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힘 기관지 격주간노동자의힘

우리의 투쟁목표는 '인권위원회 의견 수용'이 아니라, '개악안 자체의 폐기'이어야 한다

77호 정세초점

지난 4월 1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기간제 사유제한 및 기간만료 후 정규직화, 동일노동 동일임금, 파견사용업체 사용자책임 인정 등을 골자로 한 의견서를 발표했다. 이에 정부·여당 및 보수언론은 미친듯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인권위의 의견제시는 균형잃은 정치적 행위", "비전문가들의 월권행위", "단세포적 기준"(김대환 노동부장관), "황당무계하다, 국회는 국회의 길을 가겠다"(이목희 열우당 의원), "생뚱맞다", "노동자가 허리띠를 졸라매야"(이경제 환노위 위원장) 등.
인권위원회에서 제출한 '정부의 비정규법안에 대한 의견'은 외견상 정부안에 대한 비판으로 보였고, 노동운동진영에서는 적지 않은 교란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4월 18일 민주노총을 비롯한 358개 시민사회단체들은 "인권위원회 의견을 최저기준으로 하여 정부입법안의 수정안을 만들자"는 요구를 하였고, 57개 비정규노동 대표자 연명으로 "인권위 의견수용, 4월국회 입법화"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런 요구는 인권위원회의 의견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자, 오히려 정권과 자본의 노동법 개악을 도와줄 위험성을 갖고 있다.

인권위원회 의견의 핵심은 비정규직 법안 자체의 '폐기'

비록 의견 수준으로 표명되었지만, 인권위원회 안의 핵심은 "비정규직은 예외적인 경우에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정규직을 일반적인 고용형태로 만들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인권위 의견서는 파견제 법안에 대해서는 '현행 그대로 두라'고 제시했다.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허용이 안 되는 업종만 명시하고 모두 가능하도록 하는 것)으로 변경을 제시한 정부안에 대해서 인권위원회는 이것이 파견근로를 남용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면서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또 파견휴지기를 축소하고 파견기간을 늘리는 정부안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고용의제조항에서 일정한 기간이 지난 파견노동자는 자동적으로 직접고용으로 되는 것으로 보는 조항(간주조항)을 의무조항으로 바꾸는 정부의 안에 대해서도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이것이 정규직이 되지 못하도록 악용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다시 말해 파견법을 개정하는 정부의 안 모두를 반대한 것이며, 그것이 모두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에 아무런 실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파견노동자들을 괴롭히거나 파견노동자들을 확대할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파견법은 이미 그 자체가 악법이므로 손을 대는 순간 더 나빠질 뿐이다.
기간제법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권위원회는 기간제 법안에 대해 크게 두 가지를 언급했다. 하나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명문화하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허용사유를 명시하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노동운동진영에서도 요구해왔던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이 내용을 받아서 정부 기간제 법안을 수정하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노동운동진영이 요구해왔던 것은 '기간제특별법'이 아니다.
노동운동진영의 요구는 '근로기준법'에 이 내용을 넣으라는 것이었다. 만약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아니라 기간제특별법을 만든다면 그 법이 오히려 기간제 노동자들을 확대하는 데에 기여할 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위원회의 의견대로 하려면 정부에서 내놓은 '기간제 법안'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기간제 안을 폐기하고 근로기준법 안에 인권위원회가 이야기한 허용사유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명문화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정부에서 내놓은 기간제 법안과 파견제 법안이 모두 노동자들의 권리와 인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노동3권을 보장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비정규직을 확산할 뿐이며,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은 단 하나이다. 정부의 입법안을 폐기하는 길이다.

인권위원회 의견대로 정부안을 수정하는 순간 개악이 된다!

노동운동 일부와 시민운동진영에서는 "인권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정부의 안을 수정하자"고 주장하지만, 이는 함정에 빠지는 수순이다. 인권위원회의 의견은 원칙적인 수준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정부 입법안이라는 큰 틀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인권위원회 의견을 수용한다면서 수정을 시작하면 자본과 정권이 원하는 바대로 수정될 가능성이 커진다.
예를 들어 기간제 안에 대해 '특별법'을 그대로 두되, 인권위원회 의견대로 허용사유만 명시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 허용사유를 무엇으로 할 지 논란이 생긴다. 물론 우리는 허용사유를 무엇으로 할지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다. 그것은 '임시·간헐적 업무'라는 것이다. 이 외에는 절대로 기간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비정규직은 특수하고 예외적인 경우에만 활용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부합한다.
그런데 정부의 '기간제 특별법안'을 폐기하지 않은 채 그 안에서 허용업무를 명시하려고 하면, 정부나 자본은 전문적 지식과 기술의 활용이 필요한 경우라든가, 고령자고용촉진법에 의한 준고령자와의 근로계약의 경우라든가, 기업 업무의 일시적 증가 등을 허용사유에 끼워 넣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런 것을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 논쟁을 하게 되면 이 중 하나라도 들어가게 되고, 만약 이런 허용사유가 들어가면 기간제는 사실상 모두 가능해지는 것과 다름이 없다. 즉 정부의 원래 개악안 그대로가 되는 것이다.
96년도에 정부가 파견법을 만들 때 내세웠던 논리도 '전문적 지식과 기술이 필요한 업무'와 '준고령자와의 근로계약'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보면 오히려 힘들게 일하고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파견업이 집중되었고, 그렇게 한번 길을 터놓은 자본은 이제 와서 파견법을 확대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기업업무의 일시적 증가'와 같은 사유는 대단히 추상적이어서 자본이 마음만 먹으면 기간제를 마음대로 활용하고는 기업업무의 일시적 증가 때문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게다가 이후 시행령에 마음대로 허용업무를 더 넣을 수 있으니 자본과 정권이 결코 못 받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기간제의 내용 수정이란 있을 수 없다. 가능한 유일한 길은 기간제안을 폐기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파견제도 마찬가지다. 인권위원회에서 현행 포지티브 방식을 유지하라고 말한다. 즉 더 이상 파견을 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안을 갖고 수정하자고 하면 아마도 정부는 개정안을 바꾸겠다고 말할 것이다. 인권위원회가 이야기한대로 포지티브 방식을 유지하되, 몇 개만 더 허용을 해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몇 개를 더 허용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 업무의 노동자들은 이제 파견노동의 굴레를 덮어쓰게 된다는 뜻이다. 누가 과연 이것을 허용할 권한을 갖고 있는가? 누가 노동자들을 노예노동에 빠뜨릴 권한을 갖고 있는가? 게다가 허용업무를 한 두 개 더 넣는다고 하면서 예를 들어 '서비스업'처럼 광범위한 업무로 허용업무를 명시할 경우, 포지티브 방식을 유지하는 의미 자체가 없어질 것이다.
현재의 파견법 자체가 이미 너무나 심각한 악법이다. 노동자들을 중간착취하고 노동자들을 주기적으로 해고하는 법이다. 파견법은 손을 대면 댈수록 심각해진다. 파견법의 존재 자체가 우리 노동운동의 수치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이다. 파견법 자체를 철폐하는 것, 최소한 정부의 개정안 자체를 철회하도록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

개악안 '폐기'를 위한 투쟁에 집중해야!

인권위원회 의견을 기준으로 정부에게 '수정'을 요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인권위의 의견은 말 그대로 의견일 뿐 구속력도 없는데다, 정부나 자본측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사실상 전무하다. 인권위 의견이 비정규직 보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부에서 내놓은 기간제법안과 파견제법안의 '폐기' 밖에 없다.
교섭론자의 논리에 따라 정부의 개악안 두 개를 놓고 교섭을 하다보면, 정권의 의도에 농락당하면서 정권의 의도를 다 관철시켜줄 것이 뻔한 상황이다. 인권위원회 의견을 지킨다고 하면서 사실상 실효는 없고, 정권과 자본이 원래 내놓은 안에 근접하게 될 가능성이 많은 상황에서 왜 아직도 민주노조운동진영은 '법안의 수정'을 이야기하는가?
우리의 길은 하나이다. '노동법 개악 폐기!' 인권위원회 의견을 '최저수준'으로 협상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정권의 의도를 모두 관철시켜주고도 우리의 의도가 반영된 것처럼 착각하는 자기기만에 빠져서는 안된다. 인권위원회의 '의견'이 가진 최소한의 의미라도 살리는 유일한 길은 '폐기'말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