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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국들 홍콩 WTO 각료회의 선언문 이끌어내다

홍콩에서 외국인 1,300여명 12시간에 걸쳐 연행, 무자비한 인권탄압, 14명 무작위 기소... 홍콩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없는, 국제시위에 대한 이러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지난 12월 17일, 홍콩 WTO 각료회의가 한창 진행되던 중 벌어졌다. 이는 물론 지난 40여년 동안 ‘폭력시위’를 구경조차 못해본 홍콩 당국의 과잉 반응이기도 하지만, 전세계에서 모여든 노동자, 농민, 여성, 활동가들이 각료회의장을 향해 진격하고자 했던 바로 그 때 최종 합의문을 향해 사활을 걸고 각료들이 밤샘 회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홍콩당국은 WTO ‘경비’ 노릇을 제대로 하려 했던 것이다.

WTO 생명줄이 걸려 있던 홍콩각료회의

지난 2-3년 간 WTO는 증폭하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2003년 9월 칸쿤 WTO 각료회의 결렬 이후,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은 지지부진한 상태를 이어가다가 2004년 7월 말, 선진국 대표주자와 개도국 대표주자들 - 이른 바 ‘이해당사자 5개국 (유럽연합과 미국, 호주, 인도, 브라질)’ - 이 ‘도하개발의제 세부원칙 기본골격’에 전격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다시 협상은 난항에 빠졌고, 자칫 잘못하다가 홍콩 각료회의도 결렬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돌기 시작했다. 만약 홍콩 각료회의가 결렬된다면, WTO에게 ‘총 여섯 차례의 각료회의 중 세 번 결렬(시애틀, 칸쿤, 홍콩), 한 번 간신히 통과(도하)'라는 부끄러운 기록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전세계 민중들의 저항으로 이미 정당성의 위기를 겪기 시작한 WTO와 이것이 대변하는 신자유주의 무역체제 자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파스칼 라미 WTO 사무총장과 미국, 유럽연합 등 주요 강대국들은 일찌감치 홍콩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긴장감 속에서 2005년 12월 13일, 각료회의가 시작했다. 초반에는 개도국과 강대국들이 신경전을 벌이면서 갈등이 계속됐다. 심지어 각료회의 중반이었던 12월 16일에는 강대국들에 맞서 최빈국 및 개도국들이 110개국(WTO 회원국은 현재 총 149개)으로 구성된 ‘G110’을 구성하면서 이번 각료회의도 결렬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17일 오후에 상황이 급반전했다. 오후가 되자 비농산물시장접근(NAMA)과 서비스, 농업 협상에서 상당한 합의가 이루어진 문서가 나왔고, 각료들은 17일 오후부터 18일까지 협상을 벌여 홍콩 각료회의 최종 선언문에 합의하게 된 것이다.

결국 ‘높은 수준의 합의’가 된 홍콩 각료회의 선언문

비농산물시장접근(NAMA)에서는 이른바 ‘스위스공식’을 도입하는 데 합의했다. 스위스공식은 관세가 높을수록 더 많이 감축해야 한다는 공식인데, 이는 상대적으로 관세가 높은 개도국들에게 상당히 불리하다. 이에 더해 관세 상한선을 대폭 낮춰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관세화 되지 않은 상품에 대해서는 곧바로 관세화해서 급격히 낮추라고 주문하고 있다. NAMA는 농업과 서비스를 제외한 사실상 모든 재화와 상품 - 공산품, 수산물, 광물 등 - 을 포괄하고 있어 NAMA 협상으로 제3세계 소규모 제조업은 몰살하거나 한 줌의 초국적 기업의 하청으로 전락하여 대량실업과 노동유연화를 초래할 뿐 아니라, 해안지역의 소규모 어업을 초토화하고 자연자원에 대한 착취를 가져오게 된다.

서비스협상에서도 강대국들과 자본의 승리였다. 기존의 양자간 협상 방식을 대체할 수 있는 ‘모드별 협상’, ‘부문별 협상’ 등 ‘복수적 협상방식’이 서비스에서의 주요 합의사항이었다. 복수적 협상은 복수의 국가가 상대국 특정 서비스분야의 개방을 집단적으로 요청하는 방식이다. 강대국들이 집단적으로 특정 국가의 특정 서비스 사유화를 강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홍콩 선언문은 “2006년 2월 28일까지 복수적 양허요청서를 제출”, “2006년 7월 31일까지 2차 수정양허안을 제출”, 그리고 “2006년 10월 31일까지 최종양허안을 제출”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미국, 일본, 한국 등 복수적 협상방식 주창자들은 새로운 협상 방식을 기반으로 통신과 금융 등 부문에 대해 제3세계로부터 높은 수준의 자유화를 얻어내 시장을 확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우리는 문화, 교육과 의료, 물과 에너지 등 공공서비스에 대한 ‘집단 공격’을 받을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가장 쟁점이 되었던 농업협상에서는 2013년까지 유럽연합과 미국의 수출보조금을 완전히 철폐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마치 개도국의 이해를 대폭 반영한 것처럼 보이나 개도국들의 요구보다 후퇴한 것이며, 게다가 유럽연합과 미국은 이미 여러 가지 편법을 이용하여 자국 농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유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충분히 지속할 수 있다. 그리고 추가 합의가 필요한 부분과 세부원칙은 2006년 4월 30일까지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한국 정부는 이번 협상 과정에서 ‘농업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함으로써 비난을 샀으며, 16일에는 농민들의 한국 총영사관 점거농성에 직면해야 했다. 비록 이번 협상에서 상당 부분이 미합의된 채 남겨졌지만, 한국 협상단의 이와 같은 발언은 향후 협상에 대한 예고가 아닐 수 없다.

선언문을 이끌어낸 핵심 공로는 강대국들과 손잡은 개도국

갈등과 논란을 거듭하던 WTO가 어떻게 갑자기 급반전하면서 애초에 예고했던 바와 달리, ‘높은 수준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그 공로는 물론 유럽연합과 미국 등 강대국들의 교활한 전술에 일차적으로 있었으나, 더욱 핵심적으로는 이에 합세한 브라질과 인도 정부에게 가야 한다. 강대국들은 농업협상에서 양보하는 척 하면서 사실상 챙길 것을 다 챙기는 전술을 발휘했으며, 개도국 ‘대표주자’ 역할을 자임하던 인도와 브라질은 작년 7월 기본골격 합의에 이어 이번 홍콩선언문이 나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해당사자 5개국’은 홍콩 각료회의 전부터 비공식회의를 진행했었고, 유럽연합은 수출보조금을 철폐할 의향을, 대신 브라질과 인도는 서비스와 NAMA 협상에서 양보할 의향을 비공식적으로 내비친 바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16일까지 서로의 카드를 제시하지 않고 줄다리기를 하면서 각자가 얼마나 내줄 수 있는지를 계속 타진하였고, 12월 17일이 되어서야 유럽연합은 농업에서 “양보”하겠다는 카드를, 브라질과 인도는 서비스와 NAMA에서 “양보”하고 나머지 개도국들을 설득시키겠다는 카드를 테이블에 내놓은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난관에 봉착했던 여러 쟁점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면서 ‘높은 수준의 합의’를 이끌어냈고,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개도국의 ‘개발’을 위한 것이라는 거짓 명분을 되살려줬으며, WTO를 구출했고 신자유주의 무역체제가 아직까지는 견고함을 과시했다.

파스칼 라미는 18일 각료회의가 끝난 직후 기자회견을 하면서 “권력이 개도국 쪽으로 기울었다”고 발언을 했다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WTO가 추진하고 브라질과 인도가 승인해 준 도하개발의제 협상은 신자유주의적 '개발'을 위한 것이며, 새롭게 권력을 쥐게 된 자들은 국제무대에 새롭게 부상하면서 신자유주의 체제에 철저히 복무하는 '개도국'들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이번 협상의 최대 수혜자는 초국적 자본과 국제무대에서 급부상하는 개도국 자본이다.

향후 전망

WTO는 이번 홍콩 각료회의를 계기로 2006년 내 협상을 완료한다는 계획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면 늦어도 2007년 중반까지 협상을 완료하고 2008년에 도하개발의제를 발효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실제로 이번 선언문의 또 하나의 ‘성과’는 협상을 최대한 빨리 완료시키겠다는 회원국들의 일치된 결의이며, 이를 구체적인 일정으로 표출했다는 것이다. 농업과 NAMA에 대한 세부원칙은 2006년 4월 31일까지 마련하겠다고 하며, 서비스협상에서도 새로운 협상 방식에 의거한 달력을 내놓았다. WTO는 이러한 일정을 지키기 위해 질주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 부시 대통령의 ‘무역증진권한'(이른바 ‘fast track'으로 알려진 법안으로, 부시 대통령이 2001년 도하 각료회의를 앞두고 황급히 통과시켰다. 의회를 거치지 않고 무역 협상에 대한 모든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해주는 일종의 경제 ’계엄령‘으로 비판받았다)이 2007년 6월에 만료될 예정이어서 조속한 시일 내 협상을 완료하라는 미국의 압력이 지대할 것으로 보인다.

‘홍콩 WTO 각료회의 저지를 위한 한국민중투쟁단’ 1,500여명과 전세계에서 모여든 수천명의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활동가들은 6박7일 동안 힘있는 투쟁을 보여줬다. 그리고 한국민중투쟁단 11명을 포함해 아직도 14명이 기소된 채 홍콩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홍콩 투쟁을 통해 홍콩시민과 전세계 민중들, 국제 노동자·농민운동의 뜨거운 연대와 힘을 보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홍콩경찰의 인권유린, 폭력과 비상시적 기소, 그리고 WTO를 다시 살려낸 초국적 자본의 힘과 이에 조응하는 한국 정부 등 지배계급의 ‘국제연대’와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이번 홍콩 각료회의가 저들의 승리로 끝났지만 동시에 WTO와 도하개발의제, 이에 편승한 개도국 정부들의 본질을 다시 한 번 확연히 드러내줬다.

한편으로는 WTO의 향후 일정을 예의주시하면서 대응을 계속 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국제연대를 강화함으로써 각국 정부와 지구적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투쟁을 일국 차원과 국제 차원에서 강화해야 한다. 한국 정부의 살농 정책과 비정규 법안 강행 처리 시도, 의료 및 교육 법인화·사유화 등 지배계급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강제하고 있다. 동시에 이것이 위기에 처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마지막 발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전소희, 신자유주의세계화반대민중행동 조직국장/한국민중투쟁단 상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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