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시각 다른분석

다른시각 다른분석
노동자의 눈으로 본 구로동맹파업 20주년, 돌아보는 진실

참세상  / 2005년07월24일 22시18분

홍석만/《시사프로젝트 피플파워》,
이번 순서는 <다른시각 다른분석>입니다.
85년 6월, 서슬 퍼런 전두환 5공정권 아래
구로공단에서는 “구속노동자 석방하라”
“노동부장관물러가라” “집시법,노동악법등 악법철폐”를 외치며
연대투쟁을 벌였던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구로동맹파업인데요, 당시 대우어페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 5개노조의 동맹파업이 벌어졌고
여러 노조와 운동단체의 지지연대투쟁으로 확대되었던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구로동맹파업이 벌써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학술적인 평가도 있고 언론에서도 구로동맹파업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을 주체로 보지 않고
대상화시켜 바라보는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구로동맹파업의 의미를 노동자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노동운동의 오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보고자 합니다.

스튜디오에는 김영미 당시 효성물산 노동조합위원장님과
김현옥 선일섬유 노동조합위원장님 자리에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홍석만/ 구로동맹파업이 벌써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는데요,
이번에 2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들도 있었고,
또 직접 현장에 계시던 분들의 입장에서
특히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구로동맹파업을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

김현옥/ 20주년 행사하면서 오랫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 만났던 것이
가장 큰 의미가 있었던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 외의 몇 개 행사는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고, 또 여전히 얘기가 왜곡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얼마 전에 방영했던 엠비씨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같은
경우도 그래요. 사실 20년 전에 전두환 정권이 그렇게 우리 정신을
왜곡하고 그랬던 건 원래 그랬던 놈이니까 괜찮은데,
지금 우리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나마 우리가 믿었던 프로에서
그런 식으로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에 좀 화가 나더라고요.
구로동맹파업에 대해 얘기하면서 당사자인 나에게는 연락도 없었고.
그걸 보고 한 조합원이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티비에 같이 싸우고 아는 사람들이 나왔으니까 보고했는데,
언니 우리가 진짜 학생들이 그랬던 거에 우리가 같이 그랬던 거야?
우리가 진짜 조종당했던 거야?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걸 들으니까 이건 정말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론의 왜곡된 평가
- 노동자들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투쟁이 아니라
학생출신들에 의해 이끌린 타율적인 투쟁으로 평가

김영미/ 제 입장에서는 엠비씨는 3가지 오류를 범했다고 봐요.
전두환 정권과 마찬가지로 동맹파업을 배후조정자가 있는 싸움으로
평가했다는 것, 또 노동자들이 끝까지 동지를 보호하고
신뢰하고자 했던 것도 다 져 버린 것.
그리고 그 때 정말 숭고한 정신으로 왔던 학생들의 생각, 열정을
왜곡 시켰다는 것이죠. 말 몇 마디로 그 수많은 사람들을
매장시킬 수 있느냐란 생각이 들어요.
지금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노동자들을,
내가 했던 투쟁을 후회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살고 있는데,
학생들이 떠난 걸 원망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추면 안 되는 거죠.

김현옥/ 우리한테는 그런 책임감이 있어요. 이게 나 혼자의 문제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조합원들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프로그램에서 말하면 그걸 사실로 믿어버리게 되고
그러면 굉장히 실망할 거예요. 지금까지도 우리를 믿고 있는데..
그 때는 우리 뜻이고 우리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했는데..
마치 대우어패럴이 주도해서, 또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 주도해서
그래서 연대투쟁이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보이게 만들어서
조합원들에게 상처를 입힌 거죠.


홍석만/ 지금 말씀하셨듯이 지금까지는 구로동맹파업에 대한 평가가
대우어패럴 중심으로, 또 학생출신 활동가들 중심으로
이야기가 되어왔는데,
실제 당사자들로서 당시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우리 모두가 함께 결정하고 이룩한 투쟁이므로 누구도 주도자라 하지 않음

김영미/ 사실 지금도, 오늘날까지 아무도, 동맹파업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은
내가 주도했다. 내가 주동했다. 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투쟁이었기 때문에, 누가 주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던 거죠. 그렇게 우리의 선택에 따라 같이 싸웠던 거고
그래서 대우어패럴이, 학생출신들이 모든 걸 주도했다는 얘기는
틀린 얘기에요. 기록 등도 왜곡된 게 많아요.
모든 기록이 대우어패럴 중심으로 되어있어서
파업 숫자나 이런 것들도 효성, 선일의 숫자는 축소된 부분이 많고.
이런 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악용되어서는 안 된단 거예요.
이미 동맹파업 이전에 우리는 일상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1년간 함께 노조활동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두터운 상태였기 때문에 연대파업도 가능했던 겁니다.

구로동맹파업의 진행상황

홍석만/ 1년간 함께 노조활동을 하셨다고 하시는데,
동맹파업 이전에 각 공장의 노조들은 어떻게 결성됐나요?.


소모임, 야학 등을 통해 노조 결성 시작
다른 노조들과 일상생활에서부터 자연스러운 연대

김영미/ 소모임, 야학 등을 통해서 조금씩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적은 인원으로 시작해서 점차 사람들도 늘어나고,
같이 등산도 다니고 디스코텍도 다니고 그랬는데,
거기서 대우어패럴 사람들 만나서 또 친해지고 같이 다니고,
그래서 84년에 대우는 4월, 효성은 7월에 노조가 결성 됐는데
그 후에도 서로 사업장에 일 생기면 가서 돕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한국노총 통해서 선일섬유, 가리봉 전자 알게 됐는데
우리끼리도 자주적인 노조연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노조활동하면서 모든 결의대회와 보고대회를 통해 조항 하나하나를 조합원과 함께 했었고, 이렇게 노동조합을 하나하나 완성해 나갔죠.
그러다 단체교섭하고 하면서 회사도 어쩌지 못한다는 공포로부터의 해방도 있었고, 노동자 스스로가 자유로워지면서
노조를 완성시킨 거죠. 조합원을 100%화 시켰고,
파업 안 해도 결의-보고대회하면서
회사측에겐 모이는 것만으로도 위협이었으니까

다섯 개 사업장의 자연스런 공유
단체교섭, 임금인상 협상 후 조합원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절대적 신뢰

김현옥/ 단위사업장 투쟁의 형태, 조합원들을 확보하는 과정,
신규조합원을 교육하는 방법, 이런 것들이 다섯 개 사업장이
공동으로 이루어졌어요, 다른 장소에서 하더라도 주제가
거의 똑같은 내용, 다섯 개 사업장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탄압사례, 성공사례가 공유되었어요.
너무나 짧은 1년이지만, 그러고 나서 보다 우리 과정에서
공감대가 형성되고, 동지애가 싹트고. 85년 임금투쟁이 승리하면서
이건 조합원의 승리, 노동조합의 승리, 사회적 승리였죠.
인근에서도 우리를 부러워하는 상황에 있는데, 단체교섭, 임금인상
두 번의 완전한 승리를 거둔 조합원들의 사기를 누구도
꺾을 수 없었죠. 노동조합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었던 거죠.

홍석만/ 얘기들어보니까 당시 정말 굉장했던 것 같은데,
그럼 구로동맹파업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대우어패럴 위원장 구속을 계기로 시작

김현옥/ 갑자기 김영미 위원장에게 전화가 왔어요.
김준영 대우어페럴 노조위원장이 잡혀갔다는 거였는데,
그 얘기를 듣자마자 당장 사무실로 달려갔죠.
우리 오빠가 구속됐는데 당연히 싸워야 하는 거 아니냐..
그 때는 점심 먹고 항상 노조 사무실에서 시간 같이 보냈는데
그 얘기 하니까 반응이, 올 것이 왔다,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건데
당연히 싸우는 것이라는 식이었어요. 단순히 대우어패럴 위원장이
구속된 게 아니라 친오빠가 구속된 거나 다름없던 거니까.
우리는 사업장 개념 없이 행사마다 같이 하고, 어려운 일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하면서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냈어요.
그래서 저희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어떤 얘기까지 나왔냐면,
왜 끌려간거냐라고 물어서 임금협상 파업으로 끌고 갔다하니까
파업은 우리가 더 많이 했는데, 왜 거길 잡아가냐,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당시 동맹파업은 일상 속에서 이미 형성된 동지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

김영미/ 당시 대우어패럴을 공격한 것은 약한 고리를 먼저 친 거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핵심 몇 명을 잡아가면 노조 와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거죠. 파업이 이렇게 이어질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우리는 누구를 원망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정신,
우리가 당연히 파업을 하자고 했던 것은 논리나 이런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동지애고,
자기 사업장이 아니더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담이라도 넘어서
같이 분노하고 함께 해주려고 했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했던
그런 애정이 이미 일상 활동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당시 조합원들 대부분 당연히 동맹파업을 해야 한다는 의식
노동자 스스로 선택하고 준비하는 과정이었음

김현옥/ 얘기 듣고 바로 연락을 했죠, 다른 간부들도 당연히 해야 한다고
얘기가 나왔고, 그 때 당시 섬유연맹 이원보 부장님 교육이
있었는데 이원보 부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교육 짧게 한 다음
토론을 했죠. 나중에 문제 될 수 있으니 이원보 부장님 보내고,
다음날 아침까지 토론하고 가리봉 전자 위원장 집으로 가서
논의했는데 위원장이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효성하고 선일이 하는데, 우리는 뭐야, 당연히 우리도 해야지, 라고
그 다음에 일반 조합원들 보내고 간부들 모여서 이동하고,
나중에 조사받을 걸 대비해서 알리바이 다 만들었죠.
김영미 위원장이 처음에 얘기 꺼내고 내가 동조한 거다,
그리고 구호는 누가 하고, 결의문은 어떻게 하고, 그런 것들을
다 결정한 거죠.
사실 2박 3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파업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라는 생각을 해요.
다들 알겠지만 그 당시 학생 출신들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파업 결정하는데만도 몇 날 며칠이 걸렸을 거고,
거기에 들어가는 구호 하나, 결의문 문장하나 정하는데도
석달 열흘이 걸렸을 겁니다. 그랬다면 동맹 파업은 당연히
할 수 없었을 거고, 그 사이에 김준용 위원장은 석방됐겠죠.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파업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건
그 당시 정말 순수했던 우리 노동자들이 했기 때문이죠.


홍석만/ 당시 상황도 열악했고, 시대적으로도 탄압이 심한 때라서
굉장히 어려운 투쟁이었는데도 이렇게 많은 조합원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떤 건가요?

당시 조합원들에게는 당연히 해야 하는 투쟁
도와야한다고 생각했고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에 가능

김현옥/ 사실 우리가 대단한 정치투쟁이다 뭐다 이런 생각으로 시작했던 건
아니었어요. 그런 평가는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내린 것이고,
당시 우리는 우리랑 가족처럼, 정말 친오빠 친언니처럼 지내던
그런 사람들을 잡아갔다는 것에 분노했고, 그래서 그 사람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하기 때문에 했던 것이죠.
처음 우리가 어떤 걸 해산 약속으로 잡았냐하면, 김준용 위원장이
마당으로 와서 나 석방됐으니 이제 그만해라, 이렇게 얘기해야
해산하는 것으로 약속하고 시작했어요. 이 정도로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패할 경우
후의 문제들에 대해서 오히려 많이 생각 못했던 거죠.
그 때만 해도 우리는 우리가 뭉쳐서 같이 하는 거에 자신 있었고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대상이 누구든 같이 싸웠고
적이 크면 다 같이 붙어보는 거다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홍석만/ 그럼 동맹파업은 어떻게 마무리되었나요?

김영미/ 마무리 과정도 사업장별로 다른데, 자진해산 형식으로 효성물산이
제일 먼저 해산을 했어요. 그전에 간부들끼리 모여서 해산한 다음
한국노총을 점거해서 의사소통이 원활한 곳에서 투쟁을 한다는
결정을 한거예요. 삼삼오오, 소그룹 단위로 비상연착체계로,
여기서 새나가면 한국노총이 쌓여있을까봐, 여의도 세 명씩
조를 짜서 와라, 조책임자는 물론 간부나 대의원이었겠죠.
이렇게 해서 전화도 없으니, 전화가 없어서 사전약속이 없으면
연락이 안되니까, 그래놓고 자진해산하고 기념사업회 사무실로
쫓아간거야, 나중에 신민당사 점거하고, 노동부사무소 점거하고... 결국 거기서도 끌려나오고..

파업마무리과정
- 선일섬유의 경우 공권력이 뚫고 들어와 강제 해산

김현옥/ 선일섬유 같은 경우에는 워낙에 다른데 소식을 모르니까,
경찰들이 다른데 파업 접었다, 너희도 접어라 해도, 다른 위원장들이 안 나타나니까 그 사람들 오면 나가겠다고 버텼죠.
그러다가 부모님 모시고 오고, 그래도 계속 버티고 있었는데
결국 문이 뚫렸어요. 경찰들이 막 밀고 들어와서 조합원들을
끌고 나가는데, 어차피 이제 남은 여자들로는 저 많은 수의
경찰 병력을 당할 수는 없고, 이미 끝났으니까 대신 손대지 말라고
우리 발로 걸어나가겠다고 했죠. 그 사이에 부모님들 올라왔던
조합원들은 다 끌려가고 맞고 그랬어요.
그리고 나서 책임자들은 대부분 다 연행됐고요..

동맹파업 이후

홍석만/ 파업에 참가했던 책임자 대부분이 연행되고 나서의 상황은
어땠나요? 아무래도 타격이 컸을 것 같은데요.

김현옥/ 저 같은 경우는 3년 구형을 받았어요. 이렇게 구형받으면 보통
집행 유예로 나오는 데, 처음에 지도부 없는 동안 다른 쪽에서
우리 조합원들에게 현장도 못 가게하고,
다른 지역에서 새벽에 유인물 돌리게 하고,
그래서 너무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내가 나올 때까지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다들 같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현장지도부 구속은 당시 조합원들에게 큰 타격

김영미/ 이 파업투쟁이 밖에서 누가 지도했던 것이라면 현장 지도부
몇 명이 구속되었다고 해서 문제될 게 없었겠지만,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에 현장 지도부가 구속되니까 힘든거죠.
우리 조합원들 경우에는 80명 정도가 10일에서 29일정도
구류를 살았다고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지도부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계속 함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나중에 서노련 간부로 있었던 사람들이
각 지역을 담당하면서 우리 조합원들을 데리고 갔는데
함께 하고 믿었던 지도부들이 없는 상황에서
지도부라고 나타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하고
무섭고 힘들어했지만 자기들이 여기서 쓰러지면
위원장이 나오지 못할까봐 계속 뭉쳐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같이 있었다고 해요.

김현옥/ 이 싸움이 노동자들의 결심이라는 또 하나의 얘기가 있는데,
제가 가리봉 위원장이었던 분과 함께 감옥에 있었어요.
이 친구도 위원장 하던 다른 친구가 그만두고 나서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위원장이 된 거였는데, 그리고 얼마 안 돼서
동맹파업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의식 있는 투사는
아니었던 셈인데, 그 당시에는 가리봉전자가 구로 지역
다른 공장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근로조건, 임금, 복지시설 등이
매우 좋은 편이었어요. 그래서 이 위원장은 파업 결정 때문에
조합원들이 이 좋은 직장에서 쫓겨나게 됐다는 걸 계속 걱정하고,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 안에서 만난 사람한테 우리
조합원들 어디 취직시켜줄 수 없는 지 알아보고 그랬어요.
당시 위원장들은 다 그런 마음이었고, 그 때 연투를 결심했던
노동자들의 마음은 그런 마음이었어요.
당연히 우리가 이길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싸움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치 투쟁이다 뭐다 하는 평가이겠지만,
우리는 해야 되겠다, 우리가 해야 위원장이 나올 수 있다,
그런 마음으로 한 거죠.

김영미/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다 다른 곳에서 조사를 받고,
그렇게 고문을 당했는데
사실 그 안에서는 한국노총 민주세력이나, 당시 학생 출신들에게
배후세력이라고 엮으려고 했었거든요.
하지만 아무도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도 않았고,
다 약속한 대로만 얘기했죠.
이런 것도 정말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동지애가 있어서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홍석만/ 출소 이후 상황은 어땠나요?

김현옥/ 나와 보니까 우리 다니던 선일 섬유는 직장 폐쇄 되어 있고,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남아있는 우리 조합원들을 데리고
현장에도 못 가게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우선 조합원들
현장으로 보내고, 그 때부터 서노련하고는 끊었죠.

직장폐쇄, 강제 해산 등으로 조합원 대부분 흩어지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직도 힘들어짐.

김영미/ 효성물산도 직장 폐쇄가 돼서 조합원들이 많이 흩어졌고,
대우어패럴이나 가리봉전자 부흥사 등은 핵심조합원 구속,
강제 해산되면서 많이 못 만났는데 그 사이 노선분쟁이 있었더군요. 서노련쪽으로 모이거나 위원장들 나오기를 기다리거나.
같이 했던 2000명 중에 남은 사람이 5-60명 정도밖에 안 됐어요. 서노련쪽에 있었던 사람들 외에 40여명은 서로 짝지어서
취직도 하려고 했는데 다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들어간지
며칠 만에 다 해고되는 상황이었고요.
나와서 같이 했던 사람들과 평가를 하는데
노동자가 기업주 하나를 이길 수 없다는 교훈과 한계를 얻었죠.
동맹파업으로 분쇄하려고 노력했지만 5개 사업장으로는 안 되고
50개, 500개 노조를 만들어야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러자면 다시 현장으로 가서 노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현장에 들어가려고 해도 원체 선일 위원장이나 저 같이
구속된 사람들은 사진 붙은 블랙리스트였고
미싱사 출신이라 기술 하나 갖고 취업해야 하는데 재취업을 해도
3일을 넘지 못하고, 나가달라고 하고.
그래서 가리봉 위원장 사무장, 저, 사무장, 위원장이 주축이 되어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꼬셔서 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
소모임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학습을 시키기도 했어요.
노조도 많이 만들었고.

홍석만/ 구로동맹파업 이후에 1주년 집회, 2주년 집회 등이 있었는데,
이런 행사들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노선갈등 표면화, 1주년 행사 통해서 극복 하고자했으나 실패
이후 서노련, 동맹파업동지회, 노조결성추진위 등으로 분열됨

김현옥/ 우리는 사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노선싸움이니 정치 투쟁을
얘기하는데, 우린 관심 없었어요. 우리는 1주년 집회를 통해
그런 선배들이나 분위기를 화해를 시키고 싶었던 마음이었어요.
우리가 동맹파업을 했던 게 그런 정신이었으니까.
그래서 함께 하자고 했지만 일부에서는 서노련 깃발아래 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안한다라는 식으로 나오면서
결국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런 사람들은 나가버리고
자연스럽게 동맹파업했던 노동자들만 남게 됐어요.
우리는 모두를 한 자리에 모이게 하기 위해 1주년 집회를
준비했지만 결국 잘 되지 않고 오히려 싸움이 된 거죠.

김영미/ 1주년 행사 할 때 서노련에서 사람은 계승 발전시키지 않고
투쟁정신만 계승 발전시키기로 했다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서노련에 가입하지 않은 너희들은 행사를 가질 자격이
없다라고 하면서 우리 1주년 행사장을 점거했죠.

김현옥/ 2주년 행사도 그렇게 망가지면서 이미 연투의 의미도 다 사라지고, 각자가 다 찢어지게 된 거예요.

김영미/ 87년 6월 24일 2차 2주년 행사를 했어요. 그 날이
서노련의 제삿날이기도 하고 우리의 제삿날이기도 했죠.
그때도 마찬가지로 너희는 자격이 없다면서 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우리를 못 들어가게 했어요. 서노련 주최 구동파 2주년 행사, 우리는 동맹파업 동지회 명의로 한 건데, 사실 구로동맹 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 대부분이 서노련에 참여 안했어요.
서노련 때문에 부위원장도 다 찢어지고...
자본가나 공권력보다 더 빠르게 노동자를 분열시킨 셈이죠.

홍석만/ 파업에 동참했던 노동자들이 서노련에 참가하지 않았던
이유는 뭔가요?

동맹파업 겪으면서 노동조합 중요성 인식
이후 기념행사 거치면서 신뢰가 무너진 게 가장 가슴아파

김영미/ 그냥 일단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더래요. 간부들이. 그리고 유인물 같은 걸 돌리라고 하는데, 노동자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다, 이런 생각이 안 들더라는 거죠.
자기도 이해 못하는 것을 왜 돌려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었죠.
또 저 같은 경우는 동맹파업은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했고
앞서 말했듯이 5개가 같이 해서 진 거지 500개면 이긴다란 생각이
있었어요. 그만큼 우리는 노동조합의 힘을 믿었던 것이죠.
우리는 1년 동안 노동조합활동을 하면서 노조가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확인했기 때문에 노동조합 만드는 걸
꼭 하고 싶었고 한 두 개가 아니라 많은 노동조합들이 필요했는데 서노련은 우리나라에는 노동조합이 필요 없다,
너희는 기회주의자다, 이렇게 얘기가 됐어요.

김현옥/ 저도 노동조합의 힘을 믿었고, 일하지 않으면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합원들 다 현장으로 돌아가게 하고,
저 역시 다시 현장으로 들어가서 다시 노조 만들고
또 위원장도 하고 그랬죠..


동맹파업의 의의

홍석만/구로동맹파업의 정신에 비춰봤을 때,
요즘의 노동계, 노동운동의 모습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형식만 남아있는 연대는 문제
조합원 전체가 함께하는 운동으로 거듭날 필요 있음

김영미/ 간부 몇 사람만 하는 운동이 아니라, 사회적 요구, 자본가탄압에
대한 요구도 좋지만, 먼저 자기 조합원들의 요구를 진정으로
읽고 있느냐, 조합원과 조합의 발전을 위해서 얼만큼의 시간을
투자하고 얼만큼의 기여를 하고 있느냐, 그래서 노조간부조차도, 그 때 조합원들은 노조간부하는 게 꿈이었거든요,
간부들만 하는 운동을 청산해야 한다. 조합원 전체가 합의하고
전체가 함께 하는 운동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계속 고립되다가
스스로 망하게 되는 거죠.
요즘은 그런 애정이 일상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틀만
남아있고. 형식만 남아있으니 서로 힘들고 잘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늘 같이 죽고 같이 산다라고 생각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대우어패럴 위원장이 그렇게 됐을 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홍석만/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김현옥/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이런 사실들이 왜곡돼서
얘기되고 있다는 것이 많이 속상하고, 그렇죠.
또 그 때 당시 조합비가 모자라서 몇 몇 조합원들에게 200만원 정도의 돈을 빌린 적 있는데, 그 당시 200만원이면 큰 돈이거든요.
나중에 돌려주려고 하니까 아무도 받지 않으려고 하더라고요.
그런 마음들이 너무 고맙고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김영미/ 아무 조건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특히 그 때 당시 우리 복지후생부장으로 있었던 박정숙 동지를
꼭 찾고 싶어요. 나중에 우리 홈페이지에 있는 동영상을 보니까
노동부사무소 점거하고 나올 때, 그 때 거기서 경찰들이 막 발로
짓밟고 그랬었는데 그 과정에서 박정숙이 허리를 다쳐서 있는 걸
못 챙겼어요. 아직까지도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고, 그 날 이후
아예 소식도, 생사여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서라도 연락이 되면
좋겠고, 혹시라도 이 방송 보시는 분들 중에 박정숙씨를 아시는
분이 있으면 꼭 찾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홍석만/ 예,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오늘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영미/ 예, 고맙습니다.

홍석만/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손을 맞잡는 실천적 연대보다 발을 함께 모으고 서 있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 중요하단 뜻인데요, 하지만 손조차 잡지 못하는데
어떻게 발을 모을 수 있을까요?
구로동맹파업 20년이 흘렀습니다. 그만큼 노동운동의 상황도
많이 달라졌고,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노동해방의 입장은 흩어지고 연대의 정신도 엷어지고 있다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20년 전 맞잡았던 노동자들의
따뜻한 손길과 투박한 믿음이 어떤 이론보다도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날씨가 매우 덥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다음시간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참새회원이라면 누구나 참세상 편집국이 생산한 모든 콘텐츠에 태그를 달 수 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단어, 또는 내용중 중요한 단어들을 골라서 붙여주세요.
태그:
태그를 한개 입력할 때마다 엔터키를 누르면 새로운 입력창이 나옵니다.

트랙백 주소 https://www.newscham.net/news/trackback.php?board=power_news&nid=28461[클립보드복사]

민중언론 참세상의 재도약에 힘을 보태주세요

덧글 쓰기

민중언론 참세상은 현행 공직선거법 82조에 의거한 인터넷 선거실명제가 사전 검열 및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므로 반대합니다. 이에 따라 참세상은 대통령선거운동기간(2007.11.27 ~ 12.18)과 총선기간(2008.3.31 - 4.9) 중 덧글게시판을 임시 폐쇄하고 진보네트워크센터의 토론게시판의 덧글을 보여드렸습니다.
선거운동기간이 종료되었으므로 기존 참세상의 덧글게시판 운연을 재개하며, 선거운동기간 중 덧글은 '진보넷 토론게시판 덧글보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인터넷 선거실명제 폐지 공동대책위원회  ->참세상 선거법 위반 과태료 모금 웹사이트

잘 읽으셨으면 한마디 남겨주세요. 네?


책을 통해서 간혹 접했던 구로 동맹 파업을 당시 현장노동자의 생생한 경험담을 통해들으니까? 새롭습니다. 동맹 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의 연대의 정신이 오늘 같은 시기에 더 빛을 발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기사 제 블로그에 퍼갑니다.
빨강마녀
2005.07.26 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