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로운 남성성 해체하기.”
스페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요즘 남자들>이 능청스럽게 가지고 노는 말이다. ‘해로운 남성성(toxic masculinity)’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나는 늘 자동으로 이런 말을 덧붙인다. “이건 남자가 해롭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사회가 남성들에게 강요하는 ‘남자라면 이래야지’하는 남자다움에 대한 기대와 신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이 리뷰는 남자를 욕하려는 게 아니다. 남자다움을 구성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 그 남성성의 구조에 대해 대화하려는 거다.
출처: 넷플릭스
다시 <요즘 남자들>로 돌아가 보자. 주인공은 네 명의 40대 남성들이다. 잘 나가는 방송국 PD였지만 여성혐오적인 콘텐츠를 기획했다가 해고당한 ‘알파 메일’ 페드로, 변호사 애인한테 얹혀살면서도 “남자라면 역시 마초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라울, 이혼한 뒤 “엄마를 잊기 위해서는 열 명의 여자와 자야 한다”고 주장하는 딸이 연결해 주는 ‘틴더녀’와 연쇄 데이트를 하는 산티, 그리고 남성호르몬 저하와 아내와의 권태기로 곤란을 겪고 있는 루이스까지. 드라마는 이들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려고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40대 남성의 성과 사랑, 일, 우정 등을 그린다. 그야말로 21세기 남성판 <섹스 앤 더 시티>라 할만하다. 시즌1의 하이라이트는 그들이 “남성성 해체 강좌”를 들으면서 내보이는 4인 4색의 반응들이다.
내가 이 드라마를 즐기는 동안 전 세계를 강타한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이었다.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5주 이상 1위를 차지하면서 화제가 되었고,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을 잔인하게 살해한 10대 소년 제이미로부터 출발한다. <요즘 남자들>과 <소년의 시간>은 전혀 다른 드라마지만 공통된 질문을 공유하고 있다. 그건 바로 ‘젠더 관계가 변화하고 있는 이 시기에, 남자들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다.
소년의 시간, 남자의 시간
<소년의 시간>은 놀라운 작품이다. 보통은 “누가 범인인가?”에 대한 답을 따라가기 마련인 스릴러의 문법을 버리고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에 대한 답을 탐색하면서, 이 범죄 드라마는 사회 현상에 대한 치열한 보고서로 완성된다.
출처: 넷플릭스
1화에서 제이미를 명확하게 범인으로 특정한 드라마는, 2화부터 본격적으로 “왜?”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2화에서 형사들은 제이미의 학교로 가서 범행 동기와 흉기를 추적하는데,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영국의 무너져버린 공교육 시스템이다. 학교는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구하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방치된 아이들은 쉽게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고, 학교는 그 책임을 외면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공교육의 문제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유일한 원인은 아니라고 말한다. 3화는 체포되어 시설에 수감된 제이미가 심리상담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통해 이 비극을 이루고 있는 또 하나의 레이어로 파고든다. 그것은 바로 ‘해로운 온라인 문화와 인셀’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다.
오프라인 공동체의 기능이 상실된 시대, 아이들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곳에선 어른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가짜 정보를 확산하는 커뮤니티, 거짓말과 폭력을 통해 주목을 끌고 돈을 버는 자들이 활개 치는 SNS, 익명성에 숨어 폭력과 혐오를 쏟아내는 댓글, 그렇게 폭력 산업이 만들어 내고 방치는 콘텐츠의 세계관에 빠져드는 디지털 네이티브들. 드라마는 제이미가 그런 ‘매노스피어’가 만들어낸 남성성의 규범인 맨박스에 갇혀 젠더 관계뿐 아니라 공동체 자체에 대해 왜곡된 이해를 품게 되는 과정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그런 세계에선 여자 아이들 역시 안전하지 않다. 살해당한 케이티는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였다.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 전, 케이티의 맨가슴 사진이 학교에 퍼진다. 제이미는 그 이미지를 친구들과 돌려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손가락질 당하면서 사회적 지위가 ‘손상된’ 케이티에게 작업을 걸면, 그가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고. 하지만 케이티는 취약해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 강하게 나온다. 제이미를 ‘인셀’이라고 모욕하면서, 자신에 대한 부당한 취급에 맞선 것이다. ‘인셀(involuntary celibate)’은 비자발적 독신 남성을 의미하는 온라인 용어로, 여성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해 분노를 느끼고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이들을 지칭하는 멸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제이미는 분노한다. 무엇보다 ‘저 하찮은 여자’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자신을 모욕한 것을 견딜 수 없다. 유해한 디지털 문화는 케이티와 제이미 모두를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만들었고, 결국 비극적인 살인 사건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2010년대 중반부터 스스로를 인셀이라 칭하는 남성들의 무차별 총기 난사와 다중 살인 사건이 사회적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에서도 2023년 신림동 칼부림 사건이 대표적인 인셀 범죄로 분석된다. 당시 범인은 “오랫동안 나보다 조건이 나은 또래 남성들에게 열등감을 느껴왔다”고 말하며, 불특정 다수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인셀 범죄는 단순히 ‘여자와의 관계’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알파 메일’과 ‘베타 메일’ 같은, 남성들 사이에서 등장하는 위계와 경쟁, 그로부터 비롯된 좌절과 분노로부터 출발한다. “진짜 남자란 누구인가?”가 인셀 문화의 핵심에 놓여 있는 셈이다.
<소년의 시간>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4화에 등장하는 ‘축구와 그림’ 에피소드를 통해 언급한다. 4화는 제이미의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감당하기 힘든 불행에 맞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드라마는 제이미가 폭력적인 아버지나 무책임한 어머니 때문에 인셀이 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다만 이 에피소드에서 제이미의 아버지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제이미가 강한 남자가 되기를 바라 축구를 시켰지만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이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였다”고. 그러나 아버지는 축구를 못하는 아들만 기억했지, 그림을 잘 그리는 아들에겐 관심이 없었다. 이미 3화에서 제이미는 그때 느꼈던 좌절감에 관해 이야기했다. 축구에 실패했을 때, 아버지는 그런 자신을 외면했다고.
‘강한 남자’, ‘역시 축구’와 같은 사회적 통념은 남자아이들에게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남자다움의 판타지’에 부응하지 못하고 좌절한 소년들은 스스로를 ‘인셀’이라고 규정하며 더욱 깊은 고립감과 분노에 빠질 수 있다.
남자문제의 시대, 우리에겐 지도가 필요하다
확실히 ‘남자문제의 시대’가 열렸다. 다가 후토시는 『남자문제의 시대』에서 과거에 ‘젠더 문제’는 ‘여자문제’였지만, 이제 현대 일본에서 ‘젠더 문제’는 ‘남자문제’가 되었다고 쓴다. 이건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여자들 역시 혼란에 빠져있지만, 그래도 여자들에게는 ‘페미니즘’이라는 지도가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었을 때,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선배들의 이야기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쌓여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그런 지도가 없다. 예컨대 또 한 편의 영국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티스의 비밀상담소>를 생각해 보자.
드라마는 고등학생인 오티스가 얼떨결에 학교 친구들의 ‘성 상담사’ 역할을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간다. 오티스는 서툰 솜씨지만 진심을 담아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때로는 엉뚱하지만 기발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호르몬이 끓어오르는’ 십 대들의 세계는 예측 불가능한 성적인 문제들로 가득하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런 문제들이 그저 호르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신체, 감정, 관계, 사회적 구조 등이 복잡하게 얽힌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성’이라는 복잡계의 산물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소년의 시간>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떠오른 에피소드가 있었다. 시즌1, 에피소드5다. 넷플릭스가 제공한 줄거리는 이렇다. “수치스러운 사진 유출로 협박받는 학생의 의뢰가 들어온다. 한시가 급한 상황, 범인 추적에 나서는 메이브.” (메이브는 오티스와 함께 상담소를 운영하는 오티스의 오랜 짝사랑이다.) 여기서 ‘수치스러운 사진’이란 질(vagina) 사진이다. 디지털 성범죄자가 겪는 고통과 수치심, 불안, 그리고 이를 방관하거나 조롱하는 주변의 시선 등을 그리는 이 에피소드는 <소년의 시간>이 보여주지 않는 ‘소녀의 시간’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오티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노력한 <소년의 시간>과 달리 로맨틱 코미디이자 페미니스트 판타지물이다. 그동안 쌓여온 퀴어 페미니즘의 담론 위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의미다. 덕분(?)에 이 에피소드의 말미에는 예상치 못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장면이 펼쳐진다. 전교생이 모인 아침 조회 시간에 사진 속 인물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가 등장하자, 피해자의 친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외친다. “그건 내 질(vagina)이에요.” 웅성거림이 시작되자 다른 학생이 일어난다. “아니에요, 그건 내 질이에요.” 다른 학생이 외친다. “나에게도 질이 있어요!” 당황한 교장은 “하나의 질 주인이 여러 명일 순 없다”고 말한다. 얼핏 들으면 그는 옳은 말을 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명백히 틀렸다. 여성을 ‘질’로 환원하여 단순화시키는 사회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여성들은 결국 하나의 질, 그러니까 규범적이고, 정숙하고, 표준적인, 그런 질을 공유하는 셈이다. 와중에 남학생 역시 일어나 외친다. “내 질이에요.” 교장은 다시 말한다. “넌 질이 없잖아.” 하지만 결국 사람을 ‘성기’로 환원하여 판단하는 사회에서, 남성성의 기준으로부터 미끄러져 내리는 남자들에게는 ‘질을 가진 사람’이라는 낙인이 쉽게 찍힌다. 그것이 “계집애 같다”는 말의 어원이다.
능욕을 위한 성범죄가 실패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질을 가진 자들이 서로 손을 잡는 순간, 과도하게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질’은 특별한 것이 아닌, 그저 수많은 신체 기관 중 하나가 된다. <오티스>는 성범죄물의 힘을 박탈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범죄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페미니스트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오티스>의 세계는 <요즘 남자들> 속 중년 남성들이 두려워하는 바로 그 세계가 실현된 시공간이다. 그곳은 대단한 유토피아도, 대단한 디스토피아도 아니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늘 어려움을 겪는다. 설사 페미니스트 유토피아가 있다손 치더라도, 사람은 그곳에서도 길을 잃고 헤맬 것이다. 관계엔 딱 떨어지는 쉬운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서로가 서로를 밟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공간을 만들어갈 수는 있다. 그게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스트 가이드가 제공하는 하나의 가능한 지도다. 남자들에게도 페미니스트 가이드가 필요하다. <요즘 남자들>이나 <소년의 시간>은 그런 지도를 그리기 시작하는 대중적인 작품들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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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은 경희대학교 비교문화 연구소 학술연구교수이며,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프로젝트38의 멤버이다. 저서로는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