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만

작가.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글을 쓴다.


 

[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 중인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들에 개입하여 역사를 바꾸는 실험 중이다. 지민은 보안 담당자로 부임한 하미강 대위와 함께 가상 현실 속 평양으로 여행을 떠난다.

[인물 소개]

지민 : 인공 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의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

에이도스 :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 지능체.

하미강 : 오메가 섹터의 격리 구역 보안 담당자로 부임한 해병 장교.

 

 

지민은 건축엔 문외한이었지만 김정은의 저택이 주는 인상에 꽤 깊은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미강은 저택 본관으로 가는 통로를 걸으며 지민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장식물과 캐노피의 배치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김정은 저택은 2030년대 중국과 관계가 험악해지면서 자주 구조를 변경했어요. 중국과 미국이 쏘아 올린 정찰 위성들 때문에요. 그것들은 저택에 드나드는 인물을 감시하고 김정은 거소를 파악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죠. 김정은은 서방 언론을 통해 자신의 저택이 촬영된 위성 사진이 공개될 때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보위부는 동선을 은폐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어요. 군인들에게 민간인 복장으로 주변을 돌아다니게 하거나 김정은의 차량과 같은 종류의 차가 저택 주변을 맴돌게 하는 식으로 정찰 위성을 교란했죠. 이 캐노피들도 위치를 절묘하게 잡아 채광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위성 궤도에서 내려다볼 수 없게 설치했어요. 물론, 화상 카메라뿐 아니라 열화상, 적외선 촬영에도 대비하기 위해 캐노피 위에는 열선과 전파 교란 장치가 붙어 있고요.”

“평양, 아니 북한에서 가장 전기를 많이 쓰는 집이었겠네요.”

지민은 쓴웃음을 지으며 데니스 로드먼이 조각된 벽을 만져 보았다. 그 말에 미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아무리 김정은이라 해도 평양의 변변찮은 전기 공급 능력은 어쩔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저택 뒤쪽에 발전 시설이 있어요. 네메시스 팀의 첫 번째 타격 목표 중 하나였어요.”

어느새 저택 본관 입구에 다다른 두 사람은 육중한 철문을 올려다보았다. 미강은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기억이 되살아난 듯 손가락을 튕기고는 기둥 뒤쪽에 있는 수동 조작 레버를 돌려 문을 열었다.

미강은 가상 현실 안에서 자기 허리춤에 권총이 없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꼈다. 지민은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적막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미강은 몸에 밴 습관 때문인지 지민이 자기 뒤를 따르게 하면서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택 안은 생각만큼 호화롭지 않았다. 지민은 금칠을 한 김정은 동상 같은 것을 보게 되나 했는데 그런 끔찍한 장식은 보이지 않았다. 로비에 들어선 둘은 정중앙에 있는 반원형 계단 밑에 놓인 당구대로 다가갔다. 당구대 위에는 다음 게임을 기다리는 듯 공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모두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손님맞이 준비를 모두 마친 모습이었다.

“먼지 하나 없네요.”

지민은 당구대를 손가락으로 쓸어 보고 손을 들어 보였다. 미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간 미강은 본능적으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손에 쥐려고 했다.

“아, 편하게들 계시오.”

지민은 미강의 뒤로 몸을 피하며 에이도스를 불렀다.

“에이도스! 뭐야? 우리 둘뿐이라고 했잖아?”

“아뇨. 그런 말은 안 했는데요. 남쪽의 인물 정보들만 남는다고 했죠.”

가까이 다가오는 노인은 양손에 걸레와 먼지떨이를 들고 있었다. 지민과 미강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두 번은 뉴스에서 보던 얼굴이었다. 노인은 적어도 이 집의 고용인은 아니었다. 미강은 당구채를 한 손에 잡고 등 뒤로 숨겼다.

노인은 들고 있던 걸레를 당구대 위에 올려놓은 다음 바지에 손을 닦았다. 그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밖에 페인트로 낙서를 한 놈들이 아닌가 보군요.”

그는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사람 없는 집에 여성 동무들이 방문하니 간만에 온기가 도는 것 같습니다. 환영합니다. 김정은이오.”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에이도스가 벌인 짓궂은 장난으로 생각했다.

“아, 죄송해요! 정지민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하미강 대위입니다.”

미강은 당구채를 쥔 손을 뒤로하고 다른 손으로 악수했다.

“새삼스럽지만… 와! 진짜 같네요.”

지민의 말에 에이도스가 답했다.

“진짜예요.”

“뭐?”

“지금 지민 씨가 보고 있는 사람은 진짜 김정은의 유전자 정보로 구성한 인물이에요.”

“그걸 어디서 구했어요?”

지민은 미강을 보며 물었다.

“아마 중국이나 스위스의 병원을 통해서겠죠. 치료를 위해 스위스나 체코의 병원을 왕래할 때 국정원이 입수한 자료들이 있었을 거예요.”

“면전에서 그런 소릴 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구먼.”

김정은은 주름진 볼을 긁적이며 투덜거렸다. 지민은 그동안 언론을 통해서 보았던 모습과 눈앞의 가상 현실 속에서 해석된 모습에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더 지치고 왜소해 보였다. 오만하고 종잡을 수 없는 독재자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전복되리라 여겨졌던 정권을 50년 넘게 유지해 온 피로가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는 미강의 손에 들린 당구채를 보고 말했다.

“나를 죽이고 싶다면 그걸로는 좀 성이 안 차지 않겠소? 시간도 오래 걸릴 것 같고.”

“이러면 더 빠르겠지.”

미강은 무릎에 대고 당구채를 부러뜨린 다음 뾰족한 끝을 들어 보였다.

“열세 번째 훈련에서는 주방까지 쫓아가 포크로 찔러 죽인 적도 있어요.”

미강은 지민에게 말했다.

“그때는 정말 무섭더군. 뭐, 죽이건 말건 나중에 마음대로 하고, 일단 내 집에 왔으니 구경이나 먼저 하시오.”

미강과 지민은 그의 손짓에 이끌려 따라갔다. 로비를 지나 계단을 올라 2층 회랑을 걷는 동안 벽에 걸린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 얼굴에 붉은 페인트가 제멋대로 칠해져 있었다. 지민은 그림들을 보고 김정은에게 물었다.

“위원장… 아… 뭐라고 불러야 하지요?”

“편한 대로, 그냥 동무라고 부르시오.”

“좋아요, 동무. 벽에 걸린 그림들은 어떻게 된 건가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 낙서들은 어느 날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난 늘 이곳에 혼자 있었는데, 드나드는 사람들도 없었고.”

지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예요? 처음부터 혼자였다니?”

그는 걸음을 멈추고는 접견실로 보이는 방의 문을 열었다.

“하미강 대위는 진짜 내가 누군지 알 거요. 나에게 수백 발도 넘게 총을 쏘고 수십 번도 넘게 칼질을 했던 사람이니까. 한번은 수류탄을 들고 나를 끌어안아 자폭한 적도 있고.”

미강은 김정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때는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한 얼굴이었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얼굴, 그러나 도무지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세상에….”

미강은 중얼거렸다.

“김 주사님?”

미강은 조심스럽게 열었다. 김정은이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김정은은 스스로 찻물을 끓여 차를 내왔다. 차를 우리는 솜씨나 찻잔을 내려놓는 손놀림은 형편없었다. 젊은 시절의 과식과 폭음이 생활화되어 쉰 살이 넘은 이후로 주치의의 권유에 따라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했지만 여전히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만 거리낌 없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행동하던 태도는 알려진 것보다 상당히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미강은 설명했다.

“네메시스 팀에는 목표물인 김정은 역할을 하는 일종의 대역 배우가 있었어요. 국정원에서 파견 나온 요원이었는데 우리는 그분을 ‘김 주사’라고 불렀죠. 실명이나 신상 정보를 알 수는 없었지만 대북전략과에서 김정은의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을 유추하기 위해 만든 인물이에요. 김정은에 관한 자료들을 최대한 숙지하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먹고 마시고 대화하고 사고하는 인물. 메소드 연기에 빠진 배우처럼 자신을 김정은으로 인식하고 살아야 하는 인물이었죠. 이건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닌 게 이전에 김일성이나 김정일 시절에도 그런 대역 배우가 있었어요. 우리 쪽에서 어떤 작전 계획을 수립할 때 시뮬레이터로 쓰는 거죠. 네메시스 훈련 때는 훈련장에서 우리의 타격 목표가 되기도 했고요.”

지민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었다.

“에이도스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네요. 이곳에는 남쪽의 인물들만 있다고 했으니. 자 그럼 이제 남은 일정은 뭐죠? 김정은과 손잡고 떠나는 평양 투어인가요?”

지민은 김정은이 준 차를 살짝 입술만 적셔 보고는 그대로 내려놓았다. 향이 형편없었다. 김정은도 맛이 없었는지 인상을 찡그리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김정은이 말했다.

“두 분께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저를 이 임무에서 해방시켜 주세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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