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눈>생명과 환경 그리고 인권

나는 낚시를 싫어한다. 아니, ‘못한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몰입과 기다
림, 그리고 때를 낚는 묘미를 몰라서 아니다. 뭍과 물의 경계에서 살아있는 생명을 낚는 희열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표현하기 민망하지만, 낚시 바늘에 걸린 고기를 도저히 분리시키질 못해서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고기의 아가미를 도저히 찢어 분리시키질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야 재미 삼아 하는지 모르지만 바늘에 걸린 고기는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의식이 죄의식 수준으로 다가온다. 해변을 걸을 때마다 발바닥을 위협하는 낚싯바늘은 좀 그래도 덜하다. 바다에 사는 갈매기가 낚싯줄을 끌고 다니며 힘겹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본 후 더욱 그런 의식이 깊어졌다.

얼마 전 포털 사이트에서 윙컷(애완조 날개 자르기)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애완견의 목젖을 수술, 짖지 못하게 하고 수컷의 기능을 없애기 위해 거세를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집에서 키우는 새의 날개를 자른다는 이야기는 첨 듣는다. 이유는 야생의 본능을 말살하려는 시도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너무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얼마 전 TV에서 방영된 인도네시아 곰 도살 현장의 끔찍함이나, 다리를 부러뜨려 차에 매달아 끌고 다닌 다음 물을 먹여 도살하는, 소위 물 먹인 소고기도 차원은 다르지만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촉발됐다는 점에서 맥락에서 다르지 않다.

인권을 정의할 때 보통 인간중심의 사고, 즉 인본주의라는 틀 안에서 정의를 한다. 인간중심의 사고라는 틀 안에서 볼 때, 위와 같은 동물 학대와 같은 행위는 별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결국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인간의 안위를 위한다는 지극히 기계적인 맥락에서 볼 때 가능한 논리다. 그런 논리가 소위 인권을 정의하는 논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생명’이라는 더 큰 범주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 이것이 ‘생명’의 범주다. 인권은 이러한 차원에서 논의되고 천착되어야 한다. 그래서 동물의 권리를 외면한 인간만의 권리는 공허한 반 생명 논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수도사적 절제와 개고기 논쟁으로 불거진 브리짓 바르도 논쟁과는 또 다른 차원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아침에 땅을 밟을 때 “어머니 죄송합니다”라고 한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땅은 살아있는 인격인 셈이다. 조상대대로 전수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인 셈이다. 영성훈련이 잘 된 사람은 나무를 함부로 꺾지 못한다고 한다. 나무 꺾을 때 나는 소리가 생명들의 고통스런 비명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인권은 그런 차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인간중심에 국한시킨 인권은 결국 인간의 욕망을 극복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생명을 파괴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대가로 성취된 인권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권이 아니다. 누릴 수 없는 공허한 논리일 뿐이다. 결국, 인권의 범주는 생명이라는 범주와 환경이라는 범주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차원에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주현 / 경기민언련 사무처장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다산인권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