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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디어, 시청자는 손님?

당돌한 시민미디어권 프로젝트, 시민프로그램에서 시작하기

일부에선 관심도 말도 많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는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의 제도적 운영상의 문제를 진단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처방하는 작업은 나에게 벅찬 일이다.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감을 잡았다 하더라도 얼기설기 얽혀있는 관련 문제들을 속시원하게 일필휘지(一筆揮之)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방송법을 문제삼아야 할지,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의 운영상의 제반 문제들을 조목조목 밝혀보아야 할지, 방송사를 비난해야 할지, 시청자참여프로그램에 대한 가시적·비가시적 검열의 손길과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방송위원회의 관료주의적 편향성을 엉얼거려야 할지. 여하튼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요구로 마지못해 ‘시청자 참여’라는 이름을 빌어 온갖 조건을 다 내걸면서 엉정벙정하는 것에 못마땅한 감정을 숨길 수 없지만, 이 문제들의 해결방법을 찾는 것은 참으로 벅차고 난감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 정도는 몇 자 적어볼 수 있을 것이리라. 우선 나는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이라는 용어 대신 시민 프로그램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 시민프로그램이라는 용어를 굳이 사용하려는 이유는 시청자 참여라는 형식을 빌어 진행되는 프로그램이 많아 이들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고, 시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제작해서 텔레비전 채널(앞으로 라디오 방송 채널로도 확장되기 기대하며)의 방송시간 중 일부를 사용해 시청자를 만나는 프로그램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시민프로그램은 다른 시청자참여프로그램과 달리 방송 억세스(Access)의 차원에서 해석된다. 성공회대 최영묵 교수는 국제방송협회(BIC)의 규정을 들어 “억세스란 당신이 제안하고 당신이 통제하며 당신 스스로 (미디어)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인 반면, “방송 참여란 그들(미디어 생산자)이 초대하고 그들이 통제하며 그 (미디어) 시스템이 당신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매우 타당하고 정확한 개념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시민들의 다양한 방송 억세스로서의 시민 프로그램인 것이다. 하여 그들의 언어인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이라는 말을 과감하게 버리자.

이같은 시민 프로그램의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새삼 강조하는 것은 우습다. 권력집단과 기업, 엘리트 집단이 창조해왔던 ‘그들만의 미디어 세계’속에 우리의 몸을 들이밀고 그들의 언어, 이미지, 요구와 주장들을 수신해왔던 시민들. 그 시민들이 ‘보다 열려진 시민들의 미디어 세계’를 만들어내고 이 속에서 새로운 언어를 발산하는 미디어 실천이 가지는 정치적이고 사회문화적인 효과들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치와 의미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미디어. 새롭게 출현하는 뉴미디어. 정보와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것에 혀를 내두르는 사람도 많지만, 과연 그 많은 미디어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어떤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시민들의 진정한 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미디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에 슬퍼진다. 다양한 이해관계, 관점과 시각, 주의주장, 삶의 편린들과 족적들을 가지고 있는 시민들이 미디어에 보다 접근가능하고, 미디어를 통해 가지각색의 삶의 모습과 생각들을 나눌 수 있을 때 서로에 대한 상호이해와 신뢰의 증가, 갈등과 대립의 상호조정, 맹목적인 편견과 차별의식의 감소 등 긍정적인 감정과 의식들을 가져나갈 수 있다. 정치인과 기업 총수들의 이야기, 스타들의 일거수 일투족 중계보도, 괴상망측해지기 경쟁에 돌입해 있는 오락프로그램, 극히 제한된 세계만을 반복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드라마, 외국의 유명 프로그램의 무차별적인 수입과 중복 편성, 서로 베끼고 닮아가는 프로그램들의 대상화된 수신자로서만 머무르지 않고, 이것들과는 다른 세계를 재현해보고 싶은 시민들의 미디어 실천이 문화적인 성찰성과 풍요로움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은 전혀 과대망상이 아닐 것이다.

하여 시민들의 적극적인 미디어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시민권으로서의 ‘미디어권’을 당돌하게 사고하고 요구하며 이를 위해 싸우자는 것이다. 나는 시민들의 미디어권을 크게 세가지 차원에서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미디어(기술)의 수용적/이용적 측면의 권리’이다. 우리들은 사회적인 소통에 있어(개인적인 선택은 다른 문제)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를 수신하고 전송할 수 있는 미디어 기술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수신기, 커뮤니케이션 망, 뉴미디어 단말기 등을 가능하면 자유롭게 이용하거나 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신체적인 장애로 인해 미디어 콘텐츠 수용에 어려움을 느끼는 시민들의 미디어 수용권도 이에 포함된다.

다음으로, 시민들의 ‘수평적 소통’ 권리로 미디어 재현을 감시하는 ‘미디어 감시’와 이의 문제들을 각 방송사와 제작자 집단과 토론할 수 있는 과정에의 참여, 각 방송사의 시청자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 확대, 프로그램의 다양성 등을 위한 편성 정책에의 참여권이 있다. 마지막으로, 시민들의 ‘미디어 생산권’으로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하거나 다양한 미디어 채널을 통해 프로그램들을 전송하는 등의 액세스권과 독립적인 미디어를 설립 운영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된다. 이같은 시민들의 ‘미디어권’에서 세 번째 권리가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상업적인 주류 미디어를 통해 시민이나 소수집단의 프로그램을 전송하거나 주류 미디어에서 이러한 프로그램들 제작하게 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에 다다랐는데, 이에 따라 시민이나 사회적 소수집단이 자체 미디어를 소유하고, 자신들의 콘텐츠를 제작하며 이를 다양한 미디어 통로를 통해 전송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같은 차원에서 현재 운영되고 있는 기존 매체의 시민 프로그램 편성과 전송 문제는 시민들의 미디어권 실현의 관점에서 보다 과감한 실험과 싸움이 필요한 영역이다. 미디어권으로서의 시민프로그램은 거대 자본이나 관료적이고 배타적인 미디어 경영자, 이들과 연합하고 있는 정치권력집단이나 엘리트 집단에 의해 지배되는 미디어로부터 약간의 시간을 할당받고, 이러저러한 요구들 속에서 포기되고 짤려나가며, 관련 법률 조항들을 들어 사전에 ‘인정받은’ 프로그램만 전송하는 체계 내 프로그램이 아니다.

방송의 공익성과 책임성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의 프로그램을 국가주의와 가부장주의, 관료주의와 문화적 폐쇄성의 틀 속에 가두고 새로운 언어를 생산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진정 시민들의 이익을 위한 것도 시민들에 대한 책임성에 기반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시민들을 관리하고 싶은 것이다. 특히 미디어의 공공성과 시민들의 미디어권에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지상파방송, 이중에서도 특히!! 공영방송의 왜곡된 위치와 의식은 우리가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싸워나가야 할 대상이다. 공영방송의 진짜 주인이 전기세 고지서에 포함되어 있는 준조세로서의 수신료를 내고 있는 시민들임을 ‘아직도 그리고 제대로’ 인식해본 적이 없는 공영방송의 운영자들에게 자신들의 전도된 존재성과 의식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또 여전히 국가주의의 틀 속에 거주할 수 밖에 없는 방송위원회가 국가권력과 정치집단, 자본과 미디어 경영자들을 위한 기구가 아니라 시민들의 정치적, 사회문화적 권리를 대변하는 기구라는 점을 서서히 깨달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자 이제부터 머리를 맞대고 당당한 주장과 요구를 위해 준비할 것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우리가 요구할 것과 준비해야 할 것은 좀 다르다. 요구해야 할 것은 보다 당돌하고 확장된 시민 미디어권이며, 이를 위해 준비할 것은 퍼블릭 억세스, 시민프로그램, (지상파, 케이블, 위성 등)매체별 억세스와 시민프로그램 운영 상의 제반 문제들을 종합하고 이를 서로 유기적으로 구성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이론과 방법이다.


<b> 이영주, 성균관대 신방과 강사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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