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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코뮌

105호

오랜만에 연극을 봤다. 코뮌. 포스터만큼이나 제목도 빨간 이 연극은 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80년의 엄혹했던 시절도, 87년 노동자 대투쟁도, 89년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몰락도, 96년 학생운동 탄압도, 노동악법 날치기도 직접 경험하고 고민하지 못한 2000년의 대학시절을 보낸 나에게 연극은 과거의 경험을 이양시키는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양이고 나에겐 운동의 역사와 함께 내가 이어나가야 할 운동의 일상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에 대해 숙제를 남겼다.
나에게 작가는 계속 물어보는 것 같았다. 너의 꿈, 너의 코뮌은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그려나갈 것이냐고. 나는 아직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여린 불꽃을 품은 너를 처음 봤어"
연극은 기영의 기억을 통해 83년 인선과 기영의 만남을 시작으로 한다. 기영은 위장취업한 대학생이고, 인선은 14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해 온 말 그대로 '공순이'이다. 이 둘이 처음 만났던 날은 어느 봄날, 비가 내려 정전이 된 작업장에서였다. 암울하고 앞이 보이지 않았던 그 시절만큼 천둥과 번개가 쳐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어둠 속에서 기영은 디디디를 외치며 인선에게 다가간다. "전두환 대머리 돌대가리."
그리고 칠 흙 같은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켠다. 처음에 불은 인선이 아니라 기영에게 있었다. 작은 불꽃으로 밝혀진 테이블 위에는 인선과 기영의 꿈이 드러난다. 기영이 드러낸 건 '공산당선언'이었고, 인선이 드러낸 건 21세기에 나타날 디자인이었다. 작가가 교묘하게 나눠놓은 꿈. 그들은 꿈에 대해 대화한다. 꿈은 실현될 때 아름다운 것일까, 비록 고통스럽긴 하지만 꿈을 품고 있는 것이 더 아름다울까. 기영은 전자를, 인선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건 그와 그녀의 삶의 대응방식과 연결된다.
이미 공산당 선언을 줄줄 외고 있었던 인선은 기영에게 묻는다.
"읽으니까 어때?"
"읽고 있으면 심장이 뛰는 것 같아요"
"뛰긴, 어디에서 뛰는데?"
기영이 대답한다. "심장이 붉은 광장에서 뛰는 것 같다"라고.

"움추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그렇게 만남을 시작으로 둘은 사랑에 빠지고, 연인이 된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순탄치 않다. 개인과 개인의 삶은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므로.
엄혹한 시대의 폭력은 인선에게 커다란 불꽃을 일게 하고, 그녀는 투사가 되었다. 그건 그녀가 처한 환경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녀의 삶의 '선언'은 책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했다. 연극이 시작할 때 산울림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녀는 이제 '불나비'와 '바위처럼'을 부르며 크게 노래한다. 그런 그녀와 달리 기영은 술과 동맹을 맺고 일상성과 역사성을 파괴한다. 그건 89년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기영과 절친했던 영진의 분신 때문이다.
89년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꿈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던 신념이 현실 앞에서 한 순간에 허물어지던 순간을 작가는 기영, 영진, 인선의 삶을 통해 말해주고 있었다. 영진은 분신을 했고, 기영은 이제 끝이라며 술을 마시며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죄의식에 허덕이고 있었고, 인선은 이제 시작이라며 생활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흐른 뒤 유학을 준비하는 기영에게 인선은 말한다.
"넌 도망가는 게 아냐. 어깨 펴고 움츠리지 말고, 앞을 향해 가는 거야. 가는 길에, 눈에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외면하지는 말고. 네 길을 가는 거라고. 각자의 길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그리고 더 시간이 흐른 뒤, 세상은 여전히 급변하고, 꿈을 빼앗으려는 자들로 가득하지만, 기영은 소시민이 되어 있다. 그는 말한다. 아침이면 전철에 일 벌레처럼 꾸역꾸역 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합류하는 소시민이 되어버렸다고. 그런 그가 인선과의 짧은 재회와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주체로 일어서려고 한다.
그는 말한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그리고 묻는다. 내 길에서 앞으로 나가다보면 언젠가 너와 마주할 그 날이 올까.

"내 심장은 어디에서 뛰고 있는 걸까?"
기영의 기억을 통해 진행되는 연극을 보면서, 나는 기영에게 주목했다. 기영의 기억 속에서 인선은 투사였고, 그건 그녀가 위치한 노동 현장이라는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주목한 건 기영과 인선의 관계와 그 관계 속 기영의 선택과 행동이었다. 기영과 인선의 관계는 단지 연인으로만 해석될 수 없는 오묘한 관계였다. 동지라는 이 짧으면서도 어려운 단어는 그와 그녀에게도 적용된다. 기영과 인선은 서로에게 불을 나누어주고 또 받는 관계이다. 소시민이 되어버린 기영에게 인선은 불씨를 되살릴 수 있는 까닭이 되어주었고, 세월과 현실의 무기력함에 천착해가는 인선에게 기영의 다시 섬은 또 다른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주었다. 민중가요의 노래가사처럼 그들은 함께 할 때 꿈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다른 면으로는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선이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것이 단적으로는 아련한 추억으로 존재할 수 있기도 한 반면, 내 의지에 따라 내 길에 마주서고자 지향하는 인물이다. 적어도 80년 사회주의에 대한 꿈과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기영과 인선은 하나일지도 모른다.
"조직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거야"
"아니야, 조직의 주체는 나고 무슨 일인지 나도 알아야만 해"
'주체는 나'라는 기영의 말은 내가 운동을 시작하던 때 했던 말이었다. 이건 80년의 투쟁적인 운동의 경험도, 90년의 운동권의 몰락도 경험하지 못한 2000년의 나에게 있었던 일이다. 어쩌면 더더욱 현실의 무기력함을 몸으로 체득할 것을 강요받는 지금의 시기에 세상과 다른 시각으로 보고자 하는 내 열망은 무모함이나 철없음이 아닐까라는 고민이 많던 시기였다. 엄혹한 현실의 폭력은 사회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현실. 그 때 내 심장도 붉은 광장에서 뛰기를 희망했다.
그랬던 기영이, 그랬던 내가 소시민이라고 말하는 지금의 현실에서 다시 일어서서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기영은 힘없이 넘어지는 사람이기를 선택했다. 고통과 죄의식을 자양분으로 삼고, 넘어지면 일어서기 위해 글을 쓰고 길을 가기로… 일어나기 위해 넘어지는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젠 내 길을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대답하지 못했다.
내 심장은 아직도 붉은 광장에서 뛰기를 희망하고 있는 걸까?
그저 인선의 대사를 기억하기로 했다. "어깨를 펴고 앞을 보면서 전진하라고."

"심장은 차가워져도, 뜨거웠던 그 순간을 놓치지 마"
내가 본 몇 편 되지 않는 연극에 대한 추억 가운데,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좋았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연극이 하나 있었다. 그건 대학교 1학년 때 동기들과 함께 본 전태일 열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연극을 선택했던 선배에게 왜 이걸 봐야하냐고 못마땅해했던 나는 연극이 끝나고 내 동기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울었을까?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전태일열사가 고뇌하고 갈등하던 그 모습의 아련함이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오늘 같이 연극을 본 동기에게 "그 때의 연극이 기억 나냐"고 물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감동 받았던 거지?"라고 덧붙여서… 친구가 말했다.
"그 때 우리 가슴이 뜨거워서 그랬다"고.
"그랬지"라고 난 대답했다. 그리고 속으로 물었다. '지금은?'

지금은 내 심장의 온도가 어느 정도일까? 너무 식어 얼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간혹 한다. 예전에 활동을 잠시 접고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주변의 시선과 나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 나를 짓누르던 시절.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줬던 기억이 난다. 심장은 식을 수 있다고. 하지만 심장이 뜨거웠던 때를 잊지 말라고. 그럼 차가워진 심장은 언제든 다시 뜨거워질 수 있다고 말이다. 그 때 당시에는 참 멋 부린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이 말이 진실이길 바란다.

내가 또 다른 인선과 마주하게 될 그 길은 무엇일까? 같이 연극을 본 친구들. 현장을 고민하는 또 다른 인선이 될 친구와 나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친구. 그들과 함께 나눌 프로메테우스의 꺼지지 않는 불씨를 난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지. 난 아직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대답하기 위해 꿈을 꾸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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