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눈>그 많던 레즈비언들은 다 어디 갔을까?

'레즈비언의 역사' 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아니, 이렇게 묻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레즈비언들의 삶은“역사화”되었는가?

역사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며,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 했던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거울로 삼을 수 있는 그 어떤 과거도, 과거의 존재도 없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고독한 일이다. 그“거울”이 없다는 것은 오늘의 나를 설명할 언어가 없다는 것이고, 나를 설명할 언어가 없다는 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존재가 언제든 왜곡되고,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만나온 나의 수많은 레즈비언 지인들은“나 혼자만 같은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한다. 나 역시 레즈비언 정체성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열네살 때부터 스물 한살 때까지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해왔다. 세상의 그 누구와도 나의 문제를 상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 상태를“유일무이”한,“비정상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자살시도를 하던 그 순간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았더라면 나는 그와 같은 시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에게‘우리와 같은 삶을 살아온 과거의 레즈비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레즈비언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을 긍정할 수 있기 위해, 그리고 레즈비언 정체성이 선택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묻혀진 레즈비언의 역사를 복원하고, 오늘을 사는 레즈비언들의 삶에 관해 기록해야 한다.

그 기록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거창하게 기록되는 즉, 이미 언어를 가진 역사가에 의해 재구성된 그‘거창한 기록’은 오히려 사실을 은폐하기도 한다. 단 한 명의 레즈비언이 살아왔을 그 흔적들을 찾아 기록하는 작업 그리고 오늘을 살고 있는 내 주위의 단 한 명의 레즈비언의 삶을 추적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잃어버린 우리들의 시간을 되찾는 일이고, 사라진 그들의 삶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나마 우리에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세자빈 봉씨에 관한 기록, 식민지 근대사회에서 출현한 이른바‘신여성’담론 내에서 언급되는 동성애에 관한 몇 가지 기록 그리고 국내 레즈비언 활동가들에 의해 수집된 1970년대 여자택시운전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동성애에 관한 증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정말 다행이다.

레즈비언 권리 운동 10년을 지나 새로운 10년을 내다보고 있는 오늘, 우리는 과거를 살펴야 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보충하고, 사라진 존재들에 대한 기록들을 발견해 내고, 2000년대를 살고 있는 레즈비언들에 관한 생생한 삶의 증언들을 수집해야 할 것이다.

레즈비언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과 그들 곁에 함께 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서둘러야 할 일이다.

박김수진(박통) 레즈비언권리연구소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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