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눈> 4월에 부르는 남도의 노래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엘리엇의 서정적인 시로부터 유래가 되긴 했지만, 사실 그 때문만은 아니다.
자연의 리듬에 맞춰 인간의 의식을 진전시킨 치열한 역사의 궤적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순환되는 자연의 주기를 의식으로 승화시키는 일이야말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는 것만큼 위대한 일이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역설과 그 역설을 의식으로 승화시킨 4월의 정신이야말로 ‘4월의 미학’이 아닐까?

그 4월 정신을 2년 전 이맘때 제주도 중산간 지역의 ‘큰넓궤’에서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토벌군을 피해 숨어들었던 200여명의 비통함과 원성 그리고 고통의 숨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어두컴컴한 땅굴 속을 피가 나도록 기어들어가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불러 보시라. 사는 게 얼마나 힘들고 지겨웠을까.. 아직도 당시 사용하던 가재도구와 동물의 뼈가 발에 밟히는 어둡고 축축한 동굴 속, 그곳은 바로 유채꽃 만발한 4월의 잔인함을 의식으로 승화시킨 역사의 현장이었기에 흐르는 눈물을 닦는 게 그렇게 송구스러웠던 것일까?

1948년 4월 3일, 노란 유채꽃이 만발한 제주의 봄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새벽 2시를 기해 한라산자락의 89개 오름에 일제히 봉화가 오르면서 5.10 단독 선거와 민족 분단을 저지하려는 제주 민중의 치열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미군과 본토에서 급파된 토벌대에 의해 최대 3만 여명이 작은 섬 제주도에서 희생되었다니 제주도민 모두가 피해자인 셈이다.

토벌대를 피해 유부녀와 그 가족들이 숨어들었다가 몰살당했다는 와홀굴을 갔었다. 어느 한적한 동네에 빛 바랜 새마을 기가 집집마다 걸린 모습이 무척 이채로웠다. 이유인즉 4.3 항쟁 당시 민중자위대가 아닌 토벌대 편이라는 표시로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어놓고 지낸 서글픈 사연이 오늘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빛 바랜 새마을기가 집집마다 펄럭이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었던 것은 좋은 세상에 태어나 편하게 산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말없이 보내는 뭍사람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가 따갑게 다가왔던 기억이 새롭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새삼 거론해서 무엇하랴만, 넘실대는 푸른 파도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함덕 해변과 성산 일출봉 그리고 정방폭포가 바로 4.3항쟁 당시 민간인 학살지였다는 사실. 총알을 아끼려고 굴비 엮듯이 사람을 엮고 폭포 밑으로 떨어뜨렸다는 정방폭포는 이제 더 이상 절경으로 와 닿지 않는다.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함덕 해수욕장과 성산일출봉 해변의 그 은빛 모래는 더 이상 낭만과 추억의 여행지가 아닌 한 맺힌 민중의 뼈 가루로 밟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다.

4월의 아름다움을 학살이라는 잔학함으로 물들인 57년 전 바로 이 때,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을 배경으로 ‘살인의 미학’을 즐겼던 서글픈 역사를 몰랐다면, 뭍사람들에게 보내는 제주사람들의 경계의 눈초리를 알았을까?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해 외롭게 싸워야했던 변방의 서러운 역사를 진작 알았더라면 서러운 넋들을 위해 쓴 소주 한 잔이라도 땅에 부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역사에 대한 무지야말로 의식의 진전을 가로막는 반인권적 모습이 아닐까?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4월, 제주도에서 핏빛으로 물들은 유채꽃을 본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의식의 진전이요, 또 다른 인권의 차원이라는 생각으로 4월을 맞는다.

이주현(경기민언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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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 4.3 항쟁 , 민중항쟁 , 남도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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