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7월 20일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 준공식에 참석해 시찰하고 있는 박정희. 출처: 국가기록원
과학기술, 새마을운동과 함께
한국에는 1960년대 후반 ‘과학기술’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박정희는 “과학기술은 생산증강의 모체”라며 1966년 과학기술진흥법안을 마련하는 등 과학기술을 ‘귀중한 자본’으로 인식했다. 더불어 과학기술은 외화 절약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자주 과학), 방위력 강화에도 중요하다 했다.
문교부는 과학기술 종합계획을 마련했으며 1969년부터 실과교육이 전면 개편됐다. IBRD 차관으로 실업계 학교와 기술 교사 양성기관 등 30개 교육시설 건립도 추진했다.
1970년 4월 정부는 한국과학원(현 KAIST) 설립을 확정했고 박정희가 설립자로 나섰다. 학생들에게는 학비 면제, 장학금 지급, 기숙사 제공은 물론 병역특례라는 특전이 주어졌다. 이어 서울 홍릉 일대에 연구개발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했고, ‘기술개발촉진법’, ‘기술용역육성법’, ‘특정기관육성법’ 등을 만들며 박정희는 ‘과학 대통령’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산업기술 강조와 전폭 지원으로 기초과학 부실, 소수에 집중된 특혜 논란 등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무엇보다 박정희의 과학진흥운동은 ‘정치적’이었다. 1973년 1월 대통령 박정희는 연두 기자회견을 열어 ‘전 국민 과학화 운동’을 제창했다. 새마을운동에 이은 범국민운동이었다. 정부는 ‘1과학자 1마을 결연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도 단위에 ‘새마을 기술봉사단’을 결성하고 농업, 건축, 토목 분야 과학기술자들이 마을을 방문해 기술지도를 했다. 과학자들은 국가 시책에 동원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어떻든 이러한 운동의 결실로 어린이들은 ‘과학자’를 장래 희망 1위로 꼽게 되었다.(1981년 조사 결과)
출발부터 자본에 종속된 한국의 과학기술
1973년부터 기술개발촉진법이 시행됐다. 이 법의 목적은 “산업기술의 자주적 개발과 도입기술의 소화, 개량을 촉진하여 그 성과를 보급함으로써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기술 개발에 투자하는 기업에는 금융 세제 등 전폭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독일이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낸 것은 과학기술 진흥 덕이고 상공회의소가 나서서 거국적인 연구비 모집 운동을 전개한 데서 출발했다며, 한국 정부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서도 기업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초 기초과학 투자는 이뤄지지 않았기에 과학기술이라기보다는 ‘과학적 기술’이라 지적받기도 했다.
1980년 전두환은 국보위 주도로 정부출연연구소(출연연)를 통폐합했다. 난립, 연구 개발의 중복성 등으로 효율성이 낮은 게 문제라는 진단이었다. 이어 민간연구소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정부는 출연연 보유기술 기업화, 산업현장의 공동 요구 기술 연구 개발, 산업기술 인력 확대 공급을 실현해갔다. 출연연 소유 538건 기술과 특허를 기업에 무상양허했고 기업화 개발자금도 지원했다. 정책 출발 당시 내세우기는 “중소기업에 무상양허”였으나, 애초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대기업 지원이 중심을 이뤘다. 출연연은 출발부터 ‘기업 경영’, 산업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는 곳이었고 그 기조가 여전히 유지된 것이다.
1990년대 출연연은 민영화 위기에 직면했다. 과학기술의 대기업 종속성은 더 심해져 수도권 대학 이공계 정원 늘리기도 기업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91년 3월 정부는 ‘제조업 경쟁력 강화대책’을 내놔 30대 재벌그룹 지원에 집중했다.(<한겨레신문>, 1991.3.15.)
세계화를 내세운 김영삼 정부는 연구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을 목적으로 연구과제 중심 운영제도를 도입했다. 이제 연구원들은 대학, 기업연구소의 과학기술자들과 프로젝트 수주 경쟁을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출발부터 자본에 종속된 과학기술은 신자유주의 자본 증식 굴레에 점점 빠져들었다.
밤새 불 꺼질 줄 모르는 연구소, 위험에 몰린 ‘노동자’
1980년대 이전 과학기술 연구자의 노동은 ‘노동’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과 부상, 질병도 은폐됐다. 1976년 원자력연구소에서 실험 중 방사선 과다 피폭으로 사망자가 나왔지만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노동자가 된 이후에도 ‘노동’하다 사망하는 일이 이어졌다. 원자력연구원 실험 장치 폭발은 2020년에도 발생해 청소하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망했다.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 실험실에서도 폭발이 일어나 대학원생 3명이 사망했다.(1999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차량 성능 테스트 중 질식 사고가 발생해 3명이 사망하는(2024년 11월) 등 기업연구소에서도 사망 사고가 최근까지 있었다.
정부가 연구소 안전에 관한 법을 만들기도 했지만, 여전히 과학기술자들의 노동 현장, 학생들의 ‘열정 노동’ 현장은 위험하다. 25개 출연연의 연구실 안전 인력 조사 결과(2021.4.)에 따르면 2,975명이 일하는 한국과학기술원 안전 관리 인력은 4명, 1,077명이 일하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안전 관리 인력은 2명 등 평균 비율로 연구원 794.9명당 2.2명의 안전 관리 인력이 일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것도 겸직하는 경우가 반 이상이다.
밤새 꺼지지 않는 연구소의 불빛 아래 ‘노동자’가 죽어가고 있다.
노조 결성해 노동 현장 개선과 재벌 종속성 문제 제기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기업의 기술자들과 출연연 연구원들이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1987년 12월 4일 전자통신연구소노조 결성을 비롯 화학연구소, 인삼연초연구소, 에너지연구소, 동력자원연구소에 노조가 설립되었다.
석·박사급 연구자들이 노조를 설립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공기업 대기업 노조 설립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연구환경의 변화와 과학기술자 노동조건 변화가 단결 이유였다. 과학기술자 대거 양산으로 처우가 낮아지고 대기업 연구소가 급속 성장했으며 연구 자율성 침해로 노동의 가치 또한 하락했다. 정부의 경영 관리 감독 강화, 연구주제 선정과 예산 집행 자율성이 현저히 낮아졌다.
노동조합으로 뭉친 과학기술 노동자들은 인사정책 개선, 연구소 자율성 확보, 의사결정의 민주화를 요구했다. 그리고 공동 대응을 위해 1994년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과기노조)을 결성했다. 과기노조는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특히 정부출연연구소 정책을 감시·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활동을 했다. 특히 출연연구소의 연구기능을 민간에 이전하고 연구 인력을 30~40% 감축하며 연봉제를 시도하는 데 저항했다. 연구 기술과 지원의 재벌집중으로 이뤄지는 “중소기업의 기술종속과 부의 불평등 편재”를 비판했다.
전환의 시대, 노동의 개입과 통제가 필수
1960년대 이후 민중을 위한 과학기술이 자본 선진국에서 주창된 적이 있다.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자본주의적 통제와 이용에 반대해 자본주의 논리에 따르지 않는 대안적 과학기술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한국에서는 “중립적 과학을 민중의 부와 복지에 복무하도록 하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강조”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방향성 논의는 활발하지 못했다. 과학기술자들은 정부의 산업화 과정에 동원되었고 ‘민중 과학’ 의식을 가질 틈이 없었다.
1980년대 들어서 “지배적인 과학기술 이데올로기를 분쇄하고 민중을 위한 과학기술을 지원하며 제반 사회운동과 연대하는” 운동이 시작됐다. 나아가 과학기술자는 “상품 생산을 위하여 결합 노동을 집단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자”이며, 근본적으로 과학기술 노동은 “자연에 대하여 인간의 존재를 유지해주고 생산력을 발전시켜 역사발전을 추동하는 진보적인 노동”으로 정의했다. 이러한 노동은 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과학기술자 운동은 노동운동일 수밖에 없었다. 이 논리는 과학기술자의 노동자 선언과 노동조합 결성의 토대였다.
1990년대 시민운동의 확대와 더불어 변혁운동과 연관했던 과학기술 운동은 과학기술 정책을 매개로 대정부 협상력을 중심에 두는 운동으로 변화했다. 경실련 과학기술위원회가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운동으로 정의했고, 참여연대의 과학기술 민주화와 시민참여 연구센터 운동 등이 등장했다.
이즈음 과기노조도 ‘참과학기술 실현 정책연구소’ 설립을 추진했다. “전시 위주인 정부의 근시안적 정책과 돈벌이에 급급한 재벌의 입김에 의해 표류하고 있는 과학기술 정책을 바로잡고 출연 기관의 혁신 및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라는 목표를 제기했다. 하지만 연구소 설립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한 고민과 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과학기술은 자본의 주요 생산요소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고, 그야말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면에서 과학기술 자본 규모는 커졌고 대륙·국가 간 과학기술 불평등은 심화했다. 과학기술 결과물의 향유 주체 간 불평등도 심해졌다. 전환의 시대, 노동의 개입과 통제가 없다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 전체의 풍요를 가져올 것이라며 자본이 제시하는 청사진은 사기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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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원은 『전노협백서』 발간을 계기로 노동운동 자료를 모으고 노동자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2008년 이후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역사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가스공사노동조합 30년사』, 『서울지하철노동조합 30년사』 등이 있다. 이 칼럼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