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가상적 실체라는데 구구한 설명은 필요없는 듯 하다. 특히 하나의 인종적 특징이 바로 국민의 특징이 되는, 소위 국민국가는 예외에 불과하다. 절대주의 국가가 근대 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물리적 폭력을 독점한 정치기구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국민은 단지 영토의 부속물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그런 국민이 지니고 있는 ‘애국심’이라는 것 역시 실체가 없는 가상적 상징에 다름아니다.
그럼에도 최근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몇몇 사건들에서 예외없는 애국심의 등장을 목격할 수 있다. 아니 ‘등장’이라는 말이 커튼 뒤에서 배우가 등장하는 연극의 한 장면을 떠올리니, 어느 임계선에서 찰랑찰랑하다 넘쳐 흐르는 ‘범람’이라는 용어가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현재 우리 사회는 넘쳐나는 애국심에 질식상태에 있다.
황우석 교수의 난자 매매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공방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우리 나라처럼 도제식 대학원 사회에서 연구원의 ‘자유의지’ 운운하면서 연구원의 난자 제공을 합리화한다 하더라도 누가 믿겠나 싶지만, 오히려 국민들은 그 말을 믿는 듯 보인다. 아니 믿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싶다. 난자의 매매는 ‘연구의 필요성’ 이전에 연구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황우석 교수가 말한, 그리고 언론에서 떠들어댄 배아줄기세포의 복제는 ‘인류의 발전’ 및 ‘난치병 환자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런 연구가 ‘현재의 인간성’에 손상을 주는 것이라면 오지않은 희망은 곧 위선이 된다.
그런데 난자 매매와 같은 중요한 사실을 밝혀낸 모 방송사의 게시판에는 비애국적 방송을 규탄하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 뿐만이 아니라 황우석 교수팀에게 난자를 제공하겠다는 민간재단이 만들어져 여중생과 여고생까지 난자 기증의사를 밝히고 있는 시점이다. 중요한 것은 황우석 교수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그의 연구로부터 우리 한국사람 개개인이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단적으로 그가 개발한 배아줄기세포 복제를 통한 장기 생산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런 복제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복제기술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으로 한정될 것이다. 즉, 장기이식이 환자의 시급함만으로가 아니라 그와 함께 경제적 능력이 동시에 담보될 때만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쌀 협정의 비준 역시 왜곡된 ‘애국심’에 범벅된 사례다. 정부와 언론에서 떠들어내는 것처럼 이번 쌀 협정으로 우리가 ‘10년간의 유예’를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이익은 아니다. 또한 올해 안에 이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다하더라도 문제가 생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협정’안의 문제일 뿐 실질적인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보수 언론에서 국제적 신뢰의 문제 운운했던 것이 바로 그 증거라 할 것이다. 단지 이후에 예상되는 국제 관계에서의 불이익이 걱정스러운 것이며,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대미 통상에 있어 불이익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번 쌀 협정의 비준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만드는 것은, 나아가 ‘우리 모두의 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애국적인 국민의 정서다. 실제로 강기갑 의원의 단식을 두고도 지율스님의 사례를 끄집어 내며 국가적 사업을 하지 못하게 하여 수 조원대의 손실을 가져왔다고 우려하는 것은 보수 언론도 정부도 아닌 일반 국민들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내용이다. 덧붙여 쌀 협정 비준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투쟁을 기껏해야 집단 이기주의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지나치게 애국적인 국민들의 정서다.
그런데 앞의 두 사례에서 볼 수 있는 애국주의의 정체를 분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그 각각의 애국주의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객관적 이익이 어떤 것인지 따져보면 된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단지 정부가 추진하는 산업구조 개편과 맞물린 과시효과와 황우석 교수에게 들러붙은 자본의 이익만이 있을 뿐이며, 쌀 협정 비준은 대미통상에서 이익을 보는 일부 제조업 자본에게 도움이 될 뿐이다. 황우석 교수가 배아줄기세포 복제를 한다고 해서 세금이 감면되는 것은커녕 오히려 다른 분야에 투여해야 될 세금이 지원되고 있으며, 쌀 협정 비준으로 인해 수십조원의 세금이 선심성으로 뿌려질 것이다. 만약 우리 국민들이 합리적인 이익을 생각한다면 이 막대한 손해를 눈뜨고 그냥 볼 수 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왜 국민들은 자신들의 간접적인 손해에도 불과하고 애국주의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감수하려 할까?
이는 이데올로기 전선에 있어 지배 이데올로기가 너무나 효과적인, 그리고 절대적인 입지에 서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항 이데올로기 측의 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마이뉴스>나 <프로메테우스>, <매일노동뉴스> 등은 매우 탁월한 대항 이데올로기의 진지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말도 안되는 애국주의가 판을 치는가? 그것은 대항 이데올로기 측이 너무나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분명한 전선을 긋고 이를 중심으로 논리를 구축하는 전략이 너무나 필요한데, 우리 대항 언론들은 제도 언론이 고려하지도 않는 부분까지 신경을 써가며 기사를 쓴다. 그러니 차분하고 뛰어나게 분석적이지만, 가슴은 치지 못한다.
줄기세포 복제와 쌀 협정 비준을 엄밀한 계급적 관점에서 다루는 글을 보고 싶다. 차라리 교조적이라고 비판을 받을지라도, 오히려 그를 통해서 일반화된 쟁점에 균열을 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조’라는 말과 ‘꼴통’이라는 말을 일치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오히려 오해에 불과하다. 오히려 역사에서 보이는 오류들은 이론의 ‘교조적’ 실천에 의해 발생한다. 무엇보다 당파성은 교조와 거리가 멀다. 이런 식으로 이론과 실천을 구분하는 것이 궁색하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애국주의가 형성한 까칠까칠한 담론의 판을 깨는 소리가 그리운 마음이 크다. 당파성이 사라진 시대에 애국주의 같은 우파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