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택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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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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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엽, 남택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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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훈, 윤은정, 한유진, 남택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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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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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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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
1997년 12월 대한민국에서는 최초로 국민투표에 의한 여야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우리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오랜 염원만큼이나 그것은 환희와 감격이었으며 김대중 정권에 대한 기대 또한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스스로 인권의 정부를 표방하고 나서고, 자신이 야당 시절 겪었던 고초들을 생각할 때 다른 무엇보다도 민주인사에 대한 대대적 사면조치가 뒤따를 것이란 예상을 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얼마 못 가 무너지고 말았다. 전향제도를 폐지한다더니 준법서약서라는 것을 만들어 모든 양심수에게 석방의 조건으로 제시하는가 하면 법적 심리가 진행되지도 않은 수배자들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 또한 여전해 한총련은 아직까지도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있고,학생회장 당선이라는 것은 곧 수배와 구속을 의미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고도 고통받고 있는 여러 사람들 중에 정치수배자를 중심으로 김대중 정부의 인권정책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학생운동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은 중단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한총련 1세대다.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문민의 정부라는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던 1993년도에 대학에 들어갔다. 그 해에는 학생운동도 시대의 변화에 맞게 확대 개편하자는 취지로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의 대중화를 시도했다. 그렇게 바뀐 한총련과 나의 대학생활은 언제나 함께였다.
93년말 우르과이 라운드 반대 투쟁부터 97년 김영삼의 대선자금 공개투쟁까지... 그리고, 98년이 되던 즈음에 나는 졸업을 했고, 학생운동을 정리하면서 푸른영상에 들어가 새롭게 사회에서의 나의 역할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고생하고 있는 후배들에 대한 생각이 항상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하곤 했다. 그러던 중 98년 여름이 끝날 즈음에 조계사에서 김영삼 정권 시절에 정치수배를 당한 사람들이 수배해제를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치수배자는 정치적인 이유로 수배를 당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신창원도 수배자이다. 그러나, 신창원과 정치수배자가 다른 이유는 범죄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국가보안법이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을 어긴 사람도 법적 논리로 따지자면 범죄자가 된다. 그야말로, 권력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위배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국가보안법이나 집시법에 의하여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조계사에서 농성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총련 관련해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를 당했다.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7년까지 수배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이들은 정권이 바뀌면 한총련에 대한 이적단체규정이 철회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배해제도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들이 농성을 시작한 이후 3번의 특별 사면이 있었으나, 자수하면 선처하겠다라는 애매한 말로 정부는 수배문제를 얼버무리고 있었다.
조계사에서의 정치수배해제를 위한 천막 농성이 해를 넘겼다. 마지막으로 농성단은 김대중 대통령 취임 1주기 특별 사면을 4차투쟁시기로 잡고 전력을 다해 싸우기로 결정했다. 1999년 1월부터 2월말의 사면발표를 전후로 한 농성단의 희망과 갈등이 작품 내용의 중심이다. 그 속에서 부모님들의 눈물겨운 투쟁과 농성장 밖에서 도피생활을 하는 나의 후배이자 수배자인 효재를 통해 정치수배의 부당성과 한총련에 대한 탄압은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1주기 사면발표 이후에 농성단은 많은 벽들에 부딪힌다. 더 이상 농성을 진행하기 힘 들어 농성장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조계사에 남은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농성을 진행할 것인가 에 대한 방향에 대해 서로 격론을 벌이기도 한다. 결국, 농성단은 정치수배의 근본원인인 국가보안법투쟁 을 중심으로 정치수배자에 대한 문제도 해결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권력 앞에 무릎 꿇을 수 없다는 의지가 그들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지금 감옥에 있는 양심수들이 석방되고, 구정권 시절의 정치수배자들의 수배가 풀린다고 해도 현재의 분 단상태가 계속되고 국가보안법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수배자와 양심수는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 다. 제2의 조계사 농성단, 제3의 조계사 농성단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의 싸움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1년 간의 시간동안 내 머리를 항상 떠나지 않았던 화두가 바로 조계사에서 농성하는 형들이었다. 한번의 제작경험도 없이 조계사 형들이 처한, 한총련이 처한 억울한 사연을 카메라에 담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부채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겁없이 작업에 뛰어들었었다.
어차피 촬영분은 정해져 있는데,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좀 더 잘 이해하고 느낄 수 있도록 이야기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정말 나로서는 너무나 어려운 과정이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조계사 농성단이 한총련 출신이라는 것과 나 또한 형들과 같은 경험을 했다는 사실 이 처음에 조계사에 찾아서 형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에는 훨씬 장점으로 작용했지만, 후반 작업에 들어가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오히려 부담이 커져갔다. 혹시 이 작업이 농성단 형들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닐까, 또 한 편으로는 지금도 학생운동을 하고 있는 나의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작품은 되지 않을 까... 아직까지도 한총련은 이적단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데...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한총련에 대해 조금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하는데 등등... 더욱이 나의 경험이나 느낌이 작품 전반에 드러나기 때문에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 었다. 오죽하면 앞으로는 운동권 얘기 내지는 주관적 나래이션은 쓰지 않겠다는 푸념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총련에 대한 이야기를 한 첫 다큐멘터리라는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시발로 앞으로 한총련에 대한, 학생운동에 대한 애정을 담은 많은 작품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 다. 또한, 그러한 작품들로 인해 많은 관객들이 학생운동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기를 바라며 학생운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