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룸을 오가는 사람들: 물류작업자 서안숙 이야기] ① 하루에 4만 보를 걸으며 웨이퍼를 나르는 일

[필자 주] 반올림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입니다.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산재를 신청하면서 기록의 필요성을 절감해 생애사 기록을 시작했습니다. 아픔과 고통뿐만 아니라 개인의 꿈과 행복에 대해 인터뷰했고, 재해경위서, 진술서가 아닌 삶을 담은 글을 적었습니다. 2026년 매월 한 명씩 총 12명의 삶을 전해드리겠습니다. 

21년도부터 25년도까지 하루에 거의 4만 보에 가까운 걸음으로 15라인하고 16라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웨이퍼가 담겨져 있는 통, 그 풉(1)을 집어넣기도 하고 빼기도 하고 하면서 공정 간 이동을 하는 일을 했어요. 지금은 풉을 포장을 해서 반입구에 갖다주는 일을 해요.

라인 동간 이동할 때는 4만 보를 걸어야 하는 거기에 따른 근골격계 질환이 생긴 거고, 지금은 이동 거리는 짧은데 풉을 그 배 이상으로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하니까 여자들도 하루에 거의 한 450개, 500개 가까이 들어서 뺐다가 또 포장해서 또 들어서 옮겼다가 막 이런 일을 하니까 들었다 놨다 하는 이 개수가 배가 되는 거죠.

8.5kg. 8kg에서 8.5kg 정도 (무게의 풉을).

서안숙님은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동조합 명일지회 지회장으로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명일은 공장 안과 밖의 물류, 운송을 담당하는 삼성의 협력업체이다. 노조의 지회장이라니 가졌던 선입견이 있었지만 직접 만나본 서안숙님은 노조의 강성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로 필요한 말을 잘 정돈해서 하시는 서안숙님은 노조에 한평생 관심을 가진 일이 없었는데 어쩌다 노조 위원장이 된 사람이다. 여전히 노조 일이 어렵다는 안숙님은 반올림 병점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경찰서로 집회 신고를 하러 가는 이종란 활동가를 즉석에서 따라나섰다. 집회 신고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말과 함께였다.

라인을 연결하는 브릿지를 바라보는 서안숙 Ⓒ박정원

브라운관 TV를 만드는 일

고등학교 3학년 5월 달에 제가 삼성전자 사업장으로 이제 취업을 나왔어요. 그때는 매탄동 삼성전자 그 부근에 기숙사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삼성 그러니까 주로 하는 업무는 저희는 TV 만드는 파트. 그래서 영상사업부라고 했거든요. 거기서 3년 재직했어요.

저희 학교가 삼성하고 이렇게 결연을 맺어가지고 주로 생산직 사원들을 많이 이렇게 삼성으로 보내는 학교로 그 주변 일대의 지역사회에서는 그렇게 알려져 가지고 삼성에 취직할 목적으로 고등학교를 간 거죠.

어릴 때 꿈이요? 꿈은 뭐 그냥 간호사 일 뭐 이런 거 하고 싶었는데 일단은 집안에 아버지도 많이 몸이 편찮으시고 엄마가 혼자서 가장 일을 하시니까 가장이니까. 저 장녀고 오빠는 있었지만, 오빠는 실질적인 큰 도움은 안 됐고 하니까 그래서 그냥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

안숙은 전라남도 무안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살다가 삼성전자로 곧바로 취업했다. 꿈이랄 것도 구체적으로 꾼 적 없을 만큼 일찌감치 가정 형편을 살핀 결과였다. 삼성전자에서 안숙은 지금은 너무나 옛것이 되어버린, 그러나 당시에는 첨단기술이었던 브라운관 TV를 만들었다.

예전에는 그 기판이 있거든요. 회로 기판이 있으면 거기에 많은 자재들이 막 들어가요. 부품 같은 거. 기판이 이렇게 하나 딱 올려져 있으면은 거기에 TV가 만들어지기 위한 모든 부품들을 기판에다 다 손으로 이렇게 꽂으면서 일을 하거든요. 거기서부터 시작해가지고 그다음에 자재를 꽂으면 그 납땜기라는 게 있거든요. 밑에 이제 납땜하고 그다음에 선 같은 거 다 꽂고, 그리고 브라운관 같은 거. 브라운관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은 평면이지만 예전에 이렇게 좀 큰 거 있잖아요. 그거 뭐 다른 데서 납품돼 오면 조립하면서 본체를 만드는 거죠. 본체를 만들면서 화면 같은 거 색깔 정확하게 선명하게 나올 수 있게 조정하고 하는 일체의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에까지 작업을 하는 거죠.

서머타임과 컨베이어 벨트, 빵빠레

그때는 서머타임이라는 그런 제도가 있어가지고 여름에는 시간을, 1시간을 빨리 해놓고 거의 새벽에, 아침 일찍 나갔다가 거의 뭐 별 보고 퇴근하는, 새마을 운동 같은. 그렇게 일이 업무량이 되게 많았어요. 그래서 그 업무가 너무 힘들고 그래가지고 그래서 오래 못 다녔던 것 같아. 그리고 이제 이쪽(수원)에는 뭐 연고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거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그다음에 이제 교회 다니고 종교 활동 그냥 이렇게 하면서 세월을 보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생소하지만, 한국에서도 서머타임이 시행된 시기가 있었다. 1949~1961년까지 실시된 서머타임은 표준시를 135도로 옮기면서 폐지됐다가 26년 만인 1987년 5월 10일 다시 부활한 바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여러 불편을 초래하며 1989년 완전히 폐지되었다.(2) 서머타임은 시간대를 통째로 옮기는 것이기에 1시간 일찍 출근하면 1시간 일찍 퇴근해야 맞지만, 당시 안숙이 일하던 삼성 사업장에서는 일이 많다는 이유로 퇴근시간은 당겨지지 않았다.

그때는 국내 출하도 있었고 해외 수출하는 라인 팀도 있었고 그렇게 나눠져 가지고 거의 하루에 천 대 정도 생산하고 막 그랬던 것 같아요. 하루에 천 대 생산하면은 그 빵빠레 막 터졌어요. “생산 목표 천 대 달성했습니다!”

하루에 천 대를 하려면 어느 공정에서 지체가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 흐르듯이 이렇게 콘베아(컨베이어)도 있었거든요. 콘베아가 있으면 자기 앞에 있는 거를 빨리빨리 해서 넘기고 그다음 뒷작업 이렇게 할 수 있게 그냥 물 흐르듯이 잘 이렇게 가야 되는데 중간에서 뭐가 잘못됐다 그러면은 전체 인원이 이제 스톱이 되는 거예요.

서머타임과 컨베이어 벨트, 빵빠레는 얼핏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모두 공장의 생산량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고안되고 이용된 장치였다.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시간이라는 요소를 손대서 노동 시간을 늘리고, 컨베이어 벨트를 설치해 노동자들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바삐 움직이게 해 효율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목표 생산량을 달성했을 때는 빵빠레를 터뜨려 감정을 고양시키며 성취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노동자들의 감정과 일하는 속도, 시간 감각까지 통제하는 기업의 모습이 오늘날과 사뭇 다르지만 동시에 비슷하게 겹쳐지기도 한다.

저는 지원 다녔어요. 그러니까 이쪽에 인력이 부족하거나 생산이 차질이 있겠다 그러면 이쪽에 가서 도와주고 또 뭐 다른 데 가서 도와주고 다 했어요. 제가 학교 때부터 신장이 좀 안 좋아 가지고 몸이 막 손발이 붓고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고 막 그런 증상이 좀 있었는데 여기 와서 일을 하면서 몸이 고되니까 그게 더 심한 거예요. 그래가지고 병가를 뺐더니 내 일자리가 이제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여기저기 지원 업무를 다니게 됐던 거지. 일도 힘들었고 그런 것 때문에 회사를 그냥 딱 3년만 다니고 이제 퇴사를 하게 된 거죠.

건설회사, 부동산, 마트를 거쳐 다시 삼성으로

퇴사하고는 컴퓨터를 배워서 건설회사 일을 조금 하다가 22살 때 결혼을 해버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나의 도피처를 찾아간 것이다. 어쩌면 모르지 않았겠지만, 결혼하고서도 일은 멈출 수 없었다.

결혼하고서 남편이 이제 삼성전자 다녔는데 그때 한참 IMF 전, 아무튼 그 정도 시기였어요. 그때 벤처가 또 열풍이었어요. 정부에서 어떤 아이템을 가지고 창업을 하면 지원해 주고 하는 그런 벤처 열풍이 있어가지고 남편이 상사하고 같이 회사를 차려서 운영을 했었는데 그때는 방송국에 납품하는 모니터였거든요. 거기가 미디어 사업부였었는데 KBS 방송국에도 납품하고, SBS나 몇 군데, 그때 SBS가 새로 생겼나. 아무튼 그래가지고 방송국에 납품하는 미디어 모니터 그거 할 때 저도 거기 잠깐 근무하기도 했었어요. 거기도 한 3년 다녔나.

그러다가 제가 이제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 가지고 그래서 부동산을 조금 했죠. 아파트에 애들 키우면서 살다 보니까 동네 옆동의 언니를 알게 돼서 그 언니가 본인이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는데 ‘공부 한번 해봐도 괜찮을 것 같아’ 해서 그래서 그냥 권유해서. 8년 정도 했어요.

제가 부동산 일이랑 마트 일을 또 병행을 했었거든요. 그러면서 그 마트 사장님을 알게 돼 가지고 그 사장님 거 그냥 조그마한 슈퍼를 인수를 받았어요. 그래서 여동생하고 그 마트 3년 하면서 이제 권리금 작업해가지고 다른 편의점으로 우리 슈퍼를 넘겼거든요.

아침에 일찍 문을 열어야 되고, 그리고 들어오는 제품도 다양하고 그거 관리해야 되고, 여동생하고 둘이 했으니까. 저는 이때는 애들이 다 컸으니까 애들이 알아서 생활하고 했고 거의 가게에서 생활을 했어요, 저 혼자. 아침에 일찍 문 열고 밤 한 12시까지 장사하고 슈퍼에 딸린 또 조그만 방이 하나 있었거든요. 주로 거기서 이제 생활하면서 가끔 여동생 오면 잠깐 집에 가서 반찬을 해놓고 온다든가 뭐 그런 식으로 그렇게 해서 한 3년을 거기서 생활을 했어요.

명일에서 일한 이력만 알고 갔으나 듣게 된 것은 쉴 새 없이 이어진 노동의 향연이었다. 부동산과 마트 일을 동시에 하고, 잠시 여동생이 마트를 봐줄 때는 집으로 가 가사노동을 했다. 한 번에 하나씩, 이 일에서 저 일로 차례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여러 노동이 중첩되어 있었다. 자기 생활이랄 것 없이 일하다 돌고돌아 가장 처음 일했던 삼성의 사업장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 것은 고용보험 센터의 소개 때문이었다.

편의점 접고 나서 제가 실업급여를 받았거든요. 실업급여 받으면서 고용보험 센터에 나는 뭐 이 정도 급여에 이 정도는 내가 수입이 돼야지 생활을 할 수 있으니 이 정도 되는 회사가 있으면 나를 소개해 달라 그래서 그거 접수를 해놨는데 명일을 저한테 소개를 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명일 이력서 내고 그렇게 해서 취업하게 된 거예요. 그때가 21년도. 제가 11월 달에 입사했거든요.

명일에 들어와 클린룸 안과 밖을 오가며 한없이 걷고, 무거운 풉을 들고 나르는, 끝이 잘 가늠이 되지 않는 쳇바퀴 같은 노동을 시작했다. 안숙의 인생에서 노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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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풉(FOUP, Front Opening Unified Pod). 웨이퍼를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하게 이송·보관하는 밀폐형 전용 용기.

(3) 임지영, “1987년 서머타임제 실시”, 경향신문, 2011.05.09

덧붙이는 말

임다윤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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