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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의 날에서 4.30, 메이데이로

전노협 전의장 양규헌 동지와의 인터뷰

'근로자의 날'에 대한 추억 - 기념식, 표창장, 타월, 체육대회…

1970∼80년대 메이데이는 없고, 오로지 근로자의 날만 있었죠. 일반대중은 메이데이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었어요. 80년대 초중반 광주항쟁 이후 현장 물밑에서 민주노조투쟁이 터져나오면서 3월 10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근로자의 날은 당시 한국노총이 자본과 권력에 의해 탄생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죠.
그래도 3월 10일은 나름의 의미(?)는 있었어요. 노동자의 날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지역의 상층노조 간부들과 경찰서, 시청 간부들이 모여서 기념식을 하는 날이었죠. 보통 극장을 빌려서 모범근로자 표창을 했어요. 표창을 받으면 여러 혜택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택시 노동자는 개인택시를 받는 지름길이었어요. 표창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노동부장관상, 경찰서장상, 시장상 등등.
표창은 한 20명한테 주는데, 규모있는 노조들이 주로 받았죠. 거기에서 조합원이 표창을 받으려면 지부장이나 분회장에 잘 보여야 되고, 지부장이나 분회장은 지역협의회 의장에게 잘 보여야 됐어요. 그렇지 않으면 특혜가 전혀 없으니까 로비로서 이루어지는 행사였어요.
그래도 노조간부들이 상을 받으면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게 그 당시 분위기였어요. 또 지역의 한국노총 지역협의회는 나름대로 자신들이 노동운동(?)을 한다고 과시하는 장이었어요. 시장이 나왔다, 서장이 나왔다고 하면서 세를 과시하는 거죠. 상공회의소나 지역경제단체도 함께 행사에 참여했어요.
이 정도가 근로자의 날을 기념하는 수준인데, 기념식에서 기념사, 축사 등이 많았는데, 격려사는 지역협의회 의장이, 축사는 관공서, 경찰서 정보과장이 대독하는 게 관례였죠. 그래도 한국노총 지역협의회는 그걸 영광으로 생각했죠. 그런 행사 이후에 수련회를 제주도로 가는데 관공서 간부들이 자연스럽게 끼여가는 분위기였어요. 한국노총의 산별 체제 아래서 마치 일반노동자들이 보기에 노총의 지역이나 중앙조직이 저쪽과 얼마나 가까우냐가 협상을 좌우한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어서, 지역노총 간부들이 으시댔죠.

당시 현장에서는 회사가 기념타월을 조합원에게 나눠줬죠. 한쪽에는 노동조합, 다른 쪽에는 회사이름을 박아서. 당시의 현장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조금 노조가 힘이 있으면 노사화합 운동회를 하는데, 공교롭게 임투직전이었죠. 노사평화를 자랑스럽게 가족까지 불러서 체육대회로 표현하는 거죠. 근로자들에게 '노사가 하나'라는 것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이데올기적 역할을 했죠.

1970년대에 메이데이 행사가 있었나요? 1980년에 상황은 어땠나요?

70년대에 메이데이 행사를 대중적으로 했던 기억은 없어요. 메이데이의 의미에 대한 교육은 있었지만. 80년 봄 이후에는 상황이 변했죠.

그 당시의 얘기를 좀 해주시죠.

박정희가 죽고 계엄사령관이 들어선 상황에서, 그 당시 민주노조진영(?) 일부 노조가 한국노총 강당을 점거했어요. 동일방직, 원풍모방 등의 조합원들이 한국노총 직무대행에 직접 항의하면서, 폭력상황도 발생했지요.
노동자들은 이후에 정권을 잡을 유력자로서 김종필로 봤고, 최소한 삼김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지요. 학생들이 연대투쟁 왔었는데, 방용석 등 점거지도부가 완강히 연대를 거부했어요. 노동자문제는 노동자들이 해결해야 한다면서, 학생들을 돌려 보냈죠. 농성노동자들은 민주노조 탄압의 문제에 대해, 삼후보가 약속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학생들이 '삼김이 아니라 전두환이 문제'라고 하니까, '왜 전두환이 나오냐? 노동자들에게 뜬금 없는 이야기하지 마라. 얘들이 뭘 모르는 소리한다.'고 하면서 돌려보낸 거죠. 왜곡된 정보에 귀를 기울이면 혼란에 빠진다고.
80년 봄을 지나면서 메이데이에 대한 토론이 이뤄졌지만, 결의로 모아지지는 않았어요. 계엄 시기에서 한국노총 지도부가 정화대상이 되었어요. 우리 노조(당시 대한전선 노조, 1983년 이후로 대우전자부품노조)도 점거농성에 참여했는데, 제가 당시 수석부위원장이었죠. 그런데 위원장 왈, "가서 발언은 해도 괜찮은데, 어디서 왔는지 말하지 마라"는 거예요. 아마 두 가지 의미였겠죠. 한국노총 내 대립관계를 고려해서, 중앙에 찍히면 안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권력으로부터의 탄압을 예상했기 때문이죠.
어디에서 왔다고 얘기했으면 우리도 삼청교육대 갔을 거예요. 우리 노조에서도 한 20명이 참가해서, 각목 두들기며 "흔들리지 않게", "우리 승리하리라",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 "유신하면 생각나는 그 사람" 심수봉 개사곡을 부르면서 농성을 했죠.

그래도 80년대를 경과하면서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메이데이에 대한 인식은 확대되지 않았나요?

메이데이 행사를 대중적으로 한 적은 없고, 다만 소모임 차원에서 저녁에 하나의 형식으로, 묵념하는 정도였죠. 조합원 대중차원에서 뭔가를 하는 것은 그땐 엄청난 일이었어요. 한국노총에서는 메이데이가 공산주의자들의 행사라는 이데올로기로 퍼뜨렸고, 5월 1일을 노동자의 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상적으로 문제있다고 공격했죠. 한국노총으로서 3월 10일이 거룩한 날이었으니까.

메이데이의 대중화

대중적으로 논의되는 것이 1985년 이후죠. 인천대자투쟁, 구로동맹파업 이후 메이데이가 대중적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했죠. 메이데이 가투가 있었어요. 5월 1일을 기념해서 가두시위를 하는 식이었죠. 선진노동자들이 선을 통해서 결집하던 시기였죠. 당시 학생운동에서 노학연대의 바람이 불었고, 야학을 지도하거나, 현장에 들어간 학출 활동가들이 그런 행사들을 주도했어요.
1987년 이후 상황은 변했죠. 대투쟁이후 지역노조 협의체들이 만들어지고, 전노협이 건설되면서 분위기는 바뀌었죠. 지노협 시절부터 이전의 선언적·상징적으로 강조되었된 메이데이에 대한 논의가 대중적·실천적으로 메이데이 쟁취투쟁으로 발전했죠.
1988년 노동자대회를 통해서 민주노조진영이 자신감을 갖고, 구체적인 슬로건으로 '노동자의 날을 쟁취하자'가 제출되었죠. 이런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근로자의 날에 대한 분노, 노동자 스스로가 굴종의 삶에 대해 느꼈던 분노를 논의하면서, 메이데이를 복원시켰던 거죠.
그 당시 지노협을 중심으로 전국적 조직건설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한국노총을 민주화하자는 논리와 독자적인 전국조직을 건설하자는 논리로 논쟁이 붙었죠. 이 논쟁에서 한국노총의 역사적 과정을 보면, 한국노총을 노동조합 중앙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강했죠. 한국노총은 노동자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도구일 뿐이고, 전노협은 또하나의 복수노조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진정한 조직 하나를 만드는 것이라는 논리가 설득력을 가졌죠. 한국노총이 그런 평가를 받았던 것은 근로자의 날에 대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어요.

4.30과 메이데이

그런 과정을 거쳐서 공식적으로 1994년에 메이데이가 합법화되었고, 3월 10일을 대신해서 5월 1일이 노동자의 휴일로 정해진 것이죠. 개인적으로 메이데이와 관련된 기억이 있으신가요?

메이데이 대회는 주로 권역별로 진행되었는데, 수도권은 4.30 집회를 했죠. 이 날은 밤새워 싸우는 날이었어요. 그 자체가 100여 년 전의 메이데이 정신을 실천적으로 계승·발전시키자는 거였기 때문에, 메이데이 투쟁의 기조나 초점이 4.30에 잡혔어요.
가두투쟁(아래 가투)도 하고 학교에 거점을 잡고 경찰의 침탈에 맞서 싸우고 그랬죠. 이 투쟁에 노동조합 간부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수 십 시간의 교육보다는 훨씬 더 실천적인 경험이었어요. '노동자의 투쟁정신이 이런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고, 대중적으로 메이데이 정신이 확산되는 계기였어요.
노동조합운동이 전투적·비타협적 기조를 잡아나가는 실천의 계기였어요. 메이데이를 한번 하고 나면 현장에서 할 이야기가 많았어요. 이렇게 싸웠다. 뭔데 그러나? 투쟁의 경험과 밤생농성을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를 현장에서 동료들과 나누는 거죠.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슴에 와닿고 생동감있게 전달할 수 있었어요. 짜여진 틀에 갇힌 메이데이 교육만으로 소화하기 힘든 내용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메이데이와 노동문화

메이데이 행사는 또한 노동문화가 확산되는 계기였죠. 다양한 문화팀들이 자신들이 익힌 것을 발표하는 장이었죠. 전국적 풍물패들이 연대의 방향을 모색하고, 지역과 업종을 넘나드는 연대를 실천적으로 하는 계기가 되었죠. 그 이전의 노동문화가 간부합동수련회, 간부들 간의 연대 중심이었는데, 4.30을 계기로 문화에 관심을 가진 조합원들까지 연대의 폭을 확장할 수 있었지요.
그것은 문화운동으로서의 성과였어요. 메이데이와 노동자대회를 통해 노동운동은 건강한 자기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문화단위 간의 치열한 논쟁, 무대기획과 대회기조에 대한 토론과 논쟁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지요. 단순히 북치고 장구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식을 실천으로 익혀 나가는 장, 단순한 발표를 넘어 논쟁의 장을 문화적으로 확대하는 장이었죠.
메이데이를 통해서 생겨난 민중가수, 율동패가 많아요. 이런 문화운동은 지역 단위사업장으로 확산되었는데, 한번은 학습하고 한번은 풍물하는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이 확산되는 계기였죠. 90년대 중반이 되면서 노조 핵심간부 또는 지도부에는 문화활동가들 출신이 많았어요. 비록 기업별 노조지만, 문화팀도 조직해야 되니까 조직화의 경험으로 확인된 거죠.
평가적 관점에서 보면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이 쇠퇴하는 것과 노동문화가 찌그러드는 것이 무관하지 않아요. 문화란 끊임없이 개발되어야 하는데 막힌 부분도 있고, 민주노조운동 자체가 그렇게 됨으로써 문화로서의 대안을 찾기 갑갑한 측면도 있죠. 그 당시 웬만한 노조에는 노래패가 있었고, 일상활동으로 진행되었죠. 노동문화가 대중적으로 촉발되는 계기가 노동절과 노동자대회였고, 결의를 다지는 수준을 넘어 대중활동의 새로운 장으로서의 의미를 포함하는 거죠.

메이데이 싸움 중에서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1994년 동국대에서 4.30을 하면서 굴레방다리로 가서 가투한 기억이 생생하네요. 신촌에서 유리한 지형에서 대차게 싸우다가 경기대 앞으로 이동해서 적들을 제압하던 기억이 남네요. 그때 노조일반 간부들이 각목을 들면서 자신감을 갖고 가슴 벅차했던 표정을 보면서 느꼈죠. 이렇게 투쟁에 실천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서 사고를 바꾸는 게 쉽지 않구나.
집회참여가 동원이 아니라 교육과 실천의 장이자, 결의를 다지는 장으로서의 투쟁이었어요. 어떻게든 한번 참여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니까. 하기 전 생각하고, 하루밤 자고나서 생각들이 확연하게 달라지니까. 교육으로 변화시키기는 쉽지 않죠. 아무리 장시간 토론해도 생각이 쉽게 바뀌지는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4.30은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상당히 중요했어요. 그리고 나서 나중에 4.30이 없어지고 메이데이 기념식만 남고, 고작 행진하는 수준으로 떨어졌어요.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구호나 노동가 몇 곡으로 마무리되는 식으로 바뀌었죠.

어제와 오늘 - 비정규직 노동운동과 메이데이

현실적으로 봐도 오늘날 노동자들의 상황은 그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정권과 자본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포섭과 배제전략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그런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어요.
특정사업장, 대기업은 경제적 분배 덕분에, 현실의 삶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위치 때문에 포섭과 배제 시나리오 속에 있지요. 그때에도 고임금 노동자들이 있었고, 적게 받는 노동자들의 처지와 같다고 보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상대적 고임금을 받는 관리직도 자신의 처지가 결국은 노동자란 것을 깨달았죠. 그들과 끊임없이 얘기하고, 그 당시 인사체계, 지금 식으로 말해서 거대한 구조조정 시스템으로 접근하면, 큰 차이는 없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음을 엄밀히 봐야 해요. 그때에는 노동자들의 제도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정치조직이 없었죠. 지금은 민노당이란 제도정당으로 수용되고 있지요. 그렇지만 지난번 비정규직 수정안의 경우 계급적 요구가 아니죠. 의회 내에서 뭔가 명분을 찾으려는 시도였을 뿐 이예요. 노동자들의 요구는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제도권 내부로 수렴되지 않아요.

올해 116년주년 메이데이를 맞이하면서 하실 말씀은?

노동자들의 정신이 지금 바뀌어야 하는가? 오히려 더 치열하게 싸워야될 상태에 놓여있는 게 현실이예요. 정세의 측면이나 노동자들의 상태의 측면에서, 이전에 메이데이 100주년을 맞을 때 장기투쟁 비정규직은 없었어요. 내 기억으로, 16∼20년 전 한 두개 사업장은 있었지만, 지금 같지는 않았죠. 절박한 삶의 돌파구를 위해 투쟁해 나가야 하는데, 메이데이의 긴장은 포섭과 배제 전략에 먹혀 들어가지 않았나 우려돼요. 그 우려의 지점에 노동절 대회의 기조가 어떻게 되는가로 드러나지요.
지금도 노동법 관련 총파업을 선언하고 있어요. 총파업은 큰 무기이지만, 그 무기를 기업별 담장안에 감춰놔서는 무기의 위력이 없어요. 총파업이 되는 것 같은 결의의 비중으로 바깥 싸움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취약해요.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이 묻혀 들어가고 있어요. 올해 메이데이는 이 투쟁을 묶어내고 확대·발전시키고, 전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의 명료한 메시지가 나와야 해요. 비정규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기만 앞에 메이데이는 전계급적 투쟁, 이전의 4.30 정신을 되찾는 메이데이 정신을 재확인해야 해요.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하나의 노동자입니다. 말이 아니라 공동투쟁으로 확인해야 돼요. 저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그것을 용인하는 상황은 투쟁을 통해서 돌파해야 합니다. 올바른 관점을 가져야 돼요. 이미 116년 전 선배노동자들이 메시지를 남겼는데, 그것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은 현재 운동가들의 몫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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