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이 닫힐 때, 우리는 극장을 등반한다

다큐멘터리 <애국소녀> 홍콩 개봉 4개월의 기록

2024년 11월 27일, 홍콩 구룡반도 야우마테이에 위치한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Broadway Cinematheque)'에서 <애국소녀> 판권 문의 메일이 왔다. 한 달 전 이곳에서 열린 홍콩아시아영화제(HKAFF)에서 <애국소녀> 반응이 좋았고, 작게라도 홍콩 단관 개봉을 추진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여러 복잡한 사정으로 당시 <애국소녀>는 국내 개봉은커녕 국내 영화제 상영조차 못하며, 졸지에 망명처럼 해외 상영만 이어가고 있었다. 감독으로서 부채감에 괴로워하던 시점에 받은 제안이라 더욱 감사했다.

그런데 그 메일을 받고 일주일도 되지 않은 12월 3일, 대한민국에 전례 없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날 가장 많은 연락을 준 이들은 홍콩의 친구들과 관객들이었고,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에서는 "가능한 한 빨리 개봉을 하자"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광장의 운동이 탄압된 홍콩의 현실을 알기에, 개봉 제안은 영화로 한국의 상황에 힘을 보태겠다는 가장 큰 응원처럼 다가왔다.

홍콩 구룡 야우마테이의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 소개 이미지, 1996년 개관. 출처: bc.cinema.com.hk

2020년 홍콩보안법 제정 후 홍콩의 영화 사전 검열 제도는 극도로 강화되었다. 정부 비판적이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하다고 판단되면 상영이 불가능하다. 국가안보를 위협한다고 해석될 가능성만 있어도 검열 대상이 된다. 그런 환경에서 수많은 집회와 투쟁을 담은 <애국소녀>를 공식 개봉하려 한다니, 나는 100% 검열에 걸릴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통상 3~4주 걸리는 심의를 무사히 통과했고, 자막 작업과 개봉 준비를 서둘러 2025년 1월 16일 개봉이 확정되었다. 대만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TIDF)가 붙여준 중국어 제목 '남한 민주 가족의 정치학(南韓民主家政課)'으로 소개되었는데, '민주주의', '정치'라는 단어를 그대로 내세운 용기에 감사했다.

2025년 1월 16일 홍콩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에서 개봉한 <애국소녀> 포스터 

가장 작게 쓰여 있지만, 홍콩 개봉 포스터의 핵심 문구는 아래에 적힌 "1월 16일, 각자의 산을 등반하자(1月16日 各自爬山)"였다. <애국소녀>에는 엄마와 아빠가 등산 중 서로 다른 길을 택해 올라가고, 정상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는 장면이 있다. 여성인권운동가인 엄마는 가파르고 험하지만 빠른 길을 택하고, 공무원 아빠는 조금 길지만 평탄한 길을 선택한다. 서로의 속도와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같은 정상에서 만나겠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포스터 문구는 단순히 <애국소녀>의 한 장면을 변주한 표현이 아니었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의 구호 “동지여 산을 오르자, 각자의 길에서 힘쓰며(兄弟爬山, 各自努力)”를 활용한 것이었다. 그해 홍콩에서는 서로의 선택과 방식의 차이를 인정하며, 같은 목표를 향해 연대하자는 뜻으로 이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거대한 운동 안에서 소수 의견이 묵살되거나, 개인의 희생이 강요되거나, 전략 차이로 분열되는 폐해를 경계하며 나온 말이었다.

그 아름다운 구호가, 국경 밖 <애국소녀>의 장면 속에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홍콩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았다. 홍콩 관객에게 <애국소녀>는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다 보면 결국 쟁취할 수 있다”는 믿음을 건네는 작품이 되었다.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신이 주는 선물이 있다면 아마 이런 순간일 것이다. 우연히 찍힌 한 장면이 민주주의의 희망을 상징하게 되는 일)

홍콩 민주화 운동 구호를 활용한 <애국소녀> 홍콩 개봉 포스터 문구 "각자의 산을 등반하자"
서로 다른 길로 올라 정상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는 <애국소녀>의 한 장면 

그 마음으로 홍콩의 관객들은, 한국이 계엄의 광장에서 싸우던 그 시간에 극장으로 모였다. N차 관람이 이어졌고, 예매율은 꾸준히 유지되었다. 탄핵이 이뤄지기 전까지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가지 않도록 몇 개월을 붙들어 주었다.

서울보다 인구수가 적은 나라의 단 하나의 극장, 홍콩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에서 2025년 1월 16일부터 4월 25일까지 2,249명의 관객이 <애국소녀>를 보았다. 홍콩아시아영화제 당시 관객 315명을 더하면, 총 2,564명의 관객이 이 영화를 지켜준 셈이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서로 다른 싸움을 하고 있던 거 같지만, 홍콩과 한국은 모르는 사이 각자의 산을 오르며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수호 하고 있었다. 그들의 구호가 내 영화의 장면과 맞물리고, 내 영화의 장면이 다시 그들의 포스터 문구가 되는 이 기묘한 순환은 연대가 어떻게 두 나라를 잇는지를 보여주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감독님이 이 글을 보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감사 인사 올려요. 한국에서 흔하고 별 새로울 것 없는 민주화 일상이 홍콩 영화관에서 지속적으로 상영하고 있고 게다가 꽤나 높은 예매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걸 꼭 알려드리고 싶네요. '생활에 스며든 정치', '여러 입장이 있는 정치', 그리고 '옳은 것을 위해 싸울 권리'... 누군가에겐 유토피안인 이 모든 것. 영화로나마 체험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기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홍콩 개봉 당시 작성된 <애국소녀> 관람 후기 (아이디 bgg)

4월 4일 탄핵 이후, 4월 25일 마지막 상영 날 홍콩 관객에게 고별장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계엄 광장의 깃발과 응원봉을 배경으로 온라인 관객과의 대화에 접속했다. 꽉 찬 극장 속 관객들은 한국의 승리를 축하해 박수를 보냈고, 나와 인터뷰했던 기자는 부모님을 극장에 데려왔다며 화면에 손을 흔들었다. 동료 감독은 “역사적 순간을 찍어두겠다”며 한켠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작은 Zoom 화면 속에는 ‘극장’이란 광장이 여전히 뜨겁게 숨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인사를 잇지 못할 정도로 오열했다. 연대의 힘은 국경도, 스크린도 뚫는다는 희망을 다시 꿈꾸게 됐다. “너의 나라의 광장이 닫히면, 우리 나라의 극장을 열겠다”는 그 마음. 극장이 해방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다큐멘터리가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다시 품게 되었다.

인디&임팩트 114호에 소개된 '동아시아 교류 상영 포럼 - SEEAD' 을 기획한 건 홍콩 관객의 연대에 보내는 답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탄핵 이후 2025년 4월 25일 진행된 홍콩 마지막 상영 온라인 관객과의 대화

<애국소녀>는 ‘광장에서 도망가던 나의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이다.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집회에서 제대로 카메라로 연대하지 못한, 소위 말하는 ‘현장 다큐’를 만들지 못하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광장에 치열하게 서지 못하면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마음이 컸고, 그래서인지 <애국소녀>로 상을 받고 과분한 찬사를 받을 때마다 ‘부채감’, ‘기만’, ‘무임승차’라는 단어가 더 무겁게 내려앉곤 했다.

그러나 홍콩에서의 개봉은 내가 놓치고 있던 사실을 보여주었다. ‘현장’과 ‘광장’은 꼭 물리적인 집회 현장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작은 용기를 건네는 곳마다 새롭게 생겨난다는 것을. 광장에 지각해서 자기위안 삼아 뭐라도 찍으려 했던 그 미련한 몸짓이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연대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영웅보다, 울면서 뛰어가고 계속 넘어지며 질척거리는 ‘애국소녀’를 더 사랑했다. 가끔은 뒤로 숨고, 가끔은 힘에 눌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 낼 수 있는 작은 용기의 힘을 믿어준 것이다. 나는 인식하지 못한 사이, 이미 훨씬 넓고 다양한 광장을 열고 있었다.

<애국소녀>(남아름, 2023) 출처: kmdb.or.kr

2025년 5월, 중국 관둥성 선전(深圳)으로 <애국소녀> 상영을 갔을 때 한 감독이 내게 말했다. "'두반(豆瓣)'이라는 중국의 영화 평점 앱에서 <애국소녀>가 핫하다"고. 처음 듣는 앱이었고, 중국에서는 상영한 적도 없었기에 사람들이 어떻게 내 작품을 알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홍콩은 중국 선전에서 고속철도로 15분 거리였고, 상업 한국 영화조차 상영이 어려운 중국에서 관객들이  <애국소녀>를 보기 위해 국경을 넘어 홍콩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까지 찾아갔다고 했다. 감독이 흔들림 속에 찍어둔 기록에서, 국경 너머의 누군가는 자기 삶을 비추는 작은 희망의 불빛을 찾아내고 있었다.

중국의 영화 평점 앱 '두반(豆瓣)'에 올라간 <애국소녀>
중국의 영화 평점 앱 '두반(豆瓣)'에 올라간 <애국소녀> 감상평

다큐멘터리 감독답게, 대자보처럼 글을 마무리하자면 한국에도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 같은 해방의 극장이 필요하다. 그 공간의 이름이 ‘서울시네마테크’가 되어야 한다. 지면의 한계로 11월 28일 개관한 ‘서울영화센터’에 대한 자세한 논쟁은 성명서 링크로 대신한다. 

덧붙이는 말

남아름은 다큐멘터리 <핑크페미>(2018), <순간이동>(2022), <애국소녀>(2023)를 만들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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