은 마침 내 공연이 없는 날이라, 두리반에서 토요일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음악회를 함께 기획해오던 음악가 한받(a.k.a 아마츄어증폭기,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공연을 보러간 날이었다. 그때 한받은 공연을 하는 아래층에서 벽에 슬쩍 기대어 클래식 기타를 무심히 퉁기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서서 그가 연주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맥주라도 한 캔 먹은 듯 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올해 메이데이가 마침 토요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나는 왠지 들떠, 상기된 표정으로 한받에게 물었다. “올해 메이데이가 마침 토요일인데, 어차피 토요일마다 우리 두리반에서 자립음악회 하고 있으니까 그날은 좀 크게 하는 게 어때요?” 그랬더니 한받이 무심히 대꾸했다. “그럼 5월 1일이니까 51밴드를 모아서 해보죠.” 아마 나는 “예? 51밴드요?”하고 반문했을 것이며, 이어 51밴드는 너무 많지 않겠나, 51명으로 조금 줄여보는 건 어떻겠냐는 등의 이야기들을 하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한받도 웃었다. 서로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저 실없는 농담 정도로 생각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정말 해볼까?’라는 생각 정도는 있었다만.

 

그러나 재미있게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로부터 꼭 한 달하고 일주일 남짓 지났을 무렵 동교동 삼거리의 두리반에서는 정오부터 그 다음날 새벽 3시까지의, 도합 15시간 동안의 무지막지한 공연이 ‘정말로’ 벌어지고 있었다. 당초 51밴드를 모으려고 했던 계획은 참여를 희망하는 밴드들이 너무 많아 65밴드까지 늘어난 상태. 게다가 2,000명이 넘는 관객들이 찾아주었다. 우리로서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역사상, 가장 소란스러운 메이데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정말 우리는 아무런 가진 것이 없었다(은유가 아니라, 정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 처음에 우리는 겨우 빈털터리 다섯 명에 불과했다). 처음 아이디어를 낸 것이 3월 말, 그리고 관련된 첫 회의를 정식으로 가진 것이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뒤였으니까 그때면 이미 5월 1일, 메이데이를 한 달 정도 밖에 남기지 않은 시점.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굉장히 나이브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질적으로 준비할 시간도 부족할 것이고 밴드들도 51밴드가 다 섭외되기는 힘들 것이니 아마 행사 규모도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라는 식이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행사를 아예 시작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처음에 찍어둔 밴드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나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밴드들이 참여를 약속해주었기도 했고, 또 그렇게 밴드들이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하니 도무지 물릴 수가 없어졌던 것이다. 말에 책임을 져야했기에, 어쩌면 울며 겨자 먹기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사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진심으로 행사를 만들려고 머리를 굴려보니, 의외로 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았다. 아무런 자본금도 없었고 관객이 얼마나 올지도 예상이 전혀 안 되었기 때문에 돈을 들여 음향장비를 빌릴 수가 없어, 알음알음 주변의 인맥들을 동원해 장비들을 이곳저곳에서 조금씩 빌려와 짜 맞추어야 했다. 행사 당일 운영을 도와줄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해야한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부랴부랴 스텝들을 모집했는데, 의외로 정말 많이들 신청해주었고 또한 열심히 해주었다. 그 외에도 음식판매는 어떻게 할 것인지, 수익은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공연할 장소는 어떻게 꾸밀 것인지, 전력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모두 다 결정해야할 일 뿐이었다. 다들 음악가였지, 전문적인 기획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 해보는 일투성이였다. 행사 준비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 전혀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서는 모두들 그로기 상태였다. 심지어 전날 밤에는 용역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계속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설치해놓은 음향 장비들을 건드릴까봐 밤을 새워 지키기도 했고.

 

그렇게 마지막 밤을 보내고, 아침이 밝았다. 메이데이. 그날의 메이데이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짧게만 언급하자면, ‘성공적’이었다. 많은 부분에서 실패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성공적이었다는 뜻이다. 한 건의 안전사고도 없었고, 공연은 예정된 시간에 맞추어 잘 돌아갔다.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날만큼은, 두리반이 이미 승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났다. 두리반 주변은 다시 잠잠해졌다. 시간예술이라는 것이 그렇듯, 지나가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래, 어쩌면 한 여름 밤의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상황은 더 좋아지지도, 더 나빠지지도 않았다. 여전히 두리반은 철거용역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불안에 떠는 상황이고, GS건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모두 다 꿈을 꾼 것일까? 글쎄, 잘 모르겠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두리반을 찾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특히 젊은, 혹은 어린 친구들 위주로. 누군가는 두리반 건물 앞에 조그만 화단을 만들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옥상에 텃밭을 꾸리겠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레게뮤직을 하는 음악가들에게 연락이 왔다. 두리반 뒤 공터에서 레게파티를 열고 싶다는 것이다. <51+>를 만들었던 기획자들에게도 어느새 두리반은 ‘우리’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가장 처음에 ‘연대’를 외쳤다면, 우리는 조금씩 투쟁의 ‘주체’로도 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51+>의 전과 후가 같을까? 이 공간에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아마 시간이, 조금씩 증명해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문화의 힘을, 아직은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