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 전망이 질식되는 우경화의 맥락 속에서, 68년 5월의 기억은 종종 ‘쇠퇴의 기원’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그 유산은 깊은 사회적 변화가 ‘아래로부터’ 탄생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전 세계적으로 Z세대는 오늘날 엘리트를 비판하고, 상징을 새롭게 만들며,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동원을 되살리고 있다. 새로운 정치적 변혁의 약속일까?
Z세대 운동은 2025년 10월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대통령 앙드리 라조엘리나(Andry Rajoelina)를 사임으로 몰아냈고, 그는 결국 나라를 떠나야 했다. 출처 : 현지 방송 화면 갈무리
프랑스 정치 및 지적 삶의 우경화 경향은 기준점 상실의 맥락 속에서 나타난다. 누가 감히 저항국민위원회(Conseil national de la Résistance,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세력이 조직한 통합 기구)가 말했던 것처럼 다가올 ‘행복한 나날’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프랑스 공산당이 전성기 때 노래했던 ‘노래하는 내일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좌파 진영에서의 담론은 낙관적이지 않다. 논의는 주로 위기들에 집중되며, 그 시야는 2027년 대통령 선거 이상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전망의 부재는 참담하며,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의 참혹함,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의 불안정한 지정학은 국제 정치의 행위자들과 쟁점들이 거의 모든 논의를 차지하게 만들고, 그것들이 해당 사회 내부의 사회적·정치적 역동성과는 단절된 듯 보이게 만든다. 민족주의를 제외하면 말이다.
우경화는 사회적 요구가 경제에 미칠 ‘가정된’ 영향을 이유로 그것을 배제하고, 공화주의적 보편주의의 이름으로 문화적 요구를 ‘국가의 통합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함으로써 민주적 토론을 훼손한다. 우파와 극우파는 특히 68년 5월과 그 행위자들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그들이 권위를 약화함으로써 ‘워크주의(wokisme, 원래는 인종차별·성차별·사회적 불평등 등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사회 정의 의식을 뜻했으나 현재는 ‘과잉한 진보주의’, ‘정체성 집착’, ‘검열과 도덕적 강박’을 뜻하는 비판적·조롱적 용어로 쓰임)’와 그 밖의 ‘병폐들’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변화
1968년 5월은 집단적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권력의 정치적 게임이나 기술관료적 공공정책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저항으로 인해 사회가 탈산업화 시대로 진입하도록 가속하고, 심지어 그 진입을 촉발했다. 이 사실에서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68년 5월의 긍정적 유산은 우리에게 적어도 최근 혹은 동시대의 몇몇 사회운동을 신뢰와 호의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초대하며, 그것을 단순한 위기의 표지로 보기보다는(혹은 그것만으로 보지 말고) 새로운 시대에 고유한 갈등이거나, 그 시대를 열어젖히는 과정으로 볼 것을 요청한다.
과거에는 권위주의적 권력에 맞서는 인상적인 집단행동이 있었다. 2014년 홍콩의 민주화 ‘우산 운동’,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2009년 이란의 대선 이후 ‘녹색 운동’, 그리고 2022~2023년 마흐사 아미니(Mahsa Amini)라는 젊은 쿠르드 여성의 사망으로 촉발된 ‘여성·생명·자유(زن، زندگی، آزادی)’ 운동 등이 그것이다.
오늘날 동원되고 있는 것은 대략 1995년에서 2010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 즉 Z세대다. 모로코, 마다가스카르, 인도네시아, 네팔, 페루, 케냐 등지에서 Z세대 운동은 지배계급과 그들의 사치스럽거나 최소한 불필요한 지출 — 예를 들어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물, 전기, 그리고 인간다운 주거를 제공하는 것보다 덜 시급한 경기장 건설 같은 — 을 문제 삼는다.
물론 나라별로 차이는 있지만, Z세대는 부패, 족벌주의, 공공 서비스의 결함, 사회적 불의, 불안정한 삶을 고발한다. 그들은 경청을 갈망하고, 권리를 요구하며, 폭력적인 탄압과 부당한 투옥에 맞서 싸운다. 그들은 다양한 요구를 위해, 동시에 그 요구들이 정치적으로 다뤄질 수 있는 조건 — 다시 말해 민주주의 혹은 그 확대 — 을 위해 싸우고 있다.
Z세대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이 세대의 운동은 유머를 섞어 인공지능을 활용하며, 디스코드(Discord) 같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조직된다. 그들의 문화적 현대성은 전 세계적이며, 만화 ‘원피스’를 참조하거나 주인공 루피의 해적단 깃발을 상징으로 채택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루피는 민중을 해방고 부패한 정부와 싸우는 인물이다.
이 운동은 세대적이지만, 다른 세대들과의 전쟁은 아니다.
Z세대가 오래 지속되거나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탄압이 언제든 이길 수 있다. Z세대는 사라질 수도 있고, 제도화되어 정당을 낳을 수도 있으며, 타락해 폭력의 악순환, 테러, 내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미 이 운동이 분노와 격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정치적 출구를 찾지 못할 때 폭동과 약탈 등으로 표출된다는 점이 관찰된다. 그러나 68년 5월처럼, 이 운동 역시 그 긍정적인 면(높은 수준의 기획력, 문화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기본권을 위한 동원력)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에서도 Z세대 운동과의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 몇 년만 보더라도, 생태주의·페미니즘·반인종주의 운동, 노란 조끼 운동, ‘누이 드부(Nuit debout, 2016년 봄, 프랑스 전역을 휩쓴 노동법 개악 반대 사회운동의 이름)’ 운동, 연금 개혁 반대 시위 등이 그러하다.
이 운동들의 사회적 요구는 소득, 정의, 평등, 교육·보건·주거·고용에 대한 접근, 부패 반대 등으로, 이는 Z세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문화적 요구는 환경 문제나 사회적 소수의 정체성과 관련될 수 있으며, 윤리적 측면에서는 남녀 관계의 재정립, 인종차별·반유대주의 반대,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요구한다. 이러한 주제들은 해외의 Z세대 운동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서로 모순되지는 않는다.
현대의 운동들도 Z세대처럼 소셜네트워크를 활용하며, 수평적 자율관리의 논리를 중시하고 지도자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상징적인 대상이나 색깔을 채택하기도 한다. 2013년 브르타뉴에서는 붉은 모자, 2018~2019년에는 노란 조끼가 그러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프랑스에서도 세대적 특성은 확인되지만, Z세대형의 강력한 집단적 행동이 나타난 적은 아직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로부터 나온 요구들이 정당·기구·제도 등에서 다뤄지지 못할 때, 일부는 폭력이나 혁명적·반란적 공상으로, 다른 일부는 무기력과 낙담으로, 또 다른 일부는 권위주의적 해법에 대한 끌림으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스펙트럼의 극단 세력들은 일부 요구를 흡수하거나 왜곡해 자기들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란 조끼 운동은 참여자 담론 속에서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이 차지한 비중이나, ‘이성애 백인 남성 중심’의 성향 때문에 비판받았다. 그러나 본질을 흐트러뜨린 일탈 때문에 그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의미는 행동의 일탈이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더 높은 차원의 의미 속에서 읽혀야 한다.
사회를 바꾸는 일
프랑스의 여러 사회운동과 Z세대 운동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회 유형의 변화를 촉진하는가 아닌가, 그리고 그 변화를 누가 주도하는가에 따라 구분된다.
사회학자 프랑수아 뒤베(François Dubet)의 최근 개념을 빌리자면, 노란 조끼나 연금 개혁 반대 같은 투쟁이 탈산업사회적 운동의 전형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경멸이 아니다. 즉, 자연과 환경에 대한 새로운 관계, 생산과 소비에 대한 다른 관점을 지향하는 운동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그들의 사회적 요구는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지만, 사회의 구조적 전환을 겨냥한 ‘대안적 사회 구상’을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 운동들이 사회를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려는 수준의 기획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물론 사회와 환경을 결합하려는 시도(예를 들어 CFDT와 약 60여 개 단체가 추진한 ‘삶의 권력 협약(Pacte du pouvoir de vivre)’)은 예외적으로 그러한 성격을 지닌다.
이미 언급했듯, 대안 사회에 대한 요구는 반드시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려는 열망은 종종 과거의 매력을 지키려는 욕망과 뒤섞이거나 충돌한다. 노란 조끼들은 엘리트들이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할 때, 자신들은 ‘월말의 끝’을 이야기한다고 비판했다.
우리는 이미 풍부한 분석과 경고, 그리고 민주주의·정치적 대표성·정당·제도·공화국 모델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제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위기 담론에만 매달릴수록 권력 획득에 몰두하고 다음 대선을 향한 집착적 계산에 갇히게 된다.
우리는 흔히 다른 관점을 너무 쉽게 잊는다. 사회가 그 운동들, 즉 저항하는 행위자들에 의해 살아 있고, 갈등적 역동성이 대안적 사회 구상을 그려내는 공간으로서의 관점이다. 알랭 투렌(Alain Touraine)의 사회학이나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 폴 리쾨르(Paul Ricœur)의 정치철학에서 그러한 모습이 드러난다. 이들은 지난 세기의 후반부와 이번 세기의 초기에 걸친 아름다운 지적 인물들이었다. 그 교훈은 시간적으로 멀지 않은 과거, 즉 이 사상가들과 68년 5월에서 비롯되었고, 공간적으로도 멀지 않은 곳, 즉 Z세대에게서 온다.
이 교훈을 성찰하지 않거나, 설령 그 움직임이 미약하더라도 우리가 더 빠르고 더 나은 방식으로 탈산업 시대에 진입하도록 이끌 수 있는 동원들을 과소평가하거나, 더 나아가 그것들을 폄훼한다면, 그것은 오늘날 공동체적 삶의 우경화에 기여하는 일이며, 극단주의와 권위주의가 다시금 발호할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출처] De Mai 68 à la génération Z : ce que les révoltes apportent à la démocratie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
미셸 위비오르카(Michel Wieviorka)는 사회학자로,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연구원(EHESS)과 프랑스국립과학연구센터(CNRS)에 소속된 사회분석·개입센터(CADIS)의 구성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