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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영화협회와 함께하는 온라인독립영화상영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온라인 영화 상영회Ⅱ]
4월 9일

: 김태일
: 이상엽
: 이지상
: 125분
: 2000년 10월




이 작품은 6,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발생한 1,2차 인민혁명당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혁당 사건은 6,70년대 10년의 시차를 두고 중앙정보부에 의해 1,2차 사건으로 발표되었다. 1차 인혁당 사건은 64년 8월14일, 북한과 연계된 남한 최대의 지하당 사건으로 발표되었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하자마자 중앙정보부를 설치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하기위한 작업을 진행하였고, 일본과의비밀협상을 추진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정보부는 남파된 북한 간첩과 연계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고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잠재우며 불안정한 권력을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보부의 무리한 짜맞추기 수사에 반발한 공안검사들의 사표파동과 고문 사실 폭로 등으로 구속된 관련자들은 기소내용과는 턱없이 가벼운 형을 받고 모두 풀려났다.

삼선개헌 이후 박정희는 종신집권을 다지기 위한 유신헌법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1974년 4월 학생조직이 전국적으로 연결되면서 동시다발 시위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포착되어 많은 대학생들이 구속되는 '민청학련 사건'이 만들어졌다. 정보부는 학생의 배후에 과거 10년전 1차 인혁당 관련자들과 과거 혁신계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을 발표하였다. 무리한 구속수사와 잔혹한 고문, 재판기록 변조 끝에 21명의 인혁당 사건 관련자중 8명을 1년뒤인 1975년 4월9일 대법원 판결이 난 15시간뒤인 새벽 5시쯤 사형을 집행했다. 나머지 관련자들은 10여년의 옥고를 치른 끝에 이후 모두 석방되었다.

그로부터 24년후, 소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대구 유가족 세분 어머님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앞 유가협 농성 싸움을 422일간 쫓아가고 있다.

6,70년대 대표적 공안사건 중의 하나인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은 여전히 쉽지않은 문제다. 이들을 때려잡았던 국가보안법은 현실에 엄존하고 있고, 굴곡진 한국현대사에 대한 평가는 아직 제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은 해방이후 통일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선상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진상에 다가갈 수 있다. 이는 인혁당 사건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어느 유명 외국영화감독이 한국은 영화의 보고라고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굴곡많은 역사를 가진 국가이자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받았기에 영화적인 작품 소재 꺼리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이 감독의 이야기일 것이다. 영화적 소재 꺼리를 떠나 한국의 분단 현대사는 營?자체로 극적인 요소를 더 많이 갖고 있다.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45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지낼 수 밖에 없었던 사회, 특히 반공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던 게 현실이다. 분단으로 인해 치뤄야 했던 아픔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인혁당 사건을 작품화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고, 해보고 싶었던 내용이라 덥석 작품 하겠다고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순진한 생각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처음 인혁당 사건을 접하면서는 드러난 사실 뿐만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것을 밝히는 '진실찾기'에 주안점을 두었다. 여러 가지 사실들을 통해서, 정부가 발표해 왔던 일련의 북한과 연계된 대규모의 간첩단 사건이 한편으론 나름의 우리사회의 한축을 이루는 움직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나의 거창한 의미 찾기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기초자료 조사가 끝나고 생존한 관련자 분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관련자들은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고 했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살아있고 잘못하면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등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결론은 세상이 지금보다 좋아져야만 가능하다는 말씀이었다.
인혁당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간첩사건인가 민주화운동인가 하는 두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중앙정보부는 뭔가 정부를 전복하려는 북한과연계된 지하운동체라고 하고, 관련자분들은 고문과 과거 전력을 문제삼아 조작한 사건이라는 서로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관련자 분들은 국가보안법이 엄존한 지금 상황에서 민주화운동이었다고 하면 과거 중앙정보부의 발표를 일부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이었다고 한다면 사형당한 사람들은 개죽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의 선택이 현재로서 부담스러운 것이고 관련자들끼리도 이 문제에 대해 이견이 있다고 했다. 이런 속에서 차라리 답변을 안하는 것이 낫다는 것과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렇게 보낸 일년이 넘는 작업기간은 내내 나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거의 1년동안 인터뷰를 요청한 끝에 답변을 한 관련자중 한 분은 인혁당이 실제 했느냐 안했느냐보다는 그들이 추구했던 바, 바랬던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파악하는게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진실을 밝히는 작업, 그것도 몇십년이 지난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은 어쩌면 인혁당사건의 실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없이 이해될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진실을 인정할만한 사회적 여건이 조성 되어야 가능해 진다는 말이다.
작업 당시에 이 얘기를 듣고 관련자분들의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이었지만 어쩌면 누구보다 진실이 밝혀지기를 간절하게 염원하는 분들이 바로 당사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인혁당 사건에 대한 내용은 관련자들을 통하지 않고는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자료라고는 중앙정보부의 사건발표와 판결문 뿐이고 그밖에는 잡지에 언급된 것이전부였다. 당시에는 이름도 사진도 글도 남기지 않고 활동했던 때라 인혁당 사건과 관련하여 남아있는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기 어려운 여건에서 오히려 실체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의미 찾기에 초점을 두는게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또 하나의 중요했던 부분은 가족들의 삶 이였다.
아무래도 남편을 잃은 부인들과 가족의 아픔만큼 더한 것은 없으리라. 당시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졸지에 당한 남편의 사형은 가족들에겐 청천벽력 그 자체였다. 더구나 신문지상에서 대문짝만하게발표된 '간첩'이라는 말에 어디다 호소할 길도 없는 막막한 상황을 겪으면서 오랜 세월 숨죽이며 살아왔다. 또 사건 당시는 물론이고 남편의 사형 이후에도 김영삼 정부 때까지 정보기관에서 항상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를 받았고, 중요행사나 사건이 나면 정보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특히 남편의 묘비조차 세우지 못하다가 95년에 가서야 통일인사라는 묘비명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인혁당 유가족 중 대구 어머님 세분이 유가협의 의문사진상규명과 민주화운동관련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422일간의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천막농성투쟁에 합류하였다. 그분들의 마지막 소원은 죽기 전에 사건의 진상규명과 남편의 명예회복이 되는 것이다. 당신들이 지고 온 고통의 짐을 자식들에게까지 넘길 수 없다며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열심히 싸우셨다. 그래서 어머님들의 활동을 통해 인혁당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쫒아가게 되었다.

사건 자체가 2,30년 전 이야기고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만 인혁당 사건을 올바로 볼수 있다는 생각에 사건의 뿌리를 찾아갔다. 사건 관련자 대다수가 대구와 영남권 출신이라는 점과 4.19혁명 공간에서 청년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4.19이후 5.16쿠데타 전까지 남한사회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단체들이 형성되었다. 그 중에 통일민주청년동맹과 민주민족청년동맹은 청년운동가들의 활동의 장이었고 이쪽 출신들이 이후 공안사건에 연루되어 숱한 옥고를 치루었다. 좀더 깊게 들어가면 해방이후 진보운동의 흐름과 관련되어 파악해야만 인혁당 사건이 가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상투적이긴 하지만 인터뷰와 해방, 전쟁, 혁명, 쿠데타 부분을 삽입하면서 격변의 시대 속에 통일운동과 조직활동에 대한 흐름을 통해서 인혁을 이해해보려 했다. 전체 구조 속에서 볼 때도 불균형적일 수도 있지만 이 흐름 속에서만이 인혁당 사건을 볼 수 있는 진정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강박관념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이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작품구조 상으로 보면 도드라지게 튀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부분이 빠진다면 현재 시점에서 인혁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강하게 들었다. 그들은 분명 해방이후 변혁운동의 흐름상에서 이땅의 민족모순, 계급모순에 관심을 가지고 조직적 대응을 준비했던 분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통일운동이 단순하게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잇는 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민주화와 노동.농민들의 힘으로 함께 가야할 길임을 이해하고 활동했던 분들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품이 남북 정상회담이후 변화하는 현재 정세에 뒤떨어진다는 느낌도 갖게 되지만, 과거의 잘못된 문제들을 하나씩 바로 잡는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지난 1999년 12월28일 국회에서 의미있는 법이 통과되었다. 과거 비민주정권하에 일어났던 탄압과 폭력, 고문행위로 인해 다치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법적 해결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된 것이다. '민주화운동관련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과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관련법들의 후속조치가 지지부진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쉽게 이 부분을 해결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법 제정을 이뤄냈고 앞으로 먼 길이지만 하나씩 문제를 풀어가야 할 여정에 놓여있다. 또한 공안사건으로 분류되는 인혁당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문제는 이런 상황하에서 쉽게 풀릴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진정한 인혁의 진상과 명예회복은 사형당한 그분들이 외치며 목숨을 걸었던 이땅의 민주화와 통일된 상황을 꿈꾸었던 바램이 현실화하는 시기가 바로 해결의 시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혁은 여전히 계속되는 이야기일수밖에 없다.

결혼하고 살다보니 생활문제와 가족관계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분들이 가정의 행복과 단란한 삶을 가슴에 묻고 사회와 국가의 운명을 향해 온몸을 던졌다는 사실들을 발견했을 때 부끄럽고 작아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 또한 나와 같은 처지였을 텐데, 개인적인 삶을 버리고 공동체를 위할 수 있는 가슴 큰 사랑을 느낄 때마다 나의 정체성에 혼란함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들은 세상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나 또한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의 삶은 살아있는 반도의 보이지 않는 역사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음을 느낀다. 흔적도 기억도 우리들의 망각속에 묻혀 사라진다 해도 부정한 세상을 향해 온몸을 던진 용기와 열정만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펄펄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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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아래의 <22일간의 고백> 영상입니다.

확인해 보시고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조백기
2004.10.25 17:35
링크가 잘못 되어 있었네요^^;
수정했습니다.
미디어참세상
2004.10.25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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