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걱정토탈 걱정브리핑
     
한미FTA. 그 거짓말 범벅의 경제학에 대하여
[한미FTA저지특별기획](10) - '한미FTA와 한국사회' 토론회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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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발언을 시작으로 갑자기 FTA의 성공적인 추진이 국정의 중심과제가 되어버렸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모든 공무원이 추진내용에 관심을 갖고 잘 이해해야 한다”고 독려하고, 외교통상부에만 69명에 달하는 한미 FTA 전담인력이 꾸려지고 각 부처별로 전담인력을 충원하면서(1) 영화인들이 시위를 하든 농민들이 절규를 하든 노동자들이 거리에 나서든 사회 원로들이 우려를 표명하든 아랑곳없이 일사천리에 협상이 착착 진행되어 나가고 있다.

그 와중에 이미 정도를 넘어선 거짓말들이 흉흉한 민심을 더욱 어지럽힌다. “미국의 압력 때문에 추진하는 것은 아니라”는 손사래 정도는 그래도 좀 봐줄 만하다. 부르조아의 세련된 대중정치란 자고로 대중을 기만하고 여론을 조작해내는 그들의 화려한 능력에 있을 진데, “한미 FTA는 우리가 절대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다”(노무현의 인터넷을 통한 국민과의 대화)라든지 “FTA는 우리사회의 양극화를 막아내는 최선의 길이며 양극화 완화와 FTA 성공적 추진이 현 국정의 양날개”(청와대 국정브리핑) 따위를 들으면 한국 부르조아지들의 전혀 세련되지 못한 화술에 짜증을 넘어 그것이 설마 그들의 신념의 발로일 가능성에 대해 기겁하게 된다.

한미 FTA로 고용과 성장, 두 마리 토끼를 잡고 그래서 양극화를 해소한다는--그게 이론적으로 가능함을 보인다면 노벨상 수상감이다--, 이들 FTA 찬성론들의 형편없는 논리적 정합성은 과연 진보진영이 이에 맞서 과학적이며 논리적인 대응을 해야만 할까 생각마저 내심 들 정도다. 사실 국내외의 FTA 찬성론들은 설사 그것이 각종 난해한 통계자료와 지표들, 선전문구들로 치장했다 하더라도 그 그릇된 본질이 쉬이 가려지지는 않는다.

지난 3월 17일 한미 FTA 교수학술단체공대위 주관으로 개최한 <한미 FTA와 한국사회> 토론회를 비롯하여 많은 사회운동 진영에서 고뇌하고 다듬어낸 FTA 반론들은 이러한 FTA 찬성론들이 설파하는 기만들을 폭로하고 향후 FTA 저지투쟁 과정에서 소중히 유용할 수 있는 내용들을 제기하였다. 그래서, 이 글은 토론회 후기로서 짧게나마 FTA의 여러 측면들 중 특히 경제적 효과에 대해 그 전제가 되는 시장주의 경제학의 오도된 믿음들을 비판하고 대응논리의 날을 조금이나마 더 벼리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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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너도나도 먹고살기 힘들 때 위기를 FTA로 돌파하자는 막가파적 정치수사가 어처구니없게도 먹혀드는 것이 비극적인 현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유무역과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뿌리깊은 믿음과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들이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사실 FTA가 한국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다는 관변 및 자본 측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이미 줄기차게 제기되어 온 바다. 3월 17일 토론회에서도 이는 이해영 교수의 발제를 통해 분명히 지적되었다.

이해영 교수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한미 FTA의 경제효과에 대한 분석 보고서들이 (국제) 거시경제학의 CGE(Computational General Equilibrium)모델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수요와 공급이 항상 완전히 일치하게끔 설계돼 있고, 교역당사국은 산업간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에 의해 실업이 메워지는 완전고용 상태를 전제로 하며, 자본이동 또한 직접투자와 투기성 간접투자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등 모델의 기본 전제부터가 잘못되어 있음을 비판하였다. 즉, 부르조아 통계 자료의 신빙성 차원이 아니라 연구 모델의 본질적인 한계라는 것이다. (다음 절에서 상술)

더구나, 이해영 교수에 따르면 미국제무역위원회(USITC) 보고서의 경우 한미 공히 GDP나 고용 등에 큰 영향은 없으나 FTA 체결 4년 후면 '미국은 무역흑자국(한국은 무역적자국)이 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 부르조아 연구소들의 분석도 그 가능한 적자규모를 적게 잡을 뿐 그 경향 자체는 사뭇 부인하지 못한다. 특히 IMF 구제금융 이후 가혹한 시장주의 구조조정기를 거치면서 실물경제지표 만이라도 근사하게 포장해냈던 것이 한국의 수출 증가율임을 기억한다면, 대미 무역적자가 가져올 경제적 충격의 규모를 예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특히, 발제자가 강조하였듯이 이러한 경제적 효과 분석에 있어 중요한 것은 FTA가 이전의 GATT와 달리 상품무역에 대한 관세조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상품, 자본투자, 금융거래, 문화, 서비스, 지적재산권 등 국민경제의 거의 모든 부분을 교역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기에 갈등과 분쟁이 당연히 수반될 수 밖에 없는데 그 해결이 용의치않은 WTO와 같은 틀에서의 합의가 아니라 양국간 그것도 그리 대등하지 않은 한미관계에서의 협상이라는 절차를 통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對한 투자가 직접투자(FDI)에 대비한 간접투자 비중이 2003년 기준 12.4억 달러 대 534억 달러로 압도적으로 주식이나 채권 등 투기적인 자본투자에 몰려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투기장벽의 완화는 그렇지 않아도 가공스럽게 ‘국부’를 흡수해가고 있는 미국계 금융자본에 날개 하나를 더 달아주게 된다.

발제자의 예를 빌리면, “상품교역으로 100억 달러를 벌어도 1000억 달러가 자본거래를 통해 유출되는” 사태가 빚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일부 국내 연구기관에서는 ‘(농업은 망해도) 자동차, 전자, 섬유 산업은 FTA로 수혜를 얻는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는데, 이는 역으로 생각하면 FTA의 그나마 한국 측 수혜자가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등 독점자본들일 것임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나마 수혜업종의 무역수지 역시 농산물 수입증가액을 합치면 결국 적자로 돌아선다는 점에서, 농민들의 민생파탄을 비경제학적 분석영역이랍시며 논외로 하더라도 긍정적으로 진단할 수는 없는 셈이다.

또한, 이날 토론회에서 주목해야 했던 것은 IMF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FTA가 체결될 경우 앞으로 실제 국내 시장의 구조조정의 지렛대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경고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아예 공공연히 ‘국내 침체된 산업에 충격을 주어 활력을 불어넣겠다’고 주장한다. 영화산업도 농업도 경쟁력없는 제반 서비스산업도 각종 공기업들도 제대로 된 경쟁의 카운터파트들을 만나지 못해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침체되어 있다는 식이다. 그래서 태연작약 협상의 테이블로 나가는 정부관료들에게 졸지에 한미FTA는 ‘개혁을 위한 외부충격기제', '경쟁력없는 부문의 도태를 유도하기 위한 장치' 로까지 비춰지고 있다.

IMF 구제금융기 한 사회 인민들의 삶이 어떻게 처참하게 무너지는지에 대한, 우리에게는 트라우마와 같은 아픈 기억이 그들에게는 노도와 같이 밀어부칠 수 있었던 당시 구조조정의 ‘속도‘와 ’파괴력‘에 대한 부러움으로 남아있는지, 'FTA가 다시 우리를 부활케하리라‘는 불우한 믿음으로 여전히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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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날 토론회 자료집에 빼곡한 실제 통계지표들 만으로도 FTA 찬성론이 고개를 들이밀 수 없을 것 같음에도 저들의 FTA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확고하다. 국가간 교역 장벽의 해체가 인민의 복리를 달성한다는 이들의 만만찮게 굳건한 믿음은 추측컨대 중고교 교과서에서부터 배우는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을 시작으로 줄기차게 친시장, 친자유무역 담론을 학교, 언론, 사회 곳곳에서 접한 탓일 터다. (이야기가 잠시 어긋나지만, 기실 서울대 경제학부의 이영훈 교수 등 소위 뉴라이트들이 포진한 ‘교과서포럼’은 현행 중고교 교과서가 지나치게 반시장적이며 반기업적이라면서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2)

소가 웃을 일이다. 중고교 사회/경제 교과서가 반시장적인지 아니면 거꾸로 지나치게 친시장적이어서 문제인지는 그 교과서들을 달달 외워야 했던 우리 세대들이 익히 체험하고 있는 바다. 현 중고등학교 사회/경제 교과서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원리들은 한계효용의 법칙이니, 국민소득삼면등가의 법칙이니 따위들, 편향되어도 한참 오른쪽으로 편향된 시각의 잔재들 뿐이다. 중고교 경제교과서는 ‘교과서포럼’ 말마따나 반드시 개정되어야 한다. 다만 그 방향은 그들과 정반대일 것이다.)

그러나,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은 부르조아 경제학 내에서도 이미 다소 편협한 가정에 근거한 것임으로 한계지우고 있다. 교과서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을 떠올려보더라도, 예컨대 생산요소가 노동 하나밖에 없다고 가정한다든지, 체증하기 마련인 기회비용을 일정한 것으로 설정하여 각국이 한 재화생산에만 완전 특화할 수 있다고 본다든지, 비교우위를 낳는 생산성 차이 자체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규명하지 못한다든지 등의 비판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코자 주류경제학이 내세운 것이 이른바 헥셔-올린(Hecksher-Ohlin) 정리일텐데, 헥셔와 올린은 국가간 생산기술의 차이를 강조한 리카르도와 달리, 각국의 생산기술(생산함수)이 동일하더라도 국가간 요소부존의 차이가 발생하면 재화의 상대가격 차이가 발생하고, 결국 상대가격이 낮은 재화에 비교우위를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하면 노동풍부국은 노동집약재에, 자본풍부국은 자본집약재 생산에 비교우위가 있으니 그에 매진하여 생산하고 교역하게 되면 양 당사자가 이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헥셔-올린 정리를 중심으로 이후 각종 고급수학과 통계학을 이용한 몇몇 이론들이 덧붙여지지만, 비교우위론의 기본 정신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즉 결국 자유무역이 요소가격의 균등화를 가져와 완전고용을 결과하고, 교역 당사자 양국 국민들의 후생을 증진하며, 나아가 개도국의 빈곤과 불평등, 국가간 격차를 감소시킨다는 식으로 주류 국제경제학의 골격이 만들어져있는 것이다. 제 3세계에 대한 식민모국으로서의 반성과 선진국으로서의 인도적 책임을 강조하며 가끔 막대한 원조를 지원하곤 하면서도 꼭 그 조건으로 교역관세 완화나 개도국의 시장개방 따위를 패키지로 끼워넣는 얄팍한 상술의 이론적 근거가 여기에 있다.

결국 자유무역의 확대와 자본이동의 장애물(국경, 규제)의 해체, 양자 혹은 다자간 경제통합의 가속화가 당사자 국민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허황된 이데올로기가 학문의 탈을 쓰고 숱한 테크노크라트들에게 신념화된 채 학계와 재계, 금융권력 및 국제기구 도처에 포진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고교 교과서에 비교우위의 예로 버젓이 실려있는 영국과 포르투갈의 예부터 살펴 보자. 서로 상대적 비교우위가 있는 품목 생산에 집중해서 교역하면, 즉, 포르투갈은 포도주를 집중 생산해서 팔고, 영국은 섬유를 집중해서 수출하면 양자가 이득을 본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론의 그릇됨을 깨우쳐주는 가장 좋은 무기는 현실이다. 영국이 섬유에, 포르투갈이 포도주에 비교우위를 가졌던 것은 실제로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리카르도 등의) ‘순수한’ 경제학이 그렇게 판단한 결과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였다. 즉 양국의 비교우위는 토양의 비옥도나 노동생산성 차이 덕분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영국의 막강한 해군력과 포르투갈의 몰락한 군사력이 빚어낸 정치역사적 결과였던 것이다. (3)

하기에 실제로 포르투갈은 리카르도의 이론을 신봉해서라기 보다는 식민지들을 그나마 유지하기에 필요한 영국으로부터의 ‘보호’를 받고자 영국 섬유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였고 그 대가로 영국은 포르투갈 포도주에 대한 관세를 낮추었다. 그러나, 그 결과 포르투갈의 산업기반은 영국의 섬유와 기타 공산품의 시장 장악으로 붕괴되어 버렸다. 포르투갈의 포도주 수출 역시 경쟁국 프랑스가 포도주 가격을 조금이라도 낮추고 영국과 협상하면, 결국 출혈경쟁을 통해 낮은 가격으로 포도주를 팔아야했고 결국 포르투갈의 농업 전반이 피폐해지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 (4)

그러나, 이 포르투갈 농업의 비극은 국제경제학에서 거의 설명되지 않거나 혹은 뻔뻔스럽게도 포르투갈 정부가 산업간 교역 및 시장질서에 불필요하게 개입한 탓으로 정리된다. 게다가, 이후 영국의 섬유산업이 자신들보다는 훨씬 비교우위가 있는 인도의 섬유산업과 조우하게 되면 입장을 180도 바꿔 철저한 자국시장 보호전략을 취했다는 점에서,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은 과학적 이론이라기보다는 그때그때 정치적 활용도가 달라지는 경제침략의 무기에 가깝다.

그리고 안와르 샤이크(A,Shaikh)의 논의를 빌리면, 비교우위론을 중심으로 한 부르조아 국제경제학은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 명제를 뼈대로 한다. 첫째, 어떤 나라의 무역수지가 적자로 되면 그 나라의 교역조건이 악화된다. 둘째, 교역조건이 악화되면 무역수지가 개선된다. 셋째, 이러한 조정 과정에서 대량의 실업이 발생하지 않는다. (5)

그러나 부르주아 무역이론의 문제점은 이와 같은 세 가지 조건이 이론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교역조건이 그때그때 변해서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 가능했더라면 진작에 미국의 무역수지 개선이 가능했을 것이며 지금껏 무역적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나라들이 없을 터이다.

또한 환율의 움직임이 자동적으로 재빨리 무역불균형을 시정하면 좋겠지만은, 환율이 투기적 금융에 쉽게 영향을 받으며 균형을 이루기보다는 불안정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은 이젠 상식 수준에 속한다. 또한 자유무역의 결과로 수입을 유발한 것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경제의 다른 부문에서 일자리를 즉각 즉각 발견하여 완전고용을 이룰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있는데, 박정희 시절의 무자비한 ‘이촌향도’를 그리워하지 않는 한 그런 유연화된 조정과정의 풍경이 인민의 삶에 있어 결코 아름답지 못함은 물론 그 ‘조정’에 드는 사회경제적 비용이 결코 적지 않을 것임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샤이크나 하트-랜스버그(M.Hart-Landsberg)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들 주류경제학은 자유무역을 통해 제3세계의 노동자들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된다고 부득부득 주장한다. (6) 그러나, 기실 무역자유화로 이득을 얻는 것은 선진국의 기업들 뿐이며, 모든 나라들을 자동적으로 균등, 형평하게 만드는 교역메커니즘은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마르크스를 원용하지 않더라도 자본가들이 애써 부르짖고 있듯이 세계시장은 국내시장과 마찬가지로 자본들간의 경쟁적이며 때로는 국가간 전쟁도 불사하는 유혈적 투쟁의 장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사회과학에서 입에 오르내리는 빈도가 급격히 늘어난 것들이 ‘바닥으로의 경주’와 같은 음울한 단어들이다. 즉, 무역자유화와 자유로운 경쟁의 강제로 인해 당사국의 노동권과 인권이 ’누가 더 형편없나‘를 놓고 경쟁해야 하고(Race to the bottom), 일단 특정 지역이나 산업의 시장을 개방하고 나면 각종 규제완화와 최혜국대우 따위 명분 아래 황폐화된 삶의 질이 순식간에 인접지역이나 산업으로 확산되는(ripple effect) 비극을 가리키는 말들이다. 세계인민의 삶의 질의 하향평준화에 기여하고 있는 부르조아 경제학자들의 자성과 자중이 절실한 지경이다. 그러나, 정녕 자유무역의 당사자들의 후생이 공히 극대화되어 ‘누이좋고 매부좋은’ 관계가 되고자 한다면 말 그대로 당사자들이 ‘진짜 누이-매부’ 사이로 경쟁이 아니라 인도적 호혜와 상호 공존의 원리가 지배할 때나 기대함직할 것이다.

상품재의 다자간 자유무역도 이럴진대, 단순한 교역자유화 차원을 뛰어넘는 FTA를 아름답게 이론으로 포장하는 일은 주류 경제학자들도 난감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자유무역의 허황된 이론과 가정들은 건드리지 않는 대신 일종의 공학적 테크닉들을 들여오기에 이르렀는데, 소위 CGE 모델, 즉 일종의 다부문 일반균형모델을 만들고 각 방정식의 계수들을 추정한 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특정한 제도(FTA)를 도입했을 때 최적균형과 사회후생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측정해냈다. 그러나, 그 기법들의 ‘선진성’이 애당초 잘못된 전제들을 가릴 수는 없으며, 더구나 그 예측결과가 앞서 지적한 것처럼 ‘단기적으로는 대미 무역적자 불가피’로 그리 신통치 못하다는 점에서 FTA에 대한 경제학적 찬성론은 더욱 궁색해진다.

사실 비단 경제학 교과서들을 뒤지지 않아도 된다. 현실 사례들도 충분하다. 간단히 멕시코만 살펴보자. 원래부터가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미국의 ‘내부식민지’였던 멕시코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거치며 경제가 파탄에 빠지고 마뀔라도라(멕시코 북부, 미 접경지역의 수출공단지대)를 중심으로 심각한 노동착취 사태가 발생한 것이 단적인 예다. NAFTA가 체결된 1년 후 멕시코에 경제위기가 바로 닥쳤다든지, 마뀔라도라를 중심으로 일자리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 다수가 처절한 노동조건과 항시적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일뿐더러, 마뀔라도라 이외의 산업 부문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사라졌다든지 등은 이제 남의 나라 이야기로 스쳐 들을 수 만은 없게 되었다.

물론 수치를 좋아하는 경제학적 분석들에 따르면, NAFTA 이후 멕시코의 제조업 생산성 따위는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역시 노동비용 절감과 저렴한 수입자재의 사용 덕분에 기인한 것에 불과하다. 그 뿐인가? 멕시코에서 외국인 투자는 급증한 것으로 실제 나타났고, 한국 정부도 이를 선전용으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공장의 신규 건설 보다는 기존 멕시코 기업을 인수합병하거나 주식, 채권, 선물거래 등 자본시장에서의 투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멕시코 경제를 더욱 초국적 투기자본의 위협에 빠뜨렸다. 한미FTA를 통한 제조업 경쟁력 강화니, 외국인투자 증가 따위에 대한 부르조아 경제학의 장밋빛 전망은 설사 그 시계열 예측치가 맞는 것일지라도 인민의 핏빛 냄새가 나게 마련인 것이다.

혹자는 일전에 NAFTA로 황폐화된 멕시코의 이런 모습을 놓고 “하느님과는 너무 멀고, 미국과는 너무 가까워서 불행한 나라”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간 미국과 가까우면 가까웠지 그리 멀지 않았을 한국 정부도 불행히도 이제 그 거리를 더욱 좁혀 멕시코 인민들이 겪은 수난을 기꺼이 체험코자 하고 있으니 태평양을 넘는 그 사해동포주의에 새삼 감동해야 하는가?

물론, 이러한 경제학적 비판들과는 별도로, 한미 FTA가 한미관계의 특수성 상 비단 경제적 효과에 대한 한미 대자본들의 노림수만으로는 해석할 수도, 해석해서도 안 됨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3월 17일 토론회에서 배성인 교수가 지적한 군사안보적 측면이 그 예일 것인데, “한국은 미국에 시장을 내주고 그 대가로 남한 정권은 남북 평화관계 진척이라는 정치적 업적을, 북한은 경제적 성과 및 대북위협의 완화를 얻는” 시나리오가 존재하고 실제로 그로 인해 사회운동진영 내의 동요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FTA를 계기로 북미관계가 보다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안타까운 믿음은 전략적 유연성을 한 축으로 하는 미국의 동북아 패권전략의 일환으로 한미FTA가 추진되고 있음을 간과한 것이며, FTA가 한반도 평화는 물론 동북아 전체의 불안정성을 위협할 수도 있음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또다른 예로 이날 심광현 공대위 대외협력위원장이 지적한 것처럼 “서로 견원지간이던 정치권력, 경제권력, 언론권력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한미FTA를 밀어 붙이고 궁극적으로 대자본-보수언론과의 합심을 통해 615 정상회담 서울 개최 등을 통한 정권재창출의 정치적 행보의 일환”으로 현 한미FTA를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있음직하다.

따라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FTA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선전과 자유시장주의적 전제, 환상 그리고 시장폭력과 구조조정으로 늘 물질화되는 그 이데올로기적 속성에 대한 논리적 비판과 대안의 마련은 경제, 사회, 노동, 정치, 문화, 통일 등 전선의 모든 영역에서 같이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설사 바리케이드 너머의 상대편이 ‘말보다는 협박’, '협박으로 안 되면 주먹‘을 공공연히 내세운다는 점에서 FTA 반대 역시 말이나 논리만으로는 충분치는 않더라도!



(1) 연합뉴스. 2006년 3월 21일자.
(2)이영훈 외, 2006, [경제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 두레시대.
(3)Editor, 1987(Nov.), "20th Century AD: International Cooperation-A Way Out?", Monthly Review .
(4)김민웅, 2006, “독이 든 술잔?”, 프레시안 기고글.
(5)A.Shaikh, 2003, "Globalization and the Myth of Free Trade". New School University, pp.2-4.
(6)Matin HartLandsberg, 2003, "신자유주의: 신화와 현실”,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노동문제: 1997-2001], 한울.
정상준(서울대) | 등록일 : 2006.03.28
     
  2006.03.29 12:20
사해동포주의에 새삼 감동해야 하는가.........
  2006.03.29 12:20
사해동포주의에 새삼 감동해야 하는가.........
좋은글이라 널리 알리고싶네요.  2006.05.27 17:20
챕터 3의 내용을 네이버 오픈백과에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올리겠습니다. 물론 출처와 저자를 밝히고 쓰겠습니다.
좋은글이라 널리 알리고싶네요.  2006.05.27 17:20
챕터 3의 내용을 네이버 오픈백과에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올리겠습니다. 물론 출처와 저자를 밝히고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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