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 소련 침공 85주년

오늘은(22)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지 85주년이 되는 날이다.

20년 전 나는 ⟪파괴의 임금⟫(Wages of Destruction)에서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피비린내 났던 이 작전의 초기 몇 달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941622, 3제국은 군사사상 가장 거대한 작전을 개시했을 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전례 없는 집단학살 폭력을 자행했다. 이 작전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유대인 절멸이라는 목표였다는 점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의 진원지였던 동유럽에서 유대인 학살은 고립된 살육 행위가 아니었다. 독일의 소련 침공은 유럽 식민주의의 길고 피비린내 나는 역사에서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영토 강탈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적절하다.

유대인을 절멸하는 일은 볼셰비키 국가를 뿌리째 제거하기 위한 첫 단계였다. 그다음에는 광대한 규모의 토지 정리와 식민화 사업이 뒤따를 예정이었다. 이 계획은 유대인을 절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슬라브인 대다수를 '정리'한 뒤 동방 생존권의 수백만 헥타르에 독일인 정착민을 이주시켜 정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장기적인 인구 재편 계획과 함께, 독일 대경제권의 식량 수급을 확보한다는 '실용적' 필요에 따른 단기적인 수탈 전략도 추진됐다. 그러나 이 '실용적' 목표를 달성하려면 서부 소련 도시 주민 전체를 조직적인 기근으로 죽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스 프랑크와 헤르베르트 바케가 이미 총독부에서 보여줬듯, 히틀러와 나치 정권은 이번 세계대전에서 독일인이 굶주려 패배하는 일만큼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I

1939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직후부터 유대인과 슬라브인을 향한 나치 이데올로기의 집단학살 충동은 대규모 인구 강제이주와 식민 정착 계획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이 계획을 주도한 인물은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였으며, 국가보안본부(RSHA)와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판무관 산하의 실무진이 이를 뒷받침했다. 초기 계획은 현실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유대인 추방과 더 광범위한 인종 재편 및 독일인 정착 계획을 하나의 사업으로 결합하는 사고방식을 SS(나치 독일 친위대) 내부에 뿌리내리게 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의미가 있었다.

앞서 살펴봤듯 동방 식민 정착은 오래전부터 급진적 독일 민족주의의 핵심 목표였다. 여기에 1939년에는 두 가지 현실적 문제가 더해졌다. 먼저 폴란드 영토 상당 부분을 독일 제국에 편입하면서 수백만 명의 비독일계 주민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새로운 과제가 됐다. 동시에 19399월과 10월 소련 및 이탈리아와 체결한 협정에 따라 발트해 연안과 남티롤에서 수십만 명의 독일계 주민이 독일로 '귀환'하게 되면서 이들을 수용할 공간도 마련해야 했다. 이를 위해 SS는 새로 병합한 폴란드 영토에서 유대인 전원을 추방하고, 폴란드인 대다수도 함께 내쫓을 계획을 세웠다. 초기 일반계획 가운데 하나는 유대인 100만 명과 폴란드인 340만 명을 강제 이주시킨다는 목표를 담고 있었다. 현지 주민 가운데 독일 민족공동체에 편입할 수 있다고 판단한 극소수와 충분한 수의 강제 노동자만 남겨둘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처음부터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1940년 초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새로 병합한 지역에서 60만 명을 총독부(GG)로 강제 이주시킬 계획이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했다면 행정은 마비됐을 것이다. 결국 19404월까지 강제 이주한 사람은 261,517명에 그쳤으며, 절반은 유대인, 나머지 절반은 폴란드 농민이었다. 1940년 말까지도 전체 규모는 305,000명 정도에 머물렀다. 유대인을 완전히 추방하는 대신 독일 당국은 이들을 대규모 도시 게토에 집단 수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가장 큰 게토는 우치(Łódź)에 설치됐다. 한편 수백만 명의 폴란드인은 독일 본토나 점령지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1940년 말까지 독일계 이주민 18만 명이 폴란드 농장에 정착했으며, 그 과정에서는 잔혹한 강제 퇴거가 자행됐고 대대적인 선전도 뒤따랐다. 그러나 숫자상 불균형은 여전히 심각했다. 19411월까지 독일로 귀환한 독일계 주민은 53만 명을 넘었지만, 이들이 떠나온 농장과 재산의 가치는 331,500만 제국마르크에 달했다. 그럼에도 이들 대부분은 비옥한 농지를 넘겨받기는커녕 SS가 운영하는 임시 수용소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적 실패가 하이드리히와 SS의 열의를 꺾지는 못했다. 19409월부터는 이른바 독일인 명부를 도입해 본격적인 인종 선별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독일 영토 안에 있던 폴란드인 853만 명 가운데 독일인 명부에 포함된 사람은 100만 명뿐이었다. SS'인종학자'들은 이들을 독일 사회에 동화될 가능성에 따라 네 등급으로 분류했다. 나머지 약 700만 명의 운명은 불확실한 상태로 남았다. 이들의 법적 지위는 '국내 거주권이 제한된 독일 제국의 보호 대상자'로 격하됐다. 1940년 말 독일 농업부는 새로 병합한 지역의 폴란드 농민 상당수가 다음 해 농사를 준비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다. 수확철이 되어도 자기 농장을 계속 소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이드리히가 구상한 계획을 생각하면 이는 충분히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19411월 하이드리히는 새로운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하나는 당시만 해도 주로 폴란드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이었고, 다른 하나는 폴란드인 대규모 강제이주였다. 그의 당면 목표는 폴란드에서 대기 중인 독일계 이주민을 정착시키기 위해 폴란드인 77만 명을 가능한 한 빨리 총독부로 내쫓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수용 능력과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둔 독일군의 수송 수요 때문에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하이드리히는 19415월까지 25만 명을 이주시킬 계획이었지만, SS가 실제로 강제이주시킨 사람은 25,0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SS는 이를 일시적인 어려움으로 여겼다. 독일의 소련 침공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SS 내부에는 열광적인 분위기가 퍼졌다. 소련은 폴란드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규모로 영토와 인구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제공했다. 원치 않는 사람들은 동방의 광활한 황무지로 내몰 수 있었고, 방대한 토지는 독일인 정착민에게 배분할 수 있었다. 마침내 인구와 공간 문제를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1941130일 히틀러는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에 모인 군중 앞에서 2년 전 내놓았던 위협을 다시 반복했다. 무엇보다 영국의 대독 항전이 무의미하다는 점을 강조한 연설 말미에서 그는 "유대인이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는다면 유럽에서 유대인의 역할은 끝날 것"이라는 자신의 '예언'을 다시 선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1939년과 달랐다. 이는 조건부 위협이 아니라 확고한 실행 의지였다. 미국이 독일에 적대적으로 나선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고, 독일은 공식적인 세계대전에 참전했는지와 관계없이 세계적 연합세력과 맞서고 있었으며 곧 대규모 무기대여법의 지원도 상대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는 "앞으로 몇 달, 그리고 앞으로 1년 안에 내가 옳게 예언했다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보다 몇 주 앞서 하이드리히는 유럽 전체의 유대인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할 계획을 마련하라는 첫 지시를 받았다. 독일과 폴란드는 물론 유럽 전역의 유대인을 동방의 황폐한 점령지로 보내 늪지 개발 현장에서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구상이었다. 3월에는 독일 국방군과 SS가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 독일의 통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제거한다는 지침을 마련했다.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은 하이드리히에게 그 대상이 "국가정치보안부(GPU), 정치장교, 유대인 등"을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66일 이 방침은 독일 육군최고사령부가 악명 높은 '정치장교 명령'으로 공식화했다. 이 명령은 소련 국가의 정치 대표자를 모두 즉결 처형하도록 규정했다. 국방군이 지나간 뒤에는 특수기동대가 그 임무를 이어받았다. 3,000명의 경찰과 SS 대원으로 구성된 이들은 5월 하순부터 라이프치히 인근 프레치 국경경찰학교에서 집중적인 이념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들의 1차 임무는 소련 국가기구를 제거하는 것이었지만, 하이드리히는 특수기동대 지휘관들과 거듭 회의를 열면서 유대인이 볼셰비즘을 선동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고, 당과 국가에 봉사하는 모든 유대인을 처형하라고 거듭 명령했다. 그러나 침공이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두 목표의 우선순위는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소련 침공을 앞둔 분위기는 폴란드에서 시작된 더 광범위한 인종 재편 계획에도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었다. 19416월 중순, 독일의 계획 담당 부서들은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 영토의 주민뿐 아니라 총독부 주민 전체를 강제 이주시킬 가능성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폴란드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한 집단학살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1621, 하인리히 힘러는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판무관실(RKF) 실무진에게 독일의 지배 아래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동유럽 전역의 인구 재편 계획 초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몇 주 전에는 SS 독자적인 건설행정기구를 설치하기 위한 추가 예산도 요청했다. 이후 1년 동안 국가보안본부(RSHA), RKF, SS 경제행정부는 긴밀히 협력하며 유대인 정책과 동유럽 장기 식민화 계획을 함께 발전시켜 나갔다. 이른바 '동방 일반계획'의 첫 초안은 RKF 소속 농학자 콘라트 마이어(Konrad Meyer) 교수가 불과 몇 주 만에 작성했고, 1941715일 힘러에게 제출했다. 같은 해 가을에는 마이어의 계획에 따라 대규모 건설사업에 투입할 노예노동대를 운영하기 위한 기지 수용소를 폴란드에 건설하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동시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국가보안본부는 '최종 해결'의 기본 구상과 함께 동방 일반계획의 두 번째 초안도 작성했다. 폴란드와 소련의 수백만 유대인뿐 아니라 서유럽의 상대적으로 적은 유대인 공동체까지 포괄하는 최종 해결 구상은 194112월 무렵 완성됐다. 회의는 이듬해 1월로 연기됐지만, 19421월 반제 회의에서 하이드리히의 제안은 사실상 아무런 반대도 받지 않았다. 반면 유대인이 아니라 폴란드와 소련의 훨씬 더 많은 비유대인 주민을 대상으로 한 동방 일반계획 두 번째 초안은 독일 행정부 내부에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계획 수립은 국가보안본부에서 다시 RKF의 콘라트 마이어에게 넘어갔다. 마이어는 19425월 최종안을 완성했고, 히틀러(Hitler)와 협의를 거친 뒤 7월 힘러의 승인을 받아 향후 SS의 동방 식민화 정책의 기본 청사진이 됐다. 이 계획은 SS 지도부가 동유럽에서 구축하려 했던 사회 질서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설계도라 할 수 있다.

1939년 이후 SS의 모든 영토 계획에서 가장 근본적인 전제는 동유럽을 독일의 생존권으로 편입하려면 현지 주민 대부분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이어의 동방 일반계획은 유대인을 별도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인 제거는 이미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여졌다. 유대인이 인구 구성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 곳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정도였기 때문이다. 마이어의 관심은 무엇보다 다수파인 슬라브계 주민에게 집중됐다. 그는 폴란드에서는 원주민의 80~85%를 추방하고, 이어 우크라이나 주민의 64%, 벨라루스 주민의 75%를 강제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레닌그라드 주변 러시아 지역은 주민을 완전히 비워 둘 예정이었다. 동방 일반계획의 여러 초안은 구체적인 숫자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가장 적게 잡은 추산조차 유대인을 제외한 3,100만 명을 강제 이주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계획이 시행되는 동안 자연 인구 증가까지 감안한 보다 현실적인 추계는 희생자가 4,5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강제 이주된 주민들을 최종적으로 어디로 보낼지는 끝내 명확하게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른바 '소개(疏開, evacuation)'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집단 사망이 발생하리라는 점만큼은 분명했다. 독일이 관심을 가진 사람은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이들뿐이었다. 1942년 말이 되면 논의는 유대인뿐 아니라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까지 포함한 주민 전체를 '물리적으로 절멸시킬 수 있다'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도덕적 고려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남은 것은 오직 실행 가능성뿐이었다.

동방 일반계획이 품고 있던 집단학살의 성격은 1942년 여름 실시한 일종의 '시험 운영'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1942718~19, 힘러는 총독부 유대인을 절멸하라는 최종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오딜로 글로보치니크(Odilo Globocnik)에게 자모시치(Zamość) 지역 폴란드인 전체를 대상으로 실험적인 '소개'를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독일화 정책을 독일 국경 밖으로 본격 확대하는 첫 단계였다. 글로보치니크는 유대인을 모두 추방한 뒤 두 번째 '선별' 작업을 실시했다. 그는 폴란드인을 연령, 성별, 정치적 위험성에 따라 네 집단으로 나눴다. 노동이 가능한 남성과 여성은 반제 회의에서 하이드리히가 유대인에게 적용하자고 제안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서로 분리됐다. 폴란드 어린이들은 가족과 강제로 떨어졌고, 무작위로 60세 이상 노인들과 묶여 새로운 '가족'을 이뤘다. 이렇게 억지로 구성한 가족 단위는 이른바 '은퇴자 마을'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곳은 실제로는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살해한 뒤 비워 둔 정착촌이었다. 독일 당국이 가장 위험하다고 분류한 네 번째 집단은 곧바로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로 보내져 처형되거나 강제노동 끝에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자모시치 실험은 현실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SS가 주민들을 강제 연행하려 하자 거센 무장 저항이 벌어졌고, 이를 진압하려면 수천 명의 독일 경찰과 군인, 보조병력이 추가로 필요했다. 수만 명의 폴란드인은 숲으로 도망쳤다. 결국 1943년 여름 글로보치니크는 이 실험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규모만 놓고 보면 자모시치 실험은 총독부 유대인을 전면적으로 학살한 작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제3제국이 어디까지 집단학살을 확대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크다. 동방 일반계획은 동유럽 주민 전체를 단계적으로 제거하는 시간표를 제시한 계획이었다. 따라서 이 계획 역시 반제 회의에서 하이드리히가 제시한 최종 해결 계획과 마찬가지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SS가 구상한 범죄의 규모를 생각하면, 수천만 명을 죽이거나 강제 이주시킨 뒤 그 빈 땅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지 논하는 일은 마치 현실감마저 잃게 만든다. 그러나 나치 지도부가 자신들의 살인 계획을 어떻게 합리화했는지, 그리고 생존권이라는 개념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이 문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힘러와 그의 참모들은 동방 일반계획으로 비워낸 광대한 지역에 20~30년에 걸쳐 최소 1,000만 명의 독일인을 정착시킬 구상을 세웠다. 독일 민족의 경계는 지금보다 1,000킬로미터나 동쪽으로 이동하게 될 예정이었다. 이 계획을 수립한 SS 실무자들은 자신들이 튜턴 기사단을 연상시키는 구상을 내놓는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결코 시대착오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콘라트 마이어와 그의 동료들도 독일의 동방 식민 개척 전통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중세적 향수로 이해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해석이었다. 총독부의 한 관리가 설명했듯 제3제국은 역사적인 근대화 사명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했다. "실제로 독일 기사단의 지도자들, 무엇보다 마을과 농장을 상업적 원리에 따라 계획하고 건설한 정착 지도자들은 낭만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냉철한 계산가였으며, 상당수가 상업 계층 출신이었다." 이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 공상이나 단순한 이념적 구호도 아니라고 그들은 믿었다. 동방은 생계가 어려운 독일 농민에게 새로운 번영의 터전이 될 것이었다. 동방 일반계획의 설계자인 콘라트 마이어에게도 이는 인구 과밀 상태의 독일을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기회였다. 그는 선언문 성격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내일의 농촌 주민은 어제의 농촌 주민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 우리 농촌 사회에 새 시대는 근본적인 성격 변화를 의미한다. … 전통과 진보, 원시성과 현대성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공동체 의식과 성과를 중시하는 건전한 진보의 이념을 택하는 방식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이는 농민의 미래를 자연보호구역 같은 곳에서 찾는 사람들과 달리, 투쟁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옛 농민'이 사라졌다고 한탄하기보다 제3제국의 새로운 농민을 긍정하고 그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 독일의 동방 식민 구상을 이끈 비전은 중세보다 오히려 미국의 프런티어 이념에 훨씬 가까웠다. 1941년 가을 히틀러는 동방의 미래를 설명하면서 미국을 반복해서 언급했다. 그는 볼가강은 독일의 미시시피강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미국 서부 개척 과정에서 벌어진 유혈 정복은 슬라브인을 몰아내는 독일 정책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선례라고 주장했다. "동방에서는 미국 정복 과정과 같은 일이 다시 한번 반복될 것이다." 우월한 정착민이 열등한 원주민을 밀어내고, 그 결과 새로운 경제적 가능성의 시대가 열린다는 논리였다. 히틀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단언했다. "무한한 가능성의 땅은 미국이 아니라 유럽이 될 것이다.“

동방 일반계획이 그린 미래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독일 경제가 새롭고 대대적인 발전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1940년 가을 독일노동전선이 발표한 대규모 주택 건설 계획이나 전쟁 전 폭스바겐 프로젝트와 같은 맥락에 놓여 있었다. 동방에서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독일의 기술, 자본을 결합해 국민의 생활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기대했다. 이 목표를 가장 간결하게 보여주는 지표는 인구밀도였다. 계획 초기 폴란드의 목표 인구밀도는 1㎢당 100명이었다. 그러나 소련 영토를 동방 일반계획에 포함하면서 목표치는 1㎢당 80명으로 낮아졌다. 이는 1939년 독일의 인구밀도인 133명보다는 훨씬 낮았지만, 당시 프랑스보다는 높은 수준이었다. SS 소속 농업 전문가들도 농민만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은 품지 않았다. 콘라트 마이어가 이상적으로 본 모델은 1930년대 바이에른이나 하노버처럼 농업과 제조업, 서비스업이 균형을 이루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동방 일반계획은 농업 종사자를 전체 노동력의 3분의 1 이하로 제한하고, 나머지는 산업·수공업·상업·공공서비스 분야에 배치하는 인구 구조를 구상했다. 장기적인 독일의 산업구조 변화와 비교하면 SS가 꿈꾼 사회는 중세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1900년 무렵의 독일을 재현하는 데 가까웠다.

독일 본토가 안고 있던 문제를 고려하면, 토지를 어떻게 배분할지는 동방 식민화의 핵심 과제였다. 정착하는 독일인 대부분은 최소 20헥타르 규모의 자급자족 농장을 분배받을 예정이었다. 앞서 살펴봤듯 20~30헥타르 규모의 농장은 독일의 세습농장 제도를 떠받치는 기본 단위였다. 그러나 토질 때문에 30헥타르 이상의 경작지가 필요한 지역에서는 가족농만으로는 운영이 어려웠다. 이런 곳에는 SS 참전용사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영지를 조성하고, 슬라브인을 농장 노동자로 동원할 계획이었다. 폴란드 초기 계획은 전체 농지의 3분의 2를 독일 농민 15만 가구에 나누어 주고, 나머지 3분의 1SS 장교에게 지급할 12천 개의 대농장으로 남겨 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 농민이 여전히 슬라브인의 노동력에 의존해야 한다면 완전한 독일화는 실현될 수 없었다. 그래서 상당수의 독일인 농업 노동자를 이주시킬 수 있도록 별도의 토지도 마련했다. 동방 정착은 1940년 말 리하르트 발터 다레(Richard Walther Darré)가 발표한 독일 농업 구조조정 계획과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초기 계획 문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동방에서 이루어질 건설 사업은 구() 제국의 분할상속 지역을 최종적으로 재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뷔르템베르크와 바덴에서만도 10만 명의 농민과 장인 가구를 이주시킬 수 있다.“

1940년 여름부터 제국식량공사는 콘라트 마이어의 지휘 아래 독일 농촌 전역에 대한 대대적인 실태조사에 착수했다. 조사단은 약 500만 명이 거주하는 4,500개 마을을 표본으로 삼아 모든 농가의 경영 가능성을 평가했다. 앞으로 독일에서 연간 최소 3,000제국마르크의 현금소득을 올리지 못하는 농장은 존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었다. 이는 농가 소득을 전국 중위소득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의미였다. 이를 달성하려면 농장 규모는 최소 18헥타르, 지역에 따라서는 30헥타르 이상이어야 했다. 라인란트처럼 토지가 분할상속된 지역에서는 전체 농장의 30% 이상을 통폐합하거나 폐지 대상으로 분류했다. 지역 주민의 반발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면 그 비율은 50%에 가까웠을 것이다. 조사단은 농장뿐 아니라 농민도 평가했다. 성실하지만 토지가 부족한 농민은 겸업농이나 생산성이 낮은 농민에게서 토지를 넘겨받도록 지원했다. 반대로 '우수한 독일 혈통'의 젊은 가정은 동방 이주에 적극 참여하도록 장려했다. 1942년 완성된 동방 일반계획 최종안은 인구 과밀 상태인 독일 농촌에서 22만 가구를 동방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담고 있었다. 여기에 새롭게 농업에 종사하려는 젊은 부부 22만 쌍과 도시 거주민 최소 200만 명까지 식민 정착민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농업 계획가들의 목표는 토지를 빼앗고 인구를 재배치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고밀도 생존권을 건설하려면 막대한 투자가 뒤따라야 했다. 독일 자본은 독일인 정착민과 함께 대규모로 동방으로 이동해야 했다. 농장에는 충분한 가축과 농기계를 갖춰야 했고, 무엇보다 교통 기반시설을 대폭 확충해야 했다. 도시와 연결되지 않는 현대 농업은 번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이어가 처음 산정한 동방 일반계획의 사업비는 400억 제국마르크였지만, 힘러의 요구로 곧 670억 제국마르크까지 늘어났다. 이는 독일이 1930~1939년 재무장에 투입한 총액과 맞먹는 규모였다. 또한 1933~1938년 독일 전체 투자액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았고, 1941년 독일 국내총생산(GDP)의 약 3분의 2에 해당했다. 새로운 동방 제국에서는 1㎢마다 50만 제국마르크를 투자할 계획이었다. 목표 인구밀도인 ㎢당 80명을 기준으로 하면 주민 한 사람당 약 6,250제국마르크를 투자하는 셈이었다. 여기에서도 과거에 대한 향수는 찾아볼 수 없다. 힘러와 히틀러가 승인한 계획에 따르면 토지 개량과 농업에 배정된 예산은 전체의 36%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교통망, 산업시설, 도시 건설에 투자하도록 책정됐다. 게다가 이것은 국가 예산만을 기준으로 한 수치였다. 민간 기업에서도 막대한 자본이 동방으로 유입될 것으로 기대했다. 제국 정부는 국가예산에서 최소 1567천만 제국마르크를 부담하고, 힘러가 국가판무관 자격으로 운용하는 특별기금에서 429천만 제국마르크를 추가로 투입할 계획이었다. 지방자치단체도 304천만 제국마르크를 부담해야 했다. 이 공공자금은 주로 산림 개발, 사회간접자본, 도로 건설, 농지 개량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독일국영철도도 철도망 확충을 위해 최소 15억 제국마르크를 투자해야 했다. 여기에 산업과 도시 개발을 위해 민간 자본을 중심으로 200억 제국마르크 이상을 추가 조달할 계획이었다. 동방 일반계획이 실제로 실행됐다면 독일 국가자본의 중심축 자체가 동방으로 대규모 이동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막대한 사업비 때문에 동방 일반계획은 강제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최종 해결과 직접 연결됐다. 1942년 여름 힘러는 SS 고위 간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우리가 수용소를 노예로 채우지 않는다면, 여기서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하겠다. 노동 노예로 채우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의 도시와 마을, 농장을 건설하겠는가.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르든 상관없이 그들이 일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진정한 게르만인이 첫 세대부터 정착해 뿌리내릴 수 있을 만큼 식민지를 건설할 자금을 결코 마련하지 못할 것이다." 콘라트 마이어나 SS 건설 책임자 한스 캄러는 이보다 훨씬 완곡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의도는 다르지 않았다. 동방 일반계획 1단계를 추진하려면 총 40~80만 명의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이 가운데 최소 175천 명은 유대인, 폴란드인, 소련군 포로로 충당할 계획이었다. 마이어는 노예노동을 활용하면 건설비를 현금 기준으로 평균 40% 절감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다만 절감액의 절반 정도는 노동자들에게 지급할 최소한의 식량과 의복 비용으로 다시 지출해야 한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는 이 항목을 마치 뒤늦게 떠올린 부기상의 비용처럼 무심하게 계산서 한쪽에 적어 넣었다.

이러한 계획은 SS 강제수용소 체제의 미래에도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 1941년 상반기만 해도 수용소 수감자는 6만 명을 넘지 않았다. 동방 일반계획을 실행하려면 수용 능력을 대폭 확대해야 했다. 이에 따라 SS 건설부서는 1941927일 각각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강제수용소 두 곳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하나는 루블린 외곽의 마이다네크, 다른 하나는 아우슈비츠 인근 비르케나우에 세워질 예정이었다. 연말이 되자 SS는 계획을 다시 확대해 마이다네크에는 125천 명, 아우슈비츠에는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목표를 수정했다. 두 수용소는 원래 소련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계획됐지만, 곧 살펴보겠듯 아우슈비츠의 대부분 수용 공간은 결국 유대인들로 채워졌다. 어쨌든 강제수용소를 강제노동력 공급원으로 활용하는 계획은 이미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19421월 마지막 주, 힘러는 수용소 행정을 담당하는 SS 부서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가까운 시일 안에는 더 이상 소련군 포로를 기대할 수 없게 됐으므로, 독일에서 '이주시키고 있는'(원문 그대로) 많은 유대인 남녀를 수용소로 보낼 계획이다. 앞으로 4주 안에 유대인 남성 10만 명과 여성 최대 5만 명을 수용할 준비를 하라. 앞으로 몇 주 안에 강제수용소에는 중대한 경제적 임무가 주어질 것이다." 그보다 일주일 앞서 하이드리히는 반제 회의를 열어 핵심 관료들에게 SS가 구상한 '최종 해결' 계획을 설명했다. 반제 회의에서 하이드리히는 폴란드와 서유럽 유대인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에 대해 가스실이나 총살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을 동방으로 보내 거대한 건설노동대에 편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적절한 감독 아래 유대인은 이제 최종 해결의 일환으로 동방에서 노동에 투입될 것이다. 노동 가능한 유대인은 남녀를 분리해 대규모 노동부대로 편성하고, 도로 건설을 하며 동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는 자연적인 감소로 사라질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 콘라트 마이어의 동방 일반계획은 무엇보다 새로운 도로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만도 12억 제국마르크가 배정돼 있었다.

II

SS가 추진한 집단학살적 식민주의의 규모는 실로 충격적이며,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역사 연구의 중심 주제가 되어 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실은 독일 국방군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 집단학살 계획을 동시에 실행하려 했다는 점이다. 최종 해결과 동방 일반계획은 무엇보다 현지 주민의 반발을 우려한 SS가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반면 두 번째 계획은 독일 점령 첫 1년 안에 수천만 명을 굶겨 죽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음에도 1941년 봄 이미 국방군, 주요 정부 부처, 나치 정치지도부가 모두 합의한 공식 정책이었다. 이른바 '기아 계획' 역시 비밀 계획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수천 명의 실무자에게 내려간 공식 지침에도 이 계획이 언급됐으며, 무엇보다 개별적인 잔혹 행위의 배경 논리를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련 점령지에서 복무하는 모든 독일군 장병과 행정관은 이 계획의 전략적 논리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지를 얻은 이유는 계획이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독일 지도부 모두가 절실하게 깨달았듯, 독일 국민의 식량을 확보하는 일은 국가 생존의 핵심 과제였으며, 필요하다면 그 대가를 소련 주민이 치러도 된다고 여겼다.

앞서 살펴봤듯 '우크라이나의 곡창'1940~1941년 겨울 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며 작성된 모든 군사·경제 계획에서 핵심 요소였다. 히틀러는 어떤 군사 목표보다도 우크라이나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독일의 곡물 비축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이러한 우선순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194012월이 되자 제3제국의 군사·정치 지도부는 모두 이번이 식량 문제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해라고 확신했다. 이것은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940년 독일이 점령한 서유럽 대부분은 심각한 곡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새로운 사료용 곡물을 확보하지 못하면 1916년의 이른바 '돼지 도살'처럼 유럽 전역에서 가축을 대량 도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국 해상봉쇄로 유럽 대륙이 외부와 단절된 상황에서 서유럽 가축을 먹일 수백만 톤의 곡물을 공급할 수 있는 곳은 우크라이나뿐이었다. 따라서 194012월 초 히틀러가 소련 침공 준비를 공식 명령하자 농업부 차관 헤르베르트 바케는 누구보다 신속하게 움직였다.

바케에게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순간이었다. 그는 1920년대부터 러시아 영토 정복만이 '생활공간이 부족한 민족'이라는 독일의 문제를 해결할 궁극적인 방법이라고 확신해 왔다.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는 병력 300만 명과 말 60만 필로 이루어진 독일 동부군의 식량을 소련 점령지에서 자체 조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케는 우크라이나가 제국주의 선전이 묘사한 것처럼 무한한 곡창지대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는 소련 밖으로 수출할 수 있는 곡물 잉여가 많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농업 생산성이 낮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 도시 인구가 급속히 늘었기 때문이다. 1928년 이후 스탈린은 3천만 명이 거주하는 새로운 도시 사회를 건설했다. 그 도시 노동자들에게 공급되는 식량 역시 대부분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됐다. 베를린의 일반적인 경제 전문가들은 이런 현실을 근거로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더라도 독일이 당장 얻을 수 있는 식량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생산성을 크게 높이려면 수년이 걸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케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우크라이나의 곡물을 즉시 독일로 돌리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소련 도시들을 식량 공급망에서 완전히 끊어내는 것이었다. 스탈린이 10년 동안 키워낸 서부 소련의 도시 주민들은 이제 조직적으로 굶겨 죽여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이 같은 계획이 바케에게서 나왔다는 사실 자체는 놀라울 일이 아니다. 그는 독단적인 인종주의 이데올로그였으며, 발터 다레의 오랜 측근이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개인적인 친구였다. 앞서 살펴봤듯 그는 전쟁 첫해 총독 한스 프랑크와 함께 식량을 집단학살의 수단으로 활용한 경험도 있었다. 오히려 놀라운 점은 베를린 관료조직, 특히 국방군최고사령부(OKW)의 경제 책임자 게오르크 토마스 장군이 그의 제안을 거의 즉각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토마스는 때때로 히틀러의 전쟁에 반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냉혹한 현실주의자였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이 강대국으로 살아남는 일이었다. 그가 국방군최고사령부에서 맡은 임무도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국내 경제가 붕괴해 전쟁 수행 능력이 마비되는 사태를 막는 것이었다. 독일의 식량 사정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바케의 계산에 이의를 제기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더욱이 히틀러는 이미 우크라이나를 반드시 확보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토마스에게는 군사적인 이유도 있었다. 1941년 초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병참 준비에 깊은 우려를 품고 있었다. 병참참모부가 실시한 모의훈련 결과, 독일군이 필요로 하는 보급량과 동쪽으로 이어지는 철도 수송 능력 사이에는 심각한 격차가 드러났다. 가장 낙관적으로 계산해도 연료와 탄약, 식량을 모두 이 병목 구간을 통해 충분히 수송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국방군이 식량과 사료를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다면, 확보한 수송 능력을 연료와 탄약 같은 핵심 군수품에 집중할 수 있었다.

194152, 주요 정부 부처의 차관들은 게오르크 토마스 장군과 함께 점령 정책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 기록은 나치 정권의 관료 문서 가운데서도 가장 충격적인 자료 가운데 하나다. 유대인 문제를 논의할 때보다 훨씬 노골적인 표현으로 독일 정부의 핵심 부처들은 대규모 집단학살 계획에 공식 합의했다. 그 규모는 9개월 뒤 하이드리히가 반제 회의에서 제시한 최종 해결 계획조차 압도할 정도였다. 토마스 장군 비서실은 회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전쟁을 계속하려면 전쟁 3년 차부터 독일 국방군 전체의 식량을 러시아에서 조달해야 한다.

2. 우리가 필요한 식량을 현지에서 가져간다면 수천만 명이 굶어 죽게 되리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3. 가장 중요한 과제는 유지작물과 유박을 확보해 반출하는 것이며, 그다음이 곡물 반출이다.

회의록에는 독일이 굶겨 죽이려 한 인구가 정확히 몇백만 명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논의 전반에 헤르베르트 바케의 구상이 깊이 반영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바케는 소련의 '잉여 인구'2천만~3천만 명으로 추산했고, 이후 몇 달 동안 이 수치는 독일 지도부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기준이 됐다. 6월 중순, 소련 침공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하인리히 힘러는 베벨스부르에 모인 SS 집단지도자들에게 앞으로 벌어질 '민족전쟁'에 대해 연설했다. 그는 이 전쟁이 생사를 건 투쟁이 될 것이며, "군사작전과 식량 문제를 통해 슬라브인과 유대인 2천만~3천만 명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1월에는 헤르만 괴링이 이탈리아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에게 소련 주민 2천만~3천만 명을 굶겨 죽이는 것이 독일 점령정책의 핵심 요소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국방군최고사령부가 점령지 농업 운영을 위해 작성한 이른바 '녹색 지침서(Green Book)'도 바케의 구상을 거의 그대로 반영했다. 이 지침서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사이의 삼림지대를 포함한 서부 러시아의 모든 산업도시와 대도시를 식량 공급원에서 완전히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독일 점령 당국은 전례 없는 규모의 인도주의적 참사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지역에서는 수천만 명이 잉여 인구가 될 것이며, 결국 죽거나 시베리아(Siberia)로 이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점령 당국이 상황을 완화하려는 유혹을 받을 가능성에 대비해, 지침서는 대규모 기아와 독일의 전쟁 수행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흑토 지대의 잉여 식량을 이용해 주민을 기아에서 구하려는 시도는 결국 유럽 전체의 식량 공급을 희생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독일의 전쟁 지속 능력과 독일 및 유럽이 봉쇄를 견뎌낼 힘을 약화시킨다. 이 점은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 (현지) 주민이 독일 행정당국에 식량을 요구할 권리는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다.“

III

수개월 동안 계획만 거듭되던 끝에 1941622, 독일은 마침내 소련 침공을 개시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렇게 광대한 전선에서 그토록 많은 병력이 그토록 치열하게 맞붙은 전쟁은 없었다. 독일 기갑부대가 서부 소련 깊숙이 진격하자, 국방군의 선봉 바로 뒤에서는 SS의 특수기동대가 곧바로 집단학살을 시작했다. 발트해 지역을 담당한 A특수기동대, 벨라루스와 러시아 중부를 담당한 B특수기동대, 우크라이나를 담당한 C특수기동대, 루마니아와 크림반도를 담당한 D특수기동대까지 네 개 부대의 병력은 모두 합쳐도 3,000~3,2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SS는 곧 현지 민병대 수만 명을 동원해 이들을 지원하게 했다. 1941년 가을부터는 무장친위대와 수많은 독일 무장경찰 대대가 추가로 투입돼 특수기동대를 지원했다. 특수기동대의 학살 속도는 자신들이 따라가는 각 군집단의 진격 속도와 마주치는 유대인 인구의 밀도에 따라 달라졌다. 가장 파괴적인 부대는 단연 A특수기동대였다. 이들은 625~26일 카우나스에서 벌어진 참혹한 포그롬을 시작으로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를 거의 완전히 파괴했다. 1942년 봄까지 A특수기동대는 27만 명이 넘는 사람을 살해했으며, 그 대부분은 유대인이었다. 이는 네 개 특수기동대가 살해한 전체 희생자의 절반을 훨씬 넘는 규모였다. 다른 특수기동대와 마찬가지로 A특수기동대도 소총과 권총, 기관총을 이용해 직접 총살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현지 협력자들은 몽둥이나 곡괭이를 휘두르기도 했다. 무방비 상태였고 대부분 저항하지 못했던 주민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학살을 자행하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유대인 집단학살은 순식간에 끔찍한 현실이 됐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 살해는 가해자들에게도 새로운 문제를 안겨 주었다. 1941년 말이 되자 SS는 가해자의 부담을 덜어줄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 가스 밴을 이용한 첫 실험이 이뤄졌다. 당시에는 이것이 가해자들에게 더 '인도적인' 방법이라고 여겼다.하지만 가스 밴은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차량 자체가 임시방편으로 제작돼 성능이 떨어졌고, 러시아에서 독일군 차량이 겪던 것과 똑같은 기동성 문제도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산화탄소 질식은 사람을 죽이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폴란드에서는 보다 효율적인 고정식 가스실을 실험하기 시작했지만, 소련 점령지에서는 1942년 두 번째 학살 작전이 진행될 때까지도 총살이 가장 일반적인 살해 방식으로 남았다. 이 두 번째 작전으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만 유대인 최소 36만 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다. 갈리치아에서는 독일 점령 기간 동안 최대 50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서는 하이드리히가 의도했던 대로 총살과 가스실뿐 아니라 '노동을 통한 절멸'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러한 방식이 가능했던 것은 남부군집단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전략도로를 대규모로 건설했기 때문이다.

아인자츠그루펜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학살과 달리, 바케의 기아 계획은 훨씬 추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독일 당국은 이용 가능한 곡물을 모두 징발하고 도시를 식량 공급망에서 차단하기만 하면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나 체계적인 방치를 통해 대규모 기아를 유도하겠다는 이러한 구상은 현실에서는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었다. 소련 주민들은 가만히 굶어 죽음을 기다리지 않았다. 실제로 식량을 공급하지 않는 것만으로 대규모 희생을 낼 수 있었던 집단은 도시에서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소수집단과 감금된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 도시의 유대인과 소련군 포로였다. 독일군이 점령한 직후, 아인자츠그루펜에게 총살당하지 않은 유대인은 식량시장 출입과 농민과의 직접 거래를 금지당했다. 달걀, 버터, 우유, 고기, 과일처럼 귀한 식품을 구입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중부군집단이 점령한 벨라루스에서는 민스크를 비롯한 여러 도시의 유대인에게 지급된 하루 배급량이 고작 420킬로칼로리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이보다도 적었다. 1941~1942년 겨울 동안 수만 명의 유대인 남녀와 어린이가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기아 계획이 가장 큰 희생을 낳은 대상은 소련군 포로였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만 무려 330만 명의 붉은 군대 병사가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국방군은 포로를 관리해 본 경험이 없었다고 변명할 수는 없었다. 서부전선에서는 불과 두 달 만에 200만 명의 포로를 비교적 무리 없이 관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면서 독일은 소련군 포로를 제네바협약의 일반적인 보호 대상에서 제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포로는 별도로 분리해 처형하도록 지침을 마련했고, 포로들은 민족별로 구분해 수용하도록 했다. 겨울을 보낼 수용시설은 사실상 준비하지 않았다. 그나마 계획이라고는 포로들이 스스로 흙굴을 파고 생활할 것이라는 정도였다. 지급된 배급량도 다른 어떤 포로보다 훨씬 적었다. 아무리 잘 운영되는 포로수용소라도 건강을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더욱이 많은 붉은 군대 병사는 포로가 될 당시 이미 심각하게 쇠약한 상태였다. 부상을 입거나 충격과 탈진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았고,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한 병사도 적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이들은 전투 지역에서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 이동해야 했다. 이런 조건이라면 수만 명 정도의 사망자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통계는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통상적인 소모'를 넘어 국방군이 포로들을 조직적으로 굶겨 죽였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194112월 말 국방군 자체 기록에 따르면 독일은 모두 335만 명의 소련군 포로를 붙잡았다. 그 가운데 연말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110만 명뿐이었고, 실제 노동에 투입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 상태를 유지한 사람은 겨우 40만 명이었다. 사망한 225만 명 가운데 최소 60만 명은 악명 높은 정치장교 명령에 따라 총살당했다. 이 명령은 독일군과 SS 특수기동대에게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소련 시민을 즉결 처형할 권한을 부여했다. 나머지는 '자연사'한 것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그 자연사란 곧 조직적인 기아였다. 194112월부터 19422월 사이에만 약 60만 명이 굶어 죽었다. 만약 역사가 1942년 초에서 멈췄다면, 이 집단학살은 히틀정권이 저지른 단일 범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기록됐을 것이다.

반면 점령한 러시아 도시 주민 전체를 굶겨 죽이는 일은 훨씬 어려웠다. 민스크, 키이우, 하르키우를 농촌 식량 공급망에서 완전히 차단하려면 막대한 규모의 치안 병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선 곳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국방군은 그만한 병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더욱이 점령 행정을 맡은 관리들은 집단학살 정책을 즉시 시행해 주민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적어도 주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시늉 정도는 해야 했다. 독일은 주민들에게 공식 배급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하면 주민들이 식량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실제로는 일정한 식량을 배급하기 시작했다. 이 어정쩡한 타협은 한 국방군 행정관이 놀라울 만큼 태연하게 남긴 기록에 잘 드러난다. "최근 몇 달 사이 업무 중 처음으로, 그리고 점점 더 자주 민간인 식량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러시아인들이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사실상 고려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공식 지침에 따르면 우리는 애초에 그들을 고려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전쟁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 이제는 주민들의 식량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식량을 어디서 마련해야 한단 말인가.“

이 질문은 끝내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했다. 서부 러시아 도시 주민들은 암시장에 의존하거나 도시를 떠나 농촌에 남아 있던 가족에게 돌아가며 가까스로 생존했다. 국방군 역시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침공이 시작된 지 불과 몇 주 만에 독일군 상당수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식량 징발이 됐다. 병사들은 엄청난 양의 곡물과 가축, 유제품을 약탈했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수준으로 식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특히 중부군집단이 주둔한 벨라루스에서는 현지 조달만으로는 모든 면에서 부족했다. 결국 독일 본토에서 대량의 식량을 동쪽으로 추가 수송해야 했다. 하지만 열악한 수송망 때문에 그것마저 충분하지 않았다. 중부군집단이 소련군처럼 극심한 기아를 겪지는 않았지만, 1940~1941년 겨울에는 수송체계가 마비되면서 많은 독일 병사가 며칠, 때로는 몇 주씩 배급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기아 계획은 처음 구상한 만큼 철저하게 실행되지는 못했다. 독일 점령지역에 소련 최대 도시인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가 끝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도시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핵심 목표였지만 국방군은 끝내 어느 곳도 점령하지 못했다. 그 결과 기아 계획은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실현됐다. 전선이 형성되면서 수백만 명의 소련 주민이 주요 식량 공급원과 단절됐고, 그 덕분에 우크라이나의 수확물은 독일이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소련은 남은 농업 생산만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결과 소련 후방에서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과 기아가 이어졌으며, 그 비극은 무엇보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194110월 초 독일군과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포위했다. 250만 명의 민간인과 군인이 거대한 포위망 안에 갇혔다. 소련군의 저항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독일 제18군은 도시 주민을 어떻게 처리할지 여러 방안을 검토했다. 참모들은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도시를 완전히 포위해 "모두 굶겨 죽이는 것", 민간인을 독일 점령지역으로 소개시키는 것, 또는 소련 측 전선 뒤로 피란시키는 것이었다. 결론은 내리지 않았지만, 보고서는 각 방안의 장단점을 놀라울 만큼 냉정하게 정리했다. 레닌그라드 주민을 굶겨 죽이면 많은 공산주의자를 제거할 수 있고, 독일은 수백만 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도 덜 수 있었다. 단점은 선전 효과뿐이었다. 해외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할 것이 분명했다. 또한 제18군은 병사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모습을 지켜보며 받을 정신적 충격도 우려했다. 반대로 주민을 독일 점령지역으로 소개시키면 연합국은 '공포의 이야기'를 선전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새로 400만 명에게 식량을 공급해야 했다. 보고서는 이 점에 대해서도 냉혹하게 적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나오는 주민 상당수는 어차피 굶어 죽을 것이다." 이 역시 병사들에게 큰 충격을 줄 가능성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소련과 협의해 주민을 소련군 점령지역으로 피란시키는 방안도 검토했다. 선전 효과는 있을 수 있었지만, 국방군은 피란 행렬 자체가 엄청난 선전 참사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수만 명의 민간인이 소련 전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논의에서 단 한 번도 검토되지 않은 선택지는 독일이 보유한 식량으로 레닌그라드 주민을 먹여 살리는 방안이었다. 194112월 레닌그라드는 이미 극심한 기근에 빠져 있었다. 성탄절 무렵부터 19421월까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하루 4,000명 가까이 굶어 죽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연구에 따르면 포위가 시작된 뒤 첫 11개월 동안 653천 명의 레닌그라드 시민이 사망했다. 1944년 포위가 끝날 때까지 기아와 기아로 인한 질병으로 숨진 민간인은 70만 명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출처Chartbook 453 22 June 1941 - The 85th anniversary of the invasion of the Soviet Union.

[번역] 이꽃맘

덧붙이는 말

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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