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미래학이 감추고 있는 것들

이재현 (문화 평론가로서 모든 중요한 세상사에 끼어들려 한다. 운전면허, 신용카드, TV가 없다)/ 사진 홍진훤

 

이세돌 9단이 구글의 인공 지능 프로그램 알파고에게 패배한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전까지, 바둑의 경우의 수가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많아, 인공 지능이 쉽게 인간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번 대결을 접하면서 나는 묘하게도 황우석 사태와 메르스 사태가 오버랩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개강을 해서 학교에 갔다가 P 선생을 만났다. 이세돌과 알파고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화제는 제4차 산업 혁명에 대한 얘기로 옮아갔다. “제4차 산업 혁명? 그게 뭐요?”라고 내가 묻자 P 선생은 올 1월 다보스 포럼의 주제가 제4차 산업 혁명이었고, 제4차 산업 혁명이란 “정보 통신 기술 융합이 만드는 산업 혁명인데, 인공 지능 로봇, 사물 인터넷, 모바일, 3D 프린터, 무인 자동차, 나노·바이오 기술을 응용한 새로운 제품들이 등장해 산업과 경제, 사회, 정치, 학습, 생활 방식 등이 혁명적으로 바뀐다”는 요지의 설명을 해 주었다.

다보스 포럼은 글로벌 독점 자본가들과 그들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그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현재 및 미래와 관련한 어젠다를 발굴해 세팅하고 전 세계적으로 홍보하는 자리다. 그 어젠다들은 표면적·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간에 본디 새로운 투자, 새로운 상품, 새로운 수요, 새로운 착취 방식 등에 관한 것에 불과하다.

앨빈 토플러는 1980년에 《제3의 물결》이라는 미래학 책을 냈다. 제1의 물결이 농업 혁명, 제2의 물결이 산업 혁명이며, 제3의 물결이 정보 혁명인데 선진국에서는 대략 1950년대부터 정보화 사회가 출현하기 시작했다는 게 요지였다.

또 다른 미래학자인 제레미 리프킨은 2011년에 《제3차 산업 혁명》이란 책을 냈다. 리프킨은 산업 혁명의 구분을 에너지에 두고, 제1차는 증기 기관, 제2차는 전기, 이번의 제3차는 재생 에너지와 인터넷의 결합이라고 설명한다.

이번 다보스 포럼에서 말한 제4차 산업 혁명은 실상, 그 내용이 리프킨의 제3차 산업 혁명과 대동소이하다. 그저 숫자만 하나 더 불린 것에 불과하다. 아무튼 리프킨이 그려 내는 미래상은 거칠게 말해서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았던 그러한 세계로 우리가 조만간에 이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글의 엔그램 검색(books.google.com/ngrams)에 의하면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은 1930대 중반부터 시작해 1980년대 중후반에 피크에 이르는 것으로 그래프에 나타난다. 구글의 엔그램은 구글이 입력해 놓은 책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서 책 이외의 미디어에서 어떠한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제4차 산업 혁명’이란 말이 이미 오래 전부터 쓰이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편, ‘third Industrial Revolution’은 1920년대에 쓰이기 시작해서 1980년대 중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피크를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부르주아 미래학은 기독교 종말론을 대신하는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한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역 건너편인데, 서울역 지하철을 이용하다 보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하루에도 여러 번 듣게 된다. 사후 세계를 선전해 대는 종교적 종말론과 비교해 볼 때, 미래학의 다른 점은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세상이 조만간에 곧 그렇게 바뀐다는 것, 혹은 이미 그렇게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미래학의 핵심 주제는 결국 이노베이션(혁신)과 경쟁이다. 이노베이션과 경쟁의 문제는 개별 자본가들로서도 늘 어렵고, 낯설고, 두려운 것이다. 미래학은 미래학이 펼쳐 보이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혹은 부분적으로 양가적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세계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서 계급 전체로서의 자본가들에게 약간의 긴장감이 곁들여진 안도감을 부여하고, 나머지 자본주의 인구 대다수에게도 미래학이 제시하는 상상적 세계에 편승할 것을 권유한다.

미래학은 늘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하고, 또 기존의 좌우 구분이, 즉 계급적 대립과 갈등이 해체되거나 녹아 없어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미래학은 지금 경쟁에서 뒤처지면 혹은 경쟁을 준비하지 못하면 미래에 살아남지 못한다고 모두를 협박한다. 미래 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바뀌므로 이미 시작된 경쟁적인 이노베이션에서 탈락하면 누구나 루저가 되고 만다는 게 미래학 담론의 핵심이다. 그것은 결국 변형된 종말론이고 은폐된 최후의 심판론인 셈이다.

미래학의 가장 흉악한 효과는 새로운 미래 사회가 마치 자본주의가 아닌 것처럼 거짓되게 믿게 만든다는 점이다. 하지만, 분업, 협업, 기술 발전에 기초한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과 그 성과를 자본가 계급이 독점한다는 점에서, 21세기 자본주의는 18세기 자본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 중추적 에너지가 증기든 전기든 인터넷과 결합한 재생 에너지든 간에 말이다. 또, 이노베이션과 경쟁의 내용과 형식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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