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년 이맘때면 이 블로그에서 한 해 동안 내가 서평을 쓴 책들을 되돌아본다. 올해 서평을 쓰지는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독자들에게 흥미로울 만한 책들도 함께 포함하려 한다.
먼저 큰 주목을 받았던 몇 권의 주류 저작부터 살펴보자. 미국에서는 자유주의 주류 매체인 <뉴욕타임스>와 <디 애틀랜틱>에서 각각 활동하는 에즈라 클라인(Ezra Klein)과 데릭 톰슨(Derek Thompson)이 쓴 ⟪풍요⟫(Abundance)가 민주당 계열의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장은 트럼프주의와 그가 남긴 모든 것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저자들이 ‘좌파 경제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공하는 것에 더 가깝다. 저자들은 ‘좌파’가 바이든 행정부에서 노동자들(미국식 표현으로는 ‘중산층’)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행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본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2024년 민주당이 트럼프에게 패배한 이유라고 주장한다.

미국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다시 물건을 만들어야 했다. 기존의 부를 재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abundance)’를 달성해야 했고, 경제는 정체가 아니라 성장을 해야 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부유한 ‘자유주의자들’은 오염 규제, 주택 개발 반대, 도로 건설 중단 같은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자유주의 정책이 자본주의가, 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적 대기업 결합체가 필요한 것을 공급하도록 내버려두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미국이 기본적인 필요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고, 중요한 기술을 도입하는 데서 뒤처지고 있다는 저자들의 진단에는 상당한 진실이 담겨 있다. 그러나 미국이 적절한 가격의 양질의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과도한 규제와 님비주의(‘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 때문이라는 주장은 과연 사실인가. 막대한 학자금 부채 없이 젊은 세대에게 질 높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규제 과잉과 문화적 엘리트주의 때문인가. 미국의 도로와 교량이 붕괴 직전에 놓인 이유가 도시계획 규제와 소송 때문인가.
저자들은 미국의 주택 위기를 크게 부각시키며, 그 원인을 규제와 지역 사회의 개발 반대에서 찾는다. 그러나 그 주장에 일정한 진실이 있다 하더라도, 주택 위기의 진짜 원인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미국에서는 인구 증가와 가구 형성이 둔화되고 있음에도 주택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의 ‘풍요’가 필요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 책은 풍요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계획 규제만을 겨냥할 뿐, 화석연료 대기업, 사모펀드 거물, 건설업체, 그리고 보건·교육의 민간 지배라는 기득권이 만들어내는 진짜 병목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댄 왕(Dan Wang)의 ⟪질주: 미래를 설계하려는 중국의 도전⟫(Breakneck: China’s Quest to Engineer the Future)은 미국과 중국의 차이, 그리고 왜 중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 분석한 책으로 극찬을 받았다. 스탠퍼드대의 우파 성향 후버 역사 연구소 소속 연구원인 왕은, 두 초강대국의 차이가 경제 체제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방해에 능숙한 변호사 중심의 미국 엘리트”와 “건설에 능한 엔지니어 중심의 중국 기술관료 집단”의 대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최소한 과도한 단순화다. 중국이 미국의 경제적 패권을 위협할 정도로 부상한 이유는, 높은 생산적 투자율과 국가가 주도하고 국유기업이 이끄는 산업 전략 덕분이며, 투기적 금융자산과 ‘비즈니스 서비스’에 투자하는 데 치중한 미국 경제와의 대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엘리 프리드먼(Eli Friedman), 케빈 린(Kevin Lin), 로사 리우(Rosa Liu), 애슐리 스미스(Ashley Smith)가 쓴 ⟪세계 자본주의 속의 중국⟫(China In Global Capitalism)은 중국이 미국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방식의 자본주의 경제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중국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이며, 두 나라는 세계 지배를 놓고 경쟁 관계에 있다고 본다. 이는 서구 좌파 내부에서는 다수 견해이지만, 주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두고 갈린다. 하나는 자유민주주의가 없다는 이유로 중국을 ‘공산주의’로 간주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1970년대 후반 덩샤오핑 이후 자본주의를 채택했기 때문에 중국이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기본적으로 후자의 주류 경제학자들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저자들은 중국에 노동자 민주주의가 없고, 억만장자가 존재하며, 거대한 자본주의 부문이 있기 때문에 중국은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이며, 더 나아가 제국주의 국가라는 결론에 이른다. 나의 독자들은 내가 소수 견해를 취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즉 나는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본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적 시장과 기업이 투자를 지배하지 않으며, 자본가들이 정부를 통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2024년 중국에서 백만 부가 팔린 샤오환 란(Xiaohuan Lan)의 ⟪중국은 어떻게 작동하는가⟫(How China Works)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이 책은 중국의 경제적 성공이 자본주의적 진보의 부활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5개년 계획 주기에 의해 추진되는 국가 투자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의 ‘지휘 고지(commanding heights)’, 즉 은행, 전력 생산, 철도, 중공업, 조선, 해운, 대학은 국가의 손에 있으며, 국가는 이윤보다 경제 전반과 국가 이익에 대한 지원을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란은 반대쪽 극단으로 나아가 중국이 사회주의의 ‘초기 단계’에 있으며, 완전한 사회주의로 가는 길 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 경제의 성격을 더 잘 파악하고 있는 쪽이 누구인지는, 프리드먼·린·스미스인지, 아니면 샤오환 란인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이제 다른 마르크스주의 저작들로 넘어가 보자. 캐나다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머레이 E. G. 스미스(Murray EG Smith) 와 팀 헤이슬립(Tim Hayslip)은 ‘변증법적 사고’의 원리를 정교하게 설명하고 대중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 깊이 있고 범위가 넓은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의 전체 제목은 ⟪사고 체계학: 위기의 시대를 위한 비판적·변증법적 사고와 사회주의의 필요성⟫(Thinking Systematics: Critical-Dialectical Reasoning for a Perilous Age and a Case for Socialism)이다.

칼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방식으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미스와 헤이슬립은 여기에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사고를 여러 방식으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그것을 — 대대적으로 — 개선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인간이 자연 세계와 인간 사회, 그리고 이 둘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려면 변증법적 사고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비판적 변증법적 사고의 고유한 패러다임을 저자들은 사고 체계학(Thinking Systematics, TSS)이라 부른다. TSS는 세계를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바라보도록 장려하는 사고 방법과 방식들을 가리키며, 이를 통해 “현재 인간 조건에 대한 객관적 진실을 발견하고, 우리 대부분이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더 큰 세계에 대한 개인적·집단적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수 있는 능력”을 크게 향상시킨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형식 논리, 예컨대 A는 A이고 B는 아니라는 식의 논리가 기초적이며 많은 상황에서 유용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자연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의 문제와 논쟁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내 생각에 그 한 가지 사례는 중국 경제와 국가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어떤 이들은 중국을 자본주의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사회주의라고 말한다. 나는 중국이 그 어느 쪽도 아니라고 본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형식 논리에서는 A는 A이지 B는 아니다. 따라서 중국은 자본주의이거나 사회주의여야 한다. 그러나 변증법적으로, 또는 ‘체계적으로’ 사고하면 중국은 이행 중인 경제, 다시 말해 ‘사이(in between)’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규정도, “자본주의 중국”이라는 규정도 정확하지 않다. 엄격한 형식 논리에 기대면 이는 혼란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변증법적 사고는 이행적 형태(transitional forms)라는 개념을 통해, 불균등·결합 발전이라는 렌즈로 중국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이러한 혼란을 가로지른다.
귀네이 이시카라(Güney Işıkara)와 파트리크 모크레(Patrick Mokre)는 마르크스의 가치 이론이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경향과 변동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해명하는 통찰력 있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의 제목은 ⟪경계에서의 마르크스 가치 이론 – 고전 정치경제학, 제국주의, 생태 위기⟫(Marx’s Theory of Value at the Frontiers – Classical Political Economics, Imperialism and Ecological Breakdown)인데, 제목 그대로 마르크스의 가치 법칙을 이들이 말하는 ‘경계’, 즉 시장과 무역, 제국주의, 그리고 전 지구적 생태 위기의 영역까지 확장해 다루고 있음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이시카라와 모크레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의 가치 이론이 21세기 세계가 직면한 핵심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저자들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제국주의적 북반구로, 무역과 기업 가치사슬을 통해 이전되는 가치의 규모를 측정한 새롭고 의미 있는 실증 자료를 제시한다. 이들은 시장가격, 생산가격, 노동가치 사이의 괴리가 자본 구성과 착취율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국제적 가치 이전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초래한 생태 위기에서 지대와 축적이 수행하는 중심적 역할을 설명하는 데도 결정적이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실천가를 위한 핸드북”이라 할 만하다.
로버트 디스는 중세 독일 농업의 경제와 정치를 다룬 ⟪농민의 힘 – 중세 독일의 농업 경제와 정치⟫(The Power of Peasants – the economics and politics of farming in medieval Germany)라는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은 두 권으로 이루어진, 총 1,700쪽이 넘는 방대한 저작이다.

디스는 주류 경제사와는 달리, 고대와 중세처럼 압도적으로 농업 중심이었던 사회에서 농민, 즉 소농들이 유럽 문명을 진전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문명이란 농업 기술의 개선과 기술 혁신, 다시 말해 농민들의 ‘창조적 천재성’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고, 그 결과 다수 대중의 생활수준과 건강을 향상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농민들은 로마 시대의 노예 소유주나 봉건 영주에 의한 계급 지배의 희생물에 불과한 무기력하고 무정형의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행위 주체였으며, 지배계급의 지배를 깨기 위해 여러 차례 투쟁했다. 비록 성공한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생산에서의 일정한 자율성과 잉여 통제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을 때, 그들은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디스는 1525년 독일 농민전쟁의 원인과 그 패배가 장기적으로 낳은 효과에 대해 기존 연구와는 다른 새로운 설명을 제시한다. 이는 그 사건의 500주년을 맞는 올해에 특히 큰 관심을 끌 만하다.
올해 가장 강력한 책은 윌리엄 I. 로빈슨(William I Robinson) 의 ⟪시대적 위기⟫(Epochal Crisis)다. 로빈슨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 캠퍼스의 교수이며, 다수의 상을 받은 다작의 저자다.

⟪시대적 위기⟫에서 로빈슨은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의 붕괴를 신랄하게 분석했다. 그는 이 위기를 세 가지 요소로 규정했다. 첫째, 무역과 금융에서의 세계화 종식이다. 둘째, 주요 경제권에서의 금융화 심화다. 셋째, “글로벌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재생할 수 있는 능력이 소진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전례 없고 다차원적인 위기”다. 요컨대 로빈슨은 21세기의 여러 모순이 하나로 결합되며, 흔히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라고 불리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의 위기는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 시대의 위기는 자본주의가 자기 재생산 능력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쇠퇴했음을 뜻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에는 공감할 부분이 많지만, 몇 가지 유보점도 있다. 로빈슨은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에 기초한 마르크스의 위기 이론을 거부하고, 마르크스의 이윤성 법칙과 불황에 대한 과소소비 이론을 ‘결합’하려 했던 에르네스트 만델의 절충적 설명을 선호했다. 만델은 자신이 말한 ‘단일 원인론적’ 설명에 반대했다. 로빈슨은 또한 내가 보기에 마르크스를 가장 충실히 계승한 헨리크 그로스만의 위기 이론도 배제하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과소소비 이론 쪽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는 이러한 혼선에 대해 여러 차례 비판적으로 다룬 바 있다. 또 로빈슨은 다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앞서 언급했듯 중국을 자본주의이자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자본주의가 되돌릴 수 없는 실존적·시대적 위기에 빠졌다고 말한 뒤에도, 그 전개에는 여전히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고 로빈슨이 전망했다는 점이다. 그 사이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는 디지털화를 통한 새로운 자본주의적 팽창의 한 국면이 나타나, 성장과 이윤율을 일시적으로 회복시키는 동시에 위기를 추동하는 근본적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초국적 엘리트의 일부가 주장하는 급진적 재분배와 규제 개혁이 사회적 양극화를 완화하고 시장을 확대하며, 자본 내부 경쟁과 국가 간 갈등을 중재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 역시 한시적일 뿐이라고 보았다. 나는 이러한 전망이 매우 그럴듯하다고 보지만, 동시에 에포칼 위기의 최종적 귀결을 이번 세기 후반으로 상당히 미뤄두는 효과를 낳는다고 생각했다.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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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는 런던 시에서 40년 넘게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일하며, 세계 자본주의를 면밀히 관찰해 왔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