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故 이정원 [제공 : 한내]

참세상 이야기

윤지연 기자

“죽어 봐야 저승 맛을 안다고, 아직까지는 실감이 안 나는지 관리자들은 실실 웃고 다닌다. 근데 조만간 난리 날끼다. 아주 지긋지긋하다.”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또다시 지옥이 펼쳐질 조짐이다. 그는 저승 맛을 아주 잘 안다. 숱한 주변 사람이 자살로, 의문사로 그의 곁을 떠났다. 그래도 저승사자는 끊임없이 그의 주변을 배회했다. 때로는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노조 탄압이라는 이름으로. 수화기 너머 바람 소리가 거셌다. 크레인 위에서 작업 중이라고 했다. 친한 동료가 목을 맨 그곳에서 그는 매일 일하고 있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의 피바람이 몰아치던 그곳이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5년 전 부산 영도를 들썩였던 희망버스 인파도 유령처럼 사라졌다.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 2012년 12월 목숨을 끊은 최강서 열사의 유언 또한 크레인 굉음 속에 묻혔다. 그리고 한진중공업 휴직자 170여 명은 지난해 2월 모두 현장으로 복귀했다. “내 드디어 복귀 했구마. 보고 싶대이.”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정년을 코앞에 두고 아슬아슬하게 이뤄진 복귀였다. 청춘을 바친 조선소 공장에서 정년을 맞는 게 소원이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복귀자들의 기쁨은 딱 1년간만 유효했다. 올 초, 냉랭한 기운이 또 한 번 영도조선소를 집어삼켰다. 조만간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언비어가 아니었다. 유동성 위기를 겪은 회사는 1월, 채권단에 자율 협약을 신청했다. 채권단은 부동산을 담보로 1300억 원을 우선 지원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인원 감축과 임금 삭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저울 위에 가장 먼저 올라간 것은 노동자들의 생존이었다.

“백 프로 노조 항복 문서인기라.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 아니라 그냥 죽으라는 기다. 우리가 미쳤나. 그렇게 당했는데, 또 당하라는 게.” 채권단은 ‘노조 동의서’를 내밀며 백기 투항을 요구했다. 정리해고를 하든 임금 삭감을 하든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이었다.

“지회는 경영 정상화를 앞당기기 위해 인원 감축, 임금 삭감 등을 포함한 인건비 절감 계획에 대해 충실히 협조하고 이행하며, 동 경영 정상화 작업과 관련해 채권금융기관협의회 또는 주채권 은행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조치를 조건 없이 수용하기로 한다.”(노조 동의서 항목 2)

이와 함께 채권단은 공동 관리가 종료될 때까지 일체의 쟁의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현장의 반발이 거세졌다. 금속노조 소속 한진중공업지회뿐 아니라 기업 노조인 한진중공업노조도 동의서를 거부했다. STX와 대우조선해양과는 달리 한진중공업은 부동산을 담보로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채권단은 노조 동의서에 전례 없이 과도한 내용을 포함시켰다.

“지금도 산업은행 채권단이 현장에 주둔하고 있어. 분위기가 아주 지랄맞다. 쟈들 회사랑 짜고 치는 거 아이가.” 정리해고도 하고, 노조도 길들이고. 현장에서는 회사와 채권단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극약 처방에 나선 것 아니냐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당장 4월 말이면 산업은행은 모든 실사를 마무리 짓는다. 이후 회사와 채권단은 경영 정상화를 위한 MOU를 체결하게 된다. 벌써 차장, 부장, 이사 등 관리자급 20%가 잘려 나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생산직 노동자 700명은 희망퇴직, 나머지 인력은 임금이 30% 삭감될 것이라는 소식이 불안을 증폭시켰다.

회사 측에 채권단이 제시한 노조 동의서 내용의 입장을 물었다. 회사는 지켜봐 달라고만 했다. 한진중공업 관계자는 “협의 단계이고 아직 결론이 난 게 아니다. 4월 말 최종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노조 설득이 가능하다고 보나요?” 회사의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대우조선해양이나 다른 회사도 체결한 내용입니다. 특별히 문제가 있겠습니까. 잘 되지 않겠습니까.”

한진중공업은 복수노조 사업장이다. 2010년부터 노조 파괴 전문 노무 법인인 ‘창조컨설팅’ 자문을 받았다. 곧바로 현장에서 창조컨설팅의 ‘노조 파괴 시나리오’가 가동됐다. 2012년 기업 노조가 설립된 직후 회사는 창조컨설팅에 5500만 원을 입금했다. 약 2년간 한진중공업이 창조컨설팅에 지급한 컨설팅 비용은 총 10억 3400만 원에 달한다. 결국 금속노조 소속 한진중공업지회는 소수 노조가 됐다.

구조조정 투쟁만큼은 힘을 모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회사가 임단협 교섭에서 구조조정을 압박해 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교섭 대표 노조인 기업 노조는 독자적으로 임단협 협상을 진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러다 앉아서 코 베이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커졌다. 결국 지난 3월 1일, 기업 노조 조합원 31명이 지회로 넘어왔다.

“쟈들이 소감을 한마디씩 하는데, 형님들의 진정성에 마음이 흔들렸고, 또 많이 미안하대. 잘못한 만큼 민주노조를 위해 열심 투쟁하겠다고 울먹거리네.” 간만에 그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다가오는 4월.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삶에도 봄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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